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함
헨리 나우웬 지음 | 두란노
친밀함
헨리 나우웬 지음/윤종석 옮김
두란노/2001년 7월/256쪽/5,000원
정황
마술에서 믿음으로
인간의 생애를 어머니의 안전한 태중에 있을 때부터 이생과 내생의 의미를 당당히 찾아 나서는 성인기까지, 각 단계별로 살펴보자. 이것은 ‘마술에서 믿음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모든 인간이 겪는 과정이므로 한 번쯤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살펴볼 가치가 있다. 우리는 인생의 각 단계마다 성숙한 종교 의식(意識)의 구성 요소가 되는 특정 발달 측면을 강조할 것이다.
* 유아기(출생 - 만 5세)
태어나서 처음 18개월 동안 우리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가슴 아픈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렇듯 마술적 세상에서 벗어나는 첫 단계는 객관적 실체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차원에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성공한 성인기의 사람들이 여전히 하나님을 자신의 일부로 생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우리의 존재에 구속받지 않는 타자이신 하나님이 겨우 내 행복을 지켜주는 부적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꽤 유익한 형태의 종교일 수는 있으나 성숙한 형태의 종교는 확실히 아니다.
그리고 둘째 단계인 생후 18개월에서 만 3세 사이는 언어를 습득하는 시기이다. 비록 주변에 내게 속하지 않은 것들이 있어 좌절을 느끼지만 이제 말을 통해 복수할 수 있다. 한편 마술적 단어는 인간에게 사물에 대해서는 물론 자신의 본능적 충동에 대해서도 통제력을 갖게 한다. 종교적 차원에서도 언어로 가득 차 있다. 긴 기도문, 감탄의 표현, 자주 암송하는 문구 등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이런 언어사용이 종종 마술적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기도가 진정한 대화의 통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지배하는 방편이 되는 것이다.
셋째 단계인 만 4세에서 5세 사이는 양심이 형성되는 시기이다. 양심이란 내면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제 인간에게는 타인이 가진 성품의 특정 측면을 내면화하여 자신의 일부로 삼는 능력이 생긴다. 도덕적으로는 사랑하는 이들의 판단과 기준과 가치를 취하여 자신의 성품에 통합한다. 그러나 내면화로 모든 문제가 다 풀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사랑과 은신처와 보호를 베푸는 전능한 아버지에 대한 필요는 매우 절박한 것일 수 있다. 인간은 안심하고 품에 안길 수 있는 마술적 아버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며 그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건강한 발달이란 마술적 세계에서 점진적으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다른 영역들에서는 발달하면서도 종교 면에서는 이 미성숙한 차원에 머무르기 쉽다. 그런 경우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마술적 위안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신다. 하나님이 타자(他者)가 아니고, 기도가 대화가 아니며, 종교가 창의적 자율성의 원천이 아닌 한, 우리의 종교 의식(意識)은 결코 성숙할 수 없다.
* 유년기(만 5세 - 12세)
이 시기는 초등학교 시절로써 여러 가지 면에서 인간의 주요 행동 유형이 강화, 수정, 확장, 붕괴되는 시기요, 첫 5년 동안 지내던 곳보다 훨씬 넓은 사회에서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는 시기다. 종교란 대체로 개인적인 것이 되기 쉽다. 자신이 자기 세계의 중심이 되어 많은 일들을 자력으로 하는 법을 익히면서 종교는 그야말로 성경 읽을 때나 주일에 걸맞을 뿐 새로 배우는 세상과는 하등 무관한 별도의 실체로 유리될 가능성이 크다.
성숙한 종교는 본질상 통합적이다. 자체 준거의 틀 안에 새로운 지식을 모두 통합하여 인간 지성의 새로운 모든 발견과 조화를 이룰 만큼 유연성이 있다는 뜻이다. 정말 성숙한 종교는 우주선에 십자가를 싣는다. 학교에 등교하면서 과학의 여정에 오른다. 새로운 통찰을 통합하여 현재의 입장을 수정하려는 끊임없는 의지야말로 성숙한 종교가 갖는 필수 요소이다.
