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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영적 싸움에 관한 이야기

캘빈 밀러 지음 | 요단
생활 속의 영적 싸움에 관한 이야기

캘빈 밀러 지음/김인화 옮김

요단/2000년 9월/288쪽/7,800원



1부 영적 전쟁의 본질

적이 점령한 영역

C. S. 루이스는 언젠가, 사람들은 마귀에 대해 다음의 두 가지 중 한 가지 잘못을 범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귀에 대해 도에 지나친 관심을 쏟거나, 마귀의 존재 자체를 아예 무시해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본서를 접하는 독자를 이 같은 양극단 중 어느 한쪽으로 인도하는 잘못을 범하고 싶지 않다. 단지 ‘악(evil)'이라는 단어에 d라는 철자를 더하면 ’마귀(devil)'가 된다는 사실만큼은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악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악의 근원은 마귀라고 믿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어두움의 세력과 결코 끝나지 않을 전쟁을 하고 있다. 이 전쟁에서 예외인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나 마귀와의 전투에 임할 때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우리에게 닥친 곤경은 단순한 곤경일 뿐, 마귀로 인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며, 둘째, 자기가 내린 결정은 반드시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고, 셋째, 어떤 일에 실패했다고 해서 그것을 마귀의 탓으로 돌리지도 말고, 또 어떤 일에 성공했다고 해서 천사에게 그 모든 찬사를 돌리는 일 역시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미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며, 또한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삶, 곧 목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로 선택했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오는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종의 옷을 입고 종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세상은 예전에 그리스도에게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악한 세력이 모든 희망을 살라버리려 하는 곳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상의 한가운데 살며, 꺼져버린 희망의 불씨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되살릴 기회를 바라며 소망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 12)

아무리 연약해 보이는 성도라도 일단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사단은 두려워서 감히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또한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하고 그분의 전신갑주로 완전 무장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악의 세계와 싸우라는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다. 말씀의 검을 항상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분노를 곱씹으며 땅으로 떨어진 사단을 쓸데없이 두려워하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구원의 확신에 찬 우리에게는 그 어떤 협박이나 위협도 통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모든 두려움과 공포를 이미 앗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한 존재이다. 그리고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하는 책임은 우리의 몫이지만, 전투에서 승리해야 하는 책임은 그분의 것이다. 그러니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도록 하자.

천사의 분노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요한계시록 12: 12)

베트남전에 참전한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는 정신적으로 아주 심한 손상을 입고 돌아왔다. 외상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정서적으로 입은 상처가 너무나 깊어, 육체적으로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가 받은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던지, 그는 자신이 목격한 잔혹한 광경이 뇌리를 스칠 때마다 거의 발작적으로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아무 말 없이 혼자 앉아 있거나 자기 방에만 처박혀서 지내곤 했다. 그의 삶은 입에 올리기조차 두려운 소름끼치는 일들로 온통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그는 화들짝 놀라 자신만의 어두운 공상 세계 속으로 칩거해 들어가서는 몇 시간이고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단절하곤 했다. 그의 내면세계에서는 여전히 베트남전이 계속되고 있었고, 그 전투는 그가 하루에 한 번 이기기에도 너무나 벅찬 것이었다.

이러한 내면의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이 비단 그뿐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와 똑같은 싸움을 했을 것이며 앞으로도 할 것이다. 공포는 실재한다. 그것은 우리 내면에 어둡고 무서운 느낌을 불러일으키며 갑작스레 저돌적으로 덤벼들어서는 몸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것과 비슷한 깊고 쓰라린 상처를 남긴다.

