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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는 당신께 누구입니까?

필립 얀시 지음 | 요단
욥은 구약성경에서 우주적 관점에 대한 가장 깔끔한 스케치를 보여주며, 예언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시각을 가진 "선견자들"로서 좀더 자세히 보여준다. 신약성경에서 예언에 초점을 맞춘 유일한 책인 요한계시록은 우주적 관점에 대한 가장 생생한 예들을 제시한다. 우주적 관점이 하나님께서 역사를 보시는 방법과 가장 닮았다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



예언자들은 보다 깊고 근본적인 것을 보는 시각, "세상의 벽 너머에 있는 기쁨, 슬픔보다 더 쓰라린 기쁨"을 보는 시각을 요구한다. 미래와 우주적 현재를 흘끗 보여줌으로써, 예언자들은 우리가 어쨌든 공의로운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해준다. 공의는 예언자들에게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평판은 그분이 궁극적으로 공의를 베푸실 수 있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내가 살펴본 모든 구약성경은 이 질문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애굽에서 노역을 하고 있던 히브리 노예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실 것이라는 모세의 확언을 거의 믿을 수 없었다. 욥의 친구들은 미약한 욥이 우주의 여호와께 중요하다는 불합리한 생각을 조롱했다. 전도서의 전도자는 이 질문을 보다 냉소적으로 던졌을 것이다. 해 아래 정말 중요한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모든 인생이 헛되지 않은가?



나의 의심은 병이라기보다는 무능력에 가깝다. 나의 의심은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내가 자기 연민 가운데 뒹굴며, 욥기와 전도서에 너무나 잘 묘사되어 있는 우주적 고독의 쓰라림을 겪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와 그분이 행하신 일에 눈을 돌린다. "해아래" 있는 내 실존이 하나님께 중요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와 모순된다. 나는 소중한가? 예수께서는 참으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시다.욥과 같은 시대우주적인 문제들영혼을 치유하는 시편찬양대재조정문제의 시편들찬양에서, 피조물은 우주에서 선하고 참되며 아름다운 모든 것들은 창조자로부터 나온다고 즐겁게 인정한다. 이러한 찬양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적절한 위치를 상기시켜 줌으로써 하나님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시편기자들, 특히 다윗은 자연세계와 보다 긴밀한 유대가 있었기 때문에 찬양에서 큰 유익을 얻었다. 시편기자들은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다. 시편은 하나의 전체로서 잘 맞아들어가는 세상, 모든 것을 지켜보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에 의해 유지되는 세상을 제시한다.



시편은 꼭 필요한 말씀들을 줌으로써 찬양이 부족한 문화의 문제를 멋지게 해결해 준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이러한 말씀들 속에 들어가 시편의 내용이 우리의 내적인 태도를 재조정하게 하는 것뿐이다. 본회퍼는 시편은 하나님의 언어훈련과정이라고 말한다. 유아들이 부모로부터 모국어를 배우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시편에서 기도의 언어를 배울 수 있다.최근에 시편을 번역한 유진 피터슨은 소수의 시편만이 찬양과 감사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을 인정한다. 시편의 70퍼센트가 애가의 형태를 띤다. 시편의 애가는 푸념하는 것이나 불평하는 것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욥처럼, 시편기자들은 현재 상황이 어떻게 보이든 간에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하심을 굳게 믿었고 공의를 부르짖어 구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슬퍼했다. 그 결과로 나온 시편들은 이들의 영원한 믿음과 일상적인 경험을 재결합하도록 도와주었다.



