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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섹스, 권력

리차드 포스터 지음 | 두란노
돈, 섹스, 권력

리차드 포스터 지음/김영호 옮김

두란노/1989년/279쪽/7,500원



제1부 돈

돈의 어두운 면

성경 전체의 조망에 따르면 돈은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의 두 흐름이 있다. 돈이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위협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돈의 어두운 면을 본다. 한편 우리는 돈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오해를 하고 있다. 첫 번째는 부는 축복의 표시이고, 가난은 저주의 표시라는 것이다. 이러한 곡해는 개인적 평안과 번영만을 추구하는 기복주의 종교가 만연하는 현상을 초래하게 된다.

두 번째는 돈이라고 하는 것이 전적으로 중립적이고 비인격적인 것으로서 단순히 교환의 매개체라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돈의 배후에는 인격적 속성을 가진 힘(권세)이 있는데 이것은 끊임없이 우리를 지배하려고 한다. 그래서 예수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mammon)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고 하면서 이 재물을 하나님과 경쟁하는 하나의 영적 인격적 존재로 묘사한다.

이 맘몬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영적인 힘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편안함과, 자유와 능력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의 죄의식을 유발하기도 한다. 맘몬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전능성을 가지고 우리를 지배하려고 하며,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 보다 기필코 최고 우위를 차지하려고 한다. 사람이 돈을 사랑하게 되면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떤 종류의 악한 일도 서슴지 않고 하게 된다. 이처럼 돈에는 유혹적이고 악마적인 경향성의 어두운 면이 있음을 본다.

그렇다면 이러한 돈의 어두운 면을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 첫째, 우리는 돈이 많음과 적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의 감정을 잘 다루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이미 부유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돈에 대한 두려움과 좌절과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서로의 경험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넷째,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서 도와주어야 한다. 다섯째, 돈이 영원히 내 것이라는 생각을 단념해야한다. 여섯째, 기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누어 주어야한다. 우리가 돈에 대하여 이렇게 대처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억누르는 악마적인 세력에 대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의 밝은 면

한편으로 돈은 하나님의 은총으로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향상시키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구약에서 아담과 하와, 아브라함, 이삭, 욥, 솔로몬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물질적인 축복들은 그들의 영적인 삶과 긴밀히 긍정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신약에서도 돈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증진시키고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나타난다.

인간이 그들의 삶을 적절하게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물질의 공급은 바로 사랑이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다. 만물은 인간의 삶을 축복하고 향상시키도록 주어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대부분의 것들이 우리 행위의 결과가 아니며, 우리가 애써 얻지 않았고,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구원을 값없이 은혜로 받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물은 다 하나님께 속했고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은 소유자이고 우리는 그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다. 그것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여 내 돈을 얼마나 바치리이까?” 라고 말하기보다 “내가 당신의 돈을 얼마나 나를 위하여 보관하리이까?” 하고 묻게 될 것이다.

주는 것은 우리의 헌신적 삶에 진정성과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자극제가 된다. 우리가 돈을 내어주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는 것이며, 자기 중심적인 자아를 해방시키는 것이고, 우리의 거짓된 안전을 풀어주는 것이다. 베푸는 것은 우리를 돈의 횡포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며, 하나님이 우리로 무엇을 베풀기를 인도하실지 기대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을 발견해 가는 모험이 되게 해준다.

올바른 가르침과 훈련을 받은 신자들은 부패하지 않은 채 재산을 소유하며 그 소유를 하나님의 나라라는 큰 목적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다. 돈은 우리가 훈련받은 영적 생활의 한계 안에서 적절히 사용하도록 주어졌고, 인류의 이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관리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한편 예수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한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물질적인 삶을 영적인 삶과 연관시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여 살도록 가르친다. 돈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신뢰의 정신을 세우게 하고 믿음을 쌓아가게 한다. 이러한 신뢰와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정신을 기르도록 배움으로써 돈의 밝은 면을 찬양하게 된다.

불의한 재물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쓰라

돈은 때로는 약자를 못살게 굴고 억누르는 무기로 사용되기도 한다. 돈은 다른 사람의 충성심과 위신과 명예를 사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부패시키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이렇게 돈이 잘못 사용되면 그 어느 것과도 필적할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파괴적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돈을 정복하여 비경제적인 목적,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제대로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면 그 힘은 실로 무한정하다.

예수는 보물을 땅에 보다는 하늘에 쌓아두라고 한다. 그것은 돈을 보다 위대한 일에,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사용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악한 경향이 있는 돈을 정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회로 전향시켜야 한다. 가난한 이웃을 돕거나 기근에 시달리는 지역을 돕거나 복음전파를 위해서나 똑똑한 학생을 위해 투자하라. 이렇게 돈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 최선의 투자이다.

