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는 당신께 누구입니까?
필립 얀시 지음 | 요단
하나님, 나는 당신께 누구입니까?
필립 얀시 지음/전의우 옮김
요단 출판사/2001년 1월/254쪽/8,000원
구약성경은 애써 읽을 가치가 있는가?
이 책은 내가 어떻게 해서 구약성경을 피하지 않고 읽기 시작하게-궁극적으로 사랑하게-되었는지 자세히 밝히고 있다. 구약성경에는 다양한 저자들이 기록한 시, 역사, 설교, 짧은 이야기들이 뒤섞여 있다. 성경의 놀라운 통일성은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셨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놀랍게도 각 부분은 하나의 이야기처럼 서로 잘 맞아 들어간다. 더 인내하고 구약성경을 읽을수록 더 많은 구절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더 많은 구절을 이해할수록 그 구절들 속에서 나 자신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너무나 많은 개념들이-새로운 것, 개인, 사람, 역사, 자유, 영, 공의, 시간, 믿음, 순례, 혁신-구약성경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전통에 의존하지 않고는 구약성경 속에 담긴 세계와 우리의 위치를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다. 우리의 뿌리는 구약성경의 사고에 너무나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면에서-인권, 정부, 이웃 대하기,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미 구약성경을 말하며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읽을 때 예수께서 읽으셨고 사용하신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예수께서 드리신 기도요, 그분이 암송하신 시편이며, 그분이 부르셨던 노래요, 그분이 어린 시절 잠자리에 들면서 들었던 이야기요, 그분이 상고하셨던 예언들이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린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사자로 그리는가 하면 양으로도 그리며, 독수리로 그리는가 하면 어미 닭으로도 그리며, 왕으로 그리는가 하면 종으로도 그리며, 재판관으로 그리는가 하면 목자로도 그린다. 우리가 하나님을 분명히 규명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구약성경은 그분에 대한 전혀 새로운 그림을 제시한다. 그분은 고발자, 이발사(털 깎는 자), 포도원지기로 묘사된다. 결코 멈추지 않는 북소리처럼,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이 세상이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지속적인 메시지를 듣는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배우지만, 그분이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천천히, 예측할 수 없게, 역설적으로 움직이신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는 크기나 힘이나 부에 감명을 받지 않으시는 것으로 보인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믿음이며, 그분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영웅들은 힘이나 부의 영웅이 아니라 믿음의 영웅이다.
어둠 속에서 바라보기: 욥기
나는 일찍이 잡지의 저널리스트로, 20대 초반에는 고통의 문제에 끌리게 되었다. 고통의 문제는 깔끔하게 풀고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의 문제는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찾아온다. 우리는 고통의 눈물과 울음 속에서 핏덩이로 태어난다. 그리고 똑같은 방법으로 죽는다. 그러면서 출생과 죽음 사이에서 “왜?”라고 묻는다. 이런 이유에서 욥기를 보고 또 본다. 욥기는 고통의 문제를 가장 잘 다룬 성경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욥기의 대부분에서(3-37장)고난이라는 주제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욥기는 대부분의 구약성경에서 나타나는,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는 “계약적 믿음”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의 믿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선민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재난을 당할 수 있는가? 이것은 온 이스라엘이 던진 질문이었으며, 한 사람의 고전적인 이야기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었다. 대부분의 구약성경처럼, 욥기도 우리가 원하는 단순한 해답을 거부함으로써 처음에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과 언뜻언뜻 보이는 소망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우리를 절묘하게 만족시킨다.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
존 칼빈의 설교 700개 중 159개는 욥기에 대한 것이다. 닐 사이먼은 욥의 상황을 빌어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희곡을 썼다. 더 최근에는 소설가 뮤리엘 스파크가 욥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했다. 연극 <아마데우스>조차도 구성의 상당 부분은 욥기에서 빌어왔다. 그렇지만 이 희곡의 작가는 똑같은 문제를 정반대의 입장에서 다룬다.
고통의 문제는 현대인들이 씨름하는 문제이며, 우리 시대의 신학적 크립톤(자연상태에서 미량으로 존재하는 가스로 텅스텐 전구와 같은 강한 빛을 내는 데 사용된다.)이며, 고대인 욥은 물론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고민해 온 문제이다.
욥기가 몇 페이지를 제외하고 모든 부분에서 고통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린 결론은 욥기가 전혀 고통에 관한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난에 대한 세세한 부분들은 이야기의 구성재료이지만 이 재료로 만들어진 이야기의 중심 주제는 고통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욥기는 믿음에 관한 것이며, 시험을 위해 큰 시련을 겪도록 선택된 한 사람의 이야기다. 그의 반응은 고난받는 사람뿐 아니라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메시지를 제시한다.
