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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필립 얀시 지음 | IVP
1. 마지막 최고의 단어



오랫동안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시카고에서 밑바닥 인생들을 상대로 일하고 있는 한 친구한테서 들은 실화다.

창녀 하나가 나를 찾아왔네. 울먹이며 하는 이야기가 두 살 된 자기 딸을 변태섹스를 밝 히는 남자들한테 돈을 받고 팔아왔다는 거야. 딸의 몸을 한 시간만 팔면 자기가 하룻밤 버는 것보다 수입이 좋다나. 마약 먹을 돈을 대려면 어쩔 수 없다더군. 교회에 가서 도움 받아 볼 생각은 안 해 봤냐고 겨우 물어 봤지. 그 얼굴을 훑고 지나던 완전 충격의 표정, 평생 못 잊을 걸세. "교회요! 거긴 뭐하러 가요? 그러잖아도 비참해 죽겠는데 가면 그 사 람들 때문에 더 비참해질 거예요."

친구 말을 듣는 중 퍼뜩 이 창녀와 다를 바 없는 예수님을 찾아왔던 여자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피해 달아나지 않았다. 자신이 비참할수록 예수님을 피난처로 삼았던 것이다. 교회는 이 은사를 잃어버린 것인가? 이 물음을 파고들수록 마음이 끌리는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었다. 이것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은혜', 그것은 분명 놀라운 말이다. 과연 우리 시대 마지막 최고의 단어다. 물 한 방울 속에 해의 모습이 숨어 있듯이 복음의 진수가 그 속에 들어 있다. 세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은혜에 목말라 있다. 고든 맥도날드는 말한다. "웬만한 일에는 세상도 교회 못지 않거나 교회보다 낫다. 그러나 세상이 못하는 일이 하나 있다. 세상은 은혜를 베풀 수 없다." 이것은 교회가 맡아야할 절대절명의 사명을 지적한 말이다. 세상이 은혜를 찾을 곳이 교회 말고 또 어디 있겠는가? 은혜에 대한 목마름,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가 아닐까? 안식처 없이 표류하는 세상이 믿음의 닻을 내리기에 은혜만큼 좋은 곳은 없다.

제1부 주 은혜 놀라워



2. 이야기 하나: 바베트의 만찬




덴마크 태생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저자인 아이작 디네센이 쓴 『바베트의 만찬』은 80년대 영화화된 컬트의 고전이다.

진창길과 초가 지붕 오두막들만 있는 가난한 노르웨이 어촌 마을, 이 우중충한 동네 은혜 없는 사람들 속으로 바베트는 떨어진다. 루터의 추종자인 그들은 거의 매주 은혜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도 주중이면 경건과 금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사려했다. 세상을 철저히 등지고, 옷도 까만 색 일색이며, 음식도 물에 빵을 넣고 끓여 만든 묽은 죽이 전부인 이 들에게는 이 땅의 삶은 지나가는 과정일 뿐 오로지 새 예루살렘만 바라보며 살아간다. 비 가 억수로 쏟아지던 어느 날 밤, 부인을 잃고 혼자가 되어 두 딸과 함께 사는 늙은 목사 의 집 앞에 웬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 여자의 이름은 바베트. 프랑 스 내전 통에 남편과 아들을 잃고 피신해 온 그녀는 이 집에 들어와 살게 되는데 주일이 면 예배도 거들고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도 주며 집안일을 온통 도맡아 했다. 이곳에 은혜는 만찬, '바베트의 만찬'이란 형태로 찾아왔다. 프랑스에서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바베트는 그 돈을 가지고 제대로 된 프랑스 요리로 온 마을 사 람들을 위한 만찬을 차린다. 그것은 받을 자격도 없고 값도 내지 않은 자들에게 베풀어진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진수성찬이었다. 잔뜩 굳은 얼굴로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에 게 로벤헬름 장군이 말한다. "우리는 모두 은혜란 우주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어리석고 시야가 짧다 보니 하나님의 은혜마저 유한한 줄 압니다. 눈이 열리는 순간에야 은혜의 무한함을 보고 깨닫게 되지요. 친애하는 여러 분, 은혜가 요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음으로 기다리다 감사로 인정하면 그뿐 입니다." 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찾아 헤매는 유한한 인간의 순간적 은혜여! - 셰익스피어,「리차드 3세」

3. 은혜없는 세상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하면 맨 처음 생각나는 게 무엇입니까?"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물어 보면 낙태금지를 외치고 동성애를 반대하고 인터넷 검열을 주장하는 각종 운동단체가 생각난다는 다분히 정치적 성향의 답이 대부분이다. 은혜 근처에라도 가는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풍기는 냄새가 그와는 거리가 먼 탓이리라.

