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댄 동산 같은 내 영혼
루시 쇼 지음 | 요단
물댄 동산 같은 내 영혼
지은이 루시 쇼 지음/김동완 지음
요단/2001년 8월/253쪽/7,500원
제1장 하나님의 동산
하나님은 최초의 정원사였다. 세상이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처음으로 만든 것 중 하나는 바로 동산, 곧 정원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 하나님은 창세기의 첫 몇 마디가 명백히 가리키듯, 혼돈에 질서를 부여했다. 하나님이 들여온 질서란 광포한 혼돈 그 자체로부터 일구어낸 질서였다.
그 최초의 정원에서 하나님이 창조하고 장려한 성장과 삶으로부터 우리가 보고 적용할 것은 대단히 많다. 그 최초의 정원은 에덴이라 불렀고, 그 안에서 성장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조성되었다. 에덴은 목적과 한치의 오차도 없는 균형, 기후 조절과 계절의 순환, 영양과 성장, 적응과 재생산의 체계로 이루어진 동산이었다. 그런데 불순종한 두 인간이 추방된 후, 이 동산은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되었고 말 그대로 황량한 생태계로 변모했다. 최초의 불모성은 여기서 비롯된다.
척박하고 마르고 황폐한 광야는 사람의 적응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지역이다. 그러나 광야에는 소중한 교훈이 있다. 광야란 영적인 근력과 인내를 키워주는 도전의 장이다. 이런 도전을 거쳐 우리는 한 걸음씩 하나님의 성품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은 무궁한 자원을 공급하신다. 내게 필요한 것, 만나와 반석의 샘물과, 구름기둥을 보여주시고, 필요할 때는 정련의 불도 내리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광야로 불러내신다. 그 곳은 위대한 배움터다. 우리가 우리의 인간적인 능력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향한 전면적인 의탁을 배우는 곳이 바로 광야이다. 영적인 광야를 통과하는 위험한 과정은 예수와 함께일 때만 가치가 있다. 예수와 동행하며 광야를 통과하는 삶이 우리 모두가 바라는 위대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오염과 손상으로 얼룩진 우리의 21세기에 뭔가 모범적인 건강성 혹은 온전성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지만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세계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말 그대로의 야생이란 적절한 온도와 물이 있을 경우 자기 충족적인 건강한 생태계이다. 우리는 이 생태계에서 건강과 온전성의 의미를, 더 나아가서는 거룩함의 의미를 배울 수 있으나 자연의 일반적인 특징만을 취하거나 정형화시키고 멀찍이 서서 막연한 모습만을 경험함으로써 창조를 외소화한다.
우리 삶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하지 못하면 신학이라는 것이 그저 막연한 이론에 불과해 보이듯, 도시에서의 창조는 구체성을 결여한 막연한 개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창조의 근본 모습에 직접 다가서자. 이 자연이야말로 신의 취사선택된 모습만을 보여주는 책과 설교와 교회건물을 뛰어넘는 생생한 터전이다. 또한 자연은 하나님의 위대한 계시이다. 그분의 풍요, 다양성, 지식, 아름다움, 신비, 권능과 영광의 계시이다.