욥은 무슨 잘못을 했는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욥이 고난을 당하는가? 우리는 그가 벌을 받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다. 욥의 고난은 하늘에서 벌어진 큰 내기에서 중요한 주제로 선택되었다. 욥기 저자는 1-2장에서 우리에게 무대 뒤를 잠깐 보여줌으로써 이야기의 모든 긴장 요소들을 포기하지만 단 한 가지만 예외이다. 욥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욥의 믿음에 대한 질문에만 대답이 없었다. 욥은 욥기 내내 너무나 엄청난 고난과 싸우는 나머지 그의 물음이 곧 우리의 물음이 된다.
내기
사단과 하나님 사이의 내기는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다. 사단의 말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사랑할 만하시기 때문이 아니며, 그들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거기에 따른 대가가 있거나 혹은 그렇게 하도록 매수당했기 때문이라는 뜻이 암시되어 있다. 욥기는 순전함이라는 문제를 축으로 돌아간다. 욥은 하나님의 순전함이 시험당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부당하게 다루실 수 있는가? 그러나 욥의 모든 법적인 소송(항변)은 1-2장에서 제시된 보다 큰 재판의 상황, 즉 욥의 믿음에 대한 시험이라는 상황 속에서 제기된다.
욥의 이야기가 우리 현대인들에게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우리도 고난의 문제에 있어 하나님을 세운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창하고도 힘있는 어조로 하나님에게 답변을 요구한다. 그리고 욥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에 고개를 내젓는다.우리가 부당한 고난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는 데 욥기가 도움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욥기는 많은 대답을 제시하지 못하며,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욥기 1-2장은, 욥이 무슨 생각을 하든 욥기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욥이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욥이다. 욥기는 고통의 문제-내가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에 대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욥의 친구들
욥의 세 친구들, 이들은 상식과 이성이 공의로운 하나님은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실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 다음 논리단계로, 욥의 극단적인 고난은 그에게 상당히 심각하고 고백되지 않은 죄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혹평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이들을 즉석에 내치셨으며 이것은 당연하다.
욥의 친구들은 독단적인 교리주의자로 나타나 하나님의 신비스런 방법들을 변호한다. 이들은 설득력 있게 논증하며, 이들의 추론은 욥의 무절제한 감정 폭발과 대조된다. 이들은 자신의 교리와 논증이 옳다고 확신하면서 욥을 판단한다. 이들에게 있어, 문제는 분명해 보인다.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는 인간과 그들이 의롭다고 알고 있는 하나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조지 맥도널드는 이들의 태도를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보다 그분의 비위를 맞추고 규범을 지키는 것에 더 신경쓰는 바리새인들의 태도에 비유한다.
욥
욥은 풀 수 없는 딜레마에 봉착한다. 하나님을 거부하면 사랑의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근본적인 믿음, 곧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흔들릴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고난이 마땅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도 자신의 순전함을 손상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이처럼 극단적인 형벌을 받을 만한 짓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의 친구들은 선과 악의 끔찍한 싸움을 묘사한다. 욥은 선과 악 사이에서 더욱 끔찍한 도덕적 싸움을 싸우고 있다. 하나님의 공의가 욥의 무죄(순전함)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의미가 없다.
작은 승리
욥은 몹시 화가 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승리한다. 첫째, 욥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는 아내의 충고를 결코 따르지 않는다. 욥은 하나님의 공정함과 선하심과 사랑과 자신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하나님께 등을 돌리길 거부한다. 욥은 모든 증거가 그 반대라고 말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고뇌에 찬 역설을 안고 사는 쪽을 택한다. 욥은 수많은 것이 자신의 신념을 반증함에도 불구하고 공의와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념을 굳게 붙잡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다른 대안들은 더 나빠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욥이 하나님께 요구하는 내용은 그의 인격을 많이 보여준다. 욥은 절망이 그를 엄습해오고 자신의 믿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자 속히 죽기를 구한다. 왜?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욥 6:10) 그러나 죽음이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자 욥은 자신의 기도가 소망 없는 공허한 외침이라고 느끼고 “양측 사이에 손을 얹을” 중재자 또는 판결자를 요구한다. 그의 간구는 후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예수께 대한 예언으로서 멋지게 성취된다. 마침내 욥은 절망 속에서 자신의 요구를 한 가지로 줄이며 이 요구를 마지막까지 고수한다. 그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설명을 요구한다. 마지막 요구는 욥의 친구들을 격분시킨다. 마지막까지, 그는 하나님께 묻고, 그분의 설명을 요구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요구를 존중하신다.
하나님의 등장
엘리후는 지금 조그마한 욥에게 왜 하나님의 개입을 요구할 권리가 없는지 설명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이 때 하나님께서는 폭풍 가운데 나타나신다. 욥기 38-42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장엄한 말씀은 많은 주목을 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고난의 문제를 완전히 회피한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오직 한 가지만 비판하신다. 욥의 제한된 시각이 바로 그것이다. 욥은 불완전한 증거에 입각해서 판단을 내린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욥의 시야를 그의 비참한 상황에서 전체 우주로 넓히신다. 욥의 의심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의 계시 앞에 눈 녹듯 녹아내린다. 이 회개와 더불어 그리고 하나님의 화해와 더불어, 1장부터 계속되어 온 긴장이 마침내 해소된다.
