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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안에 하나님이 없다,

필립 얀시 지음 | 좋은씨앗
중재자제4부 연합: 나와 다른 하나님과 하나 됨



완전한 변화로제타 스톤통제 불능열정영적 기억 상실증제5부 성장: 천천히, 하나님을 따라 자라가기하나님의 아들은 성육신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완전하지 못한 '결함' 속으로 들어오셨다. '전지하심'은 아람어 음소 하나하나를 배워야 하는 제한된 두뇌로 바뀌었고, '편재하심'은 두 발로 걷고 때로는 나귀를 타야 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전능하심'은 나무를 켤 정도의 힘은 있었지만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나약한 상태로 변했다. 물론 복음서는 예수님의 비범한 능력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친밀해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우리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가?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위해 하늘나라를 포기하셨다. 그분은 인간이 되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 비가시적 세계와 가시적 세계 사이를 잇는 연결 고리를 다시 복구하셨다.



리차드 니버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로제타 스톤에 비유했다. 이집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어느 날 검은 돌을 발견했는데 그 돌에는 헬라어와 일상적인 이집트 문자, 그리고 그때까지 해독하지 못했던 상형 문자가 함께 새겨져 있었다. 학자들은 상형문자를 완벽하게 섭렵했고, 그것으로 희미하게 알고 있었던 세계를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심하고, 제대로 발견하지도 알지도 못한다면 믿음의 로제타 스톤이신 예수님을 꿋꿋이 바라보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내가 아는 한 의사는 사고로 절단된 손가락을 다시 붙이는 수술에 전문가였다. 일단 수술 실에 들어가면 현미경을 여섯 시간에서 여덟 시간동안 끊임없이 응시하며 사람 머리카락 보다 가는 신경망과 힘줄과 혈관을 분류하고 연결시켜야 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환자 의 손가락은 영원히 움직이지 못하거나 감각을 잃게 된다. 그는 수술하는 동안 잠깐 커피 를 마시지도 못하고 화장실에 갈 수도 없다. 언젠가 그는 새벽 3시에 비상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나갔다. 하지만 수술이 너무 복잡해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마음에 자극을 주어 수술에 집중할 생각으로 그 수술 결과를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께 바치 기로 결심했다. 수술이 진행되는 몇 시간 동안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격려하기 위해 자기 어깨 위해 손을 올리고 곁에 서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수술했다.



그런 방법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그후로 그는 수술 결과를 자기가 알고 있는 누군가에게 바친다는 마음으로 수술했다. 그는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 일깨우며 말했다. "지금 아주 어려운 수술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수술을 당신께 바치고 싶습니다. 내가 수술을 하는 동안 당신 생각을 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그때 그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 다. "나의 삶도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가 매일 행 하는 사소한 일들-전화를 받고, 직원을 고용하고, 의학 잡지를 읽고, 환자들을 만나며, 수술 일정을 잡는 것-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인식은 세상의 일들 속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전보다 간호사들을 더 배려하고 존중하며, 환자들을 돌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재정 문제에 대해 거의 걱정하 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나는 이른 아침에 하나님께 내 마음을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다. 고요함 가운데 느끼는 평온과 평화가 하루 종일 계속되기를 소망한다. 혼란과 소란함으로 가득 찬 하루 가운데 겨우 30분 정도를 할애해 묵상시간으로 지키고 있지만 그 노력은 상당한 가치과 효력이 있다. 나는 공개적으로 신앙에 대한 글을 쓰고 강연하는 사람으로서 내 자신이 하찮게 느껴지고 위선적으로 보일 때에도 여전히 나는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사용하실 수 있는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내 삶의 이면이 너무나 혼란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내 앞에 놓인 문제들을 처리해주실 것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위대한 승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때 성취된다. 충실한 사람들은 자신이 상관의 명령에 기꺼이 복종해야 하는지, 아니면 마지못해 억지로 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앞에 놓여진 일들을 책임지고 수행함으로써 믿음 생활을 유지해나가야 한다. 나는 피아노 연주자로서 나의 연주 실력이 오직 한 가지 요소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는 연습이다. 음계와 아르페지오는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 연습하는 것이 아니다. 웅장하고 멋진 작품을 연주하려면 먼저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에 정통해야 한다.지난 봄, 어느 날 아침에 나는 어린아이를 안고 공항의 탑승구를 빠져나가는 젊은 부부를 보았다. 아이는 다른 사람들을 골똘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 이는 그가 누구이든지, 젊었든 늙었든, 예쁘든 추하든, 지루한 표정이든 행복한 표정이든 아니면 근심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든 간에 순수하고 환한 얼굴로 기쁨을 나타냈다. 아름 다운 광경이었다. 어색한 분위기의 탑승구가 천국 문으로 변했다. 나는 그 아이가 자기에 게 반응을 보이는 어른들과 노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야곱처럼 위엄에 눌린 느낌을 받았 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실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분은 우리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쁨을 누리고, 당신이 만든 피조물들을 보며 '좋다'고 말씀하고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안식하셨다. 시편 139편에서 말한 것처럼, 흑암은 하나님께 아무것도 아 니다. 그분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행하는 무수히 많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게 보시며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는 피조물로 여기신다. 오로지 하나님과 그리고 사랑을 제대로 받고 자라는 어린아이만이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한 다.성령께서는 내 속에 살아계셔서 하나님께서 이식시켜주신 새로운 신분을 버리지 못하게 방지하는 능력을 행하신다. 나의 영적인 면역체계는 하나님의 임재가 내 속에 있어야 하며, 다른 외부 요소가 자리잡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매일 일깨워주는 존재를 필요로 한다. 나의 가치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분은 나에게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잊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분의 존재를 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살아계신다는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테일러는 이러한 존재의식을 유지하는 열쇠를 '집중'이라 했다.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의 접촉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실제적으로 생생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성령의 열매'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 땅에서 보여주신 성품들이다. 그분은 자신이 보여주신 것과 동일한 성품들을 길러주기 위해 우리 속에 '거하시며' 우리를 자신의 거처로 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분은 성령을 통해 내면에서 활동하신다. 하나님의 성령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단어들 -보혜사, 돕는 자, 모사- 은 한 개인의 변화가 내면에서 아주 느린 속도로 진행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반복되는 좌절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지적한다. "하나님께서는 일상에서 다가오는 도전들에 맞서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때로는 지극히 '사소한' 일들이 '근본적인' 문제일 때도 많다. 철저한 복종을 위해 부르셨다는 말은 지루하고 짜증나게 하는 사람의 말도 인내를 가지고 들어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는 잘못을 저지른 친구를 사랑으로 대하고 누가 보더라도 하찮은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사람에게 상세한 조언을 주는 것도 포함된다."



