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발돋움
헨리 나우웬 지음 | 두란노
영적 발돋움
헨리 나우웬 지음/이상미 옮김
두란노/1998년 10월/196쪽/5,000원
머리말
종종 해가 바뀌어도 짜증날 정도로 매한가지였던 걱정과 근심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몇 가지 양극점들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그 양극점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그 중간에 불안하게 매달려 있습니다. 이 양극점들은 영적인 삶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배경을 제시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모두 그 양극점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양극점은 우리가 자신과 맺는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이 양극점은 ‘외로움(loneliness)'과 ’고독(solitude)' 사이의 양극입니다. 두 번째 양극은 우리가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의 기본을 이룹니다. 이것은 ‘적개심(hostility)'과 따뜻한 환대(hospitality)' 사이의 양극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가장 중요한 양극점은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의 바탕을 이룹니다. 이것은 ’환상(illusion)'과 ‘기도(prayer)' 사이의 양극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뼈아픈 외로움에 대해서 더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마음의 고독을 참으로 갈망하고 있다는 점도 더 알게 됩니다.
또한 우리와 같은 피조물인 인간에 대한 모진 적개심뿐 아니라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이고자 하는 우리의 바람도 함께 깨닫게 됩니다. 또 이 모든 것의 바탕에서 우리는 우리가 운명의 주인인 양 행동하게 만드는 끝없는 환상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아 가장 깊숙한 곳에 감추어져 있는 미덥지 않게 보이는 선물인 기도를 발견합니다. 그런 이유로 영적인 삶은 외로움과 고독이라는 양극 사이와 적개심과 따뜻한 환대의 양극, 환상과 기도라는 양극 사이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움직임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통해 우리는 영적인 삶에는 샛길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외로움이나 적개심이나 환상을 피해 가면 고독과 따뜻한 환대와 기도에는 결코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옛 생명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을 우리가 과연 온전히 실현할 수 있을지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외로움을 느끼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적개심을 품은 채, 죽을 때 환상을 고스란히 이고서 무덤 속으로 들어갈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좇으라고 하실 때는 우리의 깨어지고 죄로 얼룩진 환경을 넘어 힘껏 발돋움하여 우리의 삶이 우리를 위해 예비해둔 위대한 것들을 드러내 주는 삶을 살라고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1부 자아를 향한 발돋움(첫 번째 움직임: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1장 가슴을 후비는 외로움
우리를 위협하며, 우리가 그렇게도 대면하기 힘들어하는 것이 바로 이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외로움입니다. 인간의 홀로됨을 매우 가까이 들여다보게 되고 뼈 속까지 파고드는 외로움을 느낄까 봐 두려워서 우리는 무엇인가 스스로를 분주하게 만드는 일을 시작하거나 다 잘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게임을 계속 할 것입니다.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인간관계의 민감함을 매우 강조하고, 의사 소통의 능력을 계발하도록 장려하며, 여러 모양의 신체적, 지적, 정서적 교감을 실험해 보도록 권하는 시대입니다. 인간관계에서는 서로 숨기는 것이 전혀 없어야 하며, 모든 것을 다 털어 놓고, 표현하고, 전해야 한다는 그릇된 형태의 솔직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외로운 느낌과 슬픈 느낌이 드는 것이 서로 마음을 충분히 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서로간에 아무런 경계선을 두지 않음으로써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하게 되면 가깝기는 하지만 무미건조한 관계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내면의 성소를 위험스레 내비치지 않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바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창조적인 교제를 갖기 원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봉사이기도 합니다. 침묵 끝에 나오지 않은 말은 그 힘을 잃어버리듯이 마음을 닫을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 여는 것 또한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그런 보호 경계선에 대한 갈망은 칼릴 지브란의 글에서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또 즐거워하되
서로 홀로일 수 있게 하십시오.
마치 수금이 줄이 따로 떨어져 있으나
같은 음악으로 함께 울리듯이
함께 서 있되 너무 가까이 머물러 있지는 마십시오.
성전의 기둥은 따로 떨어져 있으며
떡갈나무와 사이프러스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절박한 외로움으로 우리의 의식 속에 그리 자주 비집고 들어오는 이 본질적인 외로움을 우리는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우리의 상처받은 가슴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길은 외로움으로부터 고독으로 전환하는 전환의 길입니다. 외로움으로부터 도망가고, 그것을 잊거나, 부인하려고 하는 대신에 우리는 그 외로움을 지켜서 그것을 생산성 있는 고독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영적인 삶을 살려면 먼저 외로움의 광야로 들어가서 조용하고 끈기 있는 노력을 통해 그 광야를 고독의 동산으로 바꾸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강한 믿음도 있어야 합니다. 외로움으로부터 고독으로 가는 이 움직임은 모든 영적인 삶의 시작입니다.