연합 없는 교회도 비은혜의 일면이다. 사실 유독성 비은혜는 어느 종교에나 다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종교라면 질색을 하는 인본주의자들이 종종 더 지독한 비은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요즘 대학가에서는 자유주의 활동가들한테서 비은혜 풍조를 유감없이 볼 수 있다. 가장 훌륭한 인본주의자들조차도 종교가 거부한 체계를 대신할 비은혜 체계를 고안해 낸다. 이런 갖가지 형태의 절실한 노력이 사실 은혜에 대한 깊은 갈망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비은혜의 연기가 자욱한 울 안에서 살고 있다.

스미디즈는 파괴적 수치심의 3대 원인으로 세속 문화와 은혜 잃은 종교, 용납 없는 부모를 꼽는다. 세속문화의 기조 속에는 사람이란 외모도, 기분도, 능력도 늘 좋아야 한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은혜 잃은 종교에 의하면 누구든 율법 조항을 지켜야하며 만약 실패할 경우에는 영영 파멸이다. 용납 없는 부모 - "넌 창피하지도 않니!" - 는 자식들에게 아무리 노력해도 합격점에 이를 수 없음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꾸밈음은 단조로운 비은혜의 배경음에 끼여들어 가끔 높고 밝고 경쾌한 소리를 내 준다. 어떤 자동차 스티커의 말처럼 "은혜는 뜻밖에 찾아온다(Grace Happens)." C. S. 루이스는 "만나 보지 못한 꽃송이의 향기, 들어보지 못한 곡조의 메아리, 밟아보지 못한 나라의 소식"을 향한 깊은 갈망을 일깨워 주는 것을 "은혜의 물방울"이라 했다. 교회가 이 은혜를 키우는 씨앗이 되기를 빈다.

바로 그 탕자에게 아버지 집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그 아들이 경제적으로 잘 살았다면 집 에 돌아갈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시몬느 베이유

4. 사랑에 애타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값없이 조건 없이 우리를 찾아온다는 개념은 인간의 모든 본성과는 상반되는 것 같다. 불교의 고행, 힌두교의 업보(karma), 유대교의 언약, 이슬람교의 법전 모두 노력으로 인정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감히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기독교뿐이다. 예수님도 은혜에 대한 우리의 본능적 저항을 잘 아셨기에 은혜 이야기를 더 자주 하셨다.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고루 비취는 햇빛,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거저 먹고 사는 새, 가꾸는 이 없어도 험한 산자락에 절로 피는 들꽃 등을 통해 은혜로 가득 찬 세상을 보여 주셨으며, 한 마리 잃은 양, 잃어버린 동전 한 닢, 집 나간 탕자의 비유로 은혜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놀라우리만치 개인적인 것임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비유는 사실 그분의 지상생활의 축소판이다. 그분은 안전한 울을 떠나 어둡고 위험한 밤길을 나선 목자였다. 그분은 잔치에 온 세리, 잡배, 창녀도 언제나 환영하셨다. 그분은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 의인이 아니라 불의한 자를 위해 오셨다. 자기를 배반한 자 특히 가장 필요로 할 때 자기를 버린 제자들을 대할 때도 그분은 사랑에 애타는 아버지였다.

이 점, 이 정지점 없이는 무도는 없다. 거기에만 무도가 있다. - 엘리어트



5. 은혜의 색다른 계산법



분명 은혜의 곡조에는 튀는 음정 곧 불공평이 끼어 있다. 하나님이 성실한 에서 대신 교활한 야곱을 택하신 까닭이 무엇인가? 모짜르트형 직무 태만자인 삼손에게 초자연적 위력을 허락하신 까닭은 무엇인가? 왜 꼬마 목동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셨는가? 왜 그 왕의 불륜 관계의 열매인 솔로몬에게 탁월한 지혜의 은사를 주셨는가? 사실 구약의 이런 기사마다 그 이면에는 은혜의 파문이 꿈틀대고 있다. 그 파문은 마침내 예수님의 비유에서 극적으로 폭발하여 권선징악적 사조의 판도를 바꿔 놓는다.

