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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라

데이빗 A. 씨맨즈 지음 | 두란노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라

데이빗 A. 씨맨즈 지음/윤병하 옮김

두란노/1992년 10월/143쪽/3500원



1. 우리 모두 속에 숨은 아이

언제였든 어떻게였든 당신은 아이였던 때가 있었다. 우리가 우리의 어린아이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소년기 때나 10대 때의 우리는 늘 우리 안에 존재해 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숨어있는 당신의 과거 아이는 확실히 살아 있으며 좋게든 나쁘게든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리 속의 아이는 삶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는 우리를 바로든 비뚤게든 인도할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존재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떠들썩하고, 법석 떨며, 매우 버릇없는 역할을 하고, 그가 좋아하는 일이면 시끄럽게 뛰어들기도 한다. 결국 그는 현재 성인의 삶에 적응을 못하고 의미 있는 모든 관계 속에서 상처를 내고 이를 파괴시키게 된다. 그런가 하면 당신의 내적 아이는 너무 수줍고 겁 많고 연약하고 자기 혐오적이다. 당신이 아무리 원해도 동료를 얻지 못하게 하고, 당신이 가진 의견을 말하지 못하게 하며, 중요한 책임조차 맡지 못하게 한다. 내적 아이는 결국 당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으로 되는 것을 막는다. 내적 아이가 행사하는 이 능력 때문에 당신 안에 존재하는 내적 아이를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당신이 과거를 돌아보아 내적 아이가 당신의 삶을 지배하는 행동이 무엇인가 찾아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당신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변화가 필요한 부분, 용서함과 용서됨이 필요한 부분, 치유되어야 할 부분, 매일의 훈련을 필요로 하는 부분을 돌아보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당신이 되고자 했던 모습 - 성령의 치유하시는 능력으로 자유케 된 하나님의 자녀 - 으로 회복될 수 있다. 당신의 내적 아이가 숨어 있는 부분을 찾아냄으로써 그를 내쫓을 수 있는 것이다.

변화될 수 있는 아이

약 20년 전 심리학자 휴즈 미실다인(Hugh Missildine)은 『당신 과거의 내적 아이 Your Inner Child of the Past』라는 베스트 셀러 한 권을 써냈다. 아직까지도 이 분야에서 고전으로 손꼽히고 있는 이 책은 우리의 성격 형성에 부모의 행동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과거의 내적 아이는 가정이나 편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 모습이 나타난다. 성숙한 삶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친한 동료들, 룸메이트, 애인, 직장동료, 가족과의 관계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관계를 내적 자아가 점령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적인 모습을 띌 때 우리는 매우 공손해지고 훈련된 모습이 된다. 거리가 있는 이들과는 항상 매우 성숙하고 합리적인 만남을 갖는다. 그러나 가까운 인간관계 안으로 돌아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우정, 사랑, 결혼 또는 매우 두터운 동업 관계에서는 얼마나 빨리 내적 아이가 이를 지배해버리는지 모른다. 그는 매우 불합리하고 완고하며, 명령적이거나, 수줍어하고, 겁 많고, 연약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것에 우리 자신이 충격 받을 정도로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당황해하는 아이

우리가 내적 아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가정이다. 특히 부부의 애정 생활에서다. 단지 두 사람이 결혼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틀린 생각이다.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말씀은 옳다. 그러나 문제는 네 사람이 결혼했다는 것이고 집이 뭔가로 와글와글 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성인과 또 두 명의 내적 아이가 함께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일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쉬며 우리를 털어놓는 집은 다시 과거의 아이들로 되돌아가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러한 이유로 남편이나 아내의 내적 아이는 재미를 붙이고 집을 뛰어다니게 된다. 이 넷이 부딪치는 부분은 재정, 애정, 성생활, 아이 교육에서다.

