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시는 하나님
헨리 나우웬 지음 | 두란노
춤추시는 하나님
헨리 나우웬 지음/윤종석 옮김
두란노/2002년 1월/163쪽/7,000원
1. 작은 자아에서 더 넓은 세계로
나는 데이브레이크(장애인 공동체)에서 “어떻게 하면 내 고통을 없앨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 고통을 성장과 배움의 기회로 삼을 수 있을까?”를 묻는 사람들을 만났다. 대부분이 글을 읽을 수 없고 다수가 제 몸 하나 가눌 수 없는 사람들 속에서 말이다. 성하고 똑똑하고 건강한 사람들만 인간 대접을 받는 세상에서 외면 당한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 속에서 나는 인간의 고통과 하나님의 고통을 연결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그들을 보며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한복판에서 생에 몰입하는 것이 고통을 통과하는 길임을 배웠다.
우리는 마땅히 상실을 슬퍼해야 한다. 이것이 춤의 첫 스텝이다. 치유와 춤은 고통을 유발하는 원인을 직시하는 데서 시작한다. 우리를 마비시켜 부정과 수치와 죄책이라는 옥에 가둔 은밀한 상실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을 고난과 끊으려는 시도는 결국 우리의 고난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고난과 끊는 결과를 낳는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상처 입은 자신의 상태에 직면할 수 있는 사람들만 치유를 받고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삶을 지켜보며 깨달아야 할 사실이 있다. 군중들의 ‘호산나’ 소리가 모두 고요하게 잦아들고, 제자들과 친구들이 모두 예수님을 떠나고, 그분의 입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절규가 터져 나온 후 바로 그때에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점이다. 비로소 그때 그분은 죽음의 사슬을 깨뜨리고 구세주가 되셨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온 세상의 짐을 친히 담당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고난은 우리에게 더 크신 분의 손에 상처를 내려놓으라고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시는 하나님을 본다. 아픈 세상에 하나님의 고난의 사랑을 나누어 주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그분을 본다.
인생에서 중대한 질문 중 하나는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일이 벌어지든 나는 그 속에서 그것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다. 보편적으로 우리는 삶의 상황을 바꿀 수 없다. 상실 자체는 협상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 상실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하는 것만은 우리의 선택이다. “이 일이 새로운 삶을 향한 부름이 아닐까? 뭔가 새로운 것을 터득할 수 있는 계기, 내 상처로 남을 섬길 기회가 아닐까?” 우리는 어두운 순간을 지날 때조차도 우리 안에서, 우리 삶에서 일하시는 성령을 발견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거듭 주시는 소명이다. 고난을 이해하는 열쇠는 인생이 주는 고통과 아픔을 밀어내지 않는 데 있다.
애통은 우리를 초라하게 하고 우리가 얼마나 작은 사람인지 냉정하게 일깨워 준다. 그러나 바로 그곳이 춤추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일어나 첫 스텝을 내딛게 하시는 곳이다. 그곳은 고통과 가난과 불편함 속이다.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시편 30:11)라고 고백한 시편 기자처럼 우리도 그 속에서 기도하는 법을 알게 된다. 슬픔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작은 자아에서 하나님의 넓은 은혜로 옮겨가는 과정을 단순한 결심이나 혼자 힘으로 겪지 않는다. 아무것이나 절박하게 붙잡고 싶을 때,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주변 분위기를 휘감을 때 우리는 불안해진다. 그러나 그 상처를 통해 자신이 치유돼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춤추며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의 스텝을 내딛을 지평이 은혜로 열린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춤추시는 하나님과 연결된다. 모든 것을 품으시는 사랑을, 매일 매순간 우리를 만나 주시는 그 사랑을 받는 법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슬픔과 상실의 경험 너머를 내다보게 된다.
애통과 춤이 동일하게 은혜라는 몸짓의 일부라면 우리는 지금껏 살아온 모든 순간에 대해 감사할 수 있다. 내가 걸어온 독특한 여정을 내 심령이 더욱 그리스도를 닮도록 빚어 오신 하나님의 길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인 십자가는 우리를 불러 고통이 있는 곳에서 은혜를, 죽음이 있는 곳에서 부활을 보게 한다. ‘감사’로 부르심은 곧 모든 순간을 새 생명에 이르는 십자가의 길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부르심이다.