은혜는 소위 하나님에 대한 딜레마를 해결해 준다. 굳이 성경을 많이 읽지 않아도 우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 긴장이 흐르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행동에 반감을 느끼신다. 인간 안에서 당신의 형상을 보시기 원하지만 고작해야 깨어져 흩어진 조각만 보일 뿐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포기하실 수 없다. 포기하시지 않는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6-9). 하나님은 호세아서를 통해 자신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은 선지자 호세아로 하여금 고멜이라는 여자와 결혼하게 하신다. 고멜은 세 자녀를 낳은 뒤 가정을 버리고 다른 남자한테 간다. 그러다 한동안 창녀 생활을 하는데 바로 그 때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기막힌 명령을 내리신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즐 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 인을 사랑하라"(호 3:1). 고멜은 은혜를 받았다. 결국은 불가항력적인 사랑의 힘이 이긴 다. 아내의 부정으로 동네방네 말거리가 된 호세아는 아내를 다시 집으로 맞아들인다. 호 세아의 경우 은혜의 파문은 그야말로 세간의 스캔들이 된다. 고멜이 받은 것은 공평도 아 니고 공의도 아니다.

복음의 핵심은 불가항력적으로 타오르는 사랑의 힘에 짐짓 무너져 내리는 하나님이다. 다메섹 도상의 길바닥에 엎드러진 바울은 바로 그러한 은혜의 충격에서 영영 헤어나지 못했다. 바울 서신에서 귀가 따갑도록 은혜를 이야기한 바울은 하나님이 인간과 화목케 되신 경위를 밝히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하나님은 인류를 버리시기보다는 그 아들을 버리셨다. 바베트의 만찬처럼 은혜란 받는 이에게는 값없는 것이지만 주는 이에게는 전 소유가 다 들어가는 것이다.

제2부 비은혜의 사슬 끊기



6.이야기 둘 : 끊지 못한 사슬




한 가계에 얽힌 비은혜의 이야기이다.



데이지는 1898년 시카고의 한 노동자계급 가난한 가정에서 여덟째로 태어났다. 이 글을 쓰는 지금 100회 생일을 눈앞에 둔 데이지는 아버지를 '못된 주정뱅이'로 회고하며 진저 리를 친다. 아버지가 아직 아기인 남동생, 여동생을 방바닥 저쪽 끝까지 냅다 발로 차 버 릴 때마다 데이지는 구석에 웅크린 채 울음을 삼키곤 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죽도록 미웠 다. 데이지는 평생 아버지처럼 되지 않으리라 다짐해 왔다. 그러나 그녀는 집안을 포학하 게 다스렸다. 그녀는 걸핏하면 이마에 얼음주머니를 대고 소파에 누워 아이들한테 '입 닥 쳐!"하고 큰 소리를 치기 일쑤였다. 딸 마가렛이 엄마한테 울며 사과하러 간 적이 있다고 한다. "잘못했다는 게 말이나 돼! 잘못인 줄 알면 아예 처음부터 안 했으면 될 거 아냐!" 그때 데이지는 빠져나갈 틈도 주지 않고 딸을 궁지에 몰아 세웠다. 마가렛은 평생 자기 어머니 데이지와는 다르게 살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마가렛의 삶 에도 크고 작은 비극이 있었다. 네 자녀가 사춘기에 이르자 마가렛은 더 이상 아이들이 통제가 되지 않는 것만 같았다. 마가렛 역시 얼음주머니를 이마에 대고 소파에 누워 "입 닥쳐!"하고 큰 소리를 치고 싶었다. 16세가 된 아들 마이클이 특히 마가렛의 성미를 건드 렸다. 대마초를 피우다 들킨 날 마가렛은 아들을 쫓아냈고 마이클은 히피 소굴로 들어갔 다. 드디어 어느 날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마가렛은 마이클에게 찾아가 '살아 생전 다시 는 보고 싶지 않다"고 쏘아붙였다. 그게 26년 전이었는데 그 뒤로 마가렛은 마이클을 보 지 않았다. 마이클 역시 나랑 가까운 친구다. 나는 그 26년 동안 여러 차례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 해 보았으나 매번 끔찍한 비은혜의 위력에 부딪혔을 뿐이다. 마이클은 환각제 탓에 약간 둔 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60년대에 마약 소굴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하와이로 이사 가서 어 떤 여자랑 살다가 헤어지고 다시 다른 여자랑 살다가 헤어진 뒤 또 다른 여자랑 결혼했 다. 언젠가 마이클이랑 통화하던 중 "연락은 무슨!" 잘라 말하는 음조가 꼭 그의 어머니 마가렛한테 듣던 것과 흡사했다. "살아있는 동안 그 여자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우린 둘 다 한동안 말을 못했다. 마이클도 내심 자기 목소리에서 어머니의 음조를 간파한 듯했다. 마가렛의 음조는 다시 그 어머니 데이지의 것으로, 그것은 다시 거의 한 세기 전 시카고의 어느 연립주택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훌쩍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가계의 DNA에 박힌 영적 결함처럼 비은혜는 끊지 못한 사슬을 타고 전해져 내려간다. 감지할 수 없는 독가스처럼 비은혜의 작용은 조용하지만 치명적이다. 아버지가 용서받지 못하고 죽는다. 어머니는 한때 자기 몸 속에 품었던 아이한테 반평생 말을 하지 않는다. 세대에서 세대로 독소가 흘러든다. 자기 아버지한테 끔찍한 일을 당한 딸이 몇 년 후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에 아버지를 용서해야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사춘기 아들이 저지른 숱한 비행을 어머니가 그냥 묵과해야 한다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다. 그러나 은혜는 공평함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은혜의 가장 어려운 부분 중 하나다. 그리고 이것은 종족, 인종,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건너야할 다리를 부수는 것이다. - 조지 허버트