다윗은 자신의 업적-맨손으로 들짐승을 죽였고, 골리앗을 쓰러뜨렸으며, 사울의 맹공에도 살아남았으며, 블레셋을 패주시켰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건들을 회상하고 거기에 관한 시편들을 쓰면서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무대 중앙에 세우는 방법을 발견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함"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든지 다윗은 이것을 경험했다. 다윗이 하나님의 임재를 고상한 찬양 시편으로 표현했건 거친 열변으로 표현했건 간에, 그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세세한 부분에까지 연관시켰다. 다윗에게는 자신이 하나님께 중요하다는 확신이 있었다.전에는 세상을 향해 삿대질하는 고루한 늙은이로 보이던 예언자들이 오히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현대적인" 작가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언자들은 한 장 한 장마다 하나님의 침묵, 경제적 불균형, 불의, 전쟁, 악이 지배하는 것 같은 세상, 세상이 당하는 고통 등 마치 우리가 고민하는 것과 똑같은 주제들을 다룬다. 예언자들은 욥기, 시편, 전도서, 심지어 신명기에도 계속해서 나타나는 이러한 똑같은 주제들을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거기에 또렷이 초점을 맞춘다. 구약 현실주의의 전형적인 책인 예언서는 우리가 느끼는-내가 느끼는-회의(의심), 고통, 그리고 혼란을 또렷하게 표현한다. 이제 예언서를 인간이라는 사실의 딜레마에 대한 예리한 증언으로 보게 되었다.예언서의 책을 자세히 연구해 볼 만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의 애절한 물음에 답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자신이 세상을 운영하는 방식을 변호하시면서 폭풍우처럼 호통을 치시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하나님은 자신이 세상에 관심이 있다는 증거로 예언자들을, 다시 말해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던 바로 그 사람들을 내세우신다.



예언자들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대답은 거의 알 수 없다. 그분은 제멋대로인 가지(또는 나라)를 잘라주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씀하시고, 자신을 충성스럽게 따르는 남은 자들을 자랑스럽게 지적하시며, 자신의 사랑에 대한 역사적 증거들을 열거하시고, 메시야 구원자를 약속하시며, 항상 이 땅의 그릇된 모든 것이 바로 잡혀질 미래에 대한 예고로 결론을 맺으신다. 이처럼 합리적인 설명 너머에는 강렬한 빛줄기처럼 쏟아지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간절히 원하신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언자들은 구약성경의 후렴을 반복한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중요하다는 것이다.지금과 나중예언자들은 실제로 매우 멋진 그림들을 그렸다. 그 그림들은 볼수록 내 마음에 든다. 도시 출신의 이사야는(유대전승에 따르면 이사야는 왕족이다.) 정치적인 발언(예표)을 위해 3년간을 벗은 몸에 맨발로 다녔다. 예레미야는 멸망(심판)에 대한 자신의 메시지에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목에 멍에를 메었다. 에스겔은 흙으로 예루살렘의 모형을 만들어놓고 노끈으로 묶인 채 한 번에 몇 달씩 옆으로 누워 있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예언자들은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전했다.



실제로, 예언자들은 비슷한 메시지를 전했지만 각자 독특한 스타일을 사용했다. 오바댜는 자신의 예언을 한 장으로 압축하는 반면, 이사야서 두루마리는 그 길이가 7미터나 된다. 아모스는 농부였고, 이사야는 왕을 위해 일했으며, 다른 왕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전설에 의하면 므낫세가 톱으로 두 토막 내어 죽였다고 한다.) 다니엘은 두 이교도 제국 아래서 성공을 누렸다. 요나는 예언하기보다는 물에 빠져 죽으려 했다. 스가랴의 환상을 보면 에스겔의 환상은 시시해 보일 정도다.예언서를 읽다 보면 예언자들에게는 지금(now)이 나중(later)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견자로서,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전망(시각)에 대한 통찰력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시간의 속박을 받지 않는 분이시기에 그분에게 있어 예언의 성취 순서는 사소한 문제이다. 거의 모든 예언은 수천 년 후의 우리들뿐만 아니라 처음 그 예언을 들었던 사람들에게도 어떤 의미가 있었다. 예언자들은 역사가 현재의 고난과 무질서와 정치적 혼란의 현실이 아니라 미래-하나님의 미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하늘과 땅의 재창조를 말했다. 그러나 청중들이 이처럼 고상한 시각을 믿기 위해서는 시간적인 증거, 다시 말해 스케줄대로, 예언에 따라, 자신들의 시대에, 곧 지금(Now) 이루어지는 사건들이 필요했다. 예언자들의 예언들이 그들의 생애 중에 성취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나중(Later)에서 지금(Now)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흐름을 강조한다. 예언자들은 인간의 동경을 규정한다. 그런 후에 이들은 지금(Now)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영광된 미래를 그려낸다. 이들은 사람들이 혼란과 절망의 시대에도 붙잡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의 비전을 제시한다.혼합적인 시간 추이-지금/나중/훨씬 나중-는 내가 예언서의 중요한 기여라고 생각하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것은 예언서가 하나님의 관점을 제시해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에게 큰 권세들과 실제보다 큰 폭군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세상을 다른 수준의 시각에서 돌아볼 수 있는 특별한 눈을 주셨다. 예언서에는 적어도 세 가지 수준의 의미, 그러니까 일종의 삼중적 초점의 시각이 있다.