돈은 우리가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제적인 결정을 하는데 있어서 돈이 결정하면 돈이 우리의 주인이고, 하나님이 결정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다. “돈 때문에”라고 말하는 것과 “기도해 봅시다.”라고 말하는 것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돈에 대한 성경적인 통찰력을 바탕으로, 심리적, 사회적, 기술적 측면에서 돈을 잘 관리해야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양식의 변화를 지지해 줄 사랑의 지원 공통체를 규합하여, 우리의 탐욕과 이기심을 꽁꽁 묶어버리고, 관대함과 너그러움으로 우리의 돈이 선한 곳에 활용되도록 직접적, 구체적, 예방적 기도를 하여야한다. 우리는 돈을 우리 가치목록의 왕좌에서 끌어내고 돈과 물질에 대항하여 사람의 편에 서야 한다. 우리는 돈에 근거하여 사람들을 판단하거나,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지 말아야 한다.

노동은 생명을 주는 창조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의 선한 본질과 필요성을 인정하며, 노동이 인간의 삶을 풍성하게 해준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노동이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노사관계에서 사용자는 노동자의 불안한 감정과 자신이 통제 받는다는 느낌을 이해하고, 근로자는 사용자의 소외감을 이해하며 기업전체의 유익에 관심을 가짐으로 서로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단순한 삶에의 서약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단순한 삶의 서약으로 부름을 받았다. 단순한 삶을 사는 사람은 분열되지 않는 마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하나의 목적을 가진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만족이 가득하며, 탐욕으로부터 자유를 맛보며, 매사에 단정함과 절제 가운데 산다. 단순한 삶을 사는 사람은 필수적인 양식을 감사히 받으며, 돈을 남용하지 않고 선용하는 지혜가 있다. 이들은 돈에 대하여 관대하며 기꺼이 주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돈으로 할 수 있는 최상의 것 중 하나가 주어서 없애는 일이다. 주는 것은 물질이라는 우상을 정복하는 강력한 무기이며, 장사와 경쟁의 세계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다. 주려면 관대하고도 적절히 주어야 하며, 기꺼이 즐겁게 주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통제하거나 관리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돈은 통제의 도구가 아니라 사랑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돈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시간과 마음과 몸을 내어주어야 한다. 뜻을 같이 하고 도와줄 사람을 구하여야 한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때를 위해 적절히 나누어주기 위해 유언장을 작성해 두어야 한다.

한편 우리는 자녀들이 단순한 삶을 살도록 그들을 가르칠 책임이 있다. 그런데 아이를 가르칠 때에는 모범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그들에게 돈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좋은 점과 밝은 면이 많음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주는 용돈으로 그들이 십일조와 저축을 하게 하며, 돈을 현명하고 책임 있게 다루도록 적절한 통제와 자유를 주어야한다. 돈이란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돈이 유용하고 필수적인 것이나 존경과 경외의 대상도, 경멸의 대상도 아님을 가르쳐야 한다.



제2부 섹스

영성과 성

인류는 Imago Dei(이마고 데이),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 우리 인간의 성, 곧 남성과 여성은 참된 인간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사랑을 나누는 능력인 성적인 특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타락하기 전 아담과 하와는 성이 그들의 온 삶으로 연합되어 완전함이 있었기에 경쟁이나 우월 의식이나 개인주의나 부끄러움이 없이 상호 의존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타락한 이후에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인간성이 격하되고 관계성이 파괴되었다.

예수는 성이 너무나도 선하고 고상하고 거룩한 것이어서 값싸게 취급될 수 없는 것임을 아셨다. 그래서 예수는 음욕을 정죄하신 것이다. 음욕은 관계성을 거부하고, 그릇된 성을 창출한다. 음욕은 상대방을 대상이나 물건과 같이 비인격적 존재로 바꾸어 버리고, 성을 창조시의 가치보다 못하게 값싸게 만들어 버린다.바울은 결혼을 그리스도와 교회사이의 계약관계에 비유한다. 그는 독신생활에 관해 호의적으로 대변할 뿐만 아니라, 결혼을 인정하고 상호간의 성적 이행을 권면한다. 그것은 영적인 삶이 우리의 성을 풍성하게 하며 방향을 제시하고, 우리의 성은 우리의 영성에 현세적인 완전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성의 왜곡된 형태로는 첫째, 외설이 있다. 이것은 성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재미없고 진부한 것으로, 속된 것과 싸구려로 만들어 버림으로 현실과 괴리된 환상의 세계를 그려낸다. 둘째는 음욕으로서 이것은 일상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나 스치듯 지나가는 생각까지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끓어오르는 성적 초조감에 애태우며 지내는 상태이다. 음욕은 탈선이며 통제할 수 없는 뒤틀려 버린 성적 충동이다. 셋째는 가학적 변태성욕이나 피학대 음란증이다. 이것은 변질되어 강제추행이나 살인에까지 이르게 하기도 한다. 넷째는 남녀차별이다. 이것은 한편이 마음먹은 대로 지배하고 통제하며 소유하려는 것이다. 여성을 열등하게 보는 시각도 이러한 남녀차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은 동성애가 하나님께서 애초에 정해주신 패턴의 왜곡이라는 점을 시종일관 보여준다. 동성애는 자연스럽지 못한 것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없으며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우리는 기혼자가 혼외정사에 관하여 단호하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기준이 있듯이 동성애에 대하여 신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지침이 필요하다. 우리는 성생활에 대한 한계를 명확히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며 하나님이 정해주신 그 한계를 지나치게 되면 성은 파괴적이 된다.