이러한 작고 사적인 전투들은 하나님과 사단의 전쟁이라는 보다 큰 전쟁에서 파생한다. 사단은 하나님께 맞서서 자신을 높인 죄로 천국에서 추방되었다. 그가 천국을 떠나야 했던 것은 하나님이 그를 증오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그가 원하지도 않는 사랑의 관계 안에 억지로라도 머무르라고 강요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종종 ‘거룩한 분노’라고도 불리는 하나님의 분노는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신으로서의 통제력을 상실한 데서 나오는 값싼 일시적 변덕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또한 원한이나 앙심의 표출 같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의로운 분노이며 부정한 잘못에 대해 보이는 거룩한 반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결같다. 그분은 사단조차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창조하셨으며, 그 타락한 대천사가 자신이 천국에서 쫓겨나는 원인이 된 잘못된 선택들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것을 지켜보시면서 거룩한 실망으로 마음 아파하시며, 반역 상태에 있는 자들을 다시 자신에게로 회복시키고자 하는 소망이 절절하게 흐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주 작은 더러움도 허락지 않을 정도로 정결하고 거룩하신 분이며, 그것은 천국도 마찬가지이다. 화염이 불타는 지옥은 오히려 사단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피해 본인 스스로가 자신의 거주지로 택한 곳이다. 그 곳은 고통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된다는 것 자체가 화염과 유황으로 불타는 듯한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귀는 누구일까? 마귀는 자신의 주인이 천국에서 추방되자 그와 함께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들이다. 다시 말해, 오만하기 짝이 없는 루시퍼와 함께 천국에서 제명된 천사들이 바로 마귀인 것이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 중 삼 분의 일은 자신이 사단과 함께 추방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 타락한 천사들도 막상 천국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어떻게 하면 자신이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떨쳐버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실망시켰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방법은 딱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가룟 유다처럼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다가 배출구를 찾지 못해 속에서 곪아버리는 영적 죄책감을 갖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것을 돌이킬 수 없게 됐으며, 더구나 그분께 용서를 구할 수도 없게 됐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마 27: 3-10). 그리고 나머지 한 가지 방법은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한 횟수만큼 그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다시금 예수님께로 회복되는 은혜를 입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죄책감은 언제나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로 귀착된다. 곧 베드로처럼 예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기쁨을 누리게 되든지, 아니면 유다처럼 돌이킬 수도 용서를 구할 수도 없다는 생각에 철저한 고독 속에 갇히게 되든지 둘 중 하나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저기에서 사단을 섬기며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실패했다고 해서 그것에 대한 가책으로 인해 유다가 맞았던 것과 같은 종말을 맞을 필요는 없다.

사단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는 악의에 대해 모호한 개념들을 늘어놓는다고 해서 설명되는 것도 아니고, 악을 단순히 철학적으로 의인화시킨다고 해서 설명되지도 않는다. 아마도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설명은 성경에 나오는 대로, 배로 바닥을 기는 상처투성이의 뱀일 것이다. 그의 분노는 인간적인 환경 안에서는 전적으로 통제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 하는 입을 받고...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요한계시록 13: 5, 7)

크메르 루즈의 킬링필드, 르완다 부룬디에서 있었던 잔혹한 대량학살 사건, 인도네시아에서 자행된 반공주의자 숙청 사건, 스탈린이 취한 공포의 집단화 정책, 이 모든 사건들은 단순히 전쟁영화나 이념영화의 소재라기보다는 사단의 분노가 얼마나 큰 위력을 발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단이 그 분노를 얼마나 광대하게 표출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려면, 이같이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살펴보면 된다.

공산주의자들이 자행한 일들 가운데는 뾰족히 설명할 길이 없는 것들이 많다. 어느 사제의 머리에 무려 여덟 개나 되는 대못을 박아 넣은 것도 그렇고, 기도 중이던 일곱 소년과 그들의 선생에게 저지른 악행도 그렇다. 어느 교회에서 한 선생이 일곱 소년들을 데리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병사들이 그 교회에 들이닥쳐서는 총검으로 선생의 혀를 잘라낸 다음, 일곱 소년의 귀에다 젓가락을 쑤셔 박았다. 당신이라면 이 같은 행위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이러한 잔인한 행위나 자신이 야기한 고통을 보며 즐거워하는 잔혹성의 뿌리를 추적해 들어가 보면 결국은 마귀와 그들의 거주지인 지옥이 그 저변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제도 속에 나타난 마귀의 위력이 가공할 만하다는 관점에서 그들의 본성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이 마귀들은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일까? 프란츠 힌켈라메르트는 정부와 기관들이 인간을 단순한 사물로 전락시켜 인간성을 말살한 다음, 그 자리를 경제나 권력의 남용으로 대체시켜 버림으로써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인간의 “사물과 과정”이라고 불렀다.