한편 우리는 늘상 무궁한 크기의 관점에서만 하나님을 생각하려 한다. 산과 바다가 그렇고 태양계와 은하계, 우주가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과 성을 초월해 계시듯 크기와 규모 또한 초월해 계신다. 우리의 두 눈을 열면, 달팽이의 나선형 소용돌이에도,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드러나는 잎맥의 회로에서도, 사물의 심부에 끝없이 펼쳐지는 분열 연쇄에서도, 소립자의 결정구조에서도 하나님은 섬광처럼 보인다. 또한 우주 공간과 태양계의 장대함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작고 하찮은 존재를 깨닫고 겸손함을 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2: 6-8)
제2장 나의 정원
나의 정원은 화려하지는 않았어도 집의 분위기, 환경, 주인에게 잘 어울리는 정원이었다. 정원은 숲을 배경으로 나의 집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나는 나의 정원을 가졌다는 사실로 인해, 뭐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내 집에 있다는 편안함을 느꼈다. 그래서 정원은 당분간 나의 상징이었다. 대체로 자연적인 여건을 그대로 이용해서 정원을 조성하고, 이 환경에 나의 사랑과 정성을 듬뿍 쏟아 붓는 동안 나는 창조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러나 자연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배웠다. 나는 내 환경 안에서 하나님 노릇을 해 보려고 했다. 이따금씩 내가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 독립과 자율의 삶을 원했듯, 내 정원에도 나의 질서와 통제를 원했던 것이다. 정원이란 뭔가 인공적인 개념이라는 사실도 배웠다. 자연 그 자체가 만들어내지 않는 자연, 즉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고 인간의 간섭과 예술성을 보여주는 공간의 개발을 위하여 식물 생장의 자연스러운 과정을 통제하는 행위의 인공적인 개념이다. 우리의 길들여진 정원이란, 우리가 하나님과 동역할 최상의 터전 중 하나다. 우리가 만드는 정원은 우리 영혼의 성장에 대한 하나의 비유가 아닐까. 그러므로 이제 나는 어디에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이 있어야 하고 어디에 질서와 정제된 아름다움이 있어야 하는지 알기 위해 기도한다.
자생력이 강해서 계절을 이어가며 스스로 자라고 씨를 떨구며 다시 성장하는 화초들을 선택해 심는 사람도 있다. 그 식물은 저 혼자 힘으로 그 지역 전체를 덮을 것이다. 스스로 자라는 이 식물의 영속성을 나는 하나님이 발현하신 가장 고도의 창조적 계획이며 미학적 감수성이라고 생각한다. 그 영속성이야말로 아름다움과 은혜는 인간의 노력 여하에 상관없이 퍼져 나가리라는 일종의 보장인 셈이다.
나는 기도한다. 하나님의 창조작업이 나의 식물들뿐 아니라 내 안에서도 계속되기를. 내 영혼이 그분의 정원이 되기를. 창조주께서 내게 ‘밝은 눈’을 주사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것들에 눈 맞추게 하시길. 이로써 작은 것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과 보살핌에 감사하기를. 내가 강해져야 한다면 나를 떠나지 마옵시고 당신께서 선택하신 거친 들로 나를 이끌어 주시기를. 내게도 작은사랑이 필요하다면 당신께서 내 마음 어루만지사 나 또한 당신 집 뜨락의 풀과 꽃이라고 위로해 주시기를. 내 영혼의 정원을 통제하려는 마음을 포기하고 정원의 주인이신 창조주께 맡기기를.
제3장 토양
쓰레기가 부패의 자연 과정을 거쳐 그토록 훌륭한 거름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종종 경이를 금치 못한다. 우리가 흔히 역겨운 부산물로 보기 쉬운 말똥이나 닭똥도 영양분에 굶주린 흙과 섞이면 그렇게 귀한 자원일 수가 없다. 그럴진대, 우리가 환멸과 실망이라고만 여기는 일들을 다잡아 더없이 좋은 쓰임새로 바꾸실 줄 아는 하나님을 보며 내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그분은 우리의 실수를 통해 배우게 하신다. 우리는 흔히 우리 선택의 결과를 짊어지고 살아야 하지만, 그 결과들이 우리 앞길을 밝혀주고 향후로는 좀더 지혜로운 결정을 하도록 도와준다. 살아 성장하는 것들을 향한 하나님의 풍요로운 계획이 나의 것과는 현격하게 다름을 깨닫는다. 하나님은 내가 생명과 성장과 아름다움만을 새겨내고 있는 그곳에서 성장은 물론 부패와 죽음의 순환을, 봄과 여름뿐 아니라 가을과 겨울의 순환을 마련해 놓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이를 지도자로 부르신다. 그러나 지도자의 길에는 항상 유혹과 함정이 있다. 가장 명백한 함정은 교만이다. 교만 혹은 자만은 우리의 성공이 우리 자신의 능력, 재능, 노력에 근거한다는 태도이다. 시기심 또한 함정의 목록에 가세한다. 또 다른 함정은 독립심이다. 나쁜 의미에서의 이 독립심은, 누구의 도움 없이도 우리 스스로 일할 능력이 있다는 거짓감정이다. 권력도 예외가 아니다. 권력은 빈틈없이 공격적인 논리와 개인적인 위광으로 다른 사람을 다루는 매혹적인 능력이다. 오늘날의 새로운 우상이 된 자아주의는 또 어떤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우리 자신의 가치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오늘날의 세태이다. 자아의 우월성은 그래서 우리의 신이 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참되며 균형 잡힌 시각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을까? 단 하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방식을 배우는 수밖에 없다. 그분은 겸손이 우리 영혼의 건강에 근본이 됨을 알고 계신다. 이것은 올바른 시각과 우선 순위의 문제이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우리 자아를 높이기보다는 현재의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일임해야 한다.
