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진 관계 다시 잇기
레리 크랩 지음 | 요단
끊어진 관계 다시 잇기
레리 크랩 지음/이주엽 옮김
요단/2002년 1월/366쪽/10,000원
프롤로그 - 나에게 일어난 사고의 전환
이 글은 오랫동안 내 마음 한구석에 비록 흐릿하게나마 맴돌던 생각으로 극히 최근에야 그 중심에 가 닿을 수 있었고 흥미롭고 분명한 초점을 얻을 수 있었던 생각이다. 근 25년을 심리학자로서 사람들의 문제와 맞닥뜨려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씨름한 끝에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생각이란 게 나로 하여금 익숙한 영역에서 떠나 전혀 미지의 넓은 땅으로 나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생각이란 바로 이렇다. 두 사람이 서로 결속되면 그래서 두 존재가 성행위에서 두 육체처럼 서로 교차하면 한 사람에게서 무엇인가가 나와 다른 사람에게 흘러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에는 영혼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고 건강을 회복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 힘을 받는 사람은 치유받는 기쁨을 체험한다. 또한 주는 사람은 자신이 치유에 사용된다는 게 더 큰 기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모든 악보다 더 강력한 어떤 선이 내면에 들어 있다. 그 선은 언젠가 솟아나길 기다리며 거기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영혼의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에너지를 넣어 주셨는데 이 에너지는 우리가 서로 관계 맺는 속에서 흘러나오기만 하면 기적적인 일을 행할 수 있는 힘이다.
예수를 믿는 구원의 신앙이란 생명을 선물로 가져다 주는 신앙이다. 이 생명의 선물이란 용서와 밝은 미래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내가 지금 현재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분이 행한 모든 일로 풀려 나왔으며, 그분이 사람들과 맺은 관계 속에서 확연히 드러났던 에너지가 내 속에도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복음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에너지를 갖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의 인생에 뛰어들 때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행하실 일을 생각하며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 큰아들 켑 이야기
전에는 수도 없이 분노로, 또 교묘한 방식으로, 혹은 자기 정당화의 수단으로 회개를 아들한테 요구하던 아버지인 내가 이번에는 부드럽게 아들을 회개로 초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들은 몇 년 동안 자신을 공허하게 만들던 쾌락에서 발을 돌려 더 나은 것, 그저 신경을 멍하게 해서 영혼의 고통을 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정 영혼의 중심에 가 닿게 하는 것을 향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원하고 받아들이고 진정으로 좋아해 주는 기쁨, 그리고 자신도 다른 이에게 기쁨을 주고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라고 믿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기쁨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이 내 아들 켑의 인생에 있어 전환점이었다(『가슴이 따뜻한 이야기』에서 ‘큰아들 켑’ 이야기 참조).
2. 치유 공동체의 세 가지 요소
그리스도의 에너지를 담을 때 관계는 치유된다. 우선 타인을 향해 그를 기뻐하시는 그리스도를 맛보게 하는 기본 요소 없이는 제 아무리 대단한 기법과 현명한 조언, 통찰력 있는 해석, 심지어 따뜻한 위로를 해도 도움이 못된다. 사랑이 없다면 현재의 모습을 받아들이며 그 어느 날 이룰 모습을 기대하는 초자연적 기쁨이 없다면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함량 미달이다.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그들을 기뻐한다는 사실을 알게 함으로써 우리는 타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 속에 초자연적인 고결함이 있으며 그들의 분노 이면에 선한 본성이 있음을 긍정적으로 드러내고 사랑을 위해 힘든 결심도 마다 않는 열정이 그들 안에 있음을 발견해 줌으로써 우리는 타인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또한 그들 안의 어둠과 죄, 고통을 드러내되 그들로 하여금 주님의 선하심, 그들을 회개로 이끄는 선하심을 더욱 확실히 깨닫게 해 줌으로써 우리는 타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관계를 힘있게 치유하는 이 세 가지 요소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져 있지만 막상 거의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활용되기만 한다면 세 가지 중 첫 번째 요소만이라도 발휘된다면 놀랄만큼 좋은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3. 재결속을 통한 회복
심리장애에 기인한 증상이라고 알려진 문제 중 다수가 사실은 무엇과도 결속되지 못한 영혼의 문제라고 가정해 보자. 죽어라 마른 몸매에 집착하는 딸아이의 증상이나 남편의 일 중독증, 포르노그라피에 빠진 친구, 누구와도 친밀하게 지내기 어려운 나의 문제가 다 텅 빈 영혼, 생명을 갈구하는 영혼 때문이라고 해 보자. 그렇다면 이때 필요한 것은 전문치료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과 결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한 사람에게 나와서 다른 한 사람에게 부어질 정도로 풍성한 결속을 맺는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인지 우리는 잘 모른다.
