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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씨앗

헨리 나우웬 지음 | 두란노
희망의 씨앗

헨리 나우웬 지음/두란노 출판부 역

두란노/2001년 10월/344쪽/11,000원



헨리 나우웬을 위한 추모의 글

* 헨리 나우웬은 1996년 9월 21일 네덜란드에서 사망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서 그를 위한 추도 예배가 열렸다. 이 조문은 데이브레이크에서 함께 성직의 사명을 나누며 헨리 나우웬과 매우 가까운 친구로 지내던 수 모스텔러 수녀가 낭독했다. 고인에게 바치는 찬사는 따뜻하고 밝았으며 분위기에 어울렸다.

헨리의 생애는 가족들과 함께 네덜란드에서 시작해서 네덜란드에서 끝났습니다. 그의 가족은 훌륭했고, 헨리의 생애는 그가 이룬 관계, 특히 부모와의 관계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헨리는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관해, 그리고 부모에게서 들은 각기 다른 ‘목소리’에 관해 말했습니다.

헨리의 아버지는 헨리를 알았고 사랑했습니다. 헨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었고 헨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알고 드러냈습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이랬습니다. “아들아, 너는 은사를 받았단다. 너는 아주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네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잘해 낼 수 있으리라고 아버지는 믿는다.” 헨리의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했고 알았습니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헨리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이랬습니다. “너는 무슨 일을 하든지 훌륭하고 사랑스럽구나.”

그러나 부모님들이 늘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헨리의 아버지는 헨리가 꽤 신경질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아주 어릴 때 헨리는 요람에서 울고 투덜거리고 불만이 많고 까다로웠으며, 부모님이 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것을 몹시 갖고 싶어했습니다. 헨리는 언젠가 아버지의 이런 말씀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배가 고파서 그랬겠지요.”

성직자가 되려는 헨리의 소망은 가정에서 생긴 것이고, 그 이후로 헨리는 자신의 소망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헨리는 성직에 있는 동안 내내 가족들이 함께 기도하기를 원했습니다. 헨리는 가족 생활을 충실히 영위했습니다. 그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과 내적 자유를 강하게 느꼈던 것입니다.

헨리의 사역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여객선과 캔자스 주 메닝거 클리닉에서는 채플 담당 신부로, 노트르담과 예일, 하버드에서는 심리학과 교수로, 제네시에서는 수도사로, 또 작가와 강사로, 그리고 중앙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이웃으로 복음의 열망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헨리는 사역 기간 내내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감동과 힘을 불어넣어 준 열정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헨리는 삶의 경험을 통해 말하고 그 경험으로 글을 썼으며, 영적 삶에 있어서 자신의 몸부림과 성숙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영성은 의견을 달리하는 많은 기독 교파들을 뛰어넘어 광범위하게 수용되었습니다.

공식적인 사역과 가르침의 기간 동안, 헨리는 널리 여행을 다녔고 그 여행을 후원하고 격려해 준 사람들과 소중하고 변함없는 우정을 키웠습니다. 헨리는 우정에 있어 오해와 거절을 경험했는데 그것은 그에게 고통과 고민의 원인이었습니다. 헨리는 한때 고독 때문에 고통스러워했고, 집이 없어 고통받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복음을 갈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무엇인지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집이 없었기 때문에 열정을 잃고 있었습니다.” 헨리는 그가 말한 ‘마귀들’을 이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데이브레이크의 라르쉬에서 사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헨리는 처음 방문한 데이브레이크에서 일주일을 머물렀습니다. 헨리가 도착한 지 이틀째에 레이몬드 신부님이 교통 사고로 심하게 다쳤습니다. 헨리가 담당 신부가 된 것은 그 시점이었습니다. 헨리는 자진해서 문병을 갔고 열 가정을 일일이 심방하면서 레이몬드의 상태를 전해 주었으며 우리가 레이몬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그의 사진을 식탁에 올려 두라고 권했습니다. 레이몬드는 결국 회복했습니다.

헨리가 첫 방문을 마치고 떠나자, 우리는 그가 얼마나 큰 은사를 받은 사람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편지를 써서 데이브레이크로 돌아와 살면서 3년 동안 우리의 사제 신부가 되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또 그에게 사례는 드릴 처지가 못된다고 말했습니다. 헨리는 우리가 보낸 서신에 크게 감동했고, 이렇게 직접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적은 한번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헨리는 하버드를 떠나 단숨에 데이브레이크로 왔습니다. 하버드 대학은 크고 잘 알려진 곳이며 사상, 과학, 의학, 신학, 논문, 논쟁의 기초가 확립된 중심지이나, 데이브레이크는 무력한 사람들이 모여 살며 함께 삶을 나누는, 작고 알려지지 않은 공동체입니다. 데이브레이크로 오는 사람들은 보통 청바지에 배낭 차림입니다. 헨리는 친구들과 함께, 차로 끄는 트레일러를 타고 왔고, 이삿짐 트럭을 도로로 끌어내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사를 끝냈습니다!