* 사춘기(만 12세 - 18세)
지금까지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호기심이 많았고, 보고 듣는 모든 새로운 것에 마음이 들떴으나 이제는 자기 내면에서 깊고 낯설고 산만한 감정들을 만나게 된다. 알지 못하는 새롭고 어두운 충동들이 자신을 몰아가는 것만 같다. 의미조차 모를 정도로 강렬한 환희와 행복감에 도취되기도 한다. 죽고 싶고, 죽이고 싶고, 부수고 싶은 욕망의 피해자가 되기도 하며, 사랑과 미움 등 양극으로 상충되는 감정이나 개념으로 갈피를 잡지 못할 때도 있다. 이 시기는 종교적 발달의 중대 고비 중 하나이다. “나는 내면의 갈등을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가? 분명한 이해를 통해 그 갈등을 종교 의식(意識)이 성숙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가?” 많은 이들이 여기서 실패한다.
이 시기에 인간은 종교에 대해 크게 세 가지로 반응한다. 첫째, 종교란 너무 부담스럽고 억압적이며 인간의 모든 경험과 동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너무 권위적이고 부정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 따라서 갈등 해결의 유일한 길은 종교를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이것이야말로 더욱 해롭다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인간의 이면, 즉 어두운 욕망과 흉한 그림자를 한사코 부정하며 누르려는 성향이다.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고 싶어하며 악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성스러운 존재가 되려 한다. 혹시라도 내 손으로 해결 못할 사태가 벌어질까 늘 두려워하며 바짝 경직한 자세로 살아간다. 셋째, 성숙에 이르는 길로서 “물론 내게는 약점이 많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약해지는 것은 아니며, 흉한 생각이 많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흉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반응이다. 좋은 알곡을 거두려면 가라지도 함께 두어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분노를 품어보지 못한 사람은 뭔가에 긍정적 열정을 품을 수도 없다.
내적 통일성, 즉 총체적 온전함에 이르려면 자아의 모든 부분을 수용, 통합해야 한다. 이것은 평생의 과업이지만 사춘기는 이 부분에서 자신의 종교 의식을 시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갈등은 분명하다. 해답은 저항도 아니고 억압도 아니다. 통합이다.
* 청년기
이 시기야말로 분명 인생에서 가장 자유로운 시기라 할 수 있다. 부모의 가정은 떠났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가정을 이룬 상태는 아니다. 대학에서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기르고 과학적 접근을 배운다. 수용과 거부는 실험을 통해서만 결정되며, 필연성을 말할 때도 반드시 상대성을 고려한다.
종교적 발달에 있어서도 자신의 종교적 개념과 가치관을 “간접적인 것에서 직접적인 것으로”(올포트) 전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이다. 충분한 자기 수용과 창의적 거리감 정립을 통해 책임 있는 실험을 수행할 수 있는 기간이다. 대학 시절에 종교적 회의가 없었다면 그는 필시 무턱대고 맹종한 사람일 것이며, 종교적 환경에서 접하는 많은 모호함과 모순과 위선에 반감을 느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무엇에서도 진정한 만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반감을 느낀 사람은 모험에 나선다. 고통을 받으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외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절절한 고독에 빠지는 모험.
* 성인기
성인기의 한 측면은 성인의 마음이 통합된 인생 철학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다. 학업을 마치고 직장을 잡고 가정을 이룬 사람들은 “그래서 남은 게 뭔가?” 하는 의문과 함께 밀려오는 깊은 권태감으로 무력해진다. 마침내 모든 것을 이루지만 이제 몇 년 안되어 죽음으로써 세상을 떠나 잊혀질 것이다!
성숙한 종교 의식(意識)의 창의적 기능은 바로 이 부분에서 진가를 발한다. 통합 능력을 가지고 있어 수많은 단절된 조각들이 하나로 엮이면서 전에는 보지 못했던 하나의 유형이 드러난다. 성숙한 종교가 삶에 의미와 방향을 주고 목표를 찾아 주며 성취할 사명을 일깨워 준다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다. 성숙한 종교로 인해 인간은 가정과 직장과 나라를 뒤로하고 고통받는 가난한 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헌신할 수 있다. 수도원에 들어가 침묵과 고독과 묵상에 파묻힐 수도 있다. 이처럼 새로운 시각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마술에서 믿음으로 오는 여정을 마감한다.
친밀함과 성
사랑의 도전
“사랑이란 과연 유토피아의 꿈인가, 아니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관계에서 권력을 배제한 채 완전히 자신을 내어 줄 수 있을까?”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우선 두 가지 중요한 존재 형태에 대한 신중한 묘사와 이해로 시작하고자 한다. 권력의 형태와 사랑의 형태, 혹은 탈취의 형태와 용서의 형태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이 두 형태가 파괴 및 창조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살펴보려 한다.
