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강한 남자
에드윈 루이스 콜 지음 | 두란노
위기에 강한 남자
에드윈 루이스 콜 지음/김홍경 옮김
두란노/1999년/219쪽/6,500원
1. 도전
꿈
남자들은 모두 영웅으로 칭송 받는 꿈을 꾼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하면 영웅이 되는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월드 시리즈 일곱 번째 경기에 9회말이라고 하자. 당신의 팀이 지금 5대 2로 뒤지고 있는데, 베이스마다 주자들이 나가 있고, 당신은 타석에 그리고 볼 카운트는 쓰리 볼에 투 스트라이크이다. 바로 그 순간 당신은 홈런을 쳐서 볼을 담장 너머로 넘겨 버리고 베이스를 돌아 역사적인 순간을 기록한다.
이런 일은 머리 속에서나 꾸며볼 수 있는 영웅적 환상이다. 남자들은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영웅이나 순교자 그리고 군인들은 자기 자신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놓는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자기 성취와 자아 인식 그리고 자기 만족 등을 추구하느라 진정한 남자, 영웅, 지도자가 가져야 하는 것을 잃어버렸다. 남자다움이 소멸되면서 스트레스에 좌절하며 굴복했고, 부도덕과 불법 그리고 비윤리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로 인해 우리의 이상까지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오늘의 세상은 기술적으로는 진보하고 있지만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는 퇴보하고 있다. 자녀들에게 좋은 시민이 되고, 법을 준수하며, 성실하고 도덕적으로 행동하라고 가르쳐야 할 아버지들이 자신들의 문란한 생활방식을 인정하라고 맹렬하게 요구하고 있다.
지금 이 세상은 철학의 상실을 극복하고, 다시 세상에 질서와 희망 그리고 존엄성을 가져다 줄 강한 남자들을 찾고 있다. 세상은 영웅적인 남자들을 간절히 바란다. 그들은 문화적인 타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도덕 가치와 윤리적 행동 그리고 정직한 성품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피뢰침의 역할을 감당해 나갈 것이다.
부르심
어제 나는 마음이 심란한 아버지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의 딸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려 한다고 했다. 기독교인이며 대학원생인 그녀가 화가 나서 덧붙인 이유는, 예수 믿는 미혼 남자들은 모두 나약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강한 남자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들의 삶과 가족과 일을 질서 정연하게 해나가야 할 기혼 남성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세상의 압력에 불복하기에도 지쳐서 이제는 남자다운 힘을 발견하고, 그것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미혼 남성들에게도 요구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자기가 나약하고 무기력한 사내가 아니라, 진정한 남자임을 아는 그런 남자들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강한 남자다움을 가진 남자, 어떤 경우에도 다시 일어날 힘이 있고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그런 남자가 필요하다.
위대한 투수 놀런 라이언은 일곱 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을 때, 온 세상을 흥분시켰다. 그의 투구 내용이 편집된 비디오를 보면, 투구 하나 하나가 모두 성공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훈련 중에 익혔던 투구법에서 결코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군중 앞에 더 잘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개인적으로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는 위대해진 것이다. 무엇이 되려고 하든 간에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집중해서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지식의 가장 낮은 단계는 가정이다. 그 위에 지식이 있고, 그리고 이해, 그 다음은 지혜로 이것은 응용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 단계가 숙련이고 마지막 단계는 실천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알고 이해할 수 있으며, 한두 번 정도는 성공적으로 그것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성공은 똑같은 것을 날마다 반복해서 수행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정점에 이를 때까지 사는 것이 아니다. 정점에 이른 삶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근본 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남자다움을 확립해 나가야겠다. 명예는 어느 순간에 오지만, 위대함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위대한 사람은 오랜 세월 동안, 그 세월이 무엇을 가져다주는가에 상관없이, 그들이 성취한 것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2. 궁극적인 결단
믿음의 중요성
한 인간의 믿음 속에는 그의 삶을 좋게 또는 해롭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모두 내재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옳지 않은 것을 배우고 있고 옳지 않은 것을 믿고 있지만, 그것을 지독스럽게 고수하고 있어서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변화하기보다 차라리 잘못된 상태에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 그러나 변화해야 하는 때가 반드시 있다.