“주 앞에서 너희 자아를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약 4:10)
성서의 여러 비유들이 종의 순종과 겸손을 예거한다. 예수에게도 이 종의 겸손은 이론적인 원리로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공생애를 통해 일관되어 열두 제자들에게 종의 겸손을 실천하라고 가르쳤고, 그 자신이 직접 모범을 보였다. 요한복음 13장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예수는 성육신의 온전한 목적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예언자들은 우리에게 “묵은 땅을 갈아엎으라.”고 말한다. 오늘날의 기독교적 정서는 물살에 몸을 맡기듯 수동적이고 순응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묘하게 설득해 들어오는 이 세상 문화에 따라 우리의 삶과 가치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변화의 능력 앞에 우리의 영혼을 전면적으로 개방하는 믿음의 행위가 필요하다. 우리 스스로 영혼을 경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충격적인 쟁기질을 당해야만 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나는 나를 씨앗이 뿌려지는 토양으로 본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안 달라지는 것은 씨앗이 아니라 토양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 그러니까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의 토양에 뿌리내릴 수 있는 성서의 메시지요 전언이다. 씨앗의 처음 목적지는 뿌리시는 이의 손의 움직임으로 결정되며, 씨앗이 움터 싹을 내고 건강하게 성장해서 최종적으로 열매와 알곡을 내는 결과는 전적으로 씨앗을 받는 토양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경작하고 기름지게 할 수 있는가. 우선은 흙을 잘 다독거려 준비하는 일, 곧 경작이다. 겨우내 얼어 강고해진 우리 영혼의 표토를 갈아엎는 쟁기질의 과정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피할 수 없다. 그 다음은 각종 첨가물과 거름을 내는 일이다. 영혼의 토양에 거름을 주는 이 일은 종교적 실천이나 경건 훈련만이 아니라 전인적인 발전을 뜻한다. 풍부한 상상력을 추동하는 예술을 즐기고 추구하는 일, 다양한 책을 읽고, 묵상일기를 쓰며, 영혼의 친구와 우정을 쌓는 일 등등이 모두 창조주께서 우리 안에 기획하시고 공급해 주시는 아름다움과 의미를 고양시키는 과정이다.
하나님과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받아 주시고 만지시고 먹이시는 그 실재이며, 그 사랑에 대한 반응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위하여, 또한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나는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당신께서 우리 삶에 간섭하실 때
우리 비록 몸 사려 물러날지라도,
우리 마음의 토양을 고치소서.
우리를 쟁기질하시고,
우리에게 거름을 내시며,
당신의 좋은 씨앗으로 우리의 이랑을 채우소서.
쓰레기로 돌아갈 우리 삶일지라도
당신의 좋은 뜻을 위하여 사용하시고
우리를 경작하사 우리를 원대로 풍성한 열매를 내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지이다. 아멘.