2장 열려 있는 고독
고독이라는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격리된 곳에서 혼자만 있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고독은 마음의 고독입니다. 마음의 고독이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에 좌우되지 않는 내적인 소양 혹은 태도입니다. 고독은 거대한 도시의 한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속에서, 활동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사는 가운데서도 가능하고, 또 유지될 수 있으며, 계발될 수 있는 인간의 자질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고독을 가지고 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과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일 수 있지만 외로움에 쫓겨서 살 때는 자신의 갈급한 필요에 즉각적으로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말이나 사건들만을 고르려고 합니다.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외로운 사람과 고독한 사람이라는 두 편으로 정확하게 갈라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두 양극 사이에서 쉼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우리의 위치는 시간이 지나고 날이 가고 해가 지날수록 달라집니다. 하지만 이런 내면적인 긴장의 영역에 대한 민감성을 계발시키는 양극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난감한 심정에 빠지지 않아도 되고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구분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러한 내면의 민감성을 계발하는 것이 바로 영적인 삶의 첫걸음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외로움이 깊은 고독으로 바뀜에 따라 우리는 내면의 필연적인 요구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 주는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는 귀중한 공간을 만들어 냅니다. 만일 우리의 질문과 문제와 관심사들이 고독 안에서 시험되고 성숙되지 않는다면 정말로 우리 스스로의 대답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가진 사상과 의견과 관점을 마치 자신들의 것인 양 주장하고 있지만 때때로 지적인 대화라는 것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권위 있는 말을 인용하는 능력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가장 직접적인 관심사들, 이를테면 삶과 죽음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문제들도 그 시대의 유행하는 관점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내면의 자아로부터 빠져 나오고, 질문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대답을 구하게 됩니다. 외로운 사람에게는 내면의 질문이 없습니다. 외로운 사람은 대답을 원하며 그것도 지금 당장 원합니다. 그러나 고독 속에서는 우리 내면의 자아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중심주의나 병적인 자기 성찰과는 다릅니다. 거기서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발돋움함으로써 그들을 만날 수 있게 되는데 그 때 우리는 관심과 애정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여 우리 자신을 주게 되는 진정한 교제가 가능하게 됩니다.
사랑의 신비라는 것은 사랑이 다른 이가 홀로 있는 것을 지켜 주고 존중한다는 것이며, 사랑이 그 사람에게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어 주어서 그가 자신의 외로움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고독으로 바꿀 수 있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독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또 개인으로서 각자의 존재를 조심스럽게 고려해 주고, 상대방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거리를 지켜 주고, 또 인간의 마음의 신성에 대해서 경외하는 자세로 이해하는 태도를 통해 서로를 강건하게 세워 줄 수 있습니다.
이런 고독 속에서 서로를 격려하여 깊숙한 내면적 존재의 침묵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 곳에서 인간들간의 친교가 지닌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연합으로 부르는 소리를 발견합니다. 이런 고독 속에서 우리는 친구들과 사랑하는 이들을 품으시고, 우리를 먼저 사랑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서로를 사랑할 자유를 주시는 그분의 임재를 점차적으로 의식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내 방에 찾아왔던 때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내 강의를 들었던 학생인데 학교에 들렀다가 내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번에는 문제가 있어서 온 것도 아니고 교수님께 질문할 것도 없습니다. 상담이나 조언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선생님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왔어요.”
우리는 서로 바닥에 마주 앉아서 지난해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직장과 우리가 같이 알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마음의 불안함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서서히 우리는 말을 드문드문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안절부절못하게 하는 침묵이 아니라 지난해에 같이 했던 크고 작은 많은 행사들보다 더 우리를 가깝게 만들어 주는 침묵이었습니다. 차 몇 대가 지나가는 소리와 누군가 쓰레기통을 비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지만 불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이에 그윽하게 차오른 침묵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생기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따금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두려움과 의심의 마지막 찌꺼기마저 밀어내는 웃음을 짓곤 했습니다. 침묵이 점점 짙어질수록 우리는 우리 둘을 감싸안는 한 존재에 대해서 점점 더 의식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여기 있으니까 좋습니다.” “그렇군, 이렇게 다시 함께 있으니 좋군.”
