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넘어서
캐롤 스타우다처 지음 | 청양
1 부 최초의 충격사랑하는 이를 여읜 고통은 우리의 가슴과 머릿속에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살기 시작한 타인과 같다. 혼자 남겨진 사람들 대부분이 전에는 이런 고통은 겪은 적이 없다. 처음으로 혼자 남겨지고 났을 때의 슬픔의 과정은 낯설다. 32세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던 간호사는 예기치 못했던 남편의 죽음 직후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일주일이 지난 후에 다시 출근을 했어요. 의사들이 왜 왔냐고 묻더군요. 나는 화가 났습 니다. 출근하는 것 말고 달리 내가 뭘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지요. 나는 말했어요, "대체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런 경험은 처음이거든요."
무슨 일이 있을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게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수많은 다른 감정들과 현상이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힌다. 분노, 죄책감, 슬픔, 좌절, 두려움, 긴장 등. 때로는 죽은 사람의 음성을 듣거나 그 모습을 보기도 한다. 나는 지금 미쳐가고 있는 것일까? 앞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우선 '우리가 겪는 아픔은 변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하나의 과정'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개인의 성격, 기질, 혹은 상황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슬픔의 과정에는 쓰라린 상처, 두려움, 부정, 절망, 비애, 분노, 긴장, 정체성의 변화, 갈망 등이 수반되지만 이것들이 전부는 아니다. 이 중에서 몇 가지만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고,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둘 혹은 그 이상의 상태를 오가거나, 그중 몇 가지를 동시에 경험하는 것이 좀더 일반적이다.
일반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세 가지 주요 단계를 거친다. 충격, 삶의 해체, 그리고 삶의 재구성이 그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상실의 언저리를 배회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한가운데, 고통의 핵심을 통과해야 하며,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자신의 삶을 의미 있는 방식으로 지속시킬 수 있다.
2 부 사별의 고통불신과 마비상태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통보 받는 순간, "그럴 리가 없어요, 뭔가 잘못 아셨겠지요." 라고 반응할 수밖에 없다. 비록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을지라도 우리는 그 엄연한 현실을 연기하려고 한다. 장례식이 치러지는 동안 극단적인 불신과 무감각 상태에 빠지기도 하며, 이런 경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도 못한다. 어떤 부부는 아들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들의 두 친구를 비난했다. 하지만 그 두 친구는 장례식에 참석했었다. 남편의 장례식을 치른 지 일주일 후, 중년의 한 과부는 두 명의 사촌이 이틀 동안 자기 집에 머물면서 장례식 이후 여러 문제를 처리해 주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만일 이와 비슷한 경험,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외부와 '차단'되었던 경험을 한다면, 그것은 "보지도, 듣지도, 맛보지도, 만지지도 못한다면, 아무 것도 실제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외부적 사건을 인식하지 않고, 외부적 사건으로부터 자신을 절연시킴으로써 다시 말해 육체적·정신적 자아를 죽은 상태에 둠으로써 감정적인 죽음을 회피하려는 것이다. 이 같은 무감각 상태는 분노나 죄책감과 같은 불편한 감정을 억눌러 준다. 분노나 죄책감은 무감각 상태가 아니라면 대단히 압도적인 감정이 될 수도 있다.
몇 달 혹은 1∼2년이 지나서도, 죽은 사람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고 있는 자신,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으므로 사용하던 물건을 계속 보관해 두는 자신을 발견하더라도 놀랄 필요는 없다. 이것은 일시적 위안을 얻기 위한 자연스런 행동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해버리는 불신이나 부정, 오랫동안 지속되는 불신이나 부정은 정상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애도의 과정이 중지되고,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이 손상된다. 불신의 극단적인 예로, 죽은 남편의 외투를 20년 동안 같은 자리에 걸어두었던 과부의 이야기는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사별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선행절차로 장례식이 있다. 장례식은 죽은 이를 추도하고 완전한 이별을 고하는 마지막 의식이다. 현대 서구 사회에서 죽음이 처리되는 절차에는 미흡한 점이 많다. 다른 많은 문화권에서는 살아남은 이들이 격렬한 감정을 표현하고 애도에 필요한 시간이 적절히 주어질 수 있도록 하는 확고한 장례의식이 있다. 이런 문화권에서는 살아남은 이들이 병리학적 징후, 가령 만성 우울증이라든가 사별의 고통에서 기인한 육체적 질병의 징후를 내보이는 일이 흔치 않다.
분노의 경험우리가 사랑했던 그 사람은 살아야 했던 사람, 인생을 즐겨야 했던 사람, 더 많은 시간을 우리와 함께 보내야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우리의 남편, 아내, 동생, 아이, 친구가 죽는다. 이렇게 죽음이 찾아오면, 세상에 이보다 더 잘못된 일은 없어 보인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인생에 대해 그 나름의 생각과 기대를 갖고 있었다. 서로 삶을 공유했는데, 이제 그 사람은 여기에 없다. 세상은 이래야 한다는 생각은, 실제로 세상은 이렇다는 생각으로 바뀌어야 한다. 우리의 생각은 틀렸다. 우리가 분노하는 까닭은 우리의 신념체계가 틀린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현실과 대면하며 적대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여읜 사람에게는 정상적인 행동이다. 분노는 각자가 느끼는 고통의 논리적이며 자연스러운 한 부분일 뿐 아니라, 사별의 고통이 갖는 보편적 요소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러한 분노는 여러 양상으로 표출된다.
