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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사랑목회의 능력

데이브 한센 지음 | 요단
참된 사랑목회의 능력데이브 한센 지음/윤귀남 옮김요단출판사/2002년 5월/204쪽/7,000원

1. 위기의 순간교회 안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교회 안의 개인들과 가족들은 사랑하기 쉽다. 그렇지만 개인이나 가족보다 교회전체를 더 사랑하는 것이 요구되는 상황이 되면,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교회란 도대체 무엇인가?

사람들은 지푸라기 하나의 무게가 평형을 깨뜨릴 때까지는 장기간의 휴전이 얼마나 미묘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지를 결코 알지 못한다. 그럴 때 그 지푸라기는 10킬로그램의 망치처럼 작용한다.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 그 지푸라기는 예배 시간에 운동모자를 쓰고 앉아 있는 몇 명의 아이들이었다. 교회는 백 년이 더 된 오래된 마을의 교회였다. 마을과 교회는 메마른 토양과 나쁜 날씨로부터 승리를 이루어낸 굳은 인간 의지의 표상으로 서 있었다.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으면 우리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 그들의 규칙이었다.

어느 날 교회 피아노 반주자인 한 어머니는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아이들이 교회에 모자를 쓰고 와도 개의치 않으셨으면 해요. 지난밤에 게임하고 늦게 와서, 일어나 샤워할 틈이 없었거든요. 머리들이 엉망이랍니다.” 몬타나 학교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경기에 나가는 데 6시간 정도 가야 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아이들은 새벽 3시 30분에야 겨우 집에 돌아왔다. 경기장의 많은 아이들은 스포츠 시즌 내내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 나는 그 아이들이 교회에 오지 않는 것보다는 모자를 쓰고라도 교회에 오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들을 교회에 들어오게 하기를 원하는 가족의 욕구를 존중하였다.

그러던 7월의 어느 주일날 20대 중반의 한 청년이 모자를 쓰고 예배를 드리는 아이들에게 벗을 것을 요구하였다. 그 소년들이 요청을 거절하자 청년은 계속 모자를 벗으라고 강요했다. 아이들은 망설였다. 그 때 한 아이의 아버지가 와서 조용히 자기 모자를 머리에 쓰고 아이들 옆에 앉았다. 이것으로 대치 상황은 끝났다.

예배 후 그는 나에게 자기가 했던 일을 말하였고 나는 그에게 몹시 화를 냈다. 나는 청소년들이 교회 안에서 모자를 쓰고 있을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하였다. 그는 소년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면서, 특히 그들의 그런 행동이 연로한 교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그들이 어느 누구의 감정도 상하게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물론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 다음 주에 운동모자에 대한 논란은 일촉즉발의 기세로 재현되기 시작했다. 나는 바울의 편지를 인용하여 교회 안에서 청소년들이 모자를 쓸 권리가 있다고 옹호하였다. 소년들의 가족들은 좋아하였다. 그 가족 중 한 사람은 “우리 편을 들어주어서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좀더 깊은 차원에서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말은 나에게 힌트를 주는 말이었지만 깨닫지 못했다. 가장 나빴던 것은 내가 솔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독선적으로 부주의하게 지껄여대면서도,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그 상황이 지닌 회중적, 문화적, 그리고 목회적인 역동성을 심각하게 오판하였다. 카우보이에게 모자는 독립의 표시이자, 어떤 면에선 반항의 표시다. 이 곳의 문화에서 예배 중에 모자를 쓰는 것이 단순히 개인의 재량 문제가 아니고 예배에 대한 신성모독의 문제였다. 교회에 들어갈 때는 더 높은 권위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모자를 벗는다. 교회 안에서 모자를 쓰는 것은 이러한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깊이 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특히 소년들의 어머니에게는 모자문제가 수십 년간 교회에서 진행되어 온 권력투쟁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위기로 이어졌다. 결정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나는 내 일생 최악의 심방을 했다. 나는 그 소년들 중 두 아이의 가족을 만나러 혼자 갔다. 나는 거칠게 말하는 척하면서 오랫동안 논의한 끝에, 소년들 스스로가 교회에서 모자를 써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말을 수락하였다. 어머니는 소년들이 스스로 결정하게끔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때 나는 이것이 그녀의 전쟁임을 깨달았어야 했다. 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는 결정을 어떻게 두 명의 고등학생의 손에 맡길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그들에게 너무 큰 책임이었고 나에게는 너무 큰 무책임이었다. 물론 그 소년들은 모자를 벗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공동체 밖에서 조언을 구하였다. 나의 멘토이며 20년 선배인 두 분의 목사님은 일치된 결론을 주셨다. “당신은 교회를 구해야 합니다. 소년들에게 조용히 찾아가서 모자를 벗으라고 하십시오. 그들은 당신의 권위를 존중할 것입니다.” 이것은 12년 간의 목회에서는 다룰 계기가 없었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였다. 나는 교회를 목양하는가, 아니면 개인의 집합을 목양하는가?

