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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선 예배자

매트 레드맨 지음 | 죠이선교회
7. 주목받지 못하는 예배자8. 한마음을 가진 예배자9. 만족하지 못하는 예배자"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삼하 6:21-22)" 다윗은 마침내 주님의 법궤를 메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매우 흥분해서 미친 사람처럼 춤을 춘다. 그는 이 사건에서 단지 군중들 가운데 한 명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공적인 입장을 '잊어버리고' 찬양의 불로 활활 타올랐다. 참다운 경배는 항상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다. 이것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아드레날린이나 마약 때문도 아니었다. 그의 마음에 있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풍성하게 흘러 넘쳤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사랑에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기쁨 속에 자신을 드리는 일을 이상하게 여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시간들을 열망한다. 나는 거리낌없는 경배가 흘러 넘쳐서 내 마음이 예수님으로 그렇게 타 버리는 계절이 있기를 기대한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열정적이기를 원하시는지 기억해야만 한다. 예수님의 탕자 비유에서는 고귀한 아버지가 모든 지위를 잊고서 아무것도 거리끼지 않고 자기 아들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그린다. 우리는 그 모습에서 거리낌없는 엄청난 사랑을 보게 된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도 이와 똑같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에 대한 우리의 유일한 반응은 열정적이고 천한 예배이다.



그러나 예배 인도자들에게 주의할 점이 있다. 미칠 정도로 힘이 넘칠 때,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 때 풍성한 마음에서 나왔던 순수한 행동은 무대에서 다른 사람들 앞에 섰을 때 너무나 쉽게 하나의 공연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하늘 보좌 앞에서 사람들을 인도할 때 슬그머니 기여 들어오는 공연의 요소들을 경계해야 한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주의를 흐리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도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을 마음으로 알게 된다. "우리의 음악으로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실 때, 예배는 자만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하나님은 그의 신부인 교회의 마음을 얻었다. 이것은 메마르고 예측 가능한 관계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생명과 활력이 충만한 '신과의 연애'이다. 진정한 연애는 결코 예측할 수 없다. 연애의 마음은 마음을 두드리는 이에게 다가가기 위해 새롭고 창조적인 방법들을 찾아 나선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정신나간 짓을 많이 한다. 가끔은 심지어 그들의 주위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날 향유 옥합을 들고 예수님께 온 여자도 아마 그 방에 있던 모든 독신자들을 당황하게 했을 것이다. 물론 예수님만 제외하고 말이다.



이러한 방식은 예배 인도자들에게 어떤 큰 암시를 하고 있다. 첫째로, 이 방식은 압력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성령으로만 경배한다. 둘째로, 이 방식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의지하게 된다는 점이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전적으로 연약하여 의지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영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실 기회가 될 것이다." 이것은 예배 인도자들에게도 실제적인 교훈이 된다. 셋째로, 모든 경배가 무대로부터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예배 인도자 뿐 아니라 그 밖의 사람들을 통해서도 인도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적이 많았고,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회중 가운데 일어나기 시작했다.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그리스도인이었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 다. "그리스도가 사람을 부르실 때, 그분은 그에게 가서 죽으라고 명령한다." 분명히 그 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아의 죽음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나 본회퍼 자신에게 있어서 이것은 더 많은 문자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쟁이 거의 끝 나갈 무렵인 서른아홉 살에 그는 감옥에서 붙들려 나와 히틀러와 나치당에 맞서 용감하게 교수형을 당했다. 그는 옥중 서신을 남겼다. "이것은 삶의 끝이지만, 내게는 삶의 시작이 다." 그들은 그의 몸은 죽일 수 있었지만, 그의 경배는 멈추게 할 수 없었다.나이와 극도의 연약함 속에서 벌레 같이 무력한 인간을 누가 구속하겠는가?

예수 당신은 나의 유일한 소망이시니

나의 쇠약한 육신과 마음을 강하게 하소서

오, 내가 그분을 한 번 미소짓게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영원 속으로 떨어졌으면출애굽기 34장 마지막에 모세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 능력 있는 만남을 가진 후 시내 산을 내려온다. 모세는 믿을 수 없는 계시의 차원으로 인도함을 받았다.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깊이 들어가 그의 얼굴은 실제로 빛나고 있었다. 사실 너무나 빛나서 사람들은 그를 쳐다보기도 두려웠다. 그때부터 모세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려고 수건을 둘렀다.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었다." 아무것도 심지어 한 겹의 천도 그가 하나님을 응시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없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의 통찰력을 준다. 하나님의 깊은 계시와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변화이다. 그리고 계시가 크면 클수록 변화도 크다. 경배를 드리며 수건을 벗고 하나님 앞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간 모세도 변화된 예배자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났다.



신약은 우리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우리도 수건을 벗은 예배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하나님은 우리가 경배할 때 믿을 수 없는 대단한 장소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분은 능력과 거룩으로 빛나며 타오르는 소멸하는 불로서, 더 깊은 영광의 차원으로 우리 각자를 인도하시고자 갈망하신다. 그것은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는 불타는 마음이다. 더 깊은 영광의 차원은 우리가 그분의 형상으로 더 깊이 변화되는 곳이다.



