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
오스 기니스 지음 | IVP
1. 소명 : 궁극적인 존재 이유우리 현대인들은 한결같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추구한다. 우리의 가슴 깊숙한 곳에는 우리 자신보다 더 큰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성취하고 싶은 갈망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러 여기에 있는지, 왜 이곳에 존재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저널(Journal)』에 이렇게 썼다. "그것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진정 내가 하길 원하시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해당되는 참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며, 내가 그것을 '위하여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는' 그 사상을 찾는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우리가 창조된 구체적인 목적, 곧 우리가 부름받은 그 목적을 발견할 때에만 우리 인생의 소명을 비로소 찾을 수 있다. 창조주의 소명에 응답하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이며, 인간의 존재 목적의 가장 고상한 근원이다. 그러면 '소명(Calling)이란 무엇인가? 소명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께로 부르셨기에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의 행위 전체, 우리의 소유 전체가 특별한 헌신과 역동성으로 그분의 소환에 응답하여 그분을 섬기는 데 투자된다는 진리이다.
2. 진정한 추구자는 그 어디에<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와 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걸작들을 남긴 다빈치는 끝없 는 지식욕과 인생상을 절감하면서 산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비범한 정신이 생각해낸 것 중에 그가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장엄한 실패를 통해 비로소 우리는 소명의 경이로움을 지극히 개인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떤 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인간적인 추구 이상의 것이 필요할 경우, 그 때 소명은 추구자 자신이 추적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진지한 추구자들은 지난 3000년간 서구 세계의 추구를 형성했던 '사랑에 대한 두 가지 대조적인 견해' 중 하나를 추구하게 된다. '아가페'의 길은 추구의 수단이 '에로스'와 다르다.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의 거리를 생각할 때 다빈치와 같은 그 어떤 추구자인들 그 간격을 메울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가 탐색을 시작하긴 하지만 결국에는 우리가 발견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추적당하고 있는 추구자'라는 이 오래된 이야기는 C. S. 루이스가 신앙을 찾은 여정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루이스는 20세기에 가장 존경받는 옥스퍼드의 철학자요, 문학자로서 그의 명저들은 널리 읽히고 있다). 오늘날에는 추구자라는 용어가 종종 제멋대로 사용되나 다빈치와 같이 화려한 인생을 살지만 인간 자율적인 유한한 추구로는 불가능하다는 비극을 직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소명의 진리가 위안과 약속을 준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명시적인 약속, 곧 추구하는 자는 얻을 것이라는("찾으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 약속이 있을 뿐 아니라 추구자 자신이 오히려 추적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그분의 직접적인 예가 있다.
3. 나는 누구인가?1989년 해방된 체코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던 바츨라프 하벨은 해방 전 두 번의 옥 살이를 거치면서 쓴 서구의 고전적인 3대 옥중서신이 된 「올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감옥에서의 육체적인 어려움보다 훨씬 어려운 문제인 인생의 의미를 붙들고 씨름하게 된 다. 하벨은 깊이 고뇌한다. 인간 개개인의 정체성은 책임성을 가정하고 또 그것을 요구한 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책임져야 할 대상이 없다면, 혹은 우리가 반응할 수 있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책임성이라는 개념과 '소명'에 관한 논의는 이해할 수 없는 공염불에 불과할 것이다. 부르는 자(Caller)가 없다면 부르심(소명)도 없다.
요즘 세상에서 바츨라프 하벨과 같은 정치 지도자는 드물다. 그의 열정적인 씨름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소명의 진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또 다른 증거이다. 소명(call 또는 vocation)이라는 개념은 개인의 정체성의 기반과 인간됨 자체를 이해하려는 현대인의 추구와 연관되기 때문에 우리 각자에게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정체성의 위기는 현대인에게 항상 붙어 다니는 불가피한 질문, 곧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로 요약될 수 있다.
