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포스터가 묵상한 신앙 고전 52선
리처드 포스터 지음 | 두란노
리처드 포스터가 묵상한 신앙 고전 52선
리처드 포스터 외 편집/송준인 옮김
두란노/1998년 12월/583쪽/14,000원
1부 영적인 생활을 위한 준비
1. 내가 믿는 기독교 - 시 에스 루이스
얼마나 희생해야 할까?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모든 사람이 갖는 일반적인 생각은 얼마나 많은 것을 드려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다양한 욕구와 이해관계를 가진 보통의 자아를 신앙의 출발점으로 삼아 ‘도덕’, ‘점잖은 행동’, ‘사회의 이익’ 같은 것을 위해 자신의 자아를 희생시킨다. 왜냐하면 대개 그러한 것들은 자아의 욕구에 제동을 걸기 때문이다. 보통의 자아가 하고 싶어했던 일이 때로는 소위 ‘잘못된’ 것으로 드러날 경우에는 마땅히 그것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다행히 ‘옳은’ 것으로 판명될 경우에는 마땅히 그것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에는 모든 요구 조건이 충족되어도 여전히 자아가 남아 있어서 나름대로의 삶을 영위하고, 또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기회와 시간을 갖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다. 사실상 우리는 세금을 정직하게 꼬박꼬박 내는 사람과 매우 흡사하다. 그 사람은 세금을 확실하게 잘 내기는 하지만 세금을 내고도 여전히 자기가 먹고 살 만큼의 돈이 남아 있기를 진정으로 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본래의 자아를 여전히 출발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갈등이 있는 것이다.
두 가지 결과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두 가지 결과가 예상된다. 그 결과는 선하게 살기를 포기하고 자아에 충실하거나 아니면 자아를 버리고 완전히 불행해지는 것, 이 둘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자아의 희생을 요구하는 모든 요구 조건들을 진정으로 충족시키려고 하다보면 틀림없이 자기에게는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것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양심에 따라 살면 살수록 양심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의 자아는 매순간마다 굶주리고 괴로워하며 염려하게 되므로 점점 더 화를 내게 된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는 선하게 살기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소위 ‘남을 위해 살면서도’ 늘 우리 자신을 순교자로 자처하고 남이 그것을 더 잘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불만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고 말 것이다. 일단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고 나면 처음부터 솔직히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해로운 존재가 될 것이다.
어렵고도 쉬운 길
그리스도인의 길은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에게 모든 것을 바쳐라. 나는 너의 시간과 물질과 일을 원하지 않고 바로 너를 원한다. 나는 너의 자아를 괴롭히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없애려고 왔다. 미봉책은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나는 여기저기 가지만을 잘라내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 전체를 베어 넘어뜨리기를 원한다. 자아 전체를 내어 버려라. 악하다고 생각되는 욕망만이 아니라 선하다고 생각되는 요구까지도 모두 내어 버려라. 마음의 소욕을 모두 내어버리면 그 대신 내가 새로운 자아를 주겠다. 사실, 나는 너에게 나 자신을 줄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이 너의 것이 되도록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우리 모두가 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 어렵기도 하고 더 쉽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때로는 그리스도인의 길이 매우 어렵다고 하셨고, 또 때로는 매우 쉽다고도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포로 수용소에서 맞아 죽을 정도까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길이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옳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더 어렵게 일하지 말고 더 지혜롭게 일하라
교사들의 말을 들어 보면 게으른 학생일수록 결국에는 어렵게 공부를 한다고 한다. 이 말의 뜻은 다음과 같다. 두 명의 학생에게 똑같은 기하학 문제를 주었다고 하자. 수고하고 땀 흘릴 준비가 되어 있는 학생은 그 문제를 이해하려고 할 것이고, 게으른 학생은 지금 당장은 노력이 적게 들기 때문에 그것을 암기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6개월 후 시험을 치를 때 미리 땀을 흘린 학생은 금방 이해하고 자신 있게 푸는 문제를 게으른 학생은 오랫동안 고생해야 하는 것이다.
게으르면 결국 더 많은 고생을 해야 한다.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한 번 살펴보자. 전투를 하거나 등산을 할 때 종종 많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결단해야 할 순간에 두려워하거나 겁을 내어 결단하지 못한다면 시간이 지난 후에 오히려 자신이 더 큰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비겁한 일이 가장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 쉬울까?
