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장경철 지음 | 두란노
문화읽기
장경철 지음
두란노/2001년 7월/203쪽/4,500원
1장 범람하는 대중문화의 물결
밀레가 그린 만종이라는 그림이 있다. 멀리서 예배당의 종소리가 들려오고 한 쌍의 부부가 석양을 배경으로 경건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며 경건함의 가치를 가르쳐주는 그림이다. 나는 그 그림 안에 있는 영성을 부러워하면서 “우리는 그때의 영성을 오늘도 재현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 시대는 주변에 고요한 자연이 숨쉬고 있었고, 요란한 자동차와 소란스런 대중매체의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예배당의 종소리만이 마을에서 가장 크게 들리는 소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언론과 방송, 음악, 자동차 소음 등에 영향을 받고 있다. 이러한 대중문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녀를 건강하게 양육하며, 학생들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르칠 수 있을까?
그러면 먼저 문화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이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기 전에 단어의 뜻을 안다는 것은 그 용법(쓰임새)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번은 아직 언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셋째 아이가 질문을 했다. “아빠, 만약이 뭐예요?” 나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다가 문득 말의 뜻은 용법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되물었다. “만약 아빠가 대답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래?” “아빠를 미워할 거예요.” 만약 비가 오면 어떻게 할래?“ ”우산을 쓰고 나갈래요.“ 이렇게 만약이 들어가는 문장을 네다섯 개 말해주었더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처럼 문화의 뜻을 알기 위해 우리는 문화라는 단어가 쓰이는 예를 살펴보아야 한다. 문화는 다음의 네 가지의 뜻으로 사용된다. 첫째, “우리 민족은 문화민족입니다.”라고 하는 용례에서 보듯이 문화는 야만적이거나 후진적이지 않음을 뜻한다. 둘째, “우리는 식생활 문화를 개선하고 토론문화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는 말에서 문화는 일종의 삶의 방식 또는 일상적인 삶의 영역을 의미한다. 셋째, “나는 신문의 정치면을 안 봐. 주로 문화면을 애독하는 편이야.”는 말에서 문화는 연극, 영화, 음악 등과 같은 오락이나 유흥의 측면으로서 여가시간에 즐길 수 있는 삶의 영역을 의미한다. 넷째, “이제는 굴뚝산업의 시대는 지나가고 영화, 게임, 소프트웨어, 캐릭터상품 같은 문화산업의 시대야.“라는 말에서 문화는 단지 무형적인 활동이나 작품에 그치지 않고 주요한 산업활동의 영역을 의미한다.
그리고 문화의 또 다른 의미를 알기 위해 문화와 대비되는 단어를 살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다음 문장을 살펴보자. 강은 자연이다. 그러나 운하는 문화이다. 석영은 자연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든 화살촉은 문화이다. 고함을 지르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지만 언어는 문화적인 것이다. 문화는 인간의 마음과 손이 만든 것이다. 이상에서 문화와 대비되는 단어는 자연이다. 그럴 때 문화란 있는 그대로의 상태(자연)가 아니라 사람의 손이 가해진 상태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문화를 먹고 소비하며 문화 속에서 살며 문화를 호흡하고 있다.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우리는 문화를 소비하고 향유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문화에 물들어 가고 있으며 문화는 우리의 행동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한 사회의 문화수준에 따라 우리의 행동양식이 결정되기도 한다. 이처럼 문화는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우리의 의식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상과 흐름은 빠르게 우리의 정신에 스며들고 이런 문화는 우리의 의식을 물들이고 동화시킨다.
옛날에는 소수의 지배계층만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었지만 근대 이후 과학기술의 발달과 경제적인 산업혁명 및 정보혁명으로 대중은 여분의 시간과 자원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여유 시간과 자원의 발생이 대중문화의 탄생에 기여한 것이다. 이 대중문화는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들은 선생님의 말은 잘 흡수하지 않지만 텔레비전을 통해 흘러나오는 문화적 내용물들은 잘 흡수한다. 특히 향락적인 대중문화는 사람들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특징이 있다. 대중문화는 우리의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까지 바꾸고 있으며 점차 무감각한 영혼이 되게 할 수도 있다.
대중매체에 노출됨으로써 우리의 정신이 동화되는 과정은 개구리를 삶는 과정과 비슷하다. 뜨거운 물에 곧바로 개구리를 넣으면 뛰쳐나오지만 미지근한 물에 개구리를 넣고 온도를 조금씩 높이면 개구리는 뜨거움을 느끼지 못한 채 곰탕이 되어간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 시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어항 속의 금붕어와 같다. 그들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단지 어항 안에서의 자유만 누릴 뿐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주어진 몇 가지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것에 불과하다.
