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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루케이도 지음 |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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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루케이도 지음/마영례 옮김
두란노/2002년 2월/115쪽/5,000원
터가 무너지면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시편 11:3-4)
이것이 곧 우리의 질문이 아닌가? 기초가 밑바닥부터 흔들리는 이 마당에 의인인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뚝 서 있는 고층빌딩 속으로 비행기가 관통할 때, 우리 요새가 화염에 휩싸일 때, 도시가 뒤흔들리고 사람들이 곤두박질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최근에 목격한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십자가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것이었다. 무고한 사람이 살육을 당했다. 의인이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창에 찔렸다. 예수님을 따르는 여인들은 흐느끼며 울었고 악의 무리들은 춤을 추었다. 사도들은 “터가 무너지면 의인인들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하고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의구심을 풀어 주셨다.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는 사건을 통해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며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을 그들에게 다시 일깨워 주셨다. 그리고 오늘 우리 역시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 성전에 계시며, 그분의 보좌는 여전히 하늘에 있고 그분은 여전히 다스리신다. 여전히 죄수들 중에서 대가들을, 포로들 중에서 지도자들을, ‘죽음의 금요일’에서 ‘부활의 일요일’을 만들어 내신다. 그때 하셨던 일을 지금도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도록 간청하는 일이 우리 몫으로 주어져 있다.
1.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 2001년 9월 11일의 대참사를 허락하실 수 있을까? 요즘 이를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정말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걸까? 테러리스트들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도록 허용하시는데도 우리는 과연 그분을 믿고 우주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겨 놓을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다른 차원에 거하신다는 점이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우리는 ‘몸을 보호해야지.‘하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구원해야지.‘하고 생각하신다. 우리는 봉급이 오르기를 기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가 살아나기를 꿈꾸신다. 우리는 평화를 구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고통을 사용하신다. 우리는 ’죽기 전에 살 길을 찾아야지.‘하며 마음을 다잡지만 하나님께서는 “목숨을 버리면 살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우리는 썩을 것들을 사랑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것들을 사랑하신다. 우리는 성공을 기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솔직한 자백을 기뻐하신다. 우리는 승리의 미소를 짓는 운동선수를 가리키며 “저 사람처럼 되라.”고 아이들에게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입술에 피를 흘리며 옆구리에 창 자국 난 채 십자가에 매달린 목수를 가리키시며 “그리스도처럼 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같지 않다. 우리의 길은 그분의 길과 같지 않다. 그분은 우리와 생각하는 기준이 다르다. 그분은 다른 영역에 거하신다. 그분은 다른 차원에서 사신다. 우리를 묶는 것에 그분은 묶이지 않으신다. 그분의 계획과 목적을 우리가 볼 수는 없을지라도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보좌에 계시며, 온 우주와 우리의 삶을 분명하게 다스리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미래를 맡긴다. 그분께 우리의 삶 자체를 맡긴다.
2.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
맏아들 되신 이가 물으신다. “내 사랑이 어떤 것인지 의아해하고 있느냐? 거친 언덕 위 짜개진 십자가에서 그 대답을 찾아보아라. 그 위에 달려 있는 사람이 바로 나, 너의 창조주, 너의 하나님이다. 못 박힌 채 피를 흘리고 있으며 사람들의 침에 뒤범벅이 된 채 죄를 뒤집어 쓰고 있는 그것은 내가 경험한 너의 죄다. 내가 죽은 너의 죽음이다. 내가 살아난 너의 부활이다. 그만큼 내가 널 사랑한다. 너와 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이 있겠는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 38-39)
3. 하늘 아버지께로 열린 눈길
그 어떤 사람 혹은 그 어떤 것을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몇 배로 낫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생각하면서 기도를 시작하고 마치기 원하신다. 저 위에 초점을 맞추면 맞출수록 우리는 이 아래에서 더 많은 영감을 얻는다. 저 위에 계신 분께 최대한 시선을 고정하고 확대하자. 그분을 향한 우리의 인식을 확대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돌리며 경배할 때 일어난다. 그분에게 우리의 온전한 초점을 맞출 때 일어나는 일이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시고 그를 그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 1:20-22)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려고 한 것을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그런 권세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영광을 본 적도 없었다. 온 우주가 그분의 나라인 것과도 같았다. 그들에게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 6:13)라는 한 구절을 설명해 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이미 그 의미를 알았다. 그분의 권세를 선포하는 일은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우리에게도 그렇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의심 없이 “우주의 통치자가 우리 마음을 통치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4. 진정한 승리의 길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그런 괴한들이 그렇게 엄청난 파괴와 손실을 불러오도록 허락하실 수 있단 말인가? 2001년 9월 11일, 그날 뉴욕의 비행기 테러사건에 희생된 사람들을 왜 보호하지 않으셨을까? 그때의 파편들은 아직도 연기를 뿜어내고 있으며, 여전히 고통을 느끼는 우리에게서 이 질문은 좀처럼 떠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폐허 속에서 좋은 일들이 생겨나고 있음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영웅적인 행동들, 이타적인 사랑, 하나 되는 일체감, 어찌된 영문인지 악이 벌어진 상황 속에서 선이 승리를 거두며 싸우고 있다.
