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존 비비어 지음 | 두란노
순종
존 비비어 지음/윤종석 옮김
두란노/2002년 4월/303쪽/10,000원
제1부 그분의 날개 아래 거하기
1.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나의 의뢰하는 여호와
보호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시 91:1-2).” 다윗의 이 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들을 위한 보호하심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거하는 자는’이라고 제한하는 표현에 매우 중요한 질문이 담겨 있다. 누가 그분의 보호 아래 있는가? 간단히 말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덮으심 아래 자유와 보호를 누렸다. 그러나 불순종하는 순간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여 벗어버린 바로 그것, 즉 “자신을 덮을” 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들이 하나님의 권위에 불순종함으로 인류는 한때 알던 귀한 자유와 보호를 잃어버렸다.
권위는 인기 있는 단어가 아니다. 하지만 권위를 거부하거나 두려워하면 권위를 통해 누릴 수 있는 놀라운 보호와 유익을 놓친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권위를 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권위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의 길은 완전하다. 당장은 쓰리고 아파 보이는 일도 실은 보호와 축복이나 다른 이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순수하고 완전하며 영원하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라!
2. 권위의 근원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는 왕국이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 13:1-2).” 이 말씀에는 생각할 것이 많다. 첫째, 다스리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이 세우셨다. 하나님 모르게 권위 있는 자리에 합법적으로 오를 사람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다. 우리는 이 개념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둘째, 인간 권위에 반항하는 것은 곧 주님의 명령이나 하나님에게 반항하는 것이며, 그것은 심판을 자취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의 저자가 (권력에 굶주린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워치만 니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위에 복종할 수 있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권위부터 만나야 한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그 권위를 만났는지의 여부로 규정된다. 그런 권위를 만났다면 우리는 하나님한테 붙들려 있기에 앞으로 어디서든 다른 권위를 만나도 그분이 우리를 쓰실 수 있다.”
우리는 우선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성경적 기초부터 쌓아야 한다. 그 기초를 다지고 나면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위에 대한 복종의 중요성을 다룰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복종은 그 위에 쌓아올릴 모든 것의 주춧돌이 될 것이다.
제2부 순종함으로 자유하기
3. 기쁘게 순종하는 자녀를 찾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뜻을 고백할 뿐 아니라 행하는 이들이 천국에 있게 될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구원받은 사람에 대한 일반 개념과 정의는 이 말씀 앞에 무너진다. 우리는 ‘죄인의 기도’를 고백하기만 하면 천국이라는 안전지대가 보장된다고 가르치고 믿었다.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부분은 소홀히 하거나 전혀 강조하지 않았다. 이 사이비 은혜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곁길로 나가 순종을 경시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고백할 뿐 아니라 행하는, 즉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들만 천국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 12-13).”
말세의 분위기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은 불법과 미혹이다. 불법이란 자기 일정과 즐거움과 계획을 주님 명령보다 더 앞세우는 습관에 젖어 그것을 정상적이거나 당연하게 여기는 행동이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복종하겠다던 고백대로 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계획과 맞는 부분만 순종하면서도 자기들이 불법을 행한다는 걸 모른다. 안타깝게도 바로 이것이 오늘날 믿는다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상태다. 성경은 불법을 ‘가장 큰 죄’라고 말한다. 죄의 핵심 정의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미혹’이 팽배하다. 마지막 때를 사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에는 미혹에 대한 경고가 거듭 나온다.