대중문화에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대중문화의 상품화 현상이다. 문화상품화로 인하여 문화는 부와 이익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상품으로 부각되었다. 농업상품에서 공업상품으로, 공업상품에서 문화상품으로 옮겨갈수록 부가가치는 높아진다. 쥬라기 공원이라는 영화를 통해 우리는 문화상품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스필버그 감독이 이 영화로 벌어들인 돈이 우리 나라가 미국에 일년 동안 자동차를 수출해서 벌어들인 수입을 능가한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동차는 판매 즉시 소유권이 상대에게 넘어가지만, 문화상품인 영화는 그 소유권까지 상대에게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문화상품의 위력 때문에 문화를 아끼고 사랑해서가 아니라 부와 명예를 챙기기 위한 수단으로 문화에 큰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대중문화의 두 번째 특징은 오락화 현상이다. 문화가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키기보다는 가볍게 즐기는 측면에서 주요한 기능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화의 오락화현상 뒤에는 단조롭고 지루해진 현대인의 삶이 있다. 오늘날 노동이 분업화됨으로 사람들은 일상생활이 단조로워졌고, 인생이 지루해졌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노동 속에서 거꾸로 소외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소외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노동으로 자아실현과 기쁨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즐거움을 찾게 되고 이것이 문화의 오락화 현상을 가속화시킨 것이다.
2장 대중매체에 대한 이해
이제 우리는 대중매체와 이 대중매체가 우리의 삶에 초래한 결과들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인간의 삶 속에서 의사소통, 즉 커뮤니케이션은 매우 중요하다. 행복한 가정이나 집단은 건강한 커뮤니케이션이 있고, 병든 가정이나 집단은 왜곡된 커뮤니케이션이 있는 것이다. 마귀는 이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은 다 그대로 놓아두고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 구조를 왜곡시킨다. 서로 말이 안 통하게 만들고 관계를 나쁘게 만들면 좋은 사람들을 갖고도 얼마든지 나쁜 집단과 나쁜 가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에는 네 가지 방식이 있다. 첫 번째는 대인 커뮤니케이션으로 일대일로 대화하고 의사 소통하는 가장 직접적인 것이다. 두 번째로 그룹 커뮤니케이션이 있다. 한 사람이 적은 그룹을 대상으로 자신의 견해를 펼치는 것이다. 세 번째로 공중 커뮤니케이션이다. 제법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은 무엇인가를 매개로 하지 않으며 그 대상의 숫자에는 차이가 있지만 상대를 직접적으로 접촉하며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대상이 특정한 사람으로 분명히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네 번째의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의사전달의 대상이 직접적이지도 고정적이지도 않다. 이것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의사전달이다. 참고로 매스컴은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약자로서 의사를 전달하는 방식을 말하고 매스 미디어(대중매체)는 의사를 전달하는 도구로써 신문, 텔레비전 등을 말한다.
대중문화의 확산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대중매체(매스 미디어)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중매체에서 쏟아지는 정보(뉴스, 신문)들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지배한다. 이러한 대중매체의 보급은 우리 시대의 문화적 혜택이자 정신적 위기인 것이다. 우리는 가정과 학교에서 지식을 얻기도 하지만 차츰 대중 매체를 통해서 더 많은 지식을 얻게 된다. 더욱이 대중매체를 통해서 주어지는 지식은 더 강력한 권위를 획득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나온 지식만이 검증된 지식이며 진짜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대중매체의 영향력은 지식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대중매체는 윤리적 규범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허용되지 않는지 윤리적인 결정을 내릴 때에도 매스 미디어의 영향을 받는다. 또한 현재의 구매 취향이나 장래의 직업선택에도 그 위력을 발휘한다. 옛날에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서, 혹은 감명 깊게 읽은 책을 통해서 자신의 미래를 선택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장래를 선택할 때에도 텔레비전이나 영화의 영향을 더 받는다.
텔레비전과 같은 매체는 이제 우리 가족의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다. 어느 집에 가더라도 텔레비전은 보통 거실 한가운데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자녀들은 텔레비전과 접촉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텔레비전이 진짜 부모가 되어가고, 인터넷에 빠진 학생에게는 인터넷이 담임 선생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녀들이 컴퓨터와 텔레비전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장차 우리의 자녀의 미래를 유혹하거나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탄은 마침내 대중문화를 선택했습니다』라는 책에는 비디오를 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학생들의 실례가 실려있다. 잘못된 미디어와의 만남은 이렇듯 청소년들의 삶에서 탈선을 조장할 수 있는 것이다. 비디오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기초가 되는 사상 중에는 한때의 인기몰이나 돈벌이에만 도움이 되는 일회용 사상들이 많다. 일회용 용기들이 환경을 오염시키듯이 우리 안에 들어온 나쁜 사상들은 영혼을 병들게 하고 정신을 무디게 한다.