"하느님이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이를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흔히 던지는 질문이다. 또는 "세상이 공정하게 유지되도록 하는 힘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이처럼 부당한 일이 나한테 일어날 수 있는가?" "내가 그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배워왔던, 인생의 공정성이라는 게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너무나 부당하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왜 내 딸이 죽어야 했습니까? 자기 일을 그토록 잘 해나가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던 내 딸이 왜 살 권리를 박탈당해야 하는 겁니까? 내 딸은 훌륭한 학생이었고, 집안 일도 많이 도왔고, 친구도 많았고, 유머감각도 뛰어난 아이였습니다. 그 버스에 타고 있던 사 람 중 누군가 죽어야만 했다면, 왜 길 건너에 사는 저 애가 아니라 우리 딸입니까? 그 애 는 무단 결석을 일삼고, 마약에 빠져있고, 제 부모 속을 긁어놓는 아인데요, 왜 그 애가 아니라 우리 딸이어야 했냐구요? - 버스 충돌 사고로 딸을 잃은 어머니
이 대목에서 이 어머니는 좌절감과 극심한 고통이 배어나는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물론 자신의 딸 대신 다른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비논리적이며 비윤리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 어머니는 삶의 부당함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털어놓고 있었으며, 동시에 자신의 분노를 다른 사람을 향해 표출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리고 그 상황과 관련하여 우리가 갖게 되는 의문들에는 답이 있을 수 없다. 그 답을 찾기 위해 헛되이 애쓰는 동안 번민, 격렬한 증오와 적의, 환멸, 불합리한 생각은 우리의 감정적·정신적 상태의 일부가 된다.
우리가 가장 절실히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피하거나 수동적으로 행동한다면 이것도 분노를 촉발하는 계기가 된다. 장례식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친구들, 친척들, 이웃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하는 게 보통이다. 충격적 사건이 남긴 상처를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도 우리가 느끼는 슬픔을 인정해 주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살아남은 우리에게 세상은 결코 똑같은 곳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를 잃은 한 어머니는 그녀가 아주 잘 견뎌내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간신히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을 뿐이었다.
분노에서 치유로우리의 분노가 어디를 - 의학계, 우리 자신, 가장 친한 친구, 어머니, 이웃, 그 사람이 죽었던 사고에서 살아남은 다른 사람들 등 - 향하는가에 상관없이, 분노를 표현함으로써 우리는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몇 달이고 계속 에너지를 소모하는 상태에 빠져 있을 필요는 없다. 분노는 우리가 그것을 없애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을 소모시킨다. 하지만 분노를 해소하거나 약화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많다.
신체의 지구력을 요하는 활동, 가령 달리기라든가 수영, 자전거 타기, 테니스 등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분노를 표출하기 위한 활동이 반드시 스포츠와 관련된 것일 필요는 없으며,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 한 물건을 던지고 치는 것도 괜찮다. 어디론가 가서 혼자 소리를 질러보는 것도 좋다.
항상 '예의'를 앞세우는 집안에서 자랐던 한 영국 여성이 있었다. 어린 시절, 감정을 표현하려고 할 때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이런 주의를 듣곤 했다. "얘야, 넌 영국 사람이야." 그랬던 그녀는, 오십대 중반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격한 감정이 치미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숲을 지나 강둑을 따라 걸으면서 고래고래 소리 를 질렀어요, 전에는 그랬던 적이 한 번도 없었지요.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는데, 날 야단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군요. "조용히 좀 해라, 얘 야, 넌 영국 사람이야!"
일단 분노가 누그러지면 우리 자신의 내면을 좀더 깊이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을 향한 비난과 분노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예컨대 사랑하는 이를 살려내지 못한 '그 사람들' 즉 오진을 했거나, 과속 운전을 했거나, 가서는 안 될 곳에 가도록 부추긴 사람들만이 분노를 촉발시킨 대상은 아님을 서서히 인정하게 된다. 대체로 분노는 무력하고 버림받았다는 느낌에서 기인한다.
죄책감분노와 함께 사별 이후 치유의 과정에서 압도적으로 나타나는 감정 중 하나가 죄책감이다. 죄책감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 들 수도 있으며, 서서히 생각 속에 스며들면서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정도로 강력히 자리잡을 수도 있다.
