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하나님의 신비
마이클 프로스트 지음 | IVP
서문그 어떤 것도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평범한 것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극적인 초자연적 권능으로써만 일하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듯 하다. 물론 하나님을 특별한 사건에서 배제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 분이 단순하고 평범한 일 가운데 조용한 변화를 이루시는 모습 또한 우리가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초자연적 차원과 그 권능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차원만 추구하다 보면 잃는 것이 너무 많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놀란 듯 활짝 열려 있지 않다. 고흐의 작품 <해바라기>에서 하나님을 전환할 수 없는가? 부서지는 파도 속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가? 갓 태어난 아기의 해맑은 눈동자 속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도처에서 확장되고 있다. 우리의 눈을 열어, 굉장한 사건을 주목하는 만큼 이른바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자. 이제 당신은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1. 산문체 세상과 빛바랜 진리성경 신학자 월터 브르거만은 교회의 사명은 '산문 일색의 무미건조한 세상에서 시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옳게 표현하고자 기술적인 문제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복음으로부터 모든 활기(Life)를 짜내어 버렸다는 그의 지적인 일리가 있다. 기술위주의 사고방식은 신비로움(mystery)을 문제거리로 축소시키고, 확신(assurance)을 확실성(certitude)으로, 질을 양으로 변질시키기 때문에 성경적 신앙을 그저 다루기 쉬운 모양으로 만든 셈이다.
우리는 복음을 깨지기 쉬운 귀중품으로 생각해 왔다. 그것을 너무나 꽉 잡은 나머지 형태가 없는 시시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브루거만이 말한 것처럼, "위험도, 에너지도, 가능성도 없으며, 새로움에 이르는 길도 없다."
복음을 다루기 쉬운 기술적 차원으로 축소시켜 버렸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신비와 영성을 추구하는 시대에 구도자들은 교회를 지나쳐 버리고 다른 곳에서 깨달음을 얻으려 하는 것이 보통이다. 시적인 언어가 위험스럽고 흥미진진해야 하는 것처럼 시적인 기독교 신앙도 그러해야 한다. 21세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은 확실성(certitude)과 무의미함을 내어 버리는 탄탄한 시적인 믿음을 다시 발견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가르침과 신약적 복음에 대한 헌신을 지켜 나가는 것이다.
기계적 등식에 따라 사고하는 데 익숙해질 때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하면 된다'는 식의 영성인데, 이는 거의 병적일 정도의 과도한 노력을 전제로 하는 신앙을 가리킨다. 이러한 노력은 자연스럽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아 보인다. 자연스런 영성이 쉽고 게으른 영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다운 삶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덜 인위적이고 더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취업면접을 앞두고 하나님께 함께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그 분이 오시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교회 모임을 위해 기도할 때에도 그분을 으레 늦게 도착하는 귀빈처럼 여기고 초청한다. 또 장래 계획과 꿈에 복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한다. 마치 그 분이 처음부터 관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복음의 능력을 약화시킨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시간과 장소를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은 당신의 삶에 무관심하다고 생각하면서 살던가 어떤 공식에 맞추어 그분의 관심을 얻으려고 결사적으로 애쓰고 있다면, 속수무책으로 소진될 위험이 크다. '하면 된다'는 식의 영성은 결코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 그런 영성은 결국 항상 바닥을 드러내고 마는데, 인간에게는 그걸 계속 지탱할 만한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경험세계에서 멀리 떨어진 어떤 것이 아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하라."(눅10:8-9) 리처드 니버의 모델 중 '문화에 반하는 그리스도(Christ-against-culture)' 모델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의 경험세계와 동떨어진 신성한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은 그와 다르다. 그 분은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란다고 말씀하신다. 그 둘을 갈라놓으려고 하면 알곡(그 나라)이 상할 것이다. 하나님의 권세로 다스리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 나라가 임한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한다.