결혼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성숙한 관계'다. 깊은 우정도 부부 관계와 마찬가지로 성숙한 관계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부부관계에서 두 사람은 각자의 자유와 독립을 유지하면서 일체감을 성취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남편과 아내가 공유하는 단일한 정체성이다. 물론 그분은 나와 전적으로 다른 존재이지만 많은 부분을 함께 공유하신다. 나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혼 관계보다 더 확실하게 설명해주는 것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사랑은 그런 식으로 힘을 발휘한다. 사랑의 대상이 눈에 보이든 눈에 보이지 않든 사랑의 원리는 동일하게 작용한다.많은 신앙의 위인들에게는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성공이나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라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인물들도 그와 같은 열정으로 하나님께 반응했다. 모세는 하나님과 격렬한 논쟁을 벌여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시도록 설득했다.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거머쥐기 위해 밤새도록 씨름했고 속임수를 쓰기도 했다. 욥은 하나님께 대항해 신성 모독적인 분노를 겁없이 쏟아냈다. 다윗은 십계명을 어겼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았고. 하나님 역시 그들을 단념하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분노와 비난, 심지어 의도적인 불순종까지도 다루실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한 가지 요소가 있었다. 바로 무관심이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욥과 같은 위기는 최악의 위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은 좀더 미묘한 위험에 직면한다. 고장난 컴퓨터, 결제해야할 신용카드 금액, 다가오는 여행, 친구의 결혼식, 일상적인 생활의 번잡함이 쌓여 점점 하나님을 내 삶의 중심으로부터 가장자리로 쫓아낸다. 어떤 날에는 사람들을 만나고, 음식을 먹고, 일을 하며, 결정을 내리느라 하루 종일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긴 공백은 욥이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먼저 이제 막 순례를 시작한 크리스천이나 어린아이 단계에 머물고 있는 자들에 대한 구절들을 살펴보자. 시편 131편은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와 성숙하지 못한 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의 차이점을 잘 말해준다. 바이저는 이 본문을 아래와 같이 주석했다. ".... 아이는 점점 어머니를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여기는 습관을 깨뜨리고, 스스로 어머니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간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들도 신앙의 연단을 겪은 후에는 하나님을 자신의 소원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 말고 스스로 그분을 열망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러면 삶의 중심점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옮겨진다."



