탓
데이빗 A. 씨맨즈 지음 | 두란노
탓
데이빗 A. 씨맨즈 지음/윤종석 옮김
두란노/1997년 2월/238쪽/6,000원
1. 치열한 책임 전가 싸움
그리스도인으로 나는 설교와 목회 상담과 집필을 통해, 사람들이 과거의 상처와 아픔 그리고 현재의 패배와 실패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이해하도록 도우며 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지금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놀란 것은, 복음주의 기독교 상담 자체가 하나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에 따르는 개인적 책임을 회피한 채 다른 누군가 책임 전가의 대상을 찾음으로써 거의 모든 종류의 행동에서 발뺌하려 드는 거대한 책임 전가 싸움(Blame game)이다. 거기서 힌트를 얻어 전체 주제의 핵심 단어인 ‘만약(if)'과 ’만약 …만 했더라면(if only)'이라는 말을 연구 바탕으로 삼았다.
많은 사람들은 ‘만약’이라는 뜻의 if가 성경과 영어 단어 가운데 가장 나약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뒤를 보는 나약한 단어 ‘만약 …만 했더라면’이 책임 회피의 구실이라면, 믿음에서 나오는 강한 단어 ‘만약’은 하나님의 능력의 보고(寶庫)를 여는 열쇠가 된다.
“악마가 시켜서 그랬다.” 코미디언 플립 윌슨의 이 유명한 대사는 언제나 훌륭한 우스갯소리였다. 그렇듯 “만약 …만 했더라면” “내 잘못이 아니다.” 등의 태도는 ‘피해 논리’라고 하는, 전국적으로 돌고 있는 전염병과 같은 현상이다.
피해 논리 전염병의 또 다른 증거로 각종 정신 장애의 진단 및 통계 규범으로 쓰이는 최신판 DSM-IV를 보면, 흔히 말하는 ‘정신 장애’로 규정되는 것이 300가지도 넘는다. 거기 나오는 규정들에는 죄의 행동에 대해 마땅히 져야할 책임을 다른 구실들로 무마시키려 하는 조항들이 있는데, 그로 인하여 피해 논리 전염병이 퍼지고 결국 정신 건강은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악화된다.
복음전도자로 인도의 시골 마을 선교사 생활을 하던 때에 힌두교의 천민 계급 사람들은 수천을 헤아리는 세월동안 그 종교적 성격으로 인해 냉혹해질대로 냉혹해진 이 잔인한 제도의 진짜 피해자였다. 사람이 저마다 자신의 ‘만약 …만 했더라면!(if only)'을 포기하기만 한다면 (if only), 하나님은 쓸모없는 사람도 중요한 사람으로 바꾸실 수 있다
10년 간의 시골 전도 후 나는 뱅갈로어(Bangalore)의 어느 교구로 임명을 받았다. 6년 동안의 나의 개인적인 내적 치유 경험과 상담 사역의 시초가 거기서 비롯되었다. 잘 믿기지 않겠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한 번도 죄를 지어 본 적이 없었다. 나의 내면 깊은 곳에는 완전 자동장치가 장착되어 있었고, 이 놀라운 기계 장치는 저절로 켜져 내면의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괜찮아, 데이빗. 걱정할 것 없어. 너희 엄마가 그런 사람만 아니었어도 넌 그러지 않았을 거야.” 얼마나 큰 위안인가. 그러나 그것이 책임을 회피하려는 나 자신의 변명임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모른다. 그 이후로는 성령께서 이렇게 일깨워주곤 하셨다. “데이빗,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아.” 그러면 나는 ‘만약 …만 했더라면’이라는 변명을 거부하고 내 행동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속으로 기도하곤 했다. 그리하여 끝내는 그런 변명이 완전히 잠잠케 되는 시기가 찾아왔다.
