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
제씨 펜 루이스 지음 | 두란노
십자가의 도
제씨 펜 루이스 지음/이현수 옮김
두란노/2000년 5월/159쪽/5,000원
1. 십자가의 중심성
갈보리 십자가야말로 핵심 없는 이 시대에 참된 방향과 목표를 제시해 주는 유일한 구심점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인류 역사를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핵심이 된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주를 다스리시는 데 있어서 그 모든 면에서 중심축 역할을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올바른 관점과 균형을 잃어버리고 막다른 골목에서 헤매는 이유는 바로 이 십자가의 구심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체험하기 위하여 진리의 유일한 구심점인 십자가 주변으로 모여야만 한다. 그렇게 할 때 성령님은 이 십자가라는 구심점을 통해 신앙 생활과 관계된 다른 깊은 진리들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실 것이다.
십자가는 (1)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으며 (2)갈보리에서 하나님은 원수되었던 죄인들과 화목을 이루셨고 (3)주님은 갈보리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
십자가는 죄에 대한 승리의 구심점이다
로마서 6장에 나타난 십자가의 진리는 얼마나 명백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을 위한 십자가였다. 왜 그런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생명, 곧 ‘옛사람’은 완전히 부패되고 타락되어 있었다. 뱀이 준 독소를 받아들임으로써 근본적인 뿌리는 물론 그 나무 전체가 썩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를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의 핵심은, 그가 다시 시작하셔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셔야 하는 재창조의 진리에 있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의 옛 아담으로서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완전히 허물어지고 무너져 내린 토대 속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려는 계획을 갖고 계셨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에게서는 생명력을 불러일으키거나 새롭게 할 수 있는 근거도, 가능성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승리의 구심점이다
우리 안에 세상을 향하여 죽는 경험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진정으로 동참해야 한다. 이러한 십자가의 진리가 실제적으로 적용된 성도들만이 세상과의 ‘분단’을 경험하게 될 것이요, 마치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듯한 세상과의 ‘격리’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함으로 이미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이제 주 안에 있는 자신의 위치를 굳게 지키고 세상으로 나가 세상에 속한 영혼들을 접할 때 그들의 어려움을 돌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십자가는 육신에 대한 승리의 구심점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십자가의 진리의 사실을 믿는 성도들은 ‘육신의 정욕’과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실제를 경험하게 된다. ‘육신’과 ‘성령’ 사이에는 치열한 투쟁이 있는데, 그 이유는 ‘육신’과 ‘성령’이 본질적으로 상반되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우리를 지배할 때 육신의 정욕은 사라진다. 성경은 십자가를 통해 성령이 우리 안에 있는 ‘육’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그 비밀을 계시해 준다. 즉, ‘육신’은 단지 정지해 있거나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이다! 이 말씀은 우리의 모든 ‘버릇’과 ‘습관’ 그리고 육신에 속한 모든 정욕과 욕심을 모두 한꺼번에 다루고 있다.
십자가는 사탄에 대한 승리의 구심점이다
마귀와 그의 모든 권세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현시대에 사탄이 행하는 모든 일들과 또 그의 허위적인 세력이 이 세상에서 팽창되는 것을 보고 실망하는 성도들이 있다. 그러나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아 갈보리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을 때, 우리는 심령에 참 안식을 얻고, 생활 속에서 전개되는 영적 전쟁에 승리하고 인내할 수 있다. 마귀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승리했다고 소리치던 바로 그때에, 주님은 마귀와 그의 모든 권세를 “벗겨 버려 부끄럽게 하시고” 십자가를 통해 통쾌하게 승리하셨다!
십자가의 중심성
마비(Mabie) 박사는 십자가의 중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에게는 이 십자가의 도가 우주의 신비를 열며, 모든 우주의 비밀을 풀며, 모든 것을 화목시키는 열쇠로 인식되었다. 이 십자가의 도가 바울에게 주어진 것은 그를 통해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서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주 안의 모든 문제와 비밀을 푸는 유일한 열쇠인 이 십자가의 도를 깨달아야 한다.