제4장 씨앗
씨앗 그 자체에서 생명과 생장이라는 충일한 정서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점점 더 큰 것의 미덕만을 기리는 이 세상에서, 씨앗은 지극히 하찮아 보인다. 도대체 그 보잘것없는 씨앗이 싹이라도 틔울 수 있을까. 합리적으로 따지면 씨앗의 생애라는 전 과정은 불가능 그 자체이다. 이 불가능의 역설 때문에 아마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에 관해 가르치시면서 겨자씨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리라. 거의 생명이 없어 보일 정도로 미세한 유기물질인 이 겨자씨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결코 큰 일을 할 수 없을 것처럼 작아 보이는 믿음을 뜻할 것이다. 예수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복되다 들어 쓰시는 믿음은 바로 그 작은 겨자씨의 믿음이다. 그리고 이 작은 믿음의 원리는 바울에 의해 다시금 감동적으로 울려퍼진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 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패하게 하시나니.” (고전 1: 26-28)
예수께서는 농경적인 이미지와 이야기를 사랑하셨다. 밭 갈고 씨뿌리고 추수하고 짐승을 치는 그 친숙한 장면들을 얼마나 자주 언급하셨는지 보라. 씨뿌리는 자와 토양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 무화가 나무의 비유. 이 비유들의 의도는 듣는 이들의 공감이요 체험이었다.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유의 뜻이 열리지 않는다. 비유는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만 공감된다. 귀 있는 자들은 비유를 듣고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씨앗에 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받아들이려는 마음 밭에 뿌려지고 싹을 틔우는 씨앗 자체이다.
요한복음 12:24을 풀어서 말해보자. 나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자기 자신을 씨앗과 동일한 존재로 여기셨다고 생각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묻혀 세상에 대하여 죽지 아니하면 그것은 밀알 하나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묻혀 죽으면 싹이 나고 몇 배로 재생산된다. 너희도 이와 같다. 목전의 생명에 집착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목전의 생명에 개의치 않고 사랑으로 죽이면 영원히 그 생명은 참된 생명을 얻는다.” (유진 피터슨의 번안)
씨앗이 가진 힘은 엄청나다. 백 배로 증가하는 씨앗의 확산능력처럼 어마어마한 결과를 야기하고 개인의 삶과 민족의 운명을 바꾸기까지 하는 작은 것들의 힘은 성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먹은 열매 하나. 비둘기의 부리에서 노아가 얼핏 본 감람잎새 하나. 첫 번째 유월절 전 문설주에 바른 양의 피. 어린 사무엘이 한밤에 들은 음성. 절망하여 광야로 간 엘리야를 붙든 작고 세미한 음성. 과부와 그 식구들을 굶주림에서 구한 동나지 않은 기름병. 또 다른 과부가 배고픈 선지자에게 닥닥 긁어 바친 밀가루 한 줌. 과부의 두 렙돈. 물고기 입에서 나온 동전. 작고 사소하나 여러분의 삶을 바꾸어버린 것들을! 사람 마음의 풍경을 바꾸어버리는, 씨앗들과 같이 작은 것들의 힘을 결코 무시하지 마라.
무수한 씨앗들이 하나님에 의해 확산의 메커니즘이라는 놀라운 기능을 부여받아 창조되었다. 그러나 확산이나 예수의 복음서 말씀에 나오는 ‘떨어져 죽음’의 사건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수확이라는 결과가 실현될 수 있다. 그 확산, 그 죽음은 잡초처럼 불쑥불쑥 자라나 우리 자신의 자율과 주권과 결정권을 요구하는 자아를 하나님의 의지 앞에서 깨끗이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제5장 기다림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마치 산모의 태 안에서 새 생명이 자라듯 우리 안에서 왕성하게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와 역동적인 관계로 연합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면, 이제 우리 안에는 하루하루 조금씩 예수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세포가 태아로 발전해 드디어는 온전한 인간의 아기로 자라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기까지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기다림에는 힘과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님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일은 단번에 되지 않는다. 걷고 헤매고 다시 출발하고 넘어지고 구르고 일어서고 하나님의 손에 매달리고 그분께서 이르는 말에 귀기울이고 어느 곳에 서야 할지, 장애물을 어떻게 분간해야 할지 배우고 수 없는 연습으로 우리의 근육이 피로에 지치지 않도록 하는 이 모든 과정은 시간을 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