4. 모든 사람, 모든 곳, 모든 것서구 역사상 위대한 개혁자 중에서 윌리엄 윌버포스는 1785년 25세 때 회심하게 되었을 때 정치를 집어치우고 기독교 사역의 길로 접어들 뻔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수많은 사람 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윌버포스 역시 '영적인' 일이 '세속적인'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고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존 뉴턴(Amazing Grace의 작시자)은 그에게 "나는 주님이 국 가를 위해 일하도록 당신을 세우셨다고 믿고 있으며, 또 그렇게 되길 기대한다."고 설득 하자 윌버포스는 많이 기도하고 숙고한 끝에 뉴턴의 조언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나 님은 그를 국회의원으로서 억압받는 자들의 자유를 옹호하도록 부르고 계셨다.
소명의 총체적인 성격이 왜곡되어 세속적인 것을 희생시킨 채 영적인 것을 격상시키는 일종의 이원론을 바로 가톨릭적 왜곡이라 부를 수 있다. 한편, 소명에 대한 개신교의 혼동은 이보다 더 잘못된 '개신교적 왜곡'을 초래했다. 이것도 일종의 이원론을 낳았는데 이번에는 영적인 것을 희생시킨 채 세속적인 것을 격상시켰을 뿐 아니라 후자를 전자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켜 버렸다.
5.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위한현대 세계의 압력으로 인해 개신교적 왜곡은 세속적인 것을 영적인 것과 완전히 단절시키고, 소명이란 용어를 이를 대치하는 하나의 용어로 축소시켰다. 종교개혁 초기를 거쳐 청교도 시대에는 일, 거래, 고용, 직업 등과 같은 단어들이 서서히 소명과 교호적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소명은 직업이 되었고, 직업은 부패했으며, 소명은 이제 수입은 적지만 좀더 실제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을 고상하게 일컫는 말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 개신교적 왜곡의 재앙에서 회복되는 길은 무엇일까? 첫째, 우리는 소명이 마치 부르시는 분이 없는 어떤 것인 양 생각하는 모든 관념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둘째, 좀더 적극적으로는 일차적인 소명을 우선적인 위치로 복귀시켜야 하는데 그것은 소명의 배경이 되는 예배를 회복하고 또한 소명의 핵심인 예수님에 대한 헌신을 회복함으로써 가능하다. 부르심에 대한 올바른 응답은 다른 어떤 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하나님께만 헌신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소명을 함께 묶어 놓음으로써 두 가지 왜곡을 피해야 한다. 일차적인 소명을 강조함으로써 개신교적 왜곡을 극복하고, 이차적인 소명을 강조함으로써 가톨릭적 왜곡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이원론은 소명의 힘을 없애지만 총체적인 이해는 소명의 위력을 발휘하게 한다. 하나님의 것이 되고자하는 열정이 소명에 응답하는 모든 이의 에너지를 모으는 원동력이다.
6. 당신에게 걸맞는 일을 하라유명한 색소폰 연주자였던 존 콜트레인은 매우 뛰어난 솜씨로 <지극히 탁월한 사랑>을 연 주한 다음 '눈크 디미티스!'(그 곡을 그 때보다 더 완벽하게 연주할 수 없으리라고 느낀 뒤의 찬사)라고 말했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진수에 해당하는 가장 깊은 재능을 표현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것 같다. 이것이 소명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이다. 하나님은 보통 우리의 재능에 부합되게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나 재능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일은 경이로운 동시에 위험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본연의 자아가 되도록' 부르시고 '우리의 존재에 걸맞는 일을 하도록' 부르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명을 따를 때에만 진정 '본연의 모습'이 되고, '우리 존재에 걸맞는 일'을 할 수 있다. 이때 비로소 '타인을 위한 우리의 것'인 재능은 이기심이 아니라 섬김, 곧 완전한 자유가 된다.