헨리 나우웬은 극도로 번민에 휩싸였던 시절에 자기가 한 일 한 가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나이든 신부를 찾아갔던 일인데 나우웬은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그때 일을 언급한다.
내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 나는 극도로 낙망하고 번뇌하였다. 그때 그가 거기 있었다. 수없이 그는 내 머리를 당겨 자기 가슴에 품고 말없이 그러나 성령에 가득 찬 침묵으로 기도하였다. 그러면서 내 귀신들을 몰아내 주었고 그 품에서 일어날 때마다 나는 새로운 생기를 느꼈다.
나우웬의 이야기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던져 주었다. 우선 결속을 몹시 원한다고 해서 그것이 연약함이나 다른 속셈이 있다는 증거일까? 결속을 원하는 마음이 심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하더라도 그 마음을 존중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억눌러 버리고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인가? 내가 그토록 결속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가?
그리고 힘있는 사람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다른 사람과 깊이 결속되어 자기 안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힘을 가지고 생기를 전해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어떤 심리장애가 문제이든지 간에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누구나 다른 사람의 인생을 휘저을 수 있으리만치 힘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걸까? 라는 문제였다. 4. 결속을 향한 갈망
한 영혼의 가장 참된 부분이 다른 영혼의 구석진 텅 빈 곳에 가 닿을 때 즉 결속이라는 깊은 만남이 일어날 때 생명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는 주는 사람도 이전보다 더욱 충만해질 뿐만 아니라 받는 사람도 덜 두려워하게 되고, 나아가서 좀더 깊은 서로의 결속을 갈망하게 된다.
홀로 외롭게 떨어진 한 영혼을 공동체의 혈관에 다시 잇는 일에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능력은 오로지 소수만이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 안에 부어넣으신 감춰진 생명을 볼 줄 안다. 그리고 그들 자신도 하나님께 같은 것을 받고 있음을 분명히 자각하면서 그들 안의 가장 깊고 가장 참되며 가장 고귀한 바로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깃든 그리스도의 생명이 풀려 나올 뿐 아니라 그것이 양육되었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존재가 되리라는 마음의 비전을 그린다.
치유하는 공동체는 사람들에게 바른 행동을 하게 만드는 일, 혹은 문제를 일으키는 심리적 요인들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이를 고치는 일에 기대는 것이 아니다. 치유 공동체란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고 완전한 공동체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약속이 있으며, 자유가 우리 안의 가장 참되고 깊은 욕구를 풀어 낸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법이 우리 영혼에 새겨져 있기 때문임을 믿는, 즉 인간에게는 거룩함의 욕구가 있음을 믿는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치유의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선을 풀려 나오게 하는 일에 초점을 맞출 때인 것이다.