그런 다음 또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깊은 평안이 우리 사이의 빈 공간을 채웠을 때 그는 머뭇거리며 말했습니다. “선생님을 보고 있으니 마치 그리스도를 뵙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흠칫 놀라지도 않았고 또 아니라고 하고 싶지도 않았으며 다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자네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알아챈 것일세.” “맞습니다. 정말 그분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 다음에 그가 한 말은 수많은 세월 동안 내가 들어 본 말 중에서 가장 치유력이 있는 말이 되어 내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이제부터는 교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혹은 제가 어디를 가든지 우리 사이의 모든 땅은 거룩한 땅일 겁니다.” 그가 떠난 다음 나는 그 말 속에 공동체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두려움 없이 자신의 고독을 나누는 사람들에게는 사람들간의 모든 땅이 거룩한 땅이 되기 때문에 이런 내면의 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아주 멀리까지 가볍게 여행하게 해줍니다.
이렇게 우리의 외로움은 고독을 향해 성숙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며칠, 몇 주일, 혹은 몇 달이나 몇 년 동안 외로움에 파묻힌 나머지 마음의 고독이 자신의 가시권 내에 있다는 사실을 거의 믿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고독이 무엇인지 일단 느끼기만 하면 그것을 찾기를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이 고독을 맛보게 되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고 우리를 묶고 있었던 잘못된 끈에서 해방되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과 서로를 향해 묶여질 수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3장 창조적인 반응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바뀌는 움직임은 자기 안으로만 움츠러드는 움직임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쟁점이 되는 문제에 더 깊이 참여하는 쪽으로의 움직임입니다. 외로움에서 고독으로의 움직임이 진전되면 우리가 두려움을 가지고 대응하던 양태들은 서서히 사랑에서 우러난 반응으로 바뀌어 갈 수 있습니다. 참된 영적인 삶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하여 민감하게 의식하도록 만들어서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우리의 묵상의 일부로 삼게 하며, 우리가 자유롭고 담대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참으로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고독 가운데 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라는 것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사건들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비인격적으로 이어져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소망과 열망이 성취되는 어떤 인격적인 만남을 가리키는 인도의 손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른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울부짖는 도시, 불길이 솟아오르는 병원,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부모들과 아이들의 모습 가운데서도 소망을 바랄 수 있으며, 절망의 유혹을 떨쳐 버리고 씨가 말라 가는 것을 보면서도 풍성한 열매를 맺는 나무에 대해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정말 아무런 이름도 붙지 않은 일련의 사건들이라는 감옥을 빠져 나와 고독의 한가운데 서서 말씀하시는 역사 속의 하나님에게 귀기울일 수 있으며 변화를 요구하시는 늘 새로운 그분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인류 대부분이 가진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우리 마음의 고독에서 간단하게 밀려 나간다면 지극히 개인적인 종교적 감정이 되어 버린 ‘참회하는 마음’으로 하는 우리의 회개는 한낱 경건한 감정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이 세계에 대한 해답이 우리의 생각과 손 사이를 맴돌고 있을 때는 무기력하고 피상적인 것밖에 안 됩니다. 전쟁과 차별과 사회 불의에 대한 우리의 항거가 반발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할 때 우리의 분개는 자기 의(義)에서 나온 것에 불과합니다.
자기 의를 버리고 동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내면의 연대감입니다. 고독 안에서 나온 동정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역사성에 대해서 충분히 깨우치게 합니다. 동정심이 가득한 사람이라면 악과 죽음이 구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난 사실들에 대해서 그것이 자신의 삶의 계획을 성가시게 방해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자신을 비롯한 동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봅니다. 거기서 우리는 보호해야 할 독특한 소유물로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와 함께 나눌 선물인 우리의 엄청난 치유 능력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향하는 움직임은 자연스럽게 두 번째 움직임인 적개심에서 따뜻한 환대로 향하는 움직임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가 인생 길을 가는 동안 만나는 많은 사람들을 향해 창조적으로 발돋움하도록 힘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두 번째 움직임입니다.
2부 동료 인간을 향한 발돋움(두 번째 움직임: 적개심에서 따뜻한 환대로)
4장 낯선 이들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 줌
적개심에서 따뜻한 환대를 향해서 움직이기란 어렵고 힘듭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공포에 떨면서 자신을 방어하려 하고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 천지입니다. 그들은 안절부절못하면서 자신이 가진 것에 집착하고, 자기 주변의 세상을 의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으며, 언제나 대적들이 갑자기 나타나 자기에게 해를 끼치리라는 점을 예상하고 살아갑니다. 마음으로는 다른 이들을 도와주고 싶어할지 모르지만 두려움과 거부감의 벽을 쌓고는 사람들을 피하며, 우리가 가진 선한 의도를 일깨워 줄 수 있는 사람들과 장소를 본능적으로 피합니다. 원래는 사람들을 서로 가깝게 해주고 평안이 넘치는 공동체를 이루게 하기 위해 생겨난 많은 공간들도 정신적인 전투장으로 전락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