인간성 박탈로 야기되는 비참함이 얼마나 큰 지는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사랑이 천국에서 내려오듯, 편견은 지옥에서 올라온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 촌락에는 하늘로 좇아 불을 내리게 하자고 예수님께 권유했을 때, 예수님이 그들을 그렇게 심하게 꾸짖으신 것도 아마 이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인간의 증오심을 강화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자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음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또한 야고보와 요한의 거룩하지 않은 소망은 전적으로 마귀적인 것이라고 단호하게 질책하셨다. 야고보와 요한이 사마리아인을 멸망시켜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들이 사마리아인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는 증거이고, 그것은 성령님이 바라시는 것과 정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람을 사물화하는 것은 마귀들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이었다(눅 9: 51-56).

헬라어에는 분노를 의미하는 단어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로마서 2:8에 나오는 투모스(thumos)이고 다른 하나는 오르게(orge)이다. 전자가 변덕스럽기 짝이 없고 비이성적인 사단과 인간의 분노를 일컫는 것이라면, 후자는 악에 대하여 하나님이 보이시는 변치 않는 분노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분노는 사단을 향해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언제나 용서해 주기만 하실 거라고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손주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매번 묵인해 주는 할아버지, 할머니 같으신 분이 결코 아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 3-5)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 1-2)

우리를 죄로 끌어들이는 사단을 하나님과 동일선상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원론은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단은 이미 심판을 받아 천국에서 쫓겨난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게 12: 12, 사 14: 12 이하).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하나님이 이 모든 권세 가진 적을 완전하게 제해 버리셨다는 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보다 열등한 존재인 사단은 하나님의 휘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구세주를 그 마음에 모시고 사는 모든 인간의 휘하에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에게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 7)고 권면하기도 했다.

사단을 무시무시한 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뿐이다. 많은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의 존재는 의심하면서도 사단의 존재는 의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이율배반이 아닐 수 없다. 성경 전체에서 무신론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부분은 시편 단 한 군데뿐인데, 시편기자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 1)라고 말함으로써 무신론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한 마디로 일축해 버린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부인할 정도로 어리석은 자들이 사단을 부인하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을 의심하는 영혼은 사단의 수중에 쉽게 들어가 버릴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공포에 그들이 굴복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하나님처럼 너무나 큰 존재를 의심하기보다는 그보다 작은 사단이라는 존재를 믿는 것이 더 안전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한일서 4: 1-3)

사단을 정복하기 위해 초자연적인 힘을 갖고자 하는 욕망이 요즈음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상당히 보편화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우리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을 행할 능력과 군대 마귀를 명하여 나가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경우 실제와는 거리가 먼 사탕발림일 수도 있다. 존 맥아더는 우리 자신이 가진 영적 힘에 너무 매료되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한다. 그렇게 되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체험하는 영성’을 기를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희망을 품기보다 놀라운 표적과 기사만을 보기 바란다면, 마귀에게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성경적 증거보다 영적 경험에 더 집착하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감동시키려면, 감탄사가 터지게 하는 빈도나 강도가 꾸준히 상향곡선을 그리도록 해야 하며, 이처럼 체험 본위적인 생활을 하게 되면 “내 마귀가 당신 마귀보다 훨씬 크고 막강하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위험한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 7)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후 10: 4)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원한다면, 적어도 다음의 다섯 가지 사항만큼은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 사단과의 싸움에 임하기 전에 사단을 정복할 전략을 치밀하게 세워야 한다.

(2) 모든 유혹의 저변에는 우리의 자아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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