1980년대 말 나는 기도하는 중에 무서운 환상을 보았다. 그 환상은 내 삶과 사역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았다. 나는 큰 무리를 보았다.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무리였다. 그들은 천국 문 앞에서 입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그러나 정작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넋이 나간 듯한 충격과 고통과 공포가 어렸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기독교를 믿었기에 당연히 천국에 갈 줄로 믿고 있었지만 그들은 진정 무엇이 죄인지 몰랐던 것이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삶을 진정 열망하는 자녀들을 찾으신다. 믿는 이들은 언제나 기쁨으로 그분의 뜻을 행해야 한다. 솔로몬은 순종에 따른 성공과 불순종에 따른 고생이 가득한 생을 마감하면서 모든 시대에 적용할 지혜의 말을 남겼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4. 미혹의 대가 사탄
미혹을 막는 가장 확실한 대비책은 전달받은 지식이 아니라 계시된 지식이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딤후 3:1).”라고 밝히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 ‘고통하는 때’는 정부나 무신론자, 이교도들이 믿는 이들을 핍박하는 때가 아니라 교회 안에 미혹이 만연한 때다. 미혹은 무서운 것이다. 사람을 속이기 때문이다! 미혹된 사람은 사실 자기가 틀렸는데도 옳다고 굳게 믿는다. 예수님은 미혹에 대해 거듭 경고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 24:4).” 그분의 경고에서 쉽게 긴박감을 느낄 수 있다. 진지하고 엄숙한 어조다. 그분은 제자들이 이 말씀을 영혼에 새기고 살아가기를 원하셨다.
미혹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불순종(불법)이다. 성경은 이렇게 경고한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미혹하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하나님의 말씀과 그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면 작지만 죽음에 이르게 하는 미혹의 문이 열린다.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미혹당하는 이유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했기(살후 2:10).” 때문이라고 했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안락이나 생명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권리와 특권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이요, 우리의 창조주와 구속자이며, 우리를 향한 사랑이 완전한 분이기 때문이다. 오직 이 사실이 우리를 미혹에서 지켜 준다.
하와가 처음 한 번 불순종한 것이 불법이라는 은밀한 세력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서막이 되었다. 아담과는 달리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 듣지 못하고 아담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것이다. 하와에게 그것은 계시된 지식이 아니라 전달된 지식이었다. 그래서 뱀은 아담 대신 하와를 표적으로 삼았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계시해 주셔야 말씀이 우리의 한 부분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일종의 율법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간절히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 앞에 겸손히 행할 때 계시를 받을 수 있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사 66:2).” 하나님은 우리가 책을 읽을 때나, 타인의 말을 들을 때나, 혼자 성경을 읽을 때나 성령과 교제할 때 말씀을 계시해 주신다.
사탄은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하심을 무시한 채 조항만 끄집어내어 하나님을 불공평한 존재로 보이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권을 공략한다. 사탄은 바보가 아니다. 주님 권위의 기초를 건드린 존재다.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시 97:2).” 하는 고백처럼 하나님의 보좌는 그분의 권위를 상징한다. 사탄이 미혹하고 곡해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왜곡한다면, 그때부터 그 권위의 기초는 그분의 피조물에게 의문의 대상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하게 된다. 사탄은 기회를 십분 활용하여 하나님에게 복종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처럼 되려 했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노예 삼아 스스로 권좌에 올랐다(사 14:12-14).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탄을 물리치셨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히 5:7-8).”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셨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경외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버지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으셨다. 그 누구보다 더 큰 유혹과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순종을 선택하셨다. 말씀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첫째 아담의 타락에서 배우라. 그리고 마지막 아담의 순종을 힘써 따르라.5. 순종의 씨앗, 불순종의 씨앗
순종이란 참된 믿음의 증거인 까닭에 믿음과 순종은 불가분의 관계다.
불순종의 결과는 다양하다. 즉시 눈에 띄거나 분명하지는 않아도 씨를 뿌리면 거둘 게 있듯이 확실하게 여파가 있다. 영혼의 대적인 사탄은 이 지식을 우리가 모르게 하려고 한다. 우리가 순종을 경시하고 미혹하는 전략에 쉽게 넘어가길 바라면서 말이다. 순종하지 않기로 결정하면 즉시 생기는 이득에 비하면 불순종의 결과는 대단치 않다는 논리를 무의식중에 펴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미혹적이고 치명적인 사고방식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이것이 불법의 신비 내지 은밀한 세력이다.