2. 움켜쥠에서 내려놓음으로
지난 몇 년 간 나는 그네타기 곡예를 즐겨 보았다. 당시 89세이던 우리 아버지가 이곳에 방문하시면서부터 나는 서커스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어느 날 우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그네타기 곡예사 다섯 명이 진행하는 서커스를 보았다. 그것은 한마디로 공중 무도회였다! 한 사람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잡는 이의 강한 손에 붙들리기 전에는 모든 것이 몹시 아슬아슬했다. 공연 때마다 나는 곡예사들의 용기에 끊임없이 감탄한다. 곡예사들은 잡아 주는 이의 든든한 손에 자기 손이 빨려 들면서 비행이 끝나리라는 것을 믿는다. 튼튼한 그네를 놓아야 반대편 그네까지 우아한 반원을 그리며 날 수 있다는 것도 잘 안다. 상대방이 나를 잡으려면 일단 놓아야 한다. 허공에 용감히 뛰어들어야 한다.
우리는 내려놓을 때 받는다. 위대한 역설이다. 우리는 위험한 장소에서 오히려 예기치 못한 안전을 발견한다. 모든 위험을 피하려는 사람들, 상처받지 않은 마음을 든든히 지키려는 사람들은 결국 자기가 만든 지옥에 갇히고 만다. 삶을 살짝만 붙들라는 소명을 거부하고 내 삶은 내가 다스리겠다고 할수록 상실이라는 현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그만큼 인위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내가 가진 소유와 계획과 사람을 내려놓으면 비록 모험이 따를지라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자유의 삶에 들어설 수 있다. 이것이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는 또 하나의 스텝이다. 움켜쥐려고 하지 않고, 안전지대를 확보하려 하지 않으며, 자신이나 다른 이의 삶을 스스로 안무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따르고 싶고 사랑하는 하나님께 다 내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 스스로 다스리는 삶으로 부르시지 않는다. 믿음의 삶으로 부르신다.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부분을 보라.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넘겨졌다’는 표현이 거듭 나온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위해 그 아들을 넘겨주셨다. 예수님은 더는 전도하고, 말씀하고, 치유하고, 주도권을 행사하시던 그 예수님이 아니었다. 그분은 이제 많은 일을 그저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침뱉음을 당했고, 십자가에 끌려갔고, 채찍질 당했고, 십자가에 못박혔다. 만물이 그분을 통해 창조되었지만 이제 ‘말씀’이신 그분이 자신이 피조한 세계의 피해자가 되신다.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통제권을 잃고 무력자가 되신 것,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다. 그리고 우리의 아픔과 주님의 고난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애통해하는 것은 자신에게 정체감을 주는 그 무엇에 대해 죽는 것이다. 때로 끔찍이 떠받들던 것들을 놓아야 할 때도 있다. 이 모든 부담 때문에 어떤 이들은 냉소적이 된다. ‘다 쓸데없는 짓’이라는 결론을 짓는다. 슬픔이 만성적 쓴맛이 된다. 어떤 이들은 집요한 강박관념에 빠지기도 한다. 이처럼 움켜쥠에서 내려놓음으로 옮겨갈 때 맞닥뜨리는 큰 장애물은 두려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두려움의 집에서 나와 사랑의 집에 들어가며, 소유하는 태도를 버리고 자유의 자리로 나아가라고 우리를 초청하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있는 사랑의 집에 거하시려는 의도다. 예수님은 우리가 거할 집을 예비하러 아버지께 간다고 말씀하신다. 그분이 우리 안에 사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분 안에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
방어하는 태도에서 긍휼과 평안과 자유로의 이동은 기도를 통해 일어난다. 기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더 큰 가능성에 응답할 수 있으며, 명령하고 통제하려는 욕구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럴 때 우리의 정체를 좌우할 것 같던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생각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입었기에 소외와 분리라는 강박관념에서 자유하여 타인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기도는 세상을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선물로 여기는 삶의 태도다. 우리는 새로운 일이 일어나게 할 용기를 얻는다. 