이 물음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자아를 전부 주님께 바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의 소원이나 앞날에 대한 대책까지도 모두 그리스도께 내어 맡기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거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나름대로 하려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은 소위 ‘우리 자신’을 그대로 두면서 개인의 행복을 인생의 커다란 목적으로 삼는 것이고 그와 동시에 ‘선하게’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마음의 소욕을 좇아 돈이나 쾌락이나 야망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고자 하면서 한편으로는 정직하고 정숙하며 겸손하게 살아가기를 소원한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내용이다. 예수님께서는 엉겅퀴 나무가 무화과 나무를 낼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내가 잡초 씨만 뿌려진 밭이라면 밀을 생산할 수 없다. 그 잡초를 잘라 낸다 해도 다만 잡초의 길이가 짧아지는 것뿐이다. 여전히 잡초를 낼 수 있을 뿐이며 밀은 낼 수가 없다. 만일 밀을 생산하고 싶으면 밭의 표면만 바꾸어서는 안 된다. 그 밭을 갈아엎고 다시 씨를 뿌려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몸에 배게 하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정한 문제가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이 찾고 있지 않는 곳에서 생기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아침 눈을 뜨는 바로 그 순간부터 문제는 시작된다. 우리가 그날 그날 갖게 되는 모든 소원과 희망이 사나운 야수처럼 우리에게 덤벼든다. 그렇지만 하찮은 일로 야단법석을 떨고 소란을 피우는 것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바깥 바람을 벗어나 안으로 들어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처음에는 잠시 동안만 이렇게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점점 새로운 종류의 삶이 우리의 생활 영역 전반에 걸쳐 퍼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바로 우리 우편에 서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단지 표면에만 칠해지는 페인트와 속까지 스며드는 염색이나 녹의 차이와 같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막연하거나 이상적인 헛된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그분이 “온전하라.”고 했으면 그 말 그대로 온전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렵다. 사실 타협이란 불가능하다. 알이 변하여 새가 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 알이 새로 변하지 않고 날기를 배운다는 것은 정말로 더 어렵다. 우리는 지금 알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냥 무한정 보통의 알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알은 부화되거나 썩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앞서 말한 것은 기독교 전반에 관한 것이지만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고 혼란스러워지기가 매우 쉽다. 교회가 교육, 건축, 선교, 예배 등 많은 목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는 마치 국가가 군사?정치?경제적 목적 외에 많은 다른 목적들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보면 훨씬 더 단순하다. 국가는 단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만 인간의 일상적인 행복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리고 만일 모든 법률과 국회와 군대, 법정, 경찰, 경제 상태 따위가 국민의 일상적인 삶의 순간들을 증진시키고 연장시키며 보호해 주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들이 시간 낭비에 불과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그들을 작은 그리스도로 만드는 것 외에는 다른 존재 이유가 없다. 만일 모든 교회와 성직자와 선교와 설교가, 심지어 성경 그 자체까지도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들은 단지 시간낭비에 불과할 것이다. 바로 그러한 목적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이다. 때로는 온 우주가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닌가 의심이 생길 때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온 우주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락한다고 말한다.
하나님 계획에 동참하자
우리는 지구에서 수천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과연 무엇이 살고 있을지 모른다(만약 이 우주 공간에 다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가정했을 때의 말이다). 심지어 이 지구상에서조차 인간이 아닌 다른 사물에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만 하나님의 계획을 보아 왔다.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온 말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왕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께 드리고자 했던 그 멋진 선물 속에 우리가 어떻게 포함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그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우리까지도 포함이 되는 것이다. 이것만이 우리가 지음을 받은 유일한 목적이다. 성경에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자연 만물까지도 회복되기 시작할 것이라는 이상하고도 흥미호운 암시가 많이 나와 있다. 그 때가 되면 악몽은 물러가고 아침이 올 것이다.리처드 포스터의 묵상
하나님의 방법과 인간의 방법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바꾸어 놓는 일에서보다 더 날카롭게 대조되는 경우는 없다. 우리는 특정한 행동에 관심을 갖지만 하나님께서는 안에서 밖으로 일을 하신다. 우리는 시도할 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변화시키신다. 이 책을 편집하는 일에 조력자로 일하고 있는 짐 스미스는 시 에스 루이스가 쓴 많은 글을 읽고 상당한 도움을 얻었는데 특히 앞의 글을 읽고는 크게 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의 말을 빌면 다음과 같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 글을 다 읽기도 전에 나는 내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나의 ‘자아’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자아와 자아의 욕구는 절대 침해당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나의 자아에 부속된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글을 읽은 후 나는 매일 의식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주신 새로운 자아가 소생하도록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2. 어둔 밤 - 십자가의 요한
영혼의 정화
영적인 순례길을 가다 보면 어떤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초보적인 단계에서 한 차원 높여 좀더 성숙한 단계로 인도하신다. 바로 그 단계에서 그 사람은 신앙적인 훈련에 힘쓰게 되고, 그의 영적인 생활은 더욱 깊어지게 된다. 그러한 사람들은 소위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어두운 밤’이란 그 사람들이 경건 생활에서 경험했던 모든 기쁨을 다 잃어버리는 때를 말한다.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화시키시고 더 높은 차원으로 올리시기 위함이다.
