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이름으로
헨리 나우웬 지음 | 두란노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른 사람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가를 세 번씩이나 물으시고 세 번이나 목자가 되라는 명령을 주신 후에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성숙이란 자신이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기꺼이 이끌려 갈 수 있는 능력입니다.그러면 이렇게 팔을 벌리고 살려고 하는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훈련은 무엇입니까? 나는 철저한 '신학적 성찰'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제안합니다. 기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에 계속 붙어 있을 수 있게 했듯이 또 죄의 고백과 용서가 우리의 목회를 공동체적이고 상호 보완적 관계를 유지하도록 했듯이 철저한 신학적 조명은 우리가 어디로 인도받고 있는지 분별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사고하는 목회자들이 거의 없어서 예수님의 마음에서 나온 사고는 실제 사역 현장에서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견고한 신학적 성찰이 없다면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심리학자, 사회학자, 사회 사업가의 아류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기독교 지도자는 죽음의 세력에서 인류를 벗어나게 하시고 영생의 길을 열어 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런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의 역사에서 일하시는지,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개인적·공동체적·국가적·세계적 사건들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십자가를 통해 부활로 인도될 수 있는지 순간순간 분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의 과제는 자신들이 처한 시대의 고통과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조그만 기여를 해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신의 백성들을 노예에서 광야를 거쳐 자유의 새 땅으로 인도해 가시는 그 방법들을 확인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성찰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일상의 고통과 기쁨의 현실들을 깊이 생각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의식을 하나님의 부드러운 인도하심을 아는 데까지 끌어올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종종 숨겨져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찾아 발견해야 하기 때문에 신학적 성찰은 힘든 훈련입니다. 세상의 시끄럽고 떠들썩한 소리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드럽고 온화하며 사랑스러운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지도자는 사람들이 이 음성을 듣고 위로와 평안을 얻을 수 있게끔 돕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미래의 크리스천 리더십은 신학적 리더십이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학교에서 아주 많은 일들이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신학교는 사람들이 시대의 징후들을 바르게 분별하도록 훈련하는 일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지적인 훈련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과 생각을 포함하는 전인적인 깊은 '영적 체계화'를 위한 훈련이어야 합니다. 신학교들까지도 많이 세속화되어 있어 힘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을 비워 종의 형태를 취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입는다는 것은 대다수 신학교들의 주요 관심사가 아닙니다. 우리 시대의 경쟁적이고 야망으로 가득한 세계의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마음과는 적대적입니다. 그러나 이런 영적인 체계화를 추구하고 실현한다면 다가오는 세기의 교회에는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도전: "다른 사람이 너를 데려갈 것이다"훈련: 신학적 성찰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전하는 데만 관심을 가지셨던 그분이 유일하게 하셨던 질문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과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지식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는 어느 곳을 가든지 치유, 화해, 새로운 삶과 새로운 희망을 심어 주는 일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현실에 적절하고자 하며,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은 마침내 사라져 버릴 것이며, 오직 우리의 유일한 소원은 우리의 온 존재를 다해 우리의 형제 자매들인 온 인류에게 "당신은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의 깊은 내면을 만드셨으며, 어머니의 태에서 당신을 조성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도 서로 사랑합시다."라고 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예수님께 닥쳤던 첫 번째 시험은 현실에 충실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돌을 빵으로 바꾸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을 빵으로 변화시키는 지극히 현실지향적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그는 '말씀 선포'라는 자신의 사역을 고수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훈련: 묵상 기도예수님이 받았던 세 번째 시험은 힘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내가 이 세상 모든 나라의 영광을 네게 주겠다."라고 마귀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광야에서 십자가까지 이 유혹을 가장 고통스런 방법으로 받는 삶을 사셨습니다. 교회 역사 중 가장 고통스러운 역사는 때때로 사랑 대신에 힘을, 십자가 대신에 지배력을, 인도받기보다는 인도하려는 유혹을 받아 온 사람들의 역사입니다.미래의 기독교 지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훈련은 바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계속 물으시는 그분의 임재 안에 거하는 훈련으로 그것은 묵상 기도의 훈련이 될 것입니다. 묵상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긴급한 문제들만 좇아 다니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이나 자신의 마음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한 묵상 기도는 우리 주변의 모든 일들과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 반대되는 것을 말한다고 해도 벌써 자유로우며, 우리는 이미 거할 곳을 찾았으며, 우리는 벌써 하나님께 속하고 있다는 깨달음을 심화시켜 줍니다.