나는 부모가 집에 없을 때를 택하여 아이들은 찾아가 교회를 위하여 모자를 벗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쉽게 동의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내 방문을 부모에게 이야기하였고 그들은 울화통을 터뜨렸다. 결국 대가족 전체(아홉 사람)가 교회를 떠났다. 예배 참석자의 15%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주일 안에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는 채워졌다. 그 자리는 유례없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개인들과 가족들은 사랑하기 쉽다. 그렇지만 개인이나 가족 전체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는 것이 요구되는 상황이 되면,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교회란 도대체 무엇인가? 거기에는 어떤 또 다른 결정이 필요할 것인가?이 교회는 백년동안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공적 예배를 매주 드려왔다. 그것이 전부였다. 아마도 그것이 해야 할 전부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한 특정한 가족보다 교회 사랑하기를 선택하게 만든 점인지도 모른다. 백년의 거친 세월동안 그 교회는 촛대로서 존재해 왔고 부활한 그리스도가 그 예배 안에 임재해 계셨던 것이다.(계 1:12-20) 촛대는 목사보다도 교인들보다도 가족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나는 이 촛대를 사랑할 필요가 있었다.

2. 사랑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운동모자 위기는 목회자의 사랑을 억제하게 만드는 일종의 정서적 딜레마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목회사역에 있어서 양면감정을 갖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양면감정(ambivalence)이라는 말은 ‘어느 한 문제에 대해 결정할 수 없는 것’을 뜻한다. 특별히, 우리 의지로 하여금 어떤 일련의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우리 자신을 사랑으로 내어줄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양면감정은 본질적으로 역설적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보다 더 건강한 전문가적 거리를 두고 목회사역을 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자연스럽고 건강한 방어를 흩트리고 우리 자신의 개인적 경계선에 대해 믿을 수 없게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은 때로 성숙하고 성인다운 사랑을 감행하는 데 대한 방어기제가 되어 자기 중심적인 자기 사랑으로 후퇴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들은 불건강한 형태의 사랑과 불건강한 형태의 자기희생에 상처받기 쉽게 된다. 부모는 한 자녀가 죽으면 남아 있는 자녀를 멀리함으로써 대처해 나간다. 목사도 소중한 교인들을 잃어버렸을 때 그와 유사한 본능을 누르기란 쉽지 않다. 그러한 일이 자주 일어나면 고통의 저수지가 생겨서 목회를 견딜 수 없게 되기도 한다.

목사에게 양면감정을 일으키는 상실의 고통은 공동체의 차원에서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때때로 교회협의회의 행동을 통해서 전체 교회로부터 거부당했다고 느낀다. 우리들은 죄악된 세상에 살고 있고, 목사가 그러하듯이 교회도 죄에 오염되어 있다. 교회 갈등과 목회에서 상처는 일상적인 것이다. 우리들은 목회 일에 갈등이 없으리라는 기대를 할 권리가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회자들이 직면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랑 없이는 목회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목회란 우리가 사랑을 가지고 하는 일련의 과업이 아니다. 오히려 목회는 그 자체가 사랑이며, 일련의 과업을 가지고 사랑을 적용하는 것이다. 설교, 가르침, 심방, 기도, 심지어 교회 행정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을 교회에 끊임없이 적용하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에 빛을 제공하기 위해 촛대에서 태우는 기름이며 우리들은 그 사랑을 지닌 자들이다. 우리의 사랑을 마비시키는 양면감정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싸움을 견딜 수 있게 하며 목회의 동기를 부여해 주는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양면감정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들은 예수님처럼 사랑할 것을 선택해야만 한다.

포도나무는 가지에게 자기 생명의 비축물을 제공함으로써 목숨을 버리며, 가지는 열매에게 포도나무로부터 제공받은 생명의 비축물을 공급함으로써 목숨을 버린다. 이것은 목회자의 사랑을 묘사한다. 또 우리가 장기간에 걸쳐 친구들을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버리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우리의 영적 실제의 삶이다. 우리는 사랑 없는 종교적인 전문가가 될 수도 있다. 사랑 없이 종교를 가르칠 수 있으며, 사랑 없이 종교상인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랑 없는 목회사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교회를 더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부담스러운 그 과업은 내 완강한 양면감정의 마음을 다루시는 그리스도에게 내어드리는 것으로만 해낼 수 있다. 주님이 아니면 안 된다. 예수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전사이며 타협하지 않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복종할 때에만 우리에 대해 싸우기를 그만 두실 것이다.

3. 끊을 수 없는 사랑의 구속헤세드는 사랑을 표현하는 히브리 단어들 가운데 여러 가지 용례로 사용된다. ‘융통성이 많은 단어’라고 불러도 좋은 단어이다. 헤세드는 ‘사랑, 친절, 자비, 충성’을 의미할 수 있다. 그렇지만 헤세드의 첫 자음 ‘h'소리가 연구개음과 더불어 강화가 되는 것처럼, 헤세드는 ’언약을 지킴‘이라는 의미로 강화가 되는 사랑을 말한다. 헤세드는 우리가 언약을 지키고 있는 상대방이 관계의 의미나 정신을 위반할지라도 약속을 지키는 형태의 사랑을 말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헤세드를 보인다는 것은 은혜를 보인다는 것이다. 개정표준역(RSV)과 신개정표준역(NRSV)의 번역자는 헤세드가 ‘약속을 지키는 사랑’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견고한 사랑(steadfast love)이라는 아름다운 말로 표현하였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steadfast love)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34:6)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steadfast love)이 나를 붙드셨사오며”(시94:18)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steadfast love)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시51:1)

견고한 사랑은 하나님의 길고 고집스러운 사랑이다. 우리가 그와 맺은 언약 안에 남아 있을 권리를 상실한 지 오랜 후에도 헤세드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실하시다. 하나님은 그 견고한 사랑으로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신 것이다.