* 탈취의 형태(권력의 형태)
삶의 많은 조각들에서 의미 있는 전체를 끌어낼 수 없으며, 늘 불안에 떨고 긴장해 있으므로 여유가 없고, 집중력과 창의력도 잃어버린다. ‘내가 누구인가?’보다는 ‘남들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가 더 중요하며, ‘내 생각이 어떤가?’보다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가 더 중요하다.
이러한 상태에 머물 때 인간은 두려움이 동기가 되어 권력을 좇아 행동한다. 완전 무장 자세로 타인의 행동을 감시하다가 적시에 약점을 잡아 일격을 날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좋은 직장, 좋은 대학, 좋은 부대, 좋은 배우자를 놓칠 수도 있다. 이렇듯 아주 미묘한 형태로 우리는 자주 탈취의 누에고치 속에 몸을 숨기고 살아간다.
연애하는 남녀의 경우 남자는 여자와 단둘이 있는 것보다 차라리 다른 친구들과 함께 교실에 있는 쪽이 더 편할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자유로이 애정과 기분과 생각을 털어놓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욱 자의식에 빠져 적시에 정답만 말하게 되며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다. 멀리서 보면 사랑 같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두려움일 때가 많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나는 탈취 당해 주변으로 밀려나고 싶지 않아.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내가 쥐고 싶어. 그리고 여차하면 차이는 것보다는 차는 편이 항상 낫지.”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통해 회의를 느낀다. ‘사랑’도 실은 실상을 가리는 위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회의를 갖게 된다. 사랑도 그 탈을 벗겨 보면 결국 동료 인간을 탈취하여 미묘하게 전권을 행사하는 또 하나의 방편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파멸’은 인간 존재의 불가피한 측면이 된다. 탈취 형태의 삶이란, 내 약점은 언제나 내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며 인생에는 안전지대가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토머스 머튼은 비폭력에 대한 그의 연구에서, 탈취의 존재 형태는 악의 치유 불능이라는 개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수와 실패와 잘못은 나의 인생 경력에 변화 불능의 요소로 남는다. 악이란 결정적인 것이요 변화될 수 없는 것이다. 치유 불능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파멸이다. 악이 용서될 수 없다면, 탈취의 형태로 살아가는 이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악을 잘라내고 뿌리뽑아 불태우는 것이다. 그 결과 온유와 긍휼과 사랑은 불필요한 약점으로 전락한다.
이것이 전쟁과 증오의 역학이다. 정신 병원에서 고생하는 수많은 사람들, 싸우는 부모 밑에서 깊이 상처 입은 많은 아이들, 연인과 헤어져 홀로 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남녀들을 보노라면 탈취의 존재 형태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는 의문마저 든다. 탈취의 형태는 권력의 형태요, 그 권력이 내 것이 아닌 한 파멸은 자명하다.
이런 관점에서 탈취와 권력과 궁극적 파멸이라는 악순환의 노예가 되고 만 인간에게 사랑이란 숙명적으로 불가능하다. 권력의 사람은 비아냥거리며 말할 것이다. “사랑과 평화와 용서는 아직 이 악순환에 들어서지 않은 이들의 꿈이다. 그러나 조금만 기다려 보라. 지극히 원시적인 생존 욕구에 떠밀려 그들도 치유 불능의 언어를 내뱉을 날이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도 삶을 탈취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삼켜 버릴 것이다.”
* 용서의 형태(사랑의 형태)
우선 사랑의 특성을 몇 가지 살펴보자. 사랑은 무엇보다도 ‘진실’하다. 약자의 교제에서 진실은 자유로운 행동의 흔들리지 않는 기초다. 진실이란 일차적으로 ‘인간 위에 인간 없다.’는 기본적 인류 조건을 온전히 수용한다는 뜻이다. 인간의 상황에 항상 솔직할 때에만 우리는 서로에게 충실할 수 있고 거짓과 피상적 꾸밈과 위선을 벗어날 수 있다.