어떤 배의 선장이 안개가 잔뜩 낀 어느 날 밤 그가 타고 있던 배를 향해 다가오는 다른 배의 불빛을 발견했다. 그는 신호수를 시켜서 다른 배에게 신호를 깜박이게 하였다. “진로를 남쪽으로 10도 바꾸시오.” 그러자 이런 회신이 왔다. “당신이 진로를 북쪽으로 10도 바꾸도록 하시오.” 그 배의 선장은 다시 이렇게 신호했다. “나는 선장이오. 진로를 남쪽으로 바꾸시오.” 그러자 거기에 대한 답신은 이랬다. “나는 일급 항해사요. 당신이 진로를 북으로 바꾸시오.”
화가 잔뜩 난 선장은 다시 신호를 보냈다. “진로를 남쪽으로 바꾸시오. 나는 지금 전함에 타고 있소!” 그러자 답이 이렇게 왔다. “나도 경고합니다. 당신이 진로를 북으로 바꾸시오. 나는 지금 등대에 있소이다!”
변화를 거절할 때 재앙을 부를 수 있다. 누군가 틀린 말을 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되풀이하여도 그것은 여전히 틀린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한 이치다. 아직도 사람들은 한 번도 입증된 적이 없는 진화론을 믿으면서도 증명된 기독교 신앙은 여전히 거부한다.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려면 부정적인 것에서부터 돌아서야 한다. 믿되 바르게 믿도록 배워야 할 것이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삶의 모양을 만든다. 믿음이 판단과 선택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믿음은 행위와 성품과 운명을 결정하는 근거가 된다. 잘못된 행위는 잘못된 믿음에서 나온다. 범인들은 범행을 저지르면서 붙잡히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죄수들은 재수 없게 갇혔다고 믿는다. 약물 중독자들은 마약으로 기분이 좋아지리라고 믿고, 동성연애자들은 자기들이 원래 그렇게 태어났다고 믿는다.
따라서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이 인간관계를 결정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자신과의 관계에서 그렇다. 당신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 영향을 끼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변덕스럽고 우리를 감시하는 분이라고 믿는다면 그런 믿음은 당신을 그분과 성경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을 좋으신 구원자 그리고 은혜의 주로 믿는다면 당신은 그분께로 한없이 끌려 들어갈 것이다.
신앙과 두려움
신앙은 간단히 말해 믿음의 연장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지금 보이지 않는 일이 장차 일어나리라고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일이 일어나리라고 믿는다는 점에서, 두려움도 마찬가지로 믿음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신앙과 두려움에 대해 같은 정의를 내릴 수 있지만, 두려움이 부정적인 것을 끌어들이는 반면 신앙은 긍정적인 것을 끌어들인다.
당신이 믿는 것은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당신에게는 당신이 믿고 있는 그대로이다. 만일 그렇다고 믿기만 하면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 감각적으로 직접 느낀 것인지 혹은 환상이나 소문에 의한 것인지 그런 것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남자들은 언젠가는 크게 한 몫 잡을 날이 오리라고 믿으면서 평생 도박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정말 그렇게 믿는다. 그러다가 아내들이 떠나가고,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들과의 관계에 무슨 잘못이 있었는지 어리둥절해 한다. 그들의 믿음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것이다.
쾌락을 좇아 살고, 남을 속이며 이 사람 저 사람과 복잡한 성 관계를 갖는 것이 멋있고 즐겁다고 믿는 멍에를 멘 사람들은 천박한 관계의 짐을 지고 간다. 관능적인 성적 모험을 좋게 생각하는 그들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멍에에 메여 있다. 그것은 마음의 뿌듯함이나 평화와는 거리라 멀다.