헨리는 선풍을 일으키며 우리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잡았고, 우리 공동체도 명성 있고 사랑 많은 이 사람을 갑자기 삶의 중심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기초까지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헨리 역시 도착하자마자 공동체 삶이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고는 그의 삶이 기초부터 흔들리는 경험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헨리에게 아담을 보살피고 돌보는 일과를 배우라고 정중히 부탁했습니다. 아담은 헨리의 친구이자 교사, 그리고 인도자가 될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침에 아담을 깨워서 일어나도록 도와주고, 목욕을 시키고 옷을 입히는 것과 아침 식사를 먹여 주고 일하러 나가는 것을 도와주시겠습니까?” 처음에 헨리는 깜짝 놀랐습니다. 예전에 누구를 위해 그런 일을 해 본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곧 그 일은 헨리의 일과에서 매우 의미 있고 중요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담은 말이 없고 헨리가 쓴 책을 한 권도 읽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헨리에게 존재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고 서로 평화를 주고받는 것이 무엇인지, 열정과 보살핌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담은 가난한 가운데 헨리가 자신을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보살피게 하며 자신을 전적으로 헨리의 손에 맡겼습니다. 헨리와 아담은 의미 있고 중요한 관계를 만들었습니다.

아담은 훌륭한 선생이었지만 아담에게서 잘 배우지 못한 것도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데이브레이크로 진입하는 긴 도로를 닦았을 때 그 도로의 이름을 나우웬 고속도로로 하자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헨리는 자주, 무척 서두르곤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임 때문에 우리가 몬트리올에 모여 있을 때, 우리는 헨리에게 연락해서 몬트리올로 와서 우리와 함께 자리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헨리는 시간이 안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모임에 늦게라도 도착하겠다는 헨리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윽고 오전 11시 30분, 헨리는 팔에 커다란 붕대를 감고 머리에 심한 상처를 입은 채 허둥지둥 들어왔습니다. 그는 자초지종을 말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서둘러 공항으로 가는 길이었지요. 문에 부딪힌 줄 알았는데 보니까 창문이었어요!”

헨리는 겸손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25주년 기념 축제에 초대했습니다. 헨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무척 자랑스러웠습니다. 그 자리를 빛낼 중요한 강의를 부탁하는 줄 알고 바로 승낙했거든요. 그런데 그들은 강의는커녕 나를 가짜 말에다 태우고 춤을 추게 하고 요상한 노래를 시키더라니까요!” 그날 헨리의 연기는 일품이었습니다!

헨리는 우리를 사랑했고 우리도 헨리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신부님이었고 우리와 함께 있었습니다. 열정의 사람이었고 말씀의 사람이었으며 성찬의 사람이었습니다.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친히 고통과 고민을 경험했기 때문에 고통과 투쟁 속에 있는 우리를 만나 주었습니다. 그는 불화와 고뇌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편지와 팩스도 보내 주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있었고 자신의 친구들에 대해서 우리와 나누었으며 풍성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몸짓으로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확신과 열정과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기도할 마음을 주었고 우리를 사랑으로 함께 불러 성찬을 베풀었습니다.

헨리가 어떻게 우리 사이를 잇는 다리를 놓아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를, 남과 북을, 네덜란드의 가족에서 캐나다의 가족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환경과 문화와 종파를 가진 사람들을 하나로 불렀는지 보려면, 이 공동체를 둘러보기만 하면 됩니다. 헨리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각자 그를 만나거나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아요. 좀더 말해 주세요.” 우리는 그의 책을 읽고 말했습니다. “좋아요. 좀더 얘기해 주세요.”

이제 그는 우리 곁을 떠나고 없습니다. 이제는 그가 우리에게 심어 준 영성에 책임을 져야 할 때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해진 우리 마음의 중심으로 들어가 그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헨리가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는 성령의 메시지를 들을 것입니다. ‘고통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관계가 어려울 때 사랑하세요. 소망이 시들어 갈 때 믿음을 가지세요. 서로 도우세요. 상처받고 증오하는 마음을 뛰어넘어 서로 하나가 되세요.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셔서 우리 각자에게 “사랑하는 자들아!” 하고 부르시니 진심으로 서로를 용서하세요.“

영적 사춘기에서 벗어나 성숙으로 들어가라는 이 요청은 헨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입니다. 이것은 그의 도전이며 은사입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헨리의 너그러운 성품과 애정 있는 마음에 대해 감사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삶과 사명을 찬양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이곳에 모인 아름다운 온 가족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에필로그

아담 이야기(이 세상 것이 아닌 평화)