1962년 인도를 떠나와 미국에서 설교, 교육, 상담 사역을 시작한지 벌써 30년이 되었다. 이 흠 많고 죄 많은 타락한 세상에서, 자신을 피해자로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말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 상담 및 치유 분야에서 일하는 우리들이 늘 염두에 두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비록 성경에 진짜 피해자들이 숱하게 많이 등장한다 할지라도 ‘피해 논리’가 들어설 여지는 조금도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의 치유 일정 및 회복 과정 속에는 우리 모두가 상처를 뛰어넘어 용서로, 요행심을 버리고 책임감 있는 행동으로, 책임 전가에서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할 때가 반드시 있다고 강조한다. 피해자가 승리자로 탈바꿈할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2. 고난, 그것도 사랑의 표현인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의 질병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보면, “만약 …했더라면“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 것을 놓칠 수 없다. 잠시 후 예수님은 이들의 나약하고 절망적인 ’만약 …만 했더라면‘을 전혀 다른 종류의 ’만약‘으로 맞받아 치셨다. 이 강하고 소망에 찬 ’만약‘은 그들의 시각도 달라져야 하고 안색도 달라져야 한다는 주님의 도전이었다.
요한은 마리아와 마르다, 나사로로 이루어진 베다니의 이 가족과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한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 말에 숨은 진의는 “주님, 우리는 주님이 그를 사랑하시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그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일이 잘못될 때 우리가 하나님께 던지는 기본적인 질문, ‘왜?’라고 물었던 것이다.
혹시 기막힌 심정으로 주님께 이와 비슷한 전보를 보낸 경험이 있는가? 어려움을 훨씬 증폭시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있으며, 또한 그분이 그냥 존재하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안다는 사실이다. 물론 우리도 궁극적으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해답이 되리라 믿는다. 하지만 처음에는 하나님이 오히려 문제의 일부로 보인다. 모순은 단순히 이성적인 차원을 넘어 관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성녀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는 선한 사람이 당하는 억울해보이는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따지던 중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었다 한다. “나는 원래 내 친구들을 다 그런 식으로 대하느니라.” 테레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주님께 왜 그렇게 친구가 적은지 이제야 알 것 같네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재난과 상처와 고통에 대한 특수 면역체가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어떤 사건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문제의 근본은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에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라는 질문의 초점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간섭하셔서 막아주셔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한 사고체계는 근본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사랑과 고난의 신비는 면역과 예방과 개입의 보장이 아니라 그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 있다. 예수님이 사람들은 물론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은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고통의 극에 달했을 때, 종교 지도자들은 그분을 조롱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그 자리에서 건져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 자리에서 구해주시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셨다. 우리 또한 삶의 문제에 대한 그분의 해답을 더 좋은 길에서 찾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후 보여주신 반응은 신비를 한층 증폭시키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닌가. 예수님이 이틀 동안 의도적으로 더 머무셨던 것은 표면상으로는 전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시며 왜 그 일을 하시는지 정확히 아셨다. 그렇기에 그분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사건을 통해 훨씬 큰 영광을 받으실 수 있게 하셨던 것이다.
3. 현재로 돌아오라
‘만약 …만 했더라면‘은 우리의 시선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모습에 고정시킨다. 그것은 현재의 실상과 미래의 희망을 바라볼 힘을 빼앗는다. 과거란 얼마든지 재구성이 가능하다. 우리는 과거를 새로운 렌즈로 바라볼 수 있고 새로운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만약 …만 했더라면‘은 인생을 영원히 동결시켜 버리는 과거 시제의 시각이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드린 말씀도 이와 비슷하다. “주님께서 그때 여기 계시기만 했다면 지금 아무 문제없을 거예요. 하지만 이제 너무 늦었어요.” 예수님은 어떻게든 이들이 가진 시각의 시제를 바꾸어 주셔야만 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들의 무력한 과거 시제 ‘만약 …했더라면’을 강력한 현재 시제 ‘네가 믿으면’으로 바꾸기 시작하셨다.
언젠가 나는 현재를 잃어버린 사역자와 동역한 적이 있었다. 입만 열면 왕년의 눈부신 시절 얘기였다. 모두 “그때가 좋았지.”하는 식이었다. 그는 결코 현재에 살지 못했다. 나는 종종 내담자들에게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생각만 하고 있을 셈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만약 그것만’에 매달려 사는 삶의 심각한 악영향을 일깨워 준다.