모세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헤세드를 보여준 하나님의 종의 대표적인 예이다. 헤세드를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의 삶의 짐이었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의 삶의 승리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육신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보여주어야 하는 멍에 때문에 울부짖었다. 잘 알다시피 하나님의 백성은 모세를 끊임없이 대적했다. 그들은 모세를 몇 번이나 돌로 치려고 위협하였지만, 그것은 그들이 끊임없이 불평하는 것에 비하면 오히려 자비로운 것이었다. 모세가 전성기에 있을 때 그는 그것을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출16:8)

모세가 가장 강력하게, 그리고 가장 두드러지게 헤세드를 보여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을 부추겨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 직후에 자신의 삶을 그토록 곤고하게 만든 백성들을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중보할 때였다.(출32:9-14)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우리들이 본받는 모든 형태의 사랑 중에, 헤세드는 우리가 사람들을 위해 중재할 때 하나님께 주장하면서 끊임없이 담대하게 사용하는 사랑이리라. 하나님의 헤세드를 향하여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마음에 직접 기도하는 것이다. 모세가 멋지게 기도를 하였지만,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내리도록 하는 기도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기도(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는)인 경우가 많다. (롬8:26)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헤세드 안에서 하나님의 헤세드를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렇게 헤세드를 보여주는 것이 목회자의 소명이다. 우리들이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에게 헤세드, 즉 하나님의 견고한 사랑을 보여주는 일에 부름 받았다는 것은 목회사역의 확고한 진리이다. 좀더 깊은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교인들을 향해 품으시는 견고한 사랑 안에,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해 그들과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연합해 있음으로써 헤세드의 사랑을 할 수 있다. 우리가 교인들과 목회적 관계를 맺을 때 그 계약에 어떤 다른 것이 포함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그들과 맺고 있는 연합 속에서, 그 연합으로 교인들과 우리 자신을 결합시켜야 한다.

교회와 목회자가 연합되어 있지 않으면 그 교회는 성장할 수 없다. 목회자는 약속을 지키는 일에 완벽할 필요는 없다. 모세도 완전하지 못했고, 헤세드의 위대한 본보기인 다윗도 완전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약속의 근본적인 연합을 지킬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다 끝마칠 때까지 우리의 직책을 고수하는 것이다.

몬타나에서 새로 맡게 된 두 교회는 99년과 97년 된 교회였다. 목회자들의 두 교회의 목회 임기는 평균 2-3년이었다. 두 교회는 1950년대에 좋은 목사님을 모셨다. 그는 8년 간 목회했으며 사람들은 사모가 아주 좋았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그가 떠나고 나서 교회는 다시 그전의 사이클로 돌아갔다. 교회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나의 연민의 마음은 더해갔다. 1950년대의 목사 한 사람을 빼고는 나쁜 목사는 슬슬 밀어내야 하고 좋은 목사는 스스로 떠나야 한다는 원리를 의심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내가 오래 머무른 결과는 나를 놀라게 하였다. 나는 깊고 겸손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 두 교회에 9년 간 있는 동안 내가 섬겼던 그 어느 교회에서보다도 그 주제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 나는 이 문제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고 사람들을 도와줄 전략도 있었다. 그렇지만 별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한 가지 예외를 빼고는, 내가 떠날 때까지 그들의 질문 대부분은 스스로 대답을 한 것처럼 보였다. 그 중 많은 부분이 나의 설교나 가르침에 기인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개인적 고뇌가 해결된 것은 내가 그들에게 머물러 있음으로써 하나님의 헤세드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두 교회는 나의 재임 기간 중 많은 것을 달성하였다. 그렇지만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어렵고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내가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이다.

4. 깊은 속에서 우러나는 사랑신약성경에서 연민을 나타내는 중요 단어는 스플랑크나(splaxna)라는 헬라어이다. 이 단어에서 ‘spleen(울화, 분통의 뜻-역자주)’이라는 영어 단어가 나왔다. 그리스문학에서 스플랑크나는 거의 다 생명 기관을 나타내는 여러 경우에 사용되지만 근본적으로는 ‘창자’같은 것을 의미한다. 스플랑크나는 고통에 접하여 마음이 움직일 때 우리 창자 속에서 느끼는 진동이다. 연민은 몸과 혼의 연합을 가장 완전하게 이용하는 사랑이다. 스플랑크나는 우리의 혼과 몸 속에서 일어난다. 연민은 우리의 영혼이 떨려 사랑의 충격이 몸에 쏟아부어질 때 생긴다. 연민의 경험은 철저히 영적이며, 계시에 있어서 아주 신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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