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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사회를 개혁한 영국의 양심

가트 린 지음 | 두란노
부패한 사회를 개혁한 영국의 양심

- 윌리엄 윌버포스의 생애 -

가트 린 지음/송준인 옮김

두란노/2001년/300쪽/8,500원



1. 노예무역의 중심지 영국

200년 전, 영국은 세계에서 제일 가는 노예 무역국이었다. 리버풀, 브리스톨, 런던 등지에서 영국의 선박들은 서아프리카의 해안으로 향했다. 거기서 그들은 직접 사로잡거나, 아랍상인들에게서 사거나 마을의 추장들과 교환하는 방법으로 노예들을 배에 실었다. 종종 추장들은 자신의 마을이나 이웃 마을의 주민 전부를 팔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던 노예 무역은 영국에 의해 주도되었다. 1770년에 영국의 선박들은 서아프리카에서 수출되는 십만 명의 노예들 중 절반 이상을 실어 날랐다. 1783년과 1793년 사이, 리버풀의 노예선들만 해도 303,735명의 노예들을 서인도 제도에 실어 나름으로써 15,186,850파운드(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2억 5천만 파운드 정도)에 팔아 넘겼다.

영국으로서는, 노예 무역이 실질적으로 또 하나의 성공적인 사업이 되었을 뿐 아니라 국가적인 정책이 되었다. 게다가 노예 무역은 국가 안보에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었다. 노예무역이 영국 선원들에게 훌륭한 훈련을 제공하고, 영국 해군에게 없어서는 안될 신병 모집의 근거를 제공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노예 무역만이 국가의 번영을 가능하게 해주며, 청어를 비롯한 뉴펀들랜드 어장에 대한 지불능력과, 제당업, 조선업을 비롯한 다른 관련 산업에 대한 자금원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퀘이커 교도들은 일찍이 1724년에 노예 무역을 정죄하였으며, 1761년부터는 펜실베이니아의 형제들과 제휴하여 노예 무역에 관여하는 모든 교우들과의 관계를 끊었다. 알렉산더 포프, 존 로크, 비국교도 신학자인 리처드 백스터 등은 노예 무역을 반대하는 글을 썼다. 노예 무역에 관해서 조지 윗필드와 논쟁을 벌였던 존 웨슬리는 the execrable sum of al villainy(저주받아 마땅한 온갖 극악무도한 일의 총합)이라는 소책자를 썼는데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진정한 싸움이 의회의 몫으로 남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노예 무역을 폐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적절한 대변자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노예 무역 폐지를 주장하는 정치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고위직에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버려야 했고, 더욱이 높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할 만큼 무게 있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그는 또한 의회의 동정심과 혐오감을 유발하기에 충분한 웅변가여야 했다. 그리고 해가 거듭 바뀌어도 변치 않고 대의를 추구할 수 있는 확고한 신념과, 복잡한 문제를 잘 다룰 수 있는 지성과, 편견을 물리 칠 수 없는 환경에서도 그 편견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매력을 겸비한 사람이어야 했다. 도대체 그런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사실, 그 사람은 이미 하원 안에 있었다. 그는 다방면으로 준비를 갖춘 사람이었다. 1780년 10월, 스물 한 살의 나이로 윌리엄 윌버포스는 헐을 대표하는 의원이 되었다. 그의 케임브리지 동기생인 윌리엄 피트보다 3개월 앞서서 하원 의원이 된 것이다.2. 헐 소년, 하원 의원에 당선되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헐에서 태어났다. 헐은 영국의 네 번째 항구로서, 네 개 항구 중에서 노예 무역에 관여하지 않은 유일한 항구였다. 동쪽 연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 옛날 발트해 무역 시절에 크게 번성했다. 월버포스 가문은 가까이에 있는 비벌리에서 200년 동안 장사를 했던 유명한 무역상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18세기 초에 헐로 이사해서 서른 두 살 때 시장이 되었다.

윌버포스는 몸이 약하고 키가 작았으며, 허약한 체질에 시력까지 나빠서 일생 동안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비록 신체는 약했지만, 원기 왕성했고 다정다감한 천성에, 열정적인 기질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에게는 특별한 음역을 가진 아름다운 목소리가 있었다.

윌버포스가 윌리엄 피트를 알게 된 것은 하원의 관람석에서였다.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직후, 그들은 둘 다 정치에 뜻을 두고 그곳에서 밤마다 토론에 귀를 기울였다. 윔블던에 살던 큰아버지가 죽을 때 상당한 유산을 남겨 주었고, 그의 사촌인 아벨 스미스가 헐에 있는 사업을 기꺼이 맡아서 운영해 주었으므로, 그는 자유롭게 정치에 몰두할 수 있었다.

헐에서 윌버포스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젊은 사람이 출마를 한다는 것은 대담한 야망이었다. 헐은 영국에서 큰 선거구 20개 가운데 하나로 15,000명의 인구에 1,100명의 선거인단을 가진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명망 있는 지역기반과 자신의 인기에 힘입어 선거에서 당당히 승리하여 정치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한편, 윌리엄 피트는 케임브리지에서 입후보하여 패배했으나 석 달 뒤 애플비라는 ‘부패 선거구’를 통해 의회에 들어갔다. 그것은 유명한 북부의 선거구 장사꾼인 제임스 로우더 경이 그에게 팔아 넘긴 것이었다.