7. 역사상 가장 거대한 도전오늘날 세계 도처에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나중에 "여보게,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했던 대로 행동했고 이제 여기에 묻히노라고 우리 주님께 전해 주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제 세 번째 천 년을 맞이하는 문턱에서 이 도전은 믿음만큼이나 행위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행동을 촉발해 내고 강화시키는 믿음을 요구한다.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 중 많은 이들이 소명의 진리에 담긴 다차원적인 의미를 알고자 노력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현대 세계의 도전과 현 시점의 중대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꿋꿋하게 버틸 때'는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대로 행동할 때이다. 행동할 때는 바로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치셨던 대로 믿을 때이다. 믿을 때는 바로 신앙에 대해 안락하게 생각하던 좁은 사고 방식에서 박차고 일어나 그분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때이다. 이 소명은 가장 깊고도 강렬한 우리의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8.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 되게 하라조지 스테이너(George Steiner)의 소설 『A.H의 산 크리스토발로 가는 길』은 20세기 최 고의 문제작 중 하나로 꼽힌다. 소설의 줄거리는 놀랄 만큼 단순하지만 헌신된 유대인인 스테이너는 이 책에서 나치주의가 지닌 더욱 명백한 세력 - 역사적·경제적·사회적·심 리적 - 의 저변에 깔려 있는 더욱 본질적인 신학적 악을 간파했다. 스테이너의 결론은 도 덕적으로는 잘못되었을지 모르나 다른 수많은 기독교적인 진술보다 소명의 진리에 훨씬 더 가깝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진리에 대한 사단의 증거로 볼 수 있으며, 소명에 대한 모든 부적합한 견해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형태로 오신 놀랍고도 자비로운 그 잠시동안의 사건을 제외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말로서 말씀하시고, 그분의 피조물인 우리의 책임은 그 말씀에 귀기울이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의 이면에는 소명에 관한 근본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 말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제시하시는 가장 깊고도 완전한 표현인데 그분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 그 시초이다. 따라서 그분이 부르실 때 귀기울이고 그분을 신뢰하며 순종하면 우리는 그분의 위엄과 존귀를 인정하며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 되게 하라."는 말의 의미를 격하시켜 버렸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우리의 문화 전체가 현대 세계의 선물에 너무나 의존한 나머지 실제로 '하나님이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과제 중에서 현대 세계에 대한 신앙의 권위를 회복하는 일보다 더 시급한 과제는 없다. 우리 사회와 같이 역동적이고, 유동적이, 개인주의적인 세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개개인이 실제로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 되게' 함으로써 소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신앙의 권위를 회복할 수 없다.
9. 유일한 청중조셉 프래지어가 쓴 전기 『앤드류 카네기』는 소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점을 부각시켜 준다. 자신의 계획과 시도에 관해 얘기할 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목표', '야망', '성취', '평가' 등의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여기서 '청중'이라는 중요한 요소는 쉽게 간과하는데 문제는 우리에게 청중이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어떤 청중을 갖고 있느냐이다. 이런 관 찰은 소명의 진리에 담긴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결정적인 소명에 귀 기울이면서 산 인생은 다른 모든 청중을 밀어내는 단 한 분의 유일한 청중 앞에서 살아 낸 인생이다.
마틴 루터 킹이 『버밍햄 감옥에서 쓴 편지』에서 쓴 것처럼 "당시에는 교회가 단순히 여론의 생각과 원리를 기록한 온도계가 아니라 사회의 관습을 변혁시키는 온도 조절 장치였다." 지도자인가, 뚜쟁이인가, 자이로스코프인가, 갤럽 여론 조사인가, 온도 조절 장치인가, 온도계인가? 오직 단 한 분 그 유일한 청중의 임재를 연습하는 자들만이 전자에 이르고 후자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의 위대한 그리스도인 군인이었던 찰스 고든 장군의 성품과 삶이 뛰어난 본보기다. "나는 단 한 분 그 유일한 청중 앞에서 살고 있다. 다른 모든 청중 앞에서는 내가 입증할 것도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
10. 불꽃 같은 인생우리 시대에 블레이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 불타던 인물이었 다. 파스칼은 역사상 가장 탁월한 사상가 중 한 사람이요, 서구 문학의 위대한 걸작으로 꼽히는 『팡세』의 저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대부분 파스칼의 수학적 업적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나 그의 심오한 성품과 재능에 불을 붙여 찬란한 불꽃으로 타오르게 한 요인은 우리 모두에게도 열려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소명이다. 그런 면에서 파스칼은 소명 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삶에서 가장 깊은 성장과 최고의 영웅적 자질 을 향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열쇠다.