잠실 운동장에서 보내는 반나절이 얼마든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어느 날 월드컵 최종 예선전이 벌어지는 잠실 운동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게다가 당신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친한 친구들과 함께 한다고 생각해 보라.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가을날, 기온도 최적이라 당신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하다.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서로의 우정 속에서 마음의 안정과 신뢰 그리고 친밀함을 느낀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창조적 역사 - 이 세상에 현존하는 그분의 나라 - 에 눈을 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런 완벽한 하루가 하나님의 은혜 곧 그분의 다스림을 체험하는 감격적인 순간이 될 수 있다. 나는 이런 의식구조가 하나님 나라의 관심사 - 평화, 사랑, 소망 - 와 전적으로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잠실 운동장에서 완벽한 하루를 보내면서 느낄 수 있는 만큼이나 고통, 비탄, 실망감 등을 통해서도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적인 삶 가운데 즉 얼굴에 따스하게 와 닿은 햇빛, 발가락 사이로 찰랑거리는 파도, 학교에서 돌아와 안아달라고 뛰어오는 자녀와의 포옹, 사랑하는 친구에게서 받은 위로 한 마디 등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음에도, 우리는 반드시 예배를 드리는 동안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하려고 너무나 안간힘을 쓰는 것 같다. 날마다 그분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셀 수 없이 많은 눈길, 그것을 알아볼 눈이 우리에게 있는가? 그분의 개입은 결코 제한되지 않으나 우리의 인식이 제한을 받을 뿐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눈길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하나님은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셨는데 그것은 창조와 성육신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창조 과정에 본질적으로 개입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계속 창조하고 계신다. 그런 창조의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의 동반자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빵을 맺는 나무를 창조하시는 대신 빵을 창조하셔서, 우리가 밭을 갈아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며, 거두어 갈고 까부른 다음 빵을 굽도록 하셨다. 왜 하나님은 요술지팡이로 모든 싸움과 증오와 불평등을 몰아내고 온 세상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지 않으실까? 그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셔서 우리가 그분의 동반자가 되어 사랑을 창조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동참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성육신이란 한 마디로 인간의 모습을 입은 하나님 곧 그리스도의 신성을 일컫는 기독교 교리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라고 믿어 왔다.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이고, 만일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면 살게 될 바로 그런 삶을 사신 유일한 모범이신 것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다면 복음서들을 정기적으로 철저하게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인도 정기적으로 재복음화될 필요가 있다. 즉 그들도 복음에 거듭 거듭 침잠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성육신의 관점은 우리가 어떤 천박하고 하찮은 활동을 창조적인 행위라고 정당화할 수 없게 한다. 성육신 곧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을 입고 오신 사건은 이 창조 세계의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 주는 척도가 된다. 그것은 항상 단순하거나 분명하지는 않다. 내가 처하는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지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이 바로 시적인 접근의 특징이다. 간단한 정답이란 없다. 그 대신 위험과 흥분과 온갖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2. 이목집중의 훈련1943년 작고한 프랑스의 신비주의자 시몬느 베이유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탈창조화(decreating)함으로써 이 세계의 창조에 참여하게 된다." 이 말은 내 생각에, 우리가 스스로를 점점 잃어버리고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갈수록 그 나라를 이루는 창조적 과정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된다는 뜻인 것 같다. 그녀는 또한 "기도란 한 마디로 이목집중의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늘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냉담함과 게으름을 떨쳐 버리고, 아무 생각 없이 부유하는 인생을 거부한 채 깨어 있는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눈을 크게 뜨고 영적 안테나를 높이 세워서, 주변에서 하나님의 성육신적 창조성을 가리키는 신호를 감지하고자 노력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특별한 방법으로만 자기를 계시하신다고 믿게 되었다. 우리는 초자연적 능력이 펼쳐지는 굉장한 장면이나 말로 표현하기 힘든 특별한 현상을 목격하기를 바라고, 그로써 하나님이야말로 놀라운 분이요, 우리에게 자기를 과시하는 분이라고 믿게 원한다. 그러나 만약 기도가 진정 이목집중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라면, 최상의 기도는 우리의 냉소적이고 지친 눈을 열어서 하나님이 전혀 뜻밖의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역사를 극적이고 굉장한 사건으로 한정시켰다. 소위 교회의 신성한 영역과 치유, 기적과 경이로운 사건에 그 분을 가두어 놓은 셈이다.
물론 역사를 통틀어 볼 때, 하나님이 이런 방법으로 자기를 나타내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시(詩)에 대해 배우고, 새로운 가능성 곧 우리가 속도를 늦추고 유심히 관찰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곁에 현존하고 있음을 재발견하는 법을 배워야 할 때다. 마하트마 간디는 한때 "인생은 점점 더 바쁘게 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는 마치 오기 렌이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겁니다."라고 말했던 것과 같다.