“나는(I AM)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것이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주신 대답이자 걸핏하면 현재를 잃어버리는 모든 ‘만약 …했더라면’ 신봉자들에게 주시는 대답이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만약 …했더라면’을 버리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들을 ‘너무 늦었다’는 과거의 굴레와 ‘혹시 앞으로’라는 미래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셔야 했다. 그분은 이들의 시선이 영원한 현재이신 당신께 고정되기 원하셨다.
신(神)이 감정을 보인다는 것은 요한복음을 읽는 헬라인 독자들에게 있어서는 곧 신의 전능성을 부인하는 것이요, 신성 특유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그런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생생한 색깔과 입체 음향으로 하나님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내가 울 때 위대한 현재이신 그분도 함께 우신다. 이렇게 우시고 고난받으신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셔서, 우리를 위하여 항상 간구하고 계신다(히 7:25). 역사 속의 예수를 성령을 통한 체험으로 개인의 구주로 삼을 때 그 모든 것은 현재가 된다.
4. 누가 피해자인가?
어린 나이에 도와달라 기도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며 하나님을 향해 쓰라린 절규를 내뱉던, 삼촌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두 자매가 있었다. 언젠가 참석한 세미나에서 누군가 내 인생을 파괴했다해도 우리는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나의 말에, 두 사람은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며 하나님과 나를 향해 깊은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러던 중 특별 치유 기도시간이 되었다. 두 자매중 한 사람은 모욕과 치욕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벌거벗음의 수치를 당한 모든 피해자들과 하나가 되셨으며, 그러므로 수치스러운 노출의 고통을 이해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사실을 깨닫자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그 상한 심령의 감춰진 동굴 속으로 흘러들었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그분은 우리와 함께 우신다.
“왜?”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죄에 짓밟혀 부서진 삶 속에서 죄 없이 고난받는 모든 사람들이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이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다보면 꼬치꼬치 “왜?”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존재의 저 깊고 어두운 동굴의 차원에 들어가 보면, 우리 대부분은 소위 능력과 사랑이 충만하다는 하나님이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한 데 대해 고통의 절규를 토해본 자들이다.
상담을 하다보면 깊은 상처와 원한, 가해(加害)의 욕망에 가득찬 사람들을 자주 대하게 된다. “심중에 가장 자주 떠오르면서 감정적 고통을 가장 심하게 주는 장면은 어떤 것입니까?” 그러면 이들은 뺨이나 머리를 맞는다든가 성기(性器)에 대한 능욕 등을 겪으면서 느끼는 모욕감을 토로한다. 이런 일의 결과로는 성적으로 왜곡된 태도나 행동, 깊은 수치심, 잘못된 죄책감, 낮은 자존감 등이 나타나게 된다. 모두 다 치유가 필요한 부분들이다.
그리스도는 물리력의 부재로 무방비 상태에 있던 사람들 또는 당연한 권리마저 다 빼앗긴 사람들과도 하나가 되신다. 신분이 ‘천하다거니’ 피부색이 ‘안 좋다거니’하여 부당한 취급이나 차별을 받는 모든 사람들처럼 그분 또한 예루살렘 밖으로 쫓겨나야 했다. 사랑의 하나님이 사람들의 고해(苦海)에 대한 깊은 동화(同化)가 되셨다.
그리스도가 친히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한 것은 곧 우리가 거부당하거나 버림받거나 우울에 빠지는 등 최악의 순간에 경험하는 모든 형태의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 속으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들어가신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치유의 전환점은 하나님께서 나의 기분을 아시고 그냥 관심 있는 정도가 아니라 진정으로 이해해주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다.
말씀과 행동을 통해 예수님은 우선 마리아와 마르다를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오게 하신 다음, 그들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셨다. 그들은 지금 막 새롭게 보고 겪은 그 사랑을 굳게 붙들어야 하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들이 그분의 사랑에 붙들려야 한다. 여기가 믿음의 여정에 있어 가장 어렵고 고통이 큰 단계이기 때문이다.