3. 형제를 지키는 자
신앙은 실체(Substance)이다
한 사람이 나이아가라 폭포 위를 외줄을 타고 건널 것이라고 선언했다. 수많은 인파가 캐나다 쪽과 미국 쪽 폭포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 남자는 모인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이 균형 잡는 막대기만 들고 폭포를 건널 수 있다고 믿는 분 있습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줄 위를 걷기 시작했고 마침내 폭포를 건너갔다. 그가 캐나다 쪽 끝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열광적으로 갈채를 보냈다.“내가 되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 있어요?” 그가 캐나다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제 막 그가 건너온 것을 보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어 박수를 보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물었다. “그럼 내가 이 의자를 들고서 건너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그가 의자를 높이 치켜들었지만 손을 드는 사람도, 그를 성원하며 소리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다시 한 번 그는 엄청난 물이 쏟아지고 있는 깊은 협곡을 가로질러 외줄을 타고 건너갔다. 미국 쪽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치고 휘파람을 불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그 소리가 잦아들자 그가 물었다.
“외바퀴 손수레를 끌고 여기를 건널 수 있다고 믿는 사람 있습니까?” 이번에는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며 열렬히 환호를 보냈다. “좋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러면 누가 첫 번째로 이 수레에 타시겠습니까?” 그러자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손뼉을 치는 것은 믿음(belief)에서 나온 행위이다. 그러나 손수레에 타는 것은 신앙(faith) 행위이다. 신앙은 실체이다. 지금 당신의 신앙을 든든히 하라. 필요할 때 가서 하지 말고 시험 당할 때를 준비하라. 그것은 보험과도 같다. 아프고 난 다음에는 보험에 들 수 없다. 지금 건강이 좋을 때 들어 두어야 한다. 지금이 그때다. 당신의 믿음을 그대로 행함으로 신앙이 되게 하라.
더 위대한 신앙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만큼 중요하고, 한층 더 위대한 믿음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향해 갖고 계신 믿음이다!
옛날, 하나님을 경외하는 복음 전도 그룹들은 ‘덤불 집회’를 여는 관례가 있었다. 그 이름은 집회의 장소를 만드는 방법에서 따온 것이다. 땅에 나무 막대를 여러 개 박고 막대기 끝에서 끝으로 전선줄이나 밧줄을 묶는다. 그리고 나서 그 묶은 줄 위로 덤불을 얼기설기 얹어 낮 동안은 그늘을 만들고 밤에는 지붕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 두꺼운 판자를 못질해서 바깥에서 앉을 때 쓰도록 의자를 만들기도 하였다.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아침과 오후 그리고 저녁 모임마다 모였다. 종종 그들은 이웃하고 있는 지역으로 가서 전도를 하기도 하고 새 신자나 관심 있는 단체들을 그 모임에 데려오기도 하였다. 그곳에 묵기 위해 2인용 작은 텐트나 간이 침대를 가져왔고, 그래서 그들은 기도 시간에 ‘그곳에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 수 있었다.
그렇게 집회를 열고 있을 때, 한 예배 인도자가 정오 때쯤 간이 침대로 가서 꾸벅꾸벅 졸다가 어떤 환상을 보았다. 환상 속에서 그는 감람 산에 서 있었는데 그의 앞에는 많은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머리 위로 예수님이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환상 속에서 직접 보았던 것이다. 환상 속에서 그는 갑자기 하늘 나라로 옮겨졌는데, 첫 번째 천사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첫 번째 천사가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저 세상의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분은 대답하였다. 예수님은 손을 들어 보이셨고 천사들은 그분의 손과 발, 옆구리와 이마에 난 상처자국을 보았다. 그것은 인류의 죄를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친 자국이었다.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천사들은 또 다른 질문을 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그들의 구원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라고 내가 내 제자들에게 권한을 주었노라.” 이것이 그분의 대답이었다. 천사들은 기뻐했다. 그러나 곧 근심하며 이렇게 물었다. “그렇지만 만약 그들이 실패하면요?”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했다. “다른 계획은 없다.”