율법주의는 영적인 성장 과정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특히 믿음의 유아기를 잘 드러낸다. 바울은 지나치게 율법에 얽매이는 것이 얼마나 믿음의 성장을 방해하는지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은혜의 사도였던 바울은 율법이 아닌 사랑에 기초한 자유를 강조했다. 바울은 구약 시대를 되돌아보면서 옳지 못한 의존의 모습을 발견했다. 무슨 요구든 다 들어주는 부모 손에서 자란 아이들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의존한 상태에서 끊임없이 짜증내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발견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성숙한 상태로 옮기기를 원하셨지만, 그들은 어린애처럼 반항하는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영원한 관계가 법이나 규칙이 아니라 신뢰와 은혜와 용서의 토양에서 성장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이 강요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상대방이 원하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 사랑이 희생을 요구할 때는 불평하지 않고 상대방의 뜻에 따른다. 나는 부부 생활의 이런 저런 모습을 통해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의 성숙한 관계가 제대로 유지될 수 있는지 많이 배우게 된다.



크리스천의 생활은 엄격한 자기 훈련이 아니라 어떤 희생이라도 기꺼이 감수할 만한 풍성하고 가치 있는 새로운 삶이다. 물론 그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연습이 필요하다. 루이스의 말을 인용해보자. "언젠가 자유롭고 기쁘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가운데 우리는 의무적으로 믿음의 행동들을 한다." 머튼, 베네딕트, 아씨시의 프란시스, 존 웨슬리, 테레사 수녀, 샤를 드푸코 같은 인물들에 대해 연구하다보면, 철저히 훈련의 삶을 살다간 그들의 영혼 속에는 의지적인 결심보다 자발성과 기쁨이 충만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자유함을 영적 훈련에 투자해,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심오한 자유를 보장받았다.나는 내면의 평안과 평온함에 대한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다. 하지만 컴퓨터의 프로그램 에러로 그 글들이 지워지면, 모니터 상의 전자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나의 내적 평안과 평온함은 사라져버린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어떻게 음식을 먹기 전에 잠시 멈추고 드리는 감사의 기도가 "이 음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버터 좀 건네주세요"라는 말로 바뀔 수 있는가? 차가 고장나면 나의 뇌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가장자리로 밀어내고 오로지 그 문제만을 생각한다. 물론 나도 거의 매일 하나님을 위해 "시간을 낸다." 하지만 그 시간은 업무 목록 가운데 한 가지 항목으로 변할 때가 많고 그나마 원고 마감 일이 닥치면 매우 짧게 줄어든다. 다른 지역을 여행하느라 정상적인 일과를 지키지 못할 때는 식사 전 서둘러 드리는 기도를 제외하면 하루 종일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잊어버린다. 우주의 본질과 내 삶의 중심점을 잊어버린다.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것에 대해서 로렌스 수도사는 다음과 같은 해답을 제시했다. "그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가끔 그분을 기억하고 예배하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면 됩니다. 가끔 그분께 고통을 아뢰고 그분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면 됩니다. 당신의 노동 속에서 그분이 주신 것을 감사하십시오. 할 수 있는 대로 그분에게서 위로를 얻으십시오.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할 때에 가끔씩 당신의 마음을 그분께 드리십시오. 최소한의 기억이 언제나 그분을 기쁘게 해드릴 것입니다. 그런 시간에 큰 소리로 외칠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계십니다." 로렌스는 영성의 깊이는 지금 하는 일을 바꾸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하던 일상적인 일들을 하나님을 위해 함으로써 깊어진다고 말했다. 로렌스는 어디서나 하나님을 발견했다.쟝 바니에르는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서 우러나는 세 가지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첫째, 부모에게 사랑받으려는 욕구와, 둘째, 성장한 후에는 친구를 사귀고 싶어하는 욕구를,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보다 나약한 사람들을 섬기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성숙한 크리스천은 육신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녀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희생적인 사랑을 베푸는 부모의 단계까지 성장하기를 갈망하신다. 그 단계에 이르러야 하나님을 닮아 가는 모습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다. 진 베니어가 주장한 것처럼 그렇게 고상한 단계는 영적 발달에 필수적인 요소다. 부모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가장 가까운 무조건적인 사랑을 조금이나마 깨닫는다. 로날드 롤하이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녀들을 바라보는 단순한 행동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이기심을 깨뜨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베푸는 사랑 속에서 하나님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는다. 이타심과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해지며, 내가 아닌 다른 존재의 인생이 좀더 실질적이고 중요하게 되기를 바라는 열망을 품게 된다."'선함, 타락, 구속'이라는 과정은 이 지구상의 모든 만물에 적용된다. 가족, 교회, 경제, 정부, 기업 등 인간의 손길이 닿는 모든 영역은 원래의 선함에서 흘러나오는 좋은 향기와 타락에서 나는 더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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