조정될 수 있는 아이

과거에 머물고 아이 같은 반응만 하는 사슬에 묶여 있으면 우리는 가정이나 사람과의 관계 속에 사랑을 전달할 자유를 상실한 것이다. 우리는 진실한 행동은 하지 않고 반응만 할 뿐이다. 우리는 가끔 응답하지만 창조적인 사랑엔 낯설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 중심에서 어린아이의 일을 버림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우리를 성숙케 하는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창조적 능력과 새로움을 전달해준다. 그러나 당신 과거의 숨겨진 내적 아이를 처리하기 전에는 이런 사랑이나 성숙을 볼 수 없다. 당신의 교만함을 내려놓고, 자신을 정직하게 직시하며, 모든 일을 성령님께 맡긴다면 성령님은 당신 삶의 중심에서 일 하실 것이다. 이것을 원한다면 성령님께 당신의 실체를 보여주시길, 그리고 타인과 어떻게 관계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시길 시간을 할애하여 간구하라.



2. 기억의 치유

1966년 ‘성령과 우리 상한 감정의 치유’라는 제목으로 두려움과 망설임 속에 어느 주일 저녁 설교를 했던 것을 난 기억한다. 그 설교만큼 하나님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들어 쓰신 설교는 더 없으리라 생각된다. 그 설교 테이프는 온 세계로 퍼져나가 자신들의 감정에 속박 받던 이들을 풀어주는 도구로 쓰여졌다.

잠재의식

과거의 문제아가 확실히 나타나는 부분은 그 자신을 실제로 느낄 수 있는 곳인 우리의 기억에서이다. 당장 무의식에 대해 얘기하고픈 충동을 느끼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좀 과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우선 나는 잠재의식, 또는 자각 전 의식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무의식에 대한 과대 강조의 이유는 우리 자신의 잘못된 행동 책임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전가’가 목적이 아닌가 한다. 아직 그 의미에 끌린다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무의식은 실체나 어떤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의식이란 당신 인격의 깊이를 표현하고자 하는 기술적 묘사 언어이다. 당신 마음의 잠재 의식층을 뭐라 부르든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경험한 어떤 것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혹 기억해 내지 못한다 해도 당신의 기억 속에 살아 있게 된다. 그것들은 당신의 기억 창고에 쌓이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더 멋진 사실은 당신이 성령님께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 존재한 잠재의식을 정결케 하며, 기억의 창고를 채우도록 허락한다면 하나님은 이것을 당신 인격의 가장 창조적인 부분으로 만들 실제적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잠재의식은 악과 비극도 만들어낼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잠재의식은 고통도 될 수 있다. 이것은 특별히 어릴 때의 고통스런 기억과 연관되어있다. 이런 기억을 우리 마음 밖으로 몰아내려 하면 할수록 실제적으로 기억은 더 깊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데까지 묻혀 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가 경험하고 표현 못한 감정이 상처받았을 땐 표현될 길이 막막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가슴에 살아있는 채로 묻혀 엄청난 완고함과 폭발력을 지니게 된다. 그런 기억을 의식에 떠오르지 못하도록 하는 그 엄청난 노력은 우리 에너지의 상당량을 소모하게 만든다.

잠자고 있던 그 과거의 아이가 깨어나면 개인의 행동, 반응, 외모, 행위 전반을 지배하면서 감춰졌던 감정들이 다시 살아나 깊은 우울, 분노, 걷잡을 수 없는 정욕, 열등 의식, 고독, 거절당한 느낌으로 표현되는데 그런 고통스런 기억들은 회심의 경험이나 성령 충만으로는 자동적으로 변화되지 않는다. 은혜 안에서의 성숙으로도 꼭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런 기억들은 영적 성장에 방해가 된다. 그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전까지는 그에게 있어 실제 성숙이란 없다. 불행히도 그런 기억들은 우리의 평범한 기도로는 미치지 못할 부분인 것 같다. 어떤 때는 기도가 고통을 더 악화시키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특별한 중보 기도와 치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당황스러운 것은 그의 현재 생활에선 아무 이상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치유의 기도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필요한 것은 고통스런 기억을 치유하는 기도이다. 즉 그들의 아동기와 십대 때 일어나 그들의 성숙을 막고 있으며 성장의 한 단계를 묶어두고 있는 그런 경험들을 치유하는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모든 기억은 치유의 기도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는 고통과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그분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상처받은 우리의 내적 아이를 돌보실 수 있는 영원한 현재이시다. 내 경험으로 치유가 필요한 아이는 다음 네 명의 아이들 중 하나 꼴이다. 상처받은 아이, 미움받은 아이, 부끄러움으로 가득 찬 아이, 그리고 두려워하는 아이가 그들이다.