이것은 성경의 내용이 아니고 환상 속의 이야기다. 누군가 금식하던 중에 대낮에 경험한 내용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내용은 매우 의미 있는 이야기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을 믿으신다. 하나님은 바로 당신을 절대적으로 믿고 계시는 것이다!
4. 용감한 훈련
진정한 사랑의 특성
사랑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도록 허가하는 면허증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제한이 있다. 사랑은 악을 행치 않는다. 반대로 육욕은 끝없이 악을 행한다. 사랑과 육욕 사이에는 영원만큼의 차이가 있다. 사랑은 천국의 영이고, 육욕은 지옥의 영이다. 만일 우리가 사랑의 사람들이고, 사랑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라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절제된 행위로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행동을 제한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악한 행위를 제한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종교는 사회 행동을 제한한다. 종교의 도덕 기준이 부담스러워 오늘 우리 사회의 각 부분이 종교와 멀어지거나 종교의 힘을 빼놓으려고 한다. 그래야 맘껏 육욕을 채우고 호색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탕자는 동물 이하의 수준으로 단계적으로 추락했다. 그가 반항한 첫 단계는 독립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기준에 맞춰 살고 싶지 않았고 아버지의 뜻에 종속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아버지라는 존재의 구속에서 벗어나자, 그 탕자는 온갖 도덕적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얻었다. 그러나 그 결과 타락한 삶으로 전락해 버렸다. 우리도 길을 잃고 탈선하는 데 대가를 치른다. 저급한 삶은 언제나 그 값을 비싸게 치른다.
일곱 번째 감각
나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육신의 오감과 함께 정신에 여섯 번째 감각(육감)을 주셨다고 믿는다. 아담이 이 세상 모든 피조물에 각각 이름을 지어 준 것을 볼 때 틀림없이 인간의 정신에는 극도의 강력한 힘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영혼에 일곱 번째 감각을 주셨다고 나는 개인적으로 확신한다. 그것은 다른 여섯 가지 감각을 능가하며 그보다 더 힘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을 받아 우리 안에서 그분의 특성들을 계발해 나가는 능력이다.
북부 캘리포니아에 찰스라는 이름의 건축업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어느 대기업의 쇼핑 센터를 맡아서 지어 주기로 했었다. 그는 건축을 시작하기로 한 그날 아침 일찍 사무실로 나갔다. 그런데 그의 영에 계속 떠오르는 어떤 느낌이 있었다.
참지 못하고 그는 결국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도하는 동안 무언가가 생각났다. 마음속에 어떤 갑작스런 그림이 떠올랐는데 토지를 측량하던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건축을 시작하기 전에 토지를 다시 한번 측량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토지 측정 결과 그는 토지의 뒤쪽 경계선이 잘못 측량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실제 경계선은 설계도보다 거의 60m나 뒤로 밀려 있었다. 현장감독에게 말하여 즉시 설계도를 실제대로 고치도록 했다. 마침내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었고 찰스는 마지막 잔금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건축주는 공사에 잘못이 있기 때문에 돈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건물을 토지 경계선에 너무 바짝 붙였다는 것이다. 찰스는 그 즉시 자신이 측량을 다시 했던 설계도를 보여 주며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후 모든 일이 잘 처리되어 잔금을 모두 받을 수 있었다.
찰스는 영적인 일곱 번째 감각에 의해 인도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내재하는 하나님의 영이 주신 것이다. ‘영의 인도를 받음’으로써 그는 불행을 피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처럼 영적으로 강해질 때 우리는 속되고 인간적인 것으로 이끌려 내려감을 극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