용서받은 사람의 중심은 이제 더 이상 죄가 아니다. 심리적으로 복잡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 사람의 중심에는 결속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서로 이어져 있는 공동체의 고유한 한 주체로 살면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 열매를 누리든지 아니면 두려움과 요구로 가득 찬 자기만의 섬에 갇혀서 공동체와는 단절된 채 그 섬에 끌어들인 것만 갖고서 살아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따라서 공동체의 사명은 사람들을 섬에서 끌어 내어 결속이 가능하고 또 실제로 이를 주고받는 뭍으로 데려오는 일이다. 이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영원한 공동체, 즉 우리 인간도 결속을 누릴 수 있도록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5. 결속: 생명의 중심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구가 자리한다. 나의 존재를 기뻐해 주는 누군가와 내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을 갖고 있되 그것을 나에게 주기를 즐거워하는 누군가와 자신이 받은 것은 다 남과 나누기 위한 것임을 알고 남을 존중하면서 이를 나누고 싶어하는 누군가, 그리고 그렇게 나누는 이가 있어 우리 또한 남에게 줄 것이 있음을 깨닫게 해 주는 누군가와 말이다. 바로 이 이어지고자 하는 욕구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존엄성과 천명을 규정해 준다.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부어지게 된 그 생명의 일부라도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나눠준다면 결속은 발생한다. 즉 다시 결속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전까지 고립되었던 한 영혼이 다른 이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전에는 한번도 풍부하게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이미 거기 생명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누군가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면서도 여전히 우리 안에서 기쁨을 찾으며, 우리가 책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고 나아가 남에게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믿어줄 때 우리는 그가 우리를 근본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존재로 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때 용기와 희망이 나타나며 마침내 생명이 우리 안에서 가동되면서 우리는 더 폭넓은 결속을 받아들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 결속을 제공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의심과 자기혐오에 빠져 있을 때, 내가 정말 좌절하고 낙담했을 때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고뇌와 희망을 다 갖고 있되 턱없이 쉽게 “다 괜찮아질 거야.”라든지 “조금만 참아, 기분이 나아질 테니까.”하는 따위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다만 내 안에 정말 대단한 것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갖는 희망, 내 안에 생명이 있음을 믿는 믿음으로 차서 와달라. 그래서 그 사람 눈빛에서 나는 지금 겪는 문제 이상의 존재이며, 그 선이 솟구쳐 나올 수 있다는 확신을 읽을 수 있었으면 한다.
그 선이 너무나 많은 악에 묻혀 보이지 않을 때 이를 아파하면서도 하나님의 은총만 입으면 언제라도 풀려 나올 수 있는 선이 내 안에 있음을 믿어 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조급하게 굴지 말라. 내 가슴에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넣어 주려면 먼저 신뢰의 가교를 놓아야 한다. 그래야 그 결속을 통해 연약하고 목마른 심령에 생명을 전해 주는 일이 일어난다.
6. 결속과 전망
결속이 진정 핵심인가? 만약 그렇다면 결속의 무엇이 그토록 핵심적인 힘을 갖는가? 그렇다. 결속은 모든 것의 핵심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 전망을 갖는다는 것이 핵심적 힘이다. 이렇게 간단히 답을 내리게 된 근거, 그 쉽지 않은 주제는 바로 삼위일체이다. 그렇다면 결속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여기서 이 질문에 대해 세 가지 생각을 갖고 대답해 보자.
첫째,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상대방이 누구며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전망이 관계를 위한 모든 노력의 배후에 동기로서 깔려 있다면 이때 힘있는 결속이 발생할 수 있다. 둘째, 결속이 발생하면 지혜가 생긴다. 어떤 성경적 원리가 적용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지혜, 정서적 상처와 이기적 동기들을 분별해서 보다 큰 신뢰와 깊은 회개로 이끌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 셋째, 힘있는 결속이란 전망, 즉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 품고 계신 계획이 무엇이냐를 이해하는 것과 믿음, 즉 그 하나님의 전망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을 그 요소로 한다. 한 사람에 대해 경건한 전망을 갖는 일이란 그 사람이 그 전망에서 멀어질 때 불가피하게 고문과도 같은 슬픔을 겪는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슬픔이 희망을 완전히 포기하거나 상대방을 경멸하고 업신여기는 지경에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그 사람이 전망에 부합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될 때 흥분으로 들뜰 수밖에 없다는 점도 여기 포함된다.