우리는 매순간의 격분에 싸여 눈이 가리워지고 모든 시적인 정서가 메말라 버린다. 또한 우리는 으레 상투적인 대답을 내놓고 무언가를 탐구하고 발견할 수 있는 역량을 차단해 버린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미적 감각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며, 어떤 형태든 상투적인 것이 가장 주된 적이라고 본다. 왜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보는 것을 그리 두려워할까? 즉 탐구과정을 없애고,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으며, 우리의 모든 질문에 대답을 주어 더 이상 알 필요가 없게 만든다(더 나쁜 것은, 더 이상 알고 싶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기관이든 사람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동기를 부여하려면, 그들이 스스로 발견하게끔 능동적인 참여의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흔히들 교사가 학생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지식을 얻고자 하는 탐구심을 불러 일으켜 주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 가공된 정답에 너무나 길들여져 있다. 눈을 떠서 보라고 요구한 사람은 없었다. 우리의 호기심이 발동한 적도, 흥미가 난 적도 없다. 설교시간에는 그저 멍하니 듣는 중 마는 둥 하면서 온갖 잡념에 빠지기 일쑤다. 설교가 끝나는 순간 우리는 성경을 덮는다. 최근 설교를 듣고 난 다음 집으로 가서 더 많은 것을 알아보기 위해 성경을 펼친 적이 있는가?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 백성의 마음은 무디어지고, 귀는 듣지 못하고, 눈은 가졌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그들의 다시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염려된다(마 13:14-15, 표준새번역)
이로 보건대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신 목적이 반드시 어떤 것을 설명하거나 난해한 개념을 명료하게 하기 위함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기존의 가르침에 식상한 사람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탐구심을 활성화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다 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들을 헷갈리게 해서 깨달음에 이르도록 유도하는 것이 더 낫다." 다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사야가 예언했던 그런 사람들, 곧 눈이 감기고 귀가 막힌 이들이다. 비유는 예수님이 사용하신 일종의 '솎아내기' 기술로서, 눈을 열고 진리를 탐구할 준비가 된 이들을 찾는 방법이었다. 요즈음 교회 지도자들은 은유와 직유를 사용하는 것을 꺼리는데, 주된 이유는 교인들이 잘못 해석할까봐 염려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복음 전도사역은 별로 융통성이 없으며 종종 고정된 틀을 강요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정반대의 태도를 취하고 계심을 눈여겨 보라. 어떤 율법 선생이 예수님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자, 그분은,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10:25-26)고 되물으셨다. 즉 상대방에게 거꾸로 질문을 던짐으로써 적극적인 반응으로 동참하도록 촉구하신 것이다. 그분은 당신이 던지는 질문에 그저 대답만 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당신이 능동적으로 참여하게끔 만드는 분이다. 만일 누가 당신에게 과일은 통째로 주지 않고 입으로 다 씹고 난 것을 준다면 어떻겠는가?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부자 청년에게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적극적인 개입을 촉구하는 말이다. 그것은 무미건조한 산문체의 대답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대의 반응을 요구하는 지혜의 시와 같은 것이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의문이나 회의 혹은 탐구를 피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을 환영하고 격려하신다. 우리의 의심이나 의문은 우리로 하여금 거짓이나 허위에 빠지지 않고 진실한 모습을 견지할 수 있게 하는 역량이다.
유대-기독교 신앙은 이 비종교적인 속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피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법, 평범한 것을 취해서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인정함으로써 그것을 거룩하게 만드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올림픽 육상 선수인 에릭 리델은 영화 <불의 전차>에서 주일에 열리는 경기에 참가하기를 거부한 불멸의 영웅으로 그려지는 인물인데, 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바람처럼 달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달리기를 신성한 활동으로 여기지 않지만, 리델은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성별함으로써 신성한 것으로 만든 것이다.
하나님이 수많은 방법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것 - 그분의 말씀과 창조 세계, 예술과 인간 관계, 그 밖의 여러 경로를 통해서 - 을 재발견하려면 어느 정도 도움이 필요하다. 이제 당신의 눈을 크게 뜨고 뚜렷이 응시하지 않겠는가?
3. 전율을 느끼며 사는 삶구약성경은 흔히 하나님의 은총을 강에 비유한다. 태양열과 가뭄에 익숙했던 히브리인들은 물이 지닌 양면성 곧 생명을 회복하는 힘과 파괴적인 힘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성경에서는 물이 하나님의 은총과 그분의 징벌을 모두 상징한다. 예수님도 친히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소생케 하는 생수의 강으로 비유하셨다. 왜 우리는 도시 한복판을 다닐 때보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곶 마루에 있을 때 하나님과 더 가까이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무럼비지 강과 같은 장엄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석양이 지는 광경이나 산 정상에 앉아 있는 것에 끌리는 이유는, 자연의 장엄한 경관이 저 우주에 우리보다 더 위대한 어떤 세력이 있음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창조주다. 우리의 영혼은 종종 어떤 경외감을 느끼기를 갈망한다. 그렇게 장엄한 만남을 통해 이 우주에서 우리의 진정한 위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