징계는 고통이 아니라 긍휼로 끝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어떤 성도는 어깨를 톡톡 두드리기만 해도 깨어났던 반면 또 다른 사람들은 머리를 두들겨 맞아야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매를 드셔야 할 때마다 사탄이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일을 수행하시기 위해 사탄을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첫째, 신자들을 정결케 하신다. 둘째, 잠자는 이들을 깨우신다. 셋째, 교회를 가르치신다. 우리는 다음 사실을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 50:20)
5. 쓰디쓴 복수심에 불타는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예수님은 상처의 실제 여부를 문제삼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잘못이 가해졌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으신다. 문제는 고통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고통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다. 우리에게 빚진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원수를 갚으려 한다면 결코 쉴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쉴 수 있겠는가? 원수가 절대로 빚을 다 청산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정의가 얼마만큼 이루어지면 충분하겠는가? 평안을 누리고 싶은가? 그렇다면 괴롭히는 일을 멈추라.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맛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함을 베풀라.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비로소 보복의 악순환은 끝나는 것이다.
6. 침묵 속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말을 하는 것이 어떤 한 순간을 침범하는 행위일 때가 있다. 침묵이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순간일 때가 그렇다. 그때는 경외감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그것이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중 가장 큰 재난과 절망감에 휩싸였던 사람 욥이 배운 교훈이었다. 욥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다름 아닌 그의 혀에 있었다. 욥은 말을 너무 많이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까지 욥은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내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0:4)
침묵만이 적절한 반응이었다. 토마스 아 캠피스에게도 자신의 입을 가려야 했던 때가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글을 장황하게 써 내려갔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로 그를 대면해 말씀하셨다. 그 순간부터 자신의 말들은 마치 지푸라기처럼 보였다. 그는 펜을 내려놓고 다시는 한 줄도 더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바로 이런 순간에 '경외감'이란 단어가 사용되는 것이다.
나는 뱃사람은 아니지만 폭풍우 속에서 육지를 찾는 비밀은 안다. 육지를 찾으려면 다른 배를 바라봐서는 안 된다. 절대로 파도에 눈길을 고정시켜서도 안 된다. 바람에 영향받지 않는 해안에 서 있는 등대 불빛에 시선을 맞추고 그것을 향해 전진해야 한다. 그 불빛은 폭풍우에 영향받지 않는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7. 폭풍우 속에서, 우리는 기도한다
2001년 9월 11일, 우리 모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재난을 몰고 온 극악무도한 잔인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 일로 드러난 인간 정신의 위대함 때문에. 수혈하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사상자와 그 가족들을 돕기 위해 모인 수억 달러에 달하는 기부금, 쉴 틈 없이 수고하는 경찰, 소방 공무원 그리고 다른 여러 구조 대원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전세계적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힘써 온 가장 본원적인 수고가 있다. 그것은 바로 기도로 이 세상을 방어하고 수호하는 일이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믿음의 횃불을 계속 타오르게 한다. 어둠 속에서도 믿음의 횃불은 타오른다. 우리는 그들 대부분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요한은 이렇게 썼다. "이에 그 누이들(마리아와 마르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요 11:3) 누군가가 다급한 마음으로 나사로를 대신해 예수님께 갔다. 그리고 그가 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반응을 보이셨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 편에 서서 그 사람의 불완전한 사랑을 기초로 말하지 않았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는 구세주의 완전한 사랑을 근거로 말했다. 구세주께서는 기도를 들으신다.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늘을 잠잠케 하신다. 기도를 들으신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구절을 기억하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시더라."(요 11:4)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람들이다. 우리의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하나님을 움직이게 한다. 기도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해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 땅에서 기도할 때 하늘에서 행동이 개시된다. 하나님의 능력이 힘을 발한다. 우리가 말할 때 예수님께서 들으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들으실 때 세상은 달라진다. 그건 누군가 기도했기 때문이다.
8. 하나님 편에 서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래야만 한다. 우리가 이별을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만큼이나 그것을 피하려 한다 해도 죽음이 우리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결국 우리 각자는 붙잡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놓고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의 손으로 넘겨 주어야 한다. 폭동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당신에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함께 꿈도 같이 묻어 버려야 했을 당신에게, 시신을 묻어 주기 위해 구덩이를 파놓은 자리 옆에 서 있거나 서 있게 될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확신의 말씀을 해 주신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3-14)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망 없는 슬픔을 희망찬 슬픔으로 바꾸신다. 어떻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리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심으로.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눈물 흘릴 수는 있지만 절망에 빠질 필요는 없다. 그들은 이곳에서 고통스러워했다. 그곳에는 고통이 없다. 이곳에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어려움이 없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데려가셨는지 의아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순간 그들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