미래의 성직자와 목회자들은 도덕적인 사람이 된다거나 훈련이 잘 되었다거나 단순히 동성애, 산아 제한, 낙태 그리고 안락사와 같은 그 시대의 논쟁이 되고 있는 이슈들에 대하여 창조적인 대응책을 제시할 능력이 있다거나 동료들을 도우려는 간절한 열망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매우 가치 있고 귀중한 것들임에는 틀림없지만 기독교 리더십의 핵심은 아닙니다. 핵심된 질문은 "미래의 지도자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즉 그들이 하나님의 존전에 거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육화된 하나님의 말씀을 만지고, 하나님의 그 끝없는 인자하심을 맛보고자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신학(theology)'이라는 용어의 원래 의미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의 연합(union with God in prayer)'입니다. 오늘날의 신학은 다른 많은 학문들과 병존하는 하나의 학문 영역이 되었으며, 신학자가 때로는 기도하기 더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래의 크리스천 리더십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참으로 잘 아는 마음으로부터 모든 말씀이 선포되고, 모든 충고가 행해지고, 모든 전략들이 개발될 수 있도록 신학의 신비주의적인 면을 재조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의 지도력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속적이고 친밀한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만 하며, 거기에서 바로 그들의 말과 충고와 지침들의 원천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지속적인 묵상 기도를 통하여 사랑의 목소리를 거듭해서 듣는 훈련을 해야 하며, 그들에게 어떤 이슈가 주어지든지 대처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도 그 사랑 안에서 찾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 직관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논쟁적인 이슈들을 다루는 것은 분열을 조장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미처 우리가 깨닫기도 전에 우리의 자의식은 주어진 주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생명의 원천에 우리의 인격적 친밀함이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다면 상대적이지 않으면서도 유연할 수 있으며, 독단적이지 않으면서도 확신에 차 있을 수 있고, 불쾌하지 않게 대처할 수 있으며, 너무 무르지 않으면서도 온화하게 용서할 수 있고, 교활함 없이 진정한 증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래의 진정으로 열매 맺는 크리스천 리더십을 위해서는 도덕으로부터 영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입니다.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신 후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의 사랑을 확신하신 후에 예수님은 그에게 목회의 사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막 6:7). 우리는 공동체 단위로 함께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목회란 공동체적 경험일 뿐만 아니라 상호관계의 경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양 사역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우리는 치료하는 자도 아니요, 화해자도 아니요, 생명을 주는 자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돌보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요, 깨어지고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제한적이고 매우 조건적인 사랑이 하나님의 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여는 한 통로가 되도록 우리가 택함을 받았다는 데 바로 목회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목회는 반드시 상호보완적이어야 합니다. 믿음의 공동체의 지체들이 진정으로 자신들의 목자를 알지 못하거나 사랑하지 않는다면 목양 자체가 재빠르게도 다른 사람들에게 교묘히 힘을 행사하는 한 방법이 되어 버리거나 권위주의와 독재적 특성을 보이게 됩니다.우리는 "미래의 지도자가 개인적 영웅주의에 빠지려는 유혹을 극복하기 위해 요구되는 훈련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를 위해 고백과 용서의 훈련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는 깊은 기도에 몰두한 신비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기꺼이 고백하고 그들이 목회하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영성을 외적으로만 체계화하려 하면 육신의 삶은 정욕적이 됩니다. 목회자들이 주로 머리로만 사역하고, 복음을 '선포할 가치가 있는 하나의 사상'으로 간주할 때 그의 육신은 고래고래 소리치며 사랑과 친밀감을 구하면서 재빨리 앙갚음을 합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육신의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육신 안에 산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몸 안에만 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전체의 몸 안에 사는 것이며, 그 안에서 성령의 임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죄의 고백과 용서는 형식적 영성화와 세상의 정욕을 피하고 전정한 성육신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훈련입니다. 죄의 고백을 통하여 어둠의 세력들이 육적인 고립에서 벗어나 빛 가운데로 들어와 공동체에게 드러납니다. 죄의 고백을 통하여 어둠의 세력들이 무장해제되어 축출되면서 육체와 영혼의 새로운 통합이 가능해집니다.
이 모든 말은 목회자들이 반드시 자신의 죄와 과오를 설교단이나 매일의 목회 현장에서 숨김없이 털어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건강치 못한 경솔한 일일뿐더러 섬기는 지도자의 모습도 결코 아닐 것입니다. 이 모든 말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목회자들도 그 공동체가 책임져야 할 공동체의 온전한 지체로 부름받았으며, 공동체의 사랑과 지원을 필요로 하고, 상처 입은 자아를 포함한 그들의 존재 전체로 사역하도록 부름받았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고통이 많은 사람들과 관련된 사역을 하는 목회자들에게는 자신들만을 위한 참으로 안정된 공간이 필요하다고 확신합니다. 그들에게는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깊은 고통과 투쟁들을 함께 나눌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 속으로 그들을 인도해 줄 그런 사람들과 함께 말입니다. 다행히도 개인적으로 나는 라르쉬에서 그런 공간을 가질 수가 있었는데 함께 한 사람들은 나의 숨겨진 고통들에 관심을 가져 주고, 점잖은 충고와 사랑 어린 성원으로 나의 소명을 지켜 나가도록 해 주었습니다. 모든 성직자들이 자신을 위해 그런 안전한 곳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과제: "내 양을 먹이라."훈련: 고백과 용서3장 인도하는 자리에서 인도받는 자리로
유혹: 힘이 최고다예수님이 받았던 두 번째 유혹은 정확하게 뭔가 굉장한, 그에게 열렬한 환호를 안겨다 줄 그런 일을 해 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그러면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붙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해 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분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해 보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1장 현실 지향에서 기도로
유혹: 현실적이 되라2장 유명세에서 목회로
유혹: 멋있게 보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