예의 없고 불경한 시대에, 참으로 수건을 벗은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타자성'을 인식하고, 또 그분과 친해지자는 부르심을 소중히 간직한다. 그분의 영광으로 못 박히고 그분의 임재로 변화된 우리는 훨씬 더 그분을 닮아 가게 된다. 수건을 벗은 예배자들은 다른 사람이 되어 산을 내려온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며, 보는 이에게 빛을 발한다.멈출 수 없는 예배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어디에서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용감한 복음 전도자이다. 그들이 드리는 경배의 제물들은 그들이 교회 안에 있을 때처럼 교회 바깥에서도 그렇게 진동한다. 그들은 담대한 마음을 갖고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증거할 모든 기회를 잡는다. 사도 바울의 평생의 사역은 자신의 영광스런 예수님을 알리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 자신이 고통에 휘말린다면,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스데반의 이야기는 이에 대해 더 많은 빛을 던져 준다. 그는 들으려고 하지 않는 냉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선포하면서 그 일에 자신의 생명을 걸었다. 그러나 그가 돌에 맞아 죽기 직전, 하나님은 스데반에게 놀랍도록 깊은 계시를 허락하신다. 아마도 그 계시가 이 그리스도인 첫 순교자를 끝까지 강하게 견디도록 도왔을 것이다. 스데반은 하늘 보좌가 있는 방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고,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본다. 이상한 것은 여기서 예수님이 서 계신다는 점이다. 신약에서 그 밖의 다른 모든 때에는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서 계시는가?



또한 예수님 자신도 이 땅을 걸어다니시는 동안 하늘 아버지의 마음에 드리는 멈출 수 없는 헌신의 행동으로 살아가셨다. 유다의 배반이 큰 소리로 문을 두드리고 있고, 겟세마네 동산이 손짓하고 있으며, 십자가의 그늘이 정확히 드리워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예수님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26번이나 선포할 수 있었다. 이 어둠의 시간 속에서도 하늘 아버지에 대한 그분의 헌신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분의 경배하는 마음은 위협받기를 거부한다. 이것은 경배에 관한 어떤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가? 멈출 수 없는 예배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어서 아무 것도 그들을 막지 못하게 한다. 그들은 고난의 시기에도 물러서지 않으며, 그 대신 신뢰와 찬양의 힘찬 시편을 올려 드린다.십자가에 차츰 다가가는 주간이었고, 긴장감으로 예수님은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가혹하고 부정적인 태도들에 둘러싸였으며 배신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 압박은 날마다 가중되었다. 곧 이어 겟세마네와 골고다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괴로운 가운데에서도 '쓰디쓴 사막에서 달콤한 오아시스 같은' 아름다운 행동이 일어났다.예수님은 시몬이라 부르는 사람의 집에 계셨고, 그때 갑자기 한 여자가 향유 옥합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녀는 옥합을 깨뜨려, 부끄러워하지 않고 예수님 의 머리 위에 옥합의 향유를 전부 쏟아 부었다. 예기치 못한 특별한 행동이었지만, 하나 님의 아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냉소적인 종교적 태도에 물들지 않은 한 여자의 행동이었다. 그녀는 그날 종교적 태도들과 마주쳤지만, 그런 태도들 때문에 영 향 받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것을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이 행위를 그런 식으로 보지 않으셨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막 14:6)"5. 수건을 벗은 예배자6. 멈출 수 없는 예배자멈출 수 없는 예배자는 하나님께 예배할 때가 오면 결코 조용하지 않는다. 반대나 위험, 심지어 죽음에 직면해서도 그들은 계속 예배한다. "그들이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았기에.(행 5:41)"4. 예측할 수 없는 예배자언젠가 토저(Tozer)는 우리가 '정말 바라는 것 없이 전적으로 하나님과 사랑에 빠져서 애 정을 바꿀 생각이 저 멀리에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 그 장소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이 것은 한마음을 가진 예배자들의 진정한 표시이다. 아주 단순한 삶은 '예수에 관한 모든 것'이 된다.예수 그리스도의 예배자로서 우리는 '지금'과 '아직'의 긴장 속에 살고 있다. 우리가 그분을 모셔들인 그날부터 우리 영혼들은 각각의 삶의 이유와 가치를 찾았다. 그분의 사랑과 임재가 실제로 우리 마음에 들어왔고, 우리는 성취되는 것을 보았다. 성경은 "좋은 것으로 우리 소원을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그림이 아니다. 우리는 또 만족하지 못하는 예배자들이다. 단지 부분만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하늘 아래에서 우리는 항상 우리 마음에 거룩한 좌절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에 있는 신음소리인 것이다.