독신생활과 성

성적인 결합은 육체적, 정서적, 정신적인 결합이다. 성관계는 삶을 연합시키는 행위로서 남녀의 인격적인 만남이고 영혼의 깊은 곳을 어루어 만지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혼외정사가 본질적인 범법행위이듯이 독신자의 성교에 대해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하게 금지를 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독신자들은 인격적인 사랑을 주고받으며, 정서적 성취를 맛보고, 자신들의 성적인 느낌을 스스로 통제함으로 자신을 성을 긍정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우리는 성감을 다스려야지 성감이 우리를 다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격노한 감정이 일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연합에 대한 의도 없이 맺어진 육체적 결합은 심령에 큰 상처를 입히는 행위이다. 50년간 선교사로 일했던 78세의 한 할머니는 밤낮으로 두려움에 떨었는데 상담을 해본 결과 16세 때 한 청년과의 사이에서 애정행각이 있었음을 생애 처음 시인하게 되었다. 60년 동안 할머니는 심령에 깊은 상처를 품고 살았던 것이다.

흥분된 감정이 어떤 사람을 취하고자 마음먹을 때, 즉 매혹이 음모로 바뀌는 순간, 성적인 흥분상태에서 영적 간음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음욕은 길들여지지 않는 소유하고자 하는 과도한 성적 열정이며 성적인 공상을 통해 경험하는 일상적인 성 의식과는 다른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성적 환상을 음욕과 동일시하여 스스로를 정죄하는 무력감에 빠지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수음은 그 자체가 그릇된 것은 아니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상적인 경험이다. 수음은 수많은 청소년들의 육체적 정서적 사회적 성숙의 과정에서의 불균형을 보상하며 건전한 성적 활로를 열어주는 면도 있다. 하지만 성욕은 또한 통제될 필요가 있다.수음을 통해 성적 환상에 빠지고 그것에 집착하여 강제로 빠져들게 되면 절망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수음행위에 사로잡히게 되면 될수록 더욱 우상화되는 것이다.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수음행위는 자신감과 자존감에 큰 상처를 주고 우리로 낙담하게 하므로 경계해야한다.

결혼하기 전에는 애정을 표현하려는 열정을 잘 통제해야 한다. 서로의 애정을 표현하는 다양한 행위들은 성교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 개방성을 지녀야 한다. 육체적인 친밀도가 상승하는 만큼 상호신뢰감을 높여 가는 것이 좋다.

결혼과 성

일반적으로 결혼에 있어서 중요한 기초는 낭만적인 사랑과 성적인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의 결혼에 있어서는 이 두 가지가 필요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부르심과 소명이라는 문제이다. 결혼을 통하여 이웃과 신앙공동체 모두의 행복을 위하고, 하나님 나라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지, 장애가 되는지를 고려할 일이다. 또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그리스도의 제자직에 보다 충실할 수 있는가와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에 이바지하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둘이 하나로 기능하는 실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낭만적 사랑은 언젠가 식기 마련이다. 결혼이라는 한 몸의 실재를 체험함으로 우리는 낭만적 사랑을 이겨낼 수 있다. 결혼서약은 타인과의 평생의 교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생활에는 우리의 최고 수준의 노력이 요구된다.

결혼한 이에게 성은 감미로운 경험이요 축복된 은사이다. 서로의 관계를 향상시키고 만족을 주는 일은 무엇이든지 주 안에서 자유롭다. 그런데 성생활에 싫증을 느끼는 이유는 한 몸을 이루는 인격의 연합이라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도전으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성장하면 성적으로도 친밀해지는 것이다.

결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영원한 한 몸의 실재가 되게 하는 데 있으므로 나뉠 수 없다. 하지만 연약한 여성들이 악한 남성들로부터 보호받도록 이혼을 허락하는 것이다. 1세기 당시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자기 아내를 내어버리는 남자는 그녀를 간음하게 하는 자라고 예수께서 질타하신 것은 쫓겨난 여인이 살아갈 수 있는 당시의 유일한 방법은 거리에서 몸을 파는 직업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생활의 지속이 이혼보다 현저히 파괴적일 때에는 종지부를 찍어야 하지만 내어버려서는 안 된다. 적절한 재산 분배로 살 방도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는 예수의 말은 재혼을 반대하는 의미가 아니라 남녀간의 차별을 경계하는 말이다. 1세기 당시의 문화적 상황에서 여성을 마치 가축을 사고 팔 듯이 하고, 이혼과 재혼을 반복하는 남성들의 우월적 성차별의식과 파괴적 공격적 태도를 지적하신 것이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대하실 때에도 이혼에 관하여 사실만 진술하고 문자적으로는 아무 정죄도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혼에 관하여 그녀는 할 말이 없었고 다만 다섯 번이나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재혼에 대하여 간음이라 하신 것은 남자가 여자를 대하는 그러한 모욕적인 태도를 두고 하신 말씀이며, 아내를 버리지 말고, 잘못되어 손상을 입은 결혼관계를 회복하라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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