한 영혼이 하나님에 의해 회심하게 되면 그 후 그 영혼은 성령에 의해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나게 된다. 마치 사랑하는 어머니처럼 하나님께서는 어린 영혼에게 영적인 젖을 먹이시고 보살펴 주시며 위로해 주신다. 이 단계에서 그 영혼들은 큰 기쁨을 맛보게 된다. 그들은 절박함과 인내심을 갖고 기도하기 시작하며, 온갖 신앙적인 활동에 몰두하게 된다. 그 활동들 가운데서 그들이 누리는 기쁨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더 높은 단계에 이르기를 명하실 때가 온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에게서 이전에 주셨던 위로를 앗아가 버리신다. 그것은 그 영혼에게 선을 가르치시고 악이 자라는 것을 막으시기 위함이다. 다음의 항목들은 일곱 가지 중대한 죄를 다룬다. 각각의 죄를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이 영적인 위로를 어떻게 오용하기 시작하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불완전한 죄에서 정화시키시기 위해서 왜 영적인 위로를 앗아가시는지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은밀한 교만
영적인 생활의 초보자들은 활동에 지나치게 열심을 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가장 큰 위험성은 신앙적인 활동에 만족하거나 열심히 활동하는 자신에게 도취되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에는 은밀한 ‘교만’이 자리잡기 쉽다. 그것이 바로 일곱 가지 중대한 죄 가운데 첫 번째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지나치게 영적이다. 언제나 ‘영적인 것들’만을 말하기 좋아한다. 그들은 자신의 성장에 만족한다. 따라서 가르침을 받기보다는 가르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스스로 교만해서 자기만큼 영적이지 못한 세리를 멸시했던 바리새인과 같다.
마귀는 그들의 열정에 종종 불을 붙여서 그들의 교만이 점점 더 커지도록 부추긴다. 마귀는 그들의 모든 행위와 선행이 결국 무가치하게 되고, 만일 저지하지 않으면 오히려 악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적인 열심은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받기 위해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이 얼마나 영적인 사람인가를 알아주기를 기대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기를 꺼린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이미지를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도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적인 평안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그들은 설령 하나님께서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고 해도 자신이 더 교만해지고 더 뻔뻔스러워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럴 때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교만을 겸손으로 대항한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신앙적인 활동들이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가,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가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지극히 미미하다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은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보화를 마음 속 깊은 곳에 은밀하게 간직하도록 권고하신다.
감정에 집착함
신앙의 초보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두 번째 중대한 죄인 ‘탐욕’을 갖기 시작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 나름대로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위로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점점 더 많은 영적 위로를 얻기 위해서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경건한 일들을 수행한다. 그들의 마음은 경건 생활에서 얻는 감정에 집착한다. 그들은 경건의 내용이 아니라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영혼들은 종종 특별한 종교적 대상이나 성스런 장소 따위에 집착하고 보이는 것들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바른길을 가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만 바라보고 외적인 것들이나 내적인 경험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혼의 어두운 밤에 들어가 이 모든 것들이 없어졌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영혼을 정화시키기 위해 모든 쾌락을 버린다. 왜냐하면 우리가 단단히 붙잡고 있는 것을 하나님을 향해 내어놓은 후에야 비로소 우리의 영혼이 자라기 때문이다.
세 가지 원인
세 번째 중대한 죄는 영적인 ‘사치’이다. 이 죄에서 다른 모든 죄가 비롯된다. 따라서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이제 영적인 사치가 어떻게 생기는지 살펴보자. 기도에 깊이가 있는 사람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유혹을 경험하고, 자기로서는 그것을 막을 힘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주로 이것은 세 가지 원인에서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