2. 십자가와 변화된 중심
“나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의 죽음에 동참하게 되었고 이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나의 중심은 십자가를 통해 바뀌어졌다. 이제 나의 새로운 중심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력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를 주장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 그의 생명샘에서 마치 폭포수같이 넘쳐 나와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너희들이 육적으로 판단하는 것같이 단순한 열심이나 순간적인 열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 나타난 바울의 말씀은 십자가의 도의 참된 의미를 성도들에게 밝히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잘 나타낸 말씀인가! 십자가의 내적인 진리는 결코 인간의 지식이나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너무나 위대하고 두려울 정도로 실제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그 죽음의 실재에 동참한 자만이 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진리를 우리 안에 계시하실 때 단순한 지식적인 이해를 초월하여 우리의 삶 속에 전개되는 실제적인 경험을 통해서 나타내신다.
첫째, ‘자아’(ego)의 중심이 바뀐다.
둘째, 인격에 대한 억압이 아니라 인격의 재창조가 일어난다.
셋째,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었고, 그것은 이미 끝장나고 완료된다.
넷째, 우리의 육이 계속적으로 십자가에 넘겨져 지속적인 죽임을 당함으로써 육신의 행위를 작동시키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처리 받는다.다섯째, 우리의 ‘변화된 중심’에서부터 외부적인 육신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죽음에 지속적으로 동참한다.
3. 십자가와 변화된 가치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4-16)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변화된 중심의 결과를 볼 수 있다. ‘나’라는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가치관 역시 함께 변화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이제 우리는 아무도 육신적인 관점에서 판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도 낡은 옛사람의 관점으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적이었던 우리의 가치관은 하나님의 새로운 가치관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이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활의 중심이 될 때 우리는 성령의 인도 아래 말 한마디마저도 주님이 주시도록 의지하게 될 것이다. 만일 이렇게만 된다면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물론 우리의 모든 언행까지도 ‘혁명적’으로 변화될 것이다. 정말로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여 ‘나’는 십자가에 못박아 처분해 버리고 성령께서 주님의 형상을 닮은 새로운 인격체로 재창조하실 수 있도록 우리를 온전히 맡겨 드릴 수 있을까?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4. 십자가의 길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 24-26)
주님께서는 자연계를 지배하는 법칙이 있듯이 영계에 속한 영적인 한 법칙이 있음을 암시하고 계시다. 열매를 맺기 위해 죽는 점차적이고 진행적인 죽음의 법칙을 계시하고 있다. 주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열매’를 맺기 위해 본래 우리가 지니고 있는 자연적이요, 필수적이었던 옛사람의 ‘생명’을 버리라고 하신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명은 필수적으로 죽어야 한다!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영의 자유함, (2)이어서 지, 정, 의와 관련된 우리의 인격, 곧 혼을 다루며, (3) 마지막으로 육을 다스리는 영역까지 십자가가 영향을 미침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속적인 과정을 거치기는 하지만 반드시 이런 순서로만 역사하시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주님은 각 성도들이 처한 환경과 신앙 수준에 알맞게 갖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틀에 박힌 것 같은 한 종류의 신앙 체험만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성령께서는 먼저 죄에 대한 승리를 우리 안에 경험케 하신다. 그리고 본능적인 감정과 복잡한 지성의 모든 혼적인 활동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원하신다. 성령님은 갖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열매가 풍성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고,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 같이 순종하며 주님을 따르기 원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종종 이러한 복음의 진리를 회피하려 한다. 그들은 열매를 맺기는 원하지만, ‘열매를 맺기 위한 십자가의 길’은 걸어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앙 생활 가운데 느낄 수 있고 의식할 수 있는 혼적인 생명만을 갈망하고, 의식할 수 없는 영적인 경험 안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기초로 한 영적인 삶만이 ‘굴곡’이 없다는 사실이다. 옛사람의 본성적인 생명은 십자가의 죽음에 깊이 파묻혀 버리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 자유롭게 운행하심으로써 우리가 접촉하는 모든 것에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십자가의 길을 깨달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 여하에 따라 역사하신다. 다음과 같이 고백해 보자. “주님, 저는 그 길을 선택합니다! 또 주님이 그 십자가의 길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 저는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나의 ‘생명’을 포기합니다!” 이 고백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우리가 진정 이 십자가의 길로 들어설 때, 주님은 우리를 “영생하도록 보존하실 것이다.”