* 케임브리지, 하버드 세인트 폴 대성당 교회에서 있었던 헨리 나우웬의 강연 중에서

평화를 어떻게 이야기해야 좋을까요?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수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자신감을 많이 잃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평화롭게 사는 방법에 관해 몇 가지 제안을 하는 것이 그나마 쉬웠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이야기할 중요한 점이 있다고 확신하고 쉽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강연을 준비하면서 나는 깊은 내적 공허감과 말의 무익함을 느꼈으며, 심지어 평화, 화평케 하는 일, 평화의 영성에 관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절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강연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여기 서 있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 내 빈곤한 처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 위함이고, 내가 그 사실을 여러분에게 숨기지 않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신다는 것을 전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고민한 끝에, 여러분에게 내 현재 생활에 대해 약간 이야기하고, 거기서 우리가 찾고 있는 예수님의 평화를 몇 가지 발견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2년 사이에 나는 하버드에서 데이브레이크로 옮겼습니다. 최고의 영재들을 위한 기관에서 정신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로 옮긴 것입니다. 토론토 근처에 있는 데이브레이크는 라르쉬라는 국제 공동체 연맹 중의 한 곳입니다. '라르쉬'라는 이름은 '노아의 방주'라는 뜻이며, 정신적 장애인들과 그들을 돕는 사람들이 '팔복'의 정신으로 함께 살려고 하는 곳입니다. 나는 지금 장애인 여섯 명, 봉사자 네 명과 한 집에 살고 있습니다. 봉사자들 중에는 장애인을 돕는 특별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마을에 있는 의사나 정신과 의사, 물리요법가들에게 필요한 모든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한 가족으로 모여 사는 우리는, 특별한 위기가 없으면 누가 장애인이고 누가 정상인인지 살아가면서 점점 잊어버리게 됩니다.

가난한 몇 사람으로 구성된 이 가족의 생활이 우리가 찾고 있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보여줍니까? 우리 가족 중 한 사람인 아담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아담을 통해 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장애인들과 일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걱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잘 알지 못하는 세상에 들어가는 것이 두렵기조차 했습니다. 이 두려움은 아담과 함께 직접 일하도록 초대받았을 때에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우리 가족들 중에서 제일 약합니다. 스물 다섯 살인데 말을 못하고, 혼자서는 옷을 입고 벗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합니다. 또한 남의 도움 없이는 먹지도 못합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며 이따금씩 눈만 마주칠 뿐입니다. 등은 뒤틀려 있고 팔다리를 움직일 때는 심하게 비틀린 채로 힘겹게 움직입니다. 아담은 심한 간질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아주 독한 약을 쓰는데도 거의 매일 심한 발작을 일으킵니다.

그는 때때로 몸이 너무 뻣뻣하게 굳으면 울부짖는 듯한 신음 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의 볼을 타고 굵은 눈물 방울이 흘러내리는 모습도 몇 번 보았습니다. 내가 아담을 깨워 약을 먹이고, 옷을 벗긴 다음 화장실로 데려가 씻기고 면도해 주고 양치질을 시킨 다음 옷을 갈아 입히고, 부엌으로 데려가 아침 식사를 떠 먹이고, 휠체어에 태워서 거의 하루 종일 여러 가지 치료를 받는 곳으로 데려가기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걸립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발작이라도 일으키면 시간은 훨씬 더 많이 걸리고, 아담이 발작 때문에 힘이 다 빠지면 원기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다시 데려가 잠을 재워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내가 이 모든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들을 양육하는 일을 보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담과 한 달을 지내고 나자, 전에는 결코 내게 없었던 어떤 것이 내 안에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밖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성가신 사람이요, 뒤틀린 인간이며,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쓸모 없는 피조물로만 보이는 이 심한 장애 청년이 나의 가장 소중한 동무가 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두려움이 서서히 누그러들면서, 내 속에서 따스함과 애정이 가득 찬 사랑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함께 지내는 시간에 비하면 그밖에 내가 하는 거의 모든 일이 지루하고 피상적으로 보일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 뒤틀린 몸과 상처 난 마음에서 지극히 아름다운 인간이 나와서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을 내게 주었습니다. 이 경험을 표현할 적절한 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아담은 그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내가 어떤 존재이며,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할 수 있는지 계시해 주었습니다. 아담의 옷을 벗기고 욕조에 들어가게 한 뒤 큰 물결을 만들어 아담의 가슴과 목, 코에 닿게 하고는 아담과 나에 대한 온갖 이야기를 할 때, 두 사람이 사고와 감정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어 대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깊은 이야기는, 깊이 통하고 영혼이 영혼에게 이야기하고 마음이 마음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식을 서로 나누거나 감정을 이야기하지 않고도, 오직 한 인간성의 바탕 위에서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아담과 오래 지내면 지낼수록, 아담이 점잖은 선생이 되어 어떤 책도, 학교도, 교수도 결코 가르칠 수 없었을 것을 내게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너무 낭만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추한 것을 아름답게 말하는 것일까요? 아버지가 되고 싶은 나의 숨은 욕구를 이 중증 장애인에게 투사하고 있는 것일까요? 본래 수치스러운 인간 상태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막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을 지나치게 영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까? 나도 충분히 심리적, 지적으로 훈련받은 사람이기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동안에 아담의 부모가 왔습니다. 그분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얘기 좀 해주세요. 아담이 집에 있을 때 부모님께 어떻게 해 주던가요?” 아담의 아버지는 웃으면서 즉시 대답했습니다. “아담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었습니다... 아담은 화평케 하는 아이예요... 평안을 주는 우리 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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