5. 빛이 들게 하라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돌을 옮겨 놓으라” 예수님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다루시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긍휼과 직면(直面)의 절묘한 균형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 우리의 슬픔을 위로할 사랑이 없다면, 그분께는 우리의 죄를 직면할 사랑도 없다.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에 대해 물었던 부자청년에게 예수님은 그가 갖추지 못한 부분을 그 자리에서 지적하심으로 사랑을 표하셨다.(막 10:21) 예수께서 매우 긍휼히 여기며 무덤에 가서 돌을 옮겨 놓으라 명하셨던 것도 바로 이런 엄하신 사랑에서 연유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빛과 생명은 언제나 연관되어 있다. 빛과 진리 사이에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돌을 옮겨 놓는다.”는 것은 곧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자.”(요일 1:7)는 권면을 따라 사는 삶이다. 곧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빛에 온전히 열어 놓기로 다짐하는 것이다.
마르다가 그 어두운 무덤 안쪽에 있는 것의 부패한 모습과 그에 대한 절망감을 왜 직면하기 싫었는지 우리는 안다. 우리는 ‘뚜껑을 열면’ 안으로 빛이 들면서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돌을 그대로 둘 수 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레이저 광선으로, 목적은 언제나 치유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을 ‘지금’ 직면할 수 있다.
내게 상담을 요청한 내담자들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것만 같았던 경우는 수없이 많았다. 때로는 남들한테 당한 폭행, 배반, 유기(遺棄), 거부 등에 대한 쓰라린 기억들 때문에 그러했다. 나는 그들에게 그 지점에 도달할 때면 언제나 “십자가를 묵상하라.”고 제안했다. 나는 그 장면의 의미와 메시지가 그들 마음에 가 닿기만 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우물가의 여인 이야기에서 그리스도는 당신 특유의 긍휼과 직면의 조화와 아울러 충격, 호기심 유발, 경청, 직간접 질문 등을 고루 사용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네가 만일 …만 알았더라면" 이 말씀은 그녀에게 그대로 먹혀 들어갔다. 예수님은 그녀의 행복의 가면 뒤에 내적 공허와 채워지지 않은 삶과 깊은 갈증이 있음을 아셨다.
예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생수(生水)란 무엇인가? 이는 인생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세 가지 진리이다. 이 여자의 신앙 여정 역시 우물가에서 만난 이 범상치 않은 남자에 대한 자각과 인식이 깊어져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 여자의 예수 발견으로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되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이런 엄명을 내리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돌을 옮겨 놓으라.”
6. 무덤 속을 들여다보라
‘만약 …만 했더라면‘은 여러 가지 형태의 책임 전가로 나타날 수 있다. 성경에는 과거를 돌아보는 세 가지 형태의 ’만약 …만 했더라면‘이 나온다. 지금부터 그 세 가지를 통해 내면 살피기를 시작해 보자.
과거집착형
사역초기에 샬린(Charlene)이라는 역기능가정에서 다양한 종류의 학대를 받으며 자란 여학생이 상담을 하러 왔다. 설상가상으로 그런 학대행위에는 그럴듯한 율법주의적 기독교가 한데 섞여 있어서 신앙은 그 자체로 종교적 학대였다. 상처가 너무나 깊었고 그만큼 증오와 복수심도 컸다. 수개월동안 상담을 거듭한 결과 드디어 샬린에게 지금껏 과거를 버리고 그리스도안에서 새 생활을 시작하는 중요한 결단을 내릴 준비가 됐다고 여겨지는 시점이 왔다. 그러나 샬린은 “포기할 수 없어요. 죄송해요. 하지만 이 원한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어요. 포기할 수 없어요. 나한테 남은 거라곤 그것밖에 없어요!”하며 그 뒤로도 두 번을 다시 찾아와 똑같은 말로 끝내고 말았다. 그로부터 거의 7년 후 한 도심교회 주일 예배후 한 여자가 내 앞으로 와 인사를 했다. 샬린이라고 이름 밝힌 그 여자는 닭똥 같은 눈물을 뺨 위로 흘러내리며 몹시 고통스럽게 말했다. “목사님, 이혼을 두 번씩 하면서 신경쇠약까지 걸리고 보니 정말 그때 포기할 걸 그랬나봐요.” 그리고는 홱 돌아서 나가 버렸고 그 뒤로는 다시 소식을 듣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