하나님의 소명을 좇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성장의 비밀이 되고 영웅적 자질에 이르는 열쇠가 된다. 첫째, 하나님의 소명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온전히 자라도록 직접 도전한다. 마치 운동 코치가 선수 개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듯이,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의 잠재력을 완전히 끌어내듯이, 하나님의 소명은 다른 어떤 소명도 도달할 수 없는 깊은 차원에서 우리 안에 공명하게 되고, 다른 어떤 소명도 측량할 수 없는 높은 경지로 우리를 끌어올린다. 둘째, 하나님의 소명의 핵심에는 모방의 요소가 담겨있다. 바울이 사용한 '본받는 자'라는 단어는 중요한 용어이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모델을 닮는 것 - 관찰하고 모방하는 것 - 은 제자도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스승의 권위 아래서 경험을 통하여 스승에게서 배워야만 한다. 그것은 그들의 제자도와 배움의 핵심이자 영혼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11. 책임성 : 과연 누구에 대한 책임인가?파블로 피카소는 20세기 예술의 최정상에 위치한 천재적인 예술가이다. 그러나 그는 대인 관계 특히 여성과의 관계에서는 탐욕스러운 괴물과 같았다. 무신론자였던 피카소는 하나 님을 부인했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었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교 회로 가서 그곳에서 사랑하는 여인과의 사랑의 약속에 스스로 책임을 지려 한 사건이 있 었다. 이것은 소명의 또 다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소명은 도덕적 책임의 근거를 찾 는 현대적 추구와 윤리 자체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책임성이라는 개념은 '영혼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최근에 들어와서 이 단어가 급속히 부상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책임성의 본래의 개념은 그 뿌리가 절단되어 시들어 죽을 운명이라는 점이다. 현대적 의미의 책임성은 그 기원과는 모순되게도 '누구'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모두 '무엇'에 대한 책임이 되어 버렸다.
12. 소명의 사람들남부 프랑스의 산악지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샹봉(Le Chambon) 시민들은 제2차 세계대 전 동안 5,000명 이상의 유대인 어린이를 구출한 영웅이었다. 샹봉 이야기는 현대 세계에 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좇을 본보기로는 너무나 드문 경우이나 그것은 또한 현대의 신자들이 쉽게 잊어버리는 소명의 또 다른 차원을 상기시켜 준다. 예수님의 소명에는 개인적인 차원이 있지만 순전히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 르실 때 개별적인 소명뿐 아니라 공동체적인 소명도 부여하신다.
공동체가 현대 세계에서 수난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고통스럽게도 공동체적 소명 의식을 다시 정립해야 하는데 이에 따른 몇 가지 분명한 도전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의 공동체적 소명에 헌신한다는 것은 현대의 임의적인 개인주의 성향에 단호히 저항해야 함을 뜻한다. 둘째, 우리의 공동체적 소명에 대한 헌신은 모든 개인적인 소명 안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목적과 유익을 존중해야함을 뜻한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이 확정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 관행은 기독교적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당하다. 그러나 어떤 관행에 대하여 "이 관행만이 기독교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분명히 기독교적이지 않은 방식이 많이 있지만 어느 하나만이 유일하게 기독교적인 것도 아니다. 셋째, 우리가 공동체적 소명에 헌신한다는 것은 개혁은 지속되어야 하며, 심지어는 개혁을 개혁하는 것도 필요함을 기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