또한 예언자들은 세상에 대한 신문의 시각을 도덕적인 전망에서 해석했다. 예언자들의 도덕적 역사관은 그들이 비난한 지혜와 부와 힘의 상징인 명성과 권력에 초점을 맞추는 신문의 관점과는 확연히 다르다.우주적 전투마지막 답변의 전주곡문제의 책들근본적으로 욥은 고난의 위기가 아니라 믿음의 위기를 맞았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비극적인 사고, 말기의 질병, 또는 실직 등에 머리를 흔들며 이렇게 물을 것이다. "왜 하필이면 접니까? 하나님, 저한테 무슨 감정 있습니까? 왜 하나님은 그렇게 멀리 계시나요?"



이런 때 우리는 너무나 쉽게 환경-질병, 우리의 외모, 가난, 불운-을 적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버린다. 하지만 욥은 우리에게 믿음이 가장 필요한 순간은 바로 믿기가 불가능해 보일 때라고 가르쳐준다. 비극이 찾아올 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제한된 시각에 갇히고 말 것이다. 욥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비난하고 그분을 적으로 보려는 유혹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인간의 반응에 자신의 평판이 좌우되도록 허락하셨다. 욥이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을 가장 강하게 받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직접, 거의 현미경처럼 정밀하게 그를 보고 계셨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그때보다 더 가까이 계셨던 적은 없었다.



금처럼 정제된 가장 순수한 믿음은 극한 역설의 상태나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이 보류되는 상황에서 나타난다.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예수께서는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 알기 위해"(신 8:2) 시련의 시험을 치르셨다. 후에 훨씬 심한 시련인 십자가에서 예수께서는 (시편22편을 인용하시면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울부짖으셨다.(마 27:46). 욥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는 느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계속 의뢰하셨다.시편은 영적 치유의 모델을 제시한다. 나는 언젠가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라는 책을 쓰는 동안, 성경에는 하나님께 몹시 실망한 사람들의 자세한 기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욥과 모세가 하나님께 대한 실망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하박국, 예레미야, 그리고 이름 없는 많은 시편기자들이 그랬다. 몇몇 시편들은 "하나님께 화가 난," "하나님께 배신당한," "하나님께 버림당한," "하나님께 실망한"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150편의 시편은 진행중인 영적치유의 모자이크화를 제시한다. 의심, 편집증(망상증), 경솔함, 비열함, 기쁨, 증오, 즐거움, 찬양, 복수, 배신 등, 이 모든 것을 시편에서 찾을 수 있다. 한때 이러한 감정의 폭발이 무익한 혼란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이것을 건강의 표시로 본다. 시편에서 배운 것은 하나님께 대해 느끼는 모든 감정을 하나님께 내어놓아도 좋다는 것이다.하나님의 관점마음을 쏟아놓는 기도: 시편

어깨 너머로 보는 편지시편의 세세한 부분-범주, 해석적 의미, 논리적 일관성, 시적인 형태-에 집착함으로써, 시편의 요점을 놓칠 수가 있다. 그 요점이란 시편은 인간이 하나님께 쓰는 개인적인 편지와 매우 유사한 영적 일기장이라는 것이다. 시편의 수신인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을 시인의 '어깨 너머'로 볼 수밖에 없다.