복음 때문에 상대방을 믿어 준다는 말, 이것을 복잡하지 않되 삼위일체의 신비에서 솟구치는 말로 이해할 때 턱없는 낭만적 낙관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된다. 그리스도인 생활의 핵심이 무엇이냐를 따질 때 가장 중심적인 진리이면서도 정작 소홀히 취급되는 사실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하나님, 즉 완전하게 서로와 이어져 있는 영원한 삼위일체의 공동체 모상을 따라 지음받았다는 사실이다. 삼위일체론적 이해는 육체의 생명이 피가 없으면 유지될 수 없듯이 영혼이 살기 위해서는 결속이 필수불가결임을 말해 준다. 인간은 하나님과 이어질 때 생명을 얻는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이어질 때 얻은 바 생명을 자유로이 주고받는 생명의 체험을 하게 된다. 또한 다른 이들과의 참된 결속은 자신보다는 다른 이들의 기쁨과 유익을 위한 동기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까닭은 바로 당신과 이어지고 또한 서로 이어져 사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시려는 것이다. 결속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곧 생명이다. 반면 결속을 경험할 수 없는 상태는 죽음이다. 결속이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욕구라고 할 때 결속의 결여는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핵심의 죽음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의 삶 안에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바를 감지하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전망을 갖는 일이다. 이 전망과 비전이 없이는 그 사람과의 참된 결속은 가능하지 않다.
7. 가장 높은 곳에서 바라본 비전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이 누구며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 비전을 갖고 관계를 맺는다면, 그래서 불안과 두려움, 자만심 밑바닥에 작은 예수가 서서히 형성됨을 볼 수 있다면,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그 작은 예수의 씨앗이 자라 성숙되기를 갈망한다면 그때야말로 우리 안의 무엇인가가 풀려 나와 다른 이들 안에 예수 닮은 더 많은 것을 이룰 힘이 되는 것이다. 이 힘이란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서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갖는 비전을 가교로 해서 그들 영혼에 전달되는 힘이다. 타인 안의 생명을 길러 주는 힘으로 가 닿는 생명력인 것이다. 이렇듯 비전이란 두 영혼 사이의 거리를 이어 주는 다리이자 우리의 내적 힘을 밖으로 품어 내는 방아쇠이다.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걱정하기 전에 또 자신들 감정의 뿌리를 파헤치기 전에 부모는 열 살 짜리 비만아 딸에 대한 자신들의 비전이 무엇인지부터 점검해야 한다. 희망을 갖기보다는 걱정을 더 많이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딸에 대한 비전이라는 게 고작 마른 몸매를 갖는다든지, 좀더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 정도는 아닌지, 그 어떤 일도 하나님의 영이 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키우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믿음의 큰 그림을 갖고 있는지 말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든지 거기 협력하겠다는 데 초점을 둔다면 부모는 딸의 고통에 마음 깊이 슬픔을 느끼면서도 신비롭게 평온함 가운데 머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부모의 이 같은 평온함이 딸에게는 큰 메시지로 들린다. “엄마 아빠가 평온해 보이는 이유가 뭘까? 내가 지금 뭘 놓치고 있는 걸까?” 그러니까 부모는 딸의 고통에 참여하되 그 고통이 자신들을 삼키지는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딸에게도 고통이 있는 줄은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 있는 생활을 하도록 권고하는 것이다. 방에 처박혀 있기보다는 나와서 가족과 생활을 함께 하고, 숙제도 안하고 텔레비전에만 몰두하거나 자기를 괴롭히는 학교 친구들에게 복수할 궁리만 하지는 않도록 말이다.
이렇게 딸에게 책임 있는 방식으로 지내도록 권하는 한편으로 부모에게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 확신이란 딸의 가장 깊은 속에는 본인도 책임 있는 삶을 원하는 소원이 들어 있다는 확신이다. 그리고 부모 또한 자유를 잃지 않으면서 딸을 지혜롭게 사랑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는데 이 도움이란 부모 주변의 친구들이 이들의 혼란과 분노, 두려움 밑바닥에는 분투하는 딸을 향해 풀려 날 수 있는 더 깊은 생명의 힘이 있음을 믿어줌으로써 생기는 도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