믿음의 기도

믿음의 기도가 만병통치의 도구가 아니며, 또한 치유의 기도가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도 물론 아니지만 그럼에도 어떤 이들에게는 바로 적용된다. 그 차이는 어쩌면 우리 삶에서의 큰 각도 차이일 수 있다. 나는 성령님께서 이 같은 치유 경험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적용시키실 것을 믿는다. 기억의 치유는 마음 깊숙한 곳의 적극적 개방과 다른 이들과의 나눔을 필요로 하고 당신 행동을 위한 다른 이들의 기도를 필요로 한다. 오랜 시간 동안 당신은 성령님께 새로운 통찰을 구해야 하고 또 당신의 방어벽을 허물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치유되기 원하는 부분, 즉 당신에게 고통을 주며 감정의 파장을 일으키는 모든 기억나는 것들의 목록을 적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는 신뢰하고 진정으로 믿음의 기도를 할 줄 아는 이와 함께 기도하라. 그와 함께 주님과 대화하듯 하는 기도가 가장 좋을 것이다. 모든 느낌, 그런 기억들과 관계되어 경험한 모든 감정들을 하나님께 고백하라. 만일 새로운 것이 떠오른다면 바로 중지하고 같이 얘기하라.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을 기억하라. 그분은 바로 여기 계신다. 그분은 시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아픈 경험으로 되돌아가실 수 있다. 그분에게 고백하며 각각의 경험들, 각각의 감정들, 각각의 행위들을 그분께 드려 당신을 사랑하시고, 위로하시고, 용서하시도록 하라. 그분께서 당신의 증오를 닦아내시고 상처를 싸매며, 음욕을 제어하고, 두려움을 내어쫓으시게 하라. 그리고 특별히 그분이 당신을 용서하시듯이 당신을 괴롭힌 사람들을 용서하라. 만일 당신이 타인을 위해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성령님께서 당신의 영과 그의 영을 같이 녹여주시도록 기도하고 끝으로 성령님께서 그분의 일을 어떤 식으로 하실지는 요구하지 말라.

3. 어른됨을 가로막는 어린아이의 좌우명

조건 붙은 관계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최고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사랑과 애정을 유보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수준에서 그들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좀더 잘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돕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무엇을 하든, 먹든, 예의가 바르든, 성적이 좋아지든, 또래들보다 신앙생활을 잘하든 간에 우리는 조금만 더 잘하게 되면 인정하고 사랑하리라 약속한다. 그러다가 사랑은 점차 보이지 않게 되고 희망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현재 이룬 성취 정도는 낮추어지거나 묵살된다. 우리는 “사랑한다. 조금만 더 잘해다오.”라고 얘기하지만 그것은 번번이 “좀더 잘하면 사랑해주지.”라거나 “네가 좀더 잘해야만 우린 너를 사랑하고 기뻐해 주마.”라고 들려지게 된다.

브래드라는 목사가 열성이 있고 신앙의 기복이 심한 기독교인이었을 때의 경험을 우리에게 얘기했다. 겉으로 보면 그는 굉장한 성과를 거둔 성공적인 목사였다. 그러나 그는 내면적으로 요요(yoyo)와 같이 영성의 높낮이가 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치 당구공 같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자신감의 한 면에서 정죄감과 죄책, 그리고 우울의 면으로 튕겨 다녔다. “한 2년 전 성령님으로부터 갑작스런 통찰이 제게 주어졌습니다. 나는 내 삶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지배되고 있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대신 49년 동안 부모님이 내게 심어준 어린 시절의 ‘모토(Motto, 좌우명)’가 나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것이 어릴 때 심어진 모토였음을 알기 전까지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배하고 계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 대단한 어린 시절의 모토는 무엇이었나? 그것은 “좀더 잘해봐!”였다. 브래드는 말했다. “부모님이 내게 심어 주려고 하신 건 그것이 아닌 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마치 그 말이 ‘좋다. 우린 너를 사랑한다. 그러나 네가 좀 더 잘 할 수 있다면 더 사랑할 수 있을 거야!’ 라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성령님께선 그의 참 모습을 보게 하셨고 그의 삶의 참 동기를 보여주셨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지고 온 이 말이 하나님과의 관계까지를 포함한 모든 관계에 영향을 끼쳤음을 깨달았다. 49년 간 그는 더 이상 잘할 수 있으리란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드디어 이 모토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지금은 성령님 안에서의 참 자유를 배우고 있습니다.”