3장 성서적 문화관: 문화의 우상화와 이원론을 넘어서
창세기 1장 28절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우리는 이 명령을 문화명령이라고 한다. 여기에 정복이라는 말은 무자비한 지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다운 방식으로 다스리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기쁨으로 이 세상을 물들여 가고 동화시키라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정복이나 다스림을 정치적인 억압이나 경제적인 착취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듯이 우리도 자연세계를 하나님의 빛깔로 물들이는 문화적인 동화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문화에 대한 두 가지 잘못된 접근을 피해야 한다. 첫째 문화에 대한 일방적인 탐닉은 우상숭배의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이 자연을 벗삼아 살 때에는 자연의 물체들 중에서 우상을 택했고, 하늘의 별을 보고 살아갈 때에는 자신들이 섬길 우상을 하늘에 있는 별들에서 찾았고, 농업이나 목축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소나 짐승 등을 우상화하면서 살았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를 벗삼아 사는 사람들은 문화나 연예계에서 우상을 얻는다.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맹목적인 스타추종이라고 하는 우상숭배는 하나의 종교이다.
우상숭배는 인간의 종교성과 죄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혼자만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누군가를 믿고 기대는 것이며, 스스로 연약함을 절감하고 자신의 죄악을 알기에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두려워하고 피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일종의 대용의 하나님, 곧 사이비 하나님을 찾게 된다. 심판은 하지 않고 일종의 마취제처럼 쾌락의 느낌만 주는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상숭배가 있는 곳에 오히려 복음전도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모든 설교와 가르침과 전도의 핵심은 우상을 떠나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우상을 전혀 숭배하지 않고 자신만 믿고 사는 사람을 전도하는 것이 더 힘든 경우가 있다.
둘째, 우리는 문화를 외면하거나 적개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것은 성서적인 태도가 아니라 이원론에 빠지는 것이다. 이원론이란 영혼과 물질을 분리하고 정신과 육체가 분리하며, 종교영역과 세속영역을 분리하면서 후자를 정죄하는 태도이다. 사탄이 대중문화를 선택했다는 주장은 한편으로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영혼을 병들게 하므로 옳은 주장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탄이 선택하지 않은 영역이 없으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성서적 입장에서 볼 때 사탄을 지나치게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사탄의 계략에 빠지게 된다. 대중문화에서 사탄적 계략을 발견하는 것을 주요 신앙과제로 설정하는 것은 바람직한 접근이 아니며 성경적으로도 타당한 접근도 아니다. 욥기를 보면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의뢰했고 사탄의 시험에 굴복하지 않았다. 욥은 자신이 사탄의 시험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욥은 사탄을 의식하지 않았으며 시종일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셔서 시련을 안겨 주셨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문화를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다. 인생은 하나님과 그분의 선물을 즐기기 위해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아름다움과 기쁨을 창조하신 진정한 쾌락주의자이시다. 쾌락을 나쁘게 추구하는 것이 나쁘지, 쾌락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믿음 없이 살고 있다면 삶의 환희를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누리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와 은혜를 맛보고 믿음을 회복한 상태에서 주위를 보면 그때는 인생의 아름다움과 기쁨이 보인다.
사도행전에서도 회개와 믿음에 이르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이를 것이라고 한다(행3:19). 하나님은 신앙생활을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으로 규정한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데 있다. 예배에는 내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인생을 변화시키는 압도적이고도 엄청난 기쁨이 담겨 있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배하라는 명령을 주신 것이다. 전도도 영혼을 구원하는 엄청난 기쁨이 있기에 하나님은 전도하라고 명령하셨다. 봉사도 거저 받은 자가 거저 주는 기쁨이 있으며,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깨닫고 누리는 기쁨이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지만 마귀는 우리를 쾌락으로부터 이탈하게 만든다. 마귀는 우리에게 기쁨을 빼앗아 가고 쾌락에 대한 신기루적 환상을 제시함으로 쾌락의 갈증만을 줄뿐이다. 예를 들면 마귀는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직장에 대한 기쁨을 빼앗아 간다. 그리고 나중에 내가 어딘가 다른 곳으로 직장을 옳기면 기쁨을 얻게 될 것이라고 속삭인다. 가정에서도 배우자를 향한 쾌락을 없애버리고 다른 사람을 만났더라면 더 행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넣어준다. 마귀는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향한 선의를 부추기며 선을 행하는 나를 상상으로 그려보게 함으로써 기쁨을 준다. 그리고 매일 가까이에서 만나는 사람에게는 구체적인 적개심을 불태우도록 조장한다. 반면에 하나님은 언제나 구체적이시며 현재 있는 곳에서 기쁨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대중매체를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의 문명의 발전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오늘과 같은 문화적 혜택을 주셨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큰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기 전에는 인생에 대하여 겸손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대하여 믿음의 자세를 갖지 않는다.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많은 만남이 필요하며, 그 만남을 위해서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예전의 선조들은 오래도록 살면서 삶의 의미를 깨닫고 뒤늦게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믿음의 여정을 걷기도 하였다. 아브라함도 75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올바른 신앙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수명이 짧아졌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하여 문학 작가들을 보내주셨다. 삶의 동굴에 갇힌 우리가 문학작품을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우고 겸손을 배우며, 믿음의 사람과 신앙의 민족이 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원칙적으로 문화는 하나님이 선한 의도 속에서 허용된 것이며, 그 문화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잘 받아들여서, 그 목적을 온전하게 회복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람직한 대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