7. 비본성적 행위



세계사 속에는 수세기를 넘나들며 훨씬 악한 결과를 초래한 유사한 사연들이 많다. 북아일랜드에서 폭탄을 던지는 청소년이나 르완다에서 칼을 휘두르는 병사나 구 유고의 저격병에게 왜 사람을 죽이는지 물으면 자기도 모르는 경우가 있다. 아일랜드는 아직까지도 17세기 올리버 크롬웰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복수하려고 하고, 르완다와 부룬디는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된 종족 싸움에 빠져 있으며, 유고슬라비아는 제 2차 세계대전의 상흔에 대해 복수하는 동시에 육 세기 전에 발생한 사건의 재발을 막고자 한다. 가정, 국가, 기관 할 것 없이 비은혜는 상호 적대의 원인이 된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다. 친히 우리에게 반복하라고 명하신 주기도문 한 가운데 용서라는 비본성적 행위가 자리를 틀고 있다. 예수님은 불의한 행위를 용서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용서의 조건으로 달아 놓으셨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고 악순환을 끊어 새로 시작할 수 있을 때,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고 쳇바퀴를 끊어 다시 시작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타고난 본능에 완전히 어긋나는 비본성적 행위를 요구하시는 것일까? 용서가 신앙의 중심이 될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첫째는 신학적인 측면에서 복음서에 간단히 답이 나와 있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며, 우리의 소명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용서란 결국 믿음의 행위다. 남을 용서함으로써 하나님이 나보다 정의를 실현하는 데 뛰어난 분이심을 믿는 것이다. 용서함으로써 복수의 권리를 거두고 공평 문제의 처리를 모두 하나님께 넘겨드리는 것이다. 정의와 자비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할 저울을 하나님 손에 놓아 드리는 것이다.

심령의 사막에 치유의 샘이 솟아나게 하라. 옥에 갇힌 인생으로 자유하여 찬양케 하라. - 오든

8.왜 용서인가?



그리스도인이든 불신자든 우리가 이 본성적 행위를 택하는 첫 번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용서만이 비은혜의 사슬을 끊고 비난과 고통의 악순환을 중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약에 가장 빈번히 사용된 '용서'라는 헬라어 단어는 문자적으로 '자신을 풀어 주다, 멀리 놓아주다, 자유케 하다'라는 뜻이다. 용서에는 출구가 있다. 용서로 책임 소재와 공평성의 문제가 일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관계의 새 출발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솔제니친은 바로 이 점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라 말했다. 사고력이 아니라 회개와 용서의 능력이 인간을 인간 되게 한다. 냉혹한 본성의 법을 초월하는 가장 비본성적 행위는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다. 또한 용서의 두 번째 위력은 가해자가 겪는 죄책감의 중압을 덜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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