“주님은 먼저 이 땅에 오셨고 완전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도 죽음을 가져오셨습니다. 또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셨으며, 그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변화된 인격과 중심 안에 오셔서 다시 한번 사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볼 때 주님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있던 그 생명과 영이 우리 안에 똑같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 십자가의 길을 걸을 것인가? 만일 여러분의 대답이 “예”라면 이제 성령께서 여러분을 전적으로 주관하시도록, 또 여러분의 환경을 통해 성령의 방법대로 그 일을 이루실 수 있도록 조용히 맡기는 기도를 하라!
마지막으로 나의 경험을 간증하고자 한다. 내가 이 십자가의 도를 처음 깨달은 것은 하나님 앞에 헌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당시 나는 영적인 어린 아기와도 같았다. 그때 나는 주님이 나를 통해 한 영혼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보고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체험을 했다. 그리고 그 기쁨의 감격에 못 이겨 나는 소리쳤다. “오! 주님, 이 기쁨은 내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때 나는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을 들었다. “네가 만일 500명을 구원하는 데 나의 도구로 사용된다면, 그 기쁨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느냐?” 그리고 주님이 다시 물으셨다. “너는 너를 피곤케 만드는 감성적인 기쁨을 떠나서 내가 너의 전체를 가질 수 있도록 너를 포기할 수 있느냐? 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쓸 수 있도록 네 자신을 맡길 수 있느냐?” 주님의 이러한 질문 앞에 나는 주님의 제의가 너무나 합당하다고 생각했고, 내 자신의 감성적인 기쁨에 묶여 피곤케 된 육신을 벗어나 다른 사람들에게 미칠 놀라운 축복을 상상하며, “네” 하고 주님 앞에 대답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열매를 맺는 삶이란 남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쏟아 붓고, 나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삶이다. 또 나 자신을 하나님의 장중에 완전히 떠맡기고,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치 않는 ‘완전 항복’이 십자가의 길이다.
5. 십자가와 부활의 생명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진리는 상호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죽음과 부활, 이 양자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영적 삶은 영향을 받게 된다. 부정적인 면에서의 십자가의 죽음을 적용하지 않고서는 긍정적인 면에서의 영적인 생명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부정적인 죽음의 진리만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실제적으로 영적인 죽음 가운데 빠져 삶의 긍정적인 부분들을 잃어버리게 된다. 또 반대로 긍정적인 부활의 생명만을 주장하다 보면 옛 아담의 본성적인 생명을 처리할 수 있는 죽음의 역사가 상실되어, 우리 안에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기 원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이 방해를 받게 된다.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처리될 때에만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체험적인 결과는 영의 자유함을 가져온다. 원래 영은 혼과 육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간의 영은 본성적인 자연인의 생명과 육에 묶여 주님과의 영적인 결합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누가 ‘살리시는 영’인가? 어떻게 육신에 속한 것들을 잘라내는가?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 안에 어떻게 십자가를 적용하시고, 또 어떻게 우리의 옛 사람의 생명을 죽음으로 넘겨 우리의 영을 해방시키시고, 그리스도의 영과 결합시키는가?
그 해답은 히브리서 4:12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이와 같이 우리의 영이 부활하신 주님과 한 영을 이루게 되면, 우리는 영을 통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체험하며,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세례를 받고 육을 벗을 수 있는 능력을 덧입게 된다. 그리고 성령은 아주 세밀하게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셔서 성령을 좇아 생활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알아가게 된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골 2:9-10)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겨우 찻잔 하나를 채울 정도의 미미한 충만함이 아닌가? 바울은 그런 식의 충만함이 아니라 “그 안에 모든(완전한) 충만함이 거한다!”고 말씀한다. 곧 바다 같은 영적인 충만함 안에 이미 거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