콤플렉스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는 것’과 ‘자라감’의 총체적인 과정을 성격 콤플렉스 측면에서 살펴보자. 콤플렉스의 의미는 ‘인격 전반에 지배력을 발휘하는 억눌려진 욕구와 기억의 묶음’이다. 유해한 아동기의 모토와 연관시켜볼 때, 콤플렉스란 우리의 과거로부터의 건전하지 못한 감정의 공격이라 하겠다. 우선적으로 “좀 더 잘해.”라는 모토에서의 병든 내적 공격으로 파생된 콤플렉스는 두 가지이다. 먼저 우리에게 무력감을 주며 자기 비하로 채우는 ‘열등 콤플렉스’가 있다. 또 우리가 이룬 것보다 더 잘해내야 하고 해낼 수 있다라고 느끼게 하며 자기 무시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완벽 콤플렉스’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훈련과 연습이 영적 어린아이됨에서 떠나 성인으로 자라감에 기본이다. 이것은 혼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신이 신뢰하는 친구나 목사 또는 기독교 상담자가 필요하다. 성령님과 협력하여 “좀 더 잘해.” 콤플렉스에 따라다니는 양 극단의 감정 진폭을 좁히도록 노력하라.

다음은 자신들의 불안한 결혼생활에 도움을 얻기 위해 찾아왔던 로저와 바브 부부의 이야기다. 정기적인 가정 예배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깊은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혼은 파경에 이르게 되었다. 신실한 신자로서 주님을 수년간의 결혼생활 가운데 모시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욱 더 낙심하고 낙담했다. 개인적으로 만나보니 둘은 “좀 더 잘해.”의 피해자들이었다. 그는 완고한 기독교 가정 출신이었고 그녀는 비신자 가정 출신이었지만 기본적 환경은 거의 같았다. 어떤 모양으로든 우수한 업적을 나타내면 그들은 인정이라는 대가를 받았지만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거나 아주 작은 실수라도 저지르게되면 그들 부모는 그들을 걱정과 실망으로 대했다. “남들이 뭐라고 말하겠니? 부모인 우리가 엉터리라고 생각하지 않겠니?” 그들 부모의 안정감과 자존감은 로저와 바브의 성공적인 업적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에게 ‘무거운 짐’이었다. 그러므로 “좀 더 잘해.”의 의미는 “네가 실패하면 우리 얼굴에 먹칠하는 거다.”라는 것으로 그들 성격 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들이 결혼 첫 해 그 어렵고 많은 적응을 위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상상할 수나 있겠는가? 그 후 마침내 그들은 둘 사이에 일어난 일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의 고통과 요구에 대해 깊이 나눌 수 있었다. 특별한 의미에서의 기도는 로저와 바브가 어린아이 같은 행위를 버리도록 해 주었고 하나님 외엔 기대할 수 없는 완전함을 서로에게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4. 또 다른 어린아이의 잘못된 생각

또 다른 해악이 되는 어린아이의 모토는 잘못 지도된 문화에서 온다. “용감한 아이는 울지 않는다.” 이것이 얼마나 많은 남성들과 수백만 결혼을 무너뜨렸는지 모른다. 이 빡빡한 어린아이의 모토가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쳐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어린아이의 모토는 “좋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또는 “좋은 그리스도인은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표현해선 안 된다.”라고 해석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파괴적인 모토를 살펴봄이 더 좋을 듯하다. 예수님의 감정 생활을 살펴보고 그분의 삶에서 과연 어떤 감정이 표현되었고 또 그것이 어떻게 다루어졌는가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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