그 일은 비록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지만 이제는 그다지 큰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의 벌거벗음에 결국 그분의 자비를 덧입게 된다는 것을 기도를 통해 배우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계속 우리를 불러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근원과 중심과 목표로 삼으라고 한다. 그 안전한 곳에서 우리는 슬픔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으로 달려갈 수도 있다. 슬픔은 우리에게 우리 힘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미래를 열어 준다. 바로 춤이 있는 미래다. 이것이 예수님의 길이다. 질고를 아는 슬픔의 사람(사 53:3)이 기쁨을 약속하셨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 “너희가 곡하고 애통하리니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
한편 고난은 자주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교훈도 가르친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9). 이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자유케 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절대 하나님을 내 손에 쥐고 ‘드디어 다 파악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오히려 모든 소요와 긴 밤이 지난 후 우리는 빈손으로 하나님께 나오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데려가실 곳이 어디일지 기대하며 그분을 기다릴 때 우리 안에는 하나님 임재에 대한 민감성은 물론 그분의 부재에 대한 민감성도 자란다.
그날, 아버지와 함께 서커스에 갔다가 그네타기 곡예사들에게 마음을 빼앗긴 뒤로 나는 해마다 1주일 혹은 2주일씩 서커스단에 합류하여 돌아다녔다. 최근 서커스단 리더가 내게 말했다. “헨리, 만인이 내게 박수를 보냅니다. 내가 허공에 뛰어올라 거꾸로 공중제비를 하는 것을 보며 다들 나를 영웅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짜 영웅은 잡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팔을 내밀고 믿는 것뿐입니다. 잡는 사람이 나를 잡아 끌어올려 주리라고 믿는 것뿐입니다.”
3. 운명론에서 희망으로
우리의 존재가 덧없으며 물처럼 손안에 쥘 수 없다는 사실에 새삼 가슴이 저며올 때 우리는 슬픔에 잠기고 만다. 나의 일부가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볼 눈이 있고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덧없는 인생은 찰나적인 것이 아니라 영존하는 것이고, 죽어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나는 것이며,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그래서 비록 깨지기 쉬운 연약한 삶이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을 품을 놀라운 이유가 있다. 이 숨은 실체를 어떤 이들은 ‘은혜’라 하고, 어떤 이들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 하며, 어떤 이들은 ‘우리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 나라’라 한다.
일단 이 소중한 중심에 눈과 귀를 고정하게 되면 우리는 중심 위를 굴러가는 모든 시류와 상황은 기껏해야 그 중심을 값진 불멸의 선물로 다듬는 역할만 할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예수님은 믿는 이마다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엄청난 혁명이다. 이 덧없고 찰나적인 세상에 그분이 영생의 씨앗을 뿌리러 오신 것이다. 영적인 삶이란 바로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을, 찰나적인 것 속에서 영존하는 것을,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가꾸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삶이다.
이 신비의 임재를 인식하면 인생이 달라진다. 남들이 불만을 품을 때도 우리는 기쁨을 맛본다. 세상이 전쟁을 공모할 때도 우리는 평화를 누린다. 방송에 절망적인 기사가 넘쳐나도 우리는 희망을 얻는다. 주변 공기에 증오가 배어 있을 때도 우리는 깊은 사랑을 발견한다. 물론 이러한 희망이 있다는 것이 고난을 피하거나 무시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믿음에서 나온 희망은 고난을 통해 성숙하고 정결해진다. 우리의 희망의 근거는 삶과 고난보다 강하신 그분이다.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섭리와 치유의 임재에 눈뜨게 하기 때문에 영적인 것에 귀 기울이는 삶은 우리 마음에 전혀 무리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악착같은 발버둥이 아니라 심히 연약한 중에도 하나님을 보려는 열망으로 완벽함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계획이나 일련의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매일과 매순간에 대해 열린 마음이다.