시편은 믿음과 행위의 문제에 관해 하늘에서 주어진 사도적 권위가 있는 선언이 아니다. 시편은 시의 형태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분위기에서 기록한 개인적인 기도이다. 시편기자 중에는 농부가 있는가 하면 왕도 있고, 전문 음악가가 있는가 하면 순수 아마추어도 있다. 시편은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해 믿는 것과 실제생활에서 경험하는 것을 연결시켜보려고 애쓰는 '보통' 사람들의 경우를 보여준다.엘리후는 지금 조그마한 욥에게 왜 하나님의 개입을 요구할 권리가 없는지 설명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이 때 하나님께서는 폭풍 가운데 나타나신다. 욥기 38-42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장엄한 말씀은 많은 주목을 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고난의 문제를 완전히 회피한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오직 한 가지만 비판하신다. 욥의 제한된 시각이 바로 그것이다. 욥은 불완전한 증거에 입각해서 판단을 내린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욥의 시야를 그의 비참한 상황에서 전체 우주로 넓히신다. 욥의 의심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의 계시 앞에 눈 녹듯 녹아내린다. 이 회개와 더불어 그리고 하나님의 화해와 더불어, 1장부터 계속되어 온 긴장이 마침내 해소된다.1. 저주시편은 악에 대한 적절하고 "의로운 분노"를 표현한다.

2. 저주시편은 영적 미성숙을 표현하며, 신약성경이 이것을 바로 잡았다.

3. 저주시편은 기도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하나님께서 대꾸하신다: 예언서



철저히 현대적인 책들하나님께서 목소리를 높이신다구약성경은 애써 읽을 가치가 있는가?어둠 속에서 바라보기: 욥기시대를 초월한 이야기내기욥의 친구들이 책은 내가 어떻게 해서 구약성경을 피하지 않고 읽기 시작하게-궁극적으로 사랑하게-되었는지 자세히 밝히고 있다. 구약성경에는 다양한 저자들이 기록한 시, 역사, 설교, 짧은 이야기들이 뒤섞여 있다. 성경의 놀라운 통일성은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셨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놀랍게도 각 부분은 하나의 이야기처럼 서로 잘 맞아 들어간다. 더 인내하고 구약성경을 읽을수록 더 많은 구절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더 많은 구절을 이해할수록 그 구절들 속에서 나 자신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너무나 많은 개념들이-새로운 것, 개인, 사람, 역사, 자유, 영, 공의, 시간, 믿음, 순례, 혁신-구약성경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전통에 의존하지 않고는 구약성경 속에 담긴 세계와 우리의 위치를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다. 우리의 뿌리는 구약성경의 사고에 너무나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면에서-인권, 정부, 이웃 대하기,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미 구약성경을 말하며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읽을 때 예수께서 읽으셨고 사용하신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예수께서 드리신 기도요, 그분이 암송하신 시편이며, 그분이 부르셨던 노래요, 그분이 어린 시절 잠자리에 들면서 들었던 이야기요, 그분이 상고하셨던 예언들이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린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사자로 그리는가 하면 양으로도 그리며, 독수리로 그리는가 하면 어미 닭으로도 그리며, 왕으로 그리는가 하면 종으로도 그리며, 재판관으로 그리는가 하면 목자로도 그린다. 우리가 하나님을 분명히 규명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구약성경은 그분에 대한 전혀 새로운 그림을 제시한다. 그분은 고발자, 이발사(털 깎는 자), 포도원지기로 묘사된다. 결코 멈추지 않는 북소리처럼,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이 세상이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지속적인 메시지를 듣는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배우지만, 그분이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천천히, 예측할 수 없게, 역설적으로 움직이신다. 하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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