미리 장례식 계획을 세웠던 것 때문에 얼마나 죄책감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마치 내가 남 편이 죽기를 바라기라도 했던 것 같았어요. - 불치 판단을 받고 6개월 후 남편을 떠나 보낸 63세의 과부
위의 이야기는 남편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통보를 받고 미리 장례식 계획을 세웠던 과부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죄책감을 보여준다. 그러나 죄책감은 과부들만 느끼는 것이 아니다. 사별 이후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여러 징후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이 죄책감이다. 사람들은 죄책감을 자극할 수많은 이유들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 우리가 왜 수술을 고집했을까? ◎ 아이들이 술을 마신 것 같다고 짐작했으면서도 왜 운전을 못하게 말리지 않았을까? ◎ 그의 불평을 막무가내로 무시해 버리지만 않았더라도. ◎ 정시에 도착해야 한다고 못박지만 않았어도, 서둘러 오느라 무단 횡단을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아이를 잃은 거의 대부분의 부모는 극도의 죄책감에 시달린다. 아이가 사고로 죽었다면, 사고의 유형과 상관없이 부모는 그 비극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데 죄책감을 느낀다. 아이를 잃은 부모는 몇 달 심지어 몇 년 동안, "어떻게 했어야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을 텐데..."라는 의문에 시달리며 괴로워한다.
죄책감은 제한적이고 자기 처벌적인 시각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이것들은 모두 왜곡되었거나 비논리적인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다. 인간은 그 본연의 필요에 의해 우주에 어떤 질서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갖는다. 이 질서가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에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거기에는 책임이 있는 누군가가 있다. 우리가 "누가 무언가를 다르게 했더라면,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라는 생각을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책임을, 그 고통을 결국 우리 자신에게 지우려 하는 것이다.
당신은 누군가의 죽음을 가능케 하거나 막을 수 있을 만큼 위력적인 존재가 아니다. 죽음은 대신 죽거나 교환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죽음 앞에 질서나 법칙은 없다. 그 사람이 죽은 것은 당신의 행위와는 전적으로 별개의 차원에서 일어난 사실일 뿐이다. 당신은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슬픔몇 시간 동안 죽은 사람 생각을 하지 않고 보낼 수도 있다. 며칠 동안 한 번도 무너져 내리지 않고 생활할 수도 있다. 그런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 무언가의 촉발로 출구를 기다리고 있던 감정들이 물밀 듯이 터져 나온다. 길을 걷다가 죽은 아들/딸을 생각나게 하는 아이와 마주쳤을 때, 라디오에서 남자 친구가 좋아하던 노래가 흘러나올 때, 아내와 절친했던 친구가 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언니가 보냈던 생일 축하카드를 우연히 발견했을 때, 꾹꾹 눌러왔던 감정들이 갑자기 분출한다. 이런 감정들이 항상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완전히 떨쳐낼 수 없는 깊은 슬픔을 느끼는 순간이다.
지금 슬픔을 억누르기 위해 애쓰고 있다면, 치유를 위해 꼭 필요한 감정 해소 절차를 미루는 것과 같다. 울고 싶을 때는 마음껏 울어야만 슬픔과 고통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다. 감정을 억압할 경우에는 여러 가지 신체적 징후가 나타나기도 한다. 불면증, 질식할 듯한 느낌, 불규칙한 호흡, 체중 감소 등이 그 예이다. 가까운 친구나 친척이 안부를 물어올 때는 솔직하게 대답하라. 슬픔에 빠져 있다면 그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거나 생각을 털어놓아라.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경험들에 대해 이야기하라.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글로 쓰는 것이 더 편안하다면, 그렇게 하라. 노트를 펼쳐놓고 마음속에 떠오르는 대로 솔직하게 적어 보라. 일기나 시를 쓰는 것이 반드시 여성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기억하라.
죽음을 납득하기 위한 노력죽음은 종종 뻔뻔할 정도로 '부당'해 보인다. 분명 죽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우리가 갖고 있는 종교적·형이상학적 신념의 내용과 정도에 따라서, 죽음은 불가해한 수수께끼처럼 여겨질 수도 있고, 그 대부분이 가설에 불과하므로 곤혹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죽음이 인류의 최대 딜레마이며 두려움과 투쟁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거나 우리가 겪는 고통의 한 척도로만 여긴다면, 우리는 죽음을 관찰하거나 검토해 볼 수 없다. 1970년대부터 죽음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 과학적 연구들은 '임사 체험'이라고 명명된 경험을 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수행되었다. 연구 대상자들은 '임상적 사망' 판정을 받은 사람들, 즉 호흡이나 맥박이 멈추고 임상적 사망 판정이 없었다 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죽음 근처까지 갔거나 중병, 사고, 자실 기도의 결과 외견상 죽음을 경험했던 사람들이었다
나이, 수입, 교육 수준은 각기 달랐고, 종교가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있었다. 개별 면담을 했을 때 이들은 각기 임사 상태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한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했다. 연구 결과 놀라운 현상이 발견되었다. 서로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이야길 했는지 알 리가 없는 사람들이 거의 똑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했다. 아래에 열거한 임사 체험의 몇몇 특징은 죽음이 무엇이며 어디에 죽음이 있는지 생각하는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 죽음은 긍정적인, 때로는 황홀한 경험이며 고요함, 확실성, 깊은 평화 속에서 평온한 상태가 된다. ◎ 외로움은 없다. ◎ 고통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