우리들에게는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로 보려는 유혹이 끊이지 않는다. 크로노스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요, 일련의 불연속적인 우연한 사건들이다. 우리는 자기가 시간을 관리하거나 업무를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일이 우리를 초조하게 한다. 그러나 복음서는 ‘때가 찬’ 시간에 대해 말한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눈으로 시간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간은 단순한 시간 흐름인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chairos)로 바뀐다. 카이로스란 기회, 즉 계획한 목표를 위해 무르익은 순간을 뜻한다. 시간을 카이로스의 개념으로 보면 우리의 하루하루 속에서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우리는 먼저 우리 삶에서 서로 무관해 보이는 사건들이 어떻게 우리를 지금 이 지점까지 데리고 왔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기억이란 미래와 깊은 관련이 있다. 기억이 없이는 기대도 없다. 기억은 우리를 과거에 닻을 내리게 하고, 지금 여기에 현존하게 하며, 나아가 새로운 미래에 마음을 열게 한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을 때 우리는 삶의 분초와 시간과 나날을 다르게 경험한다. 내일을 믿는 사람들이 오늘을 더 잘 살 수 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는 자들은 이미 자기들 가운데 거하시는 그분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인내로 그분의 재림을 기대하면서 더 깊어지고 더 성숙할 수 있다. 이런 성장을 희망한다는 것, 그 가능성이라도 믿는다는 것은 곧 모든 형태의 운명론을 거부하는 것이다.
4. 감정의 조종에서 순전한 사랑으로
우리는 우리가 사람들을 소유하고 이용할 수 있으며, 감정을 조작할 권리가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대처 방안에 대한 때이른 충고, 안심시키려는 성급한 시도, 이런저런 조언의 남발 등은 사실 사람들의 문제를 간편하게 마무리하려는 자신의 욕구를 더 많이 드러낸다. 그런 위로를 하며 다짜고짜 끼어들 때 우리는 아파하는 영혼이 물건이나 프로젝트인 양 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런 소유의 방식으로 대인관계에 접근하면 우리는 결국 더 고립되며 자신의 실망과 슬픔에 갇히게 된다.
정신과 의사인 토머스 호라는 대인관계를 강조하는 우리 문화를 ‘깍지 낀 양손 손가락‘에 비유했다. 깍지를 끼면 손가락 마디 안쪽 끝이 서로 맞닿는 지점까지만 맞물린다. 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동작은 손가락을 빼는 것뿐이다. 하지만 꽉 맞물린 상태에서 손가락을 빼다 보면 마찰이 생기고 통증까지 온다. 그러나 기도하는 자세로 나란히 포갠 두 손은 자신을 넘어 다른 세계를 가리키며 양손의 관계도 자유롭다. 이런 관계일 때만 진정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된다. 이럴 때만 쌍방의 사랑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놀라운 사실이 생각난다. 그들은 내게 애써 영향력을 미치려 하지 않았으며 굳이 내 반응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특정한 내적 자유를 보여 주었다. 그들을 보면 자기 이상의 다른 존재와 맞닿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자기보다 큰 실체를 가리켰고, 그들의 자유는 큰 실체인 그분 안에서 자랐다. 이렇게 중심이 잡힌 상태, 내적 자유, 영적 독립은 신비한 전염성이 있다.
다른 사람들을 우리 이상의 다른 존재, 즉 생명과 치유의 원천이요, 존재의 핵심이요, 보이지 않는 실체인 하늘 아버지와 연결시킬 때 진정한 사역은 시작되는데 이런 접근은 두 가지 훈련 - 즉 고독과 침묵 - 을 통해 우리 안에 뿌리내릴 수 있다. 고독과 침묵이란 곧 나를 ‘사랑하는 자’라 부르는 음성, 나를 다음 장의 모험으로 이끄시는 음성, 하나님이 예수님께 하신 것처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도의 자리이다. 공동체는 자신이 사랑받는 사람임을 깨닫기 시작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받는 사람으로 볼 때 생겨난다. 내 안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인사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라는 말은 우리 삶 전체에 생생히 울려 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