만족하지 못하는 예배자의 마음에는 세 가지의 풀리지 않는 긴장이 있다. 첫째, 우리는 단지 하나님 영광을 살짝 엿본, 그분의 찬란한 바다에 떨어진 아주 작은 물방울에 불과하다. 우리는 삶에서 더욱 그분을 알고자 하는 지속적인 갈망으로 살아간다. 둘째, 우리는 자신이 상처받은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갖고 산다. 부분적으로 치유를 받았지만, 여전히 너무나 상처받기 쉽다. 우리는 온전하기를 열망하는 미완성의 예배자들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낯선 땅에서 이방인들로서 존재한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환난과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 많은 잃어버린 심령들을 쓰린 마음으로 끌어안는다. 하늘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런 상황들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열망한다.우리가 살면서 주목하는 대부분의 것은 많은 형태의 무대에서 일어난다. 사람들은 눈에 띄기를 좋아하고, 우리의 문화는 명성을 사랑한다. 반면에, 하나님은 매우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신다. 그분은 그 광경을 지켜보시겠지만, 무대 뒤에서 일어나는 일에 훨씬 더 관심이 많으시다. 우리는 너무나 겉모습을 자세히 보지만, 하나님은 바로 중심을 보신다. 우리는 사물의 드러나는 면에 몰두하게 되지만, 하나님은 항상 감춰진 은밀한 면에 훨씬 관심이 있으시다.



예수님은 부자들이 성전 보물 창고에 자기들의 예물들을 놓고 가는 것을 지켜보고 계신다. 그때 작고 은밀한 경배의 행동이 그분의 시선에 잡힌다. 어느 가난한 과부가 걸어 올라와서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거의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작은 구리 동전 몇 개를 바친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포하신다.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주목받지 못하는 예배자는 이 세상에서 주목을 받고자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할 수 있으면 아주 은밀하게 예물을 드린다. 그러나 그들이 가져온 것과 그것을 드린 방법 때문에, 하늘은 추가로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아마도 그들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목받지 못하겠지만, 하나님의 마음에는 주목받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이 책에 나온 대부분의 예들은 공개적으로 행하는 경배의 행동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지켜보지 않을 때 경배드리며 은밀한 장소에서 그분께 헌신하는 것을 가장 먼저 찾으신다.1,700년대에 프랑소아 퍼넬롱은 어느 예배 인도자를 위해 위대한 충고를 적었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자아를 없애라." 우리가 정말 이렇게 한다면, 우리의 행동과 태도는 자연스럽게 따라갈 것이다. 우리가 숙여 절하고 있다고 마음에 확신이 든다면, 우리가 인 도하는 예배의 외적인 방식도 더 적당해져야 할 기회들이 된다. 잠언 25장 6절은 이렇게 요약한다.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모든 경배 음악 운동에서 우리가 정말 왕의 기쁨을 보려고 한다면, 거기에는 우리가 따라가야 할 어떤 좁은 길이 있다. 때때로 사람들에게서 기쁨을 찾는 것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목적을 위해 순수하고 진실하게 나아가는 것이 바로 과제이다. 그분 앞에 그리고 오직 그분께만 썩지 않은 제물을 가져갈 때, 왕의 기쁨이 당신에게 넘친다는 것을 이 여행이 끝날 때까지 항상 명심하라.잠재적 최면술에 걸린 세상에서 한마음을 가진 예배자가 추구하는 것은 단순하다. 바로 자신들의 눈을 예수님께 고정하는 것이다. 주위의 모든 구석마다 정신을 산란하게 하는 것들이 새로 생겨나서 우리의 주의력과 싸우고 있다. 너무 많은 일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우리의 시간과 정력을 빗나가게 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소리쳤다.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 86:11)"

예수님 자신의 경우를 보면서, 우리는 어떤 위대한 영감을 발견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이 땅을 걸어가신 이야기는 한마음을 가진 경우로서, 그분은 완전히 하늘 아버지와 그 뜻에 순종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 가시밭길에서 자신을 딴 곳으로 유혹하는 그 어떤 것도 모두 거부하시며,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완성자이시고, 참되게 한마음을 가진 경배자들이 따라야 할 모범이시다.



여러 가지 면에서 경배는 '방어'와 '공격' 이 둘을 포함한다. 내 삶에서 무언가가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고 있다면, 어떤 순간에 나는 책임을 지고 어떤 변화를 일으켜야만 한다. 어느 누구도 나를 위해 이것을 해줄 수 없을 때가 온다. 따라서 '내 마음을 정케 하소서'라는 옛 기도 뿐 아니라, 최근 나는 '내 삶을 단순하게 하소서'라고 새로운 기도를 한다. 중요한 것은 방해받지 않는 헌신의 시간과 열심히 일하는 시간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이 헌신의 시간은 조용하게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아는 순간이다. 흥미롭게도 나는 정기적으로 하나님과 만나는 '경건의 시간'을 할 때, 일상생활 속에서 그분을 훨씬 더 인식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그러나 이 세 가지 긴장들이 우리를 나쁜 예배자들로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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