욥과 같은 시대
근본적으로 욥은 고난의 위기가 아니라 믿음의 위기를 맞았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비극적인 사고, 말기의 질병, 또는 실직 등에 머리를 흔들며 이렇게 물을 것이다. “왜 하필이면 접니까? 하나님, 저한테 무슨 감정 있습니까? 왜 하나님은 그렇게 멀리 계시나요?”
이런 때 우리는 너무나 쉽게 환경-질병, 우리의 외모, 가난, 불운-을 적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버린다. 하지만 욥은 우리에게 믿음이 가장 필요한 순간은 바로 믿기가 불가능해 보일 때라고 가르쳐준다. 비극이 찾아올 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제한된 시각에 갇히고 말 것이다. 욥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비난하고 그분을 적으로 보려는 유혹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인간의 반응에 자신의 평판이 좌우되도록 허락하셨다. 욥이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을 가장 강하게 받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직접, 거의 현미경처럼 정밀하게 그를 보고 계셨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그때보다 더 가까이 계셨던 적은 없었다.
금처럼 정제된 가장 순수한 믿음은 극한 역설의 상태나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이 보류되는 상황에서 나타난다.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예수께서는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 알기 위해”(신 8:2) 시련의 시험을 치르셨다. 후에 훨씬 심한 시련인 십자가에서 예수께서는 (시편22편을 인용하시면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울부짖으셨다.(마 27:46). 욥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는 느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계속 의뢰하셨다.
우주적인 문제들
욥기의 앞부분은 하나님께서 한 인간의 악과 의에 많은 것을 거셨음을 보여준다. 욥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인류의 작은 역사가- 그리고 사실 나 자신의 믿음의 작은 역사가- 우주 역사의 큰 드라마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욥기는 우리의 믿음의 선택이 우리와 우리 자신의 운명 뿐 아니라 놀랍게도 하나님 자신에게도 중요하다는 놀라운 진리를 제시한다.
욥은 믿음이라는 가장 가는 줄에 매달림으로써 이 땅을 구속하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서 중요한 승리를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선남선녀들에게 우주의 구속에 참여하는 영예를 주셨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에 대한 순종을 통해 욥이 그렇게도 자세히 묘사한 이 세상의 고통과 불공평을 뒤바꾸는 일을 돕도록 허락하고 계신다. 타락을 뒤바꾸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믿음에 달려 있다.
욥과 고난의 수수께끼들
욥기는 정작 왜 선한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가에 대한 어떤 탄탄한 이론도 담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기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 많은 “간접적인” 통찰력을 제공한다.
1. 하나님께서는 욥의 문제를 허용하셨으나 실제로 고통을 일으킨 것은 사단이었다.
2. 욥기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능력이나 선하심이 부족하다는 암시는 없다.
3. 욥은 고난이 언제나 죄의 결과로 온다는 이론을 단호하게 논박한다.
4. 욥의 친구들은 내세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전혀 없었기에 하나님의 공정성-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인정과 비난-이 오로지 이생에서만 나타나야 한다고 잘못 생각했다.5. 하나님께서는 욥의 의심과 절망을 꾸짖지 않으셨으며, 그의 무지함을 꾸짖었을 뿐이다.
6. 어느 누구도 고난에 대해 다 알 수는 없다.
7. 하나님께서는 결코 완전히 침묵하시지 않는다.
8. 좋은 의도의 충고도 때로는 유익보다 해를 끼칠 수 있다.
9. 하나님께서는 논의의 초점을 욥이 고난을 당한 원인에서 그의 반응으로 다시 맞추셨다.
10. 하나님의 계획에서 고난은 ‘구속’이나 더 고상한 유익에 사용될 수 있다.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 시편
어깨 너머로 보는 편지
시편의 세세한 부분-범주, 해석적 의미, 논리적 일관성, 시적인 형태-에 집착함으로써, 시편의 요점을 놓칠 수가 있다. 그 요점이란 시편은 인간이 하나님께 쓰는 개인적인 편지와 매우 유사한 영적 일기장이라는 것이다. 시편의 수신인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을 시인의 ‘어깨 너머’로 볼 수밖에 없다.
시편은 믿음과 행위의 문제에 관해 하늘에서 주어진 사도적 권위가 있는 선언이 아니다. 시편은 시의 형태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분위기에서 기록한 개인적인 기도이다. 시편기자 중에는 농부가 있는가 하면 왕도 있고, 전문 음악가가 있는가 하면 순수 아마추어도 있다. 시편은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해 믿는 것과 실제생활에서 경험하는 것을 연결시켜보려고 애쓰는 ‘보통’ 사람들의 경우를 보여준다.
인생처럼 뒤죽박죽인 시편
우리가 시편을 찾는 것은 시인의 언어나 이미지가 우리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의 의도가 성공한다면, 우리는 지식보다 더 큰 것을 얻는다. 바로 변화된 시각이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거는 마술이다. 시편은 나의 영적 시각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바꾸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