사랑의 둘째 특성은 ‘부드러움’이다. 사랑이 탈취의 형태를 초월한다는 사실을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부드러움일 것이다. 사랑할 때 손은 탈취하거나 빼앗거나 움켜쥐지 않는다. 어루만진다. 어루만지는 행위는 인간의 손이 부드러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자상한 손길은 성장하게 한다. 정원사가 자상한 손길로 꽃에 빛이 비치게 하고 자라게 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손은 상대로 하여금 온전한 자기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사랑할 때 입은 물거나 삼키거나 파괴하지 않는다. 키스한다. 키스는 탈취가 아니라 두려움 없는 온전한 헌신의 표현이다. 사랑할 때 눈은 열쇠 구멍으로 낯선 사람의 몸을 탐하지 않으며, 아들 함에게 벗은 몸을 들킨 노아처럼 노출의 수치심을 유발하지 않는다. 사랑할 때 눈은 감탄하는 미소의 따뜻한 온기로 상대의 몸을 덮어 준다. 그것이 부드러움의 표현이다.사랑의 가장 중요한 마지막 특성으로, 사랑은 완전한 ‘무장 해제’를 요구한다. 사랑의 만남은 무기 없는 만남이다. 어쩌면 개인간 만남의 무장 해제가 국제적 무장 해제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가장 친밀한 관계 속에서도 아주 능숙하게 총칼을 뒤에 감춘다. 지나간 상처를 품고 있는 것, 상대의 동기를 삐딱한 눈으로 보는 것, 가벼운 의심 따위는 다 방어용 무기로 등뒤에 감춘 칼처럼 날카로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우리는 과연 아무런 방어 없이 동료 인간을 대할 수 있을까? 자신의 취약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을까?
사랑할 때 남자와 여자는 모든 형태의 권력을 벗고 완전한 무장 해제 상태로 서로 부둥켜안는다. 벌거벗은 그들의 몸은 약한 부분까지 조금도 숨기지 않고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는 것의 상징일 뿐이다. 조건부로나 한시적으로 또는 정신적 제약 속에 이루어지는 모든 성 관계는 아직도 탈취의 형태에 속한 것이다. 사랑은 제약이 없다. 서로 온전히 헌신할 때에만, 즉 평생에 걸쳐 자신의 전 인격을 내어 줄 때에만 남녀의 만남은 온전한 결실에 이를 수 있다. 약점을 온전히 내보이는 상태에서 새 생명이 태어나며, 이것이 바로 사랑의 신비이다.
우리 인생은 종종 권력으로 파괴하는 탈취의 형태와 용서로 창조하는 사랑의 형태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아주 고통스런 과정이다. 우리는 냉혹하게 경쟁하기 원하면서도 용서하고 싶어한다. 힘과 성공을 바라면서도 자신의 이면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죽이고 싶지만 감싸주길 원하기도 한다. 상처를 주고 싶지만 도와주고 싶기도 하다. 이 세상은 현실주의야말로 권력을 좇는 인생관이라고 우리를 끊임없이 다그치지만, 선뜻 이해가 안 되면서도 마음을 끄는 선지자들의 말이 있다. 선지자들은 또 다른 대안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늘 일깨워 준다. 하나같이 ‘회심’, 즉 ‘마음의 변화’를 촉구하는 말이다.
인생의 유일한 현실적 최종 해답이 죽음이라면 그 외에 무엇을 바랄 수 있으랴.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면, 인생이 두 암흑 사이에 끼어 깜박이는 희미한 불꽃에 지나지 않는다면 현 실존에 던져진 채 그대로 삼켜지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면, 거기서 안전을 바란다는 것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병적인 짓이다. 그 경우 우리에게 남는 것이라곤 권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불꽃을 지키면서 생존에 집착하는 일뿐이다. 비겁한 일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는 것보다는 비겁한 편이 낫지 않은가.
심리학자들은 이 시점에서 멈추며, 철학자들도 여기서 의문 부호로 마지막 문장을 끝낸다. 우리도 여기서 멈춰야 한다. 누군가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없다면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깊은 절망과 고독의 감옥에서 마음이 더 강퍅해지고 독해지는 것이 라니라 오히려 ‘한 새로운 사람’의 음성에 민감하게 귀가 열릴 때가 있다. 들을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그의 말을 들을 수 있고, 읽을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그의 말을 읽을 수 있다. 많은 이들이 그에게 반감과 분노를 품는다. 그러나 거기 속하지 않은 적은 무리에게 그는 희망의 표징이다. 이 새로운 사람은 기쁨으로 이렇게 선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