사실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신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그 말을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적용해 보라.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속이다가 죽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을 속이지 않고 회개할 때 받아 주신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 나아가 그분은 가인을 받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아무 조건 없이 받아 주신다는 현대 신학은 틀렸다. 실제로 그런 주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하기 때문에 위험한 주장이다. 우리를 지키고 죄에서 떠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후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였다(행 5:11).” 불순종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6. 순도 백퍼센트 순종
99.9% 순종이 사람에게는 순종으로 보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결코 순종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의 삶은 한 인간이 불순종이라는 유희에 빠질 때 일어나는 일을 생생히 보여 준다.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든 것을 멸절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사울에게 전한다. 그러나 사울은 아말렉 모든 것을 멸절시키되 왕은 살려두었고 가장 좋은 소와 양을 전리품으로 가져와 백성에게 주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했다. 아마도 당시 문화에 따르면 한 나라를 정복해 그 지도자를 생포하고 살아 있는 전리품을 왕궁으로 가져오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탄식하셨다.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삼상 15:11).” 사울은 명령의 99.9%는 순종했으니 그것을 순종이라고 보겠지만 하나님은 불순종으로 보시며 그것을 ‘거역’이라고 표현하신다.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여 참된 회개에서 등을 돌릴 때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첫째, 그렇게 불순종하는 행동을 반복하기 쉬워진다. 둘째, 미혹의 휘장이 마음을 덮어 죄를 깨닫는 감각이 둔해지며 결국 그 감각 대신 논리적인 판단을 넣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에 죄를 지을 때는 비수가 이전만큼 예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중간에 휘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끝내는 휘장이 두터울 대로 두터워져서 전혀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자기 정당화만 있을 뿐이다. 미혹이 진리를 숨기며 양심이 마비된다.
이쯤 되면 경건의 모양은 남아 있지만 선악의 지식이라는 저주 아래 그냥 종교적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더 많다. 이제는 성령께서 마음에 넣어 주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아닌 곳에서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 미혹된 자기 마음의 명령을 따라 살아간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의문(儀文)일 수도 있고(고후 3:6) 사회에서 통용되는 옳고 그름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살아 계신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다. 이제 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그에게 선지자적 메신저를 보내시는 것뿐이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사람을 점진적으로 붙잡으신다. 언제나 우선 그분은 직접 죄를 자각하게 함으로 다가오려 하신다. 미혹의 휘장이 두터워져 하나님의 마음이나 말씀과 단절된 상태라면 그분은 선지자적 메신저를 보낸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든 보내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실 수 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약 5:19-20).” 여기서 ‘허다한 죄’란 반복하여 불순종한 결과 진리를 떠난 것이다. 그러나 이 선지자적 경고까지 무시하거나 거부하면 대개 하나님은 고생이나 질병이나 그밖에 고난으로 심판하신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시 119:67, 75).” 우리는 심판을 받기 전에 먼
저 자신을 살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의 초점은 순종이다. 순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우리의 계획과 욕심이 죽지 않는 한 결국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욕망은 대립하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사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선지자답게 단호히 선포한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마법)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 15:22-23).” 사술은 사람을 귀신의 세계에 활짝 열어 놓는다. 사술은 자기의 환경과 상황과 사람을 다스려보려는 것이 목표지만 귀신의 세계에 개입되다 보면 오히려 귀신에게 다스림을 받게 되어 있다.
고등부 목사를 하면서 비교(秘敎)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 인근 고등학교들에는 장난삼아 강신술을 해 보는 고등학생들이 꽤 있었다. 마법이나 사탄교에 빠진 친구 얘기들을 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흥미로운 사탄교의 원리를 발견했다. 그들은 모임에 사람을 새로 받아들일 때 그에게 마약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불법 성관계를 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하는, 하나님의 법과 국가법을 어기는 일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거역은 사술’이라는 진리를 배운 후에야 그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들은 거역이 클수록 더 많은 힘을 얻는다고 배운다. 사실이다. 거역은 사술이기 때문이다. 마법사들의 소위 사탄교 경전에도 그 개념이 있다. 몇 년 전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사탄교와 마법 전문 채널을 보았다. 사탄교 경전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기자는 제1계명을 이렇게 보도했다. “네 뜻대로 할지니라.” 그 말이 내 관심을 끌었다. 그 순간 성경 말씀이 떠올랐다.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1:7-8)”.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 한다(요 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