3. 윌버포스와 친구들

윌버포스는 정치에 성공적으로 입문한 뒤 곧 런던 사교계에서 젊고 부유하고 매력적인 의회 의원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얻게 되고 교분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로 인해 그는 하원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피트는 하원에서 했던 경제개혁에 관한 처녀 연설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피트는 6월에 자기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미국 독립전쟁을 공박하는 탁월한 연설을 했으며, 12월에도 같은 주제로 또 한번의 훌륭한 연설을 했다. 6개월 뒤, 피트는 하원에 들어간 지 18개월 만에 약관 23세의 나이로 셀번 경의 행정부에서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윌버포스와 피트가 절친한 친구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당시 영국 정부는 폭스와 노스의 연립정부였으나 폭스가 제기한 인도 법안(India Bill)으로 인해 엄청난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법안의 골자는 동인도 회사와 인도에 있는 그 회사에 대한 정부의 임명권을 엄청나게 강화하는 것으로 피트와 윌버포스는 사력을 다해 그 법안에 대한 반대 투쟁을 벌였다.

폭스의 정치에 대해 영국 황태자의 도덕적 타락만큼이나 혐오하던 왕은 그를 제거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 법안은 하원에서 통과되었으나 상원에서는 왕의 직권에 의해 폐기되고 말았다. 다음날인 12월 18일에 왕은 연정을 해산하였고, 스물 네 살인 피트가 그를 적대시하는 하원에서 수상이 되었다.

영국 수상이 그렇게 젊었던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그러나 그 시대는 젊은이의 시대였다. 조지 3세 도 스물 세 살 때 왕위를 계승했다. 넬슨은 스무 살에 대령으로 함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웰링턴은 그 전임자인 클라이브와 마찬가지로 아주 어린 나이에 인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일구어냈다.



4. 요크셔에서의 승리

1784년 1월부터 3월까지 피트의 동의 안은 하원에서 번번이 패배했다. 그러나 왕은 여전히 피트를 수상직에 두었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한 상황을 무기한 지속할 수는 없었다. 조만간 의회가 해산될 것이 분명했다. 윌버포스는 매우 대담한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것은 요크셔 주의 두 개 의석 중 하나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요크셔는 영국 내 모든 주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주였다.

1784년 3월 25일 위빌의 주도하에 총선을 요구하기 위한 요크셔 자유민 총회가 요크 성의 잔디밭에서 열렸다. 이때 피츠윌리엄 경이 이끄는 휘그 당의 부호들은 젊은 수상인 피트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해 위빌의 청원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계획이 성공하리라는 것이 당시의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오전 중반부터 오후 늦게까지 토론이 계속되었다. 열 두 번의 긴 연설이 이어졌다. 대부분 그 청원서를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청중이 지쳐가고 있을 무렵인 오후 4시쯤, 키는 160cm 정도에 가슴둘레는 85cm 정도밖에 안될 것 같은 작은 체구의 윌버포스가 연단에 섰다. 날씨가 몹시 추웠고 강풍이 불었기 때문에 어떤 목격자는 ‘그의 작은 체구가 맹렬한 날씨를 견뎌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모습은 눈에 잘 띄지 않았으나 그의 훌륭한 목소리와 탁월한 연설은 가장 멀리 있는 청중에게까지 쉽게 파고들었다. 한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윌버포스 의원의 연설은 진실로 청원서에 반대하는 모든 연설에 대한 반박이었다. 그의 연설의 빼어난 표현력과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유창함은 청중들의 박수와 환호와 어우러져 우리가 어떤 말로도 제대로 평가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윌버포스가 연설한 지 거의 한 시간쯤 되었을 때 국왕의 사신이 급히 말을 몰고 청중들 틈을 뚫고 앞으로 나왔다. 윌버포스는 잠시 연설을 멈추고 전해 받은 편지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극적으로 바로 그날 의회가 해산되었음을 선언했다. 그 편지는 피트가 보낸 것이었다. 윌버포스가 연설을 마칠 무렵, “이 사람을 우리 주의 의원으로 삼겠소!”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어 마지막으로 존 캐번디시 경이 등단했지만 청원서는 박수 갈채로 통과되었다.

그날 밤 피트파 사람들이 승리를 자축하고 있을 때 비데일의 래리 피어스가 “작은 윌버포스 만세!”라고 충동적으로 외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도 한 말씀드리겠소, 윌버포스 당신을 요크셔 주에 출마시키기 위해서 내가 500파운드를 내놓겠소.” 그 자리는 이내 윌버포스를 위한 선거비용 모금장소로 변했다.

윌버포스는 영웅이 되어 런던으로 돌아왔다. 윌버포스는 그 선거에서 단 한푼도 쓰지 않았다. 그의 지지자들이 모금해 준 18,670파운드의 선거 기금도 4분의 1만 썼을 뿐이었다. 피트는 선거에서 얻은 압도적인 승리로 국가를 이끌어 나갔다.



5. 회심

요크셔의 의원이 된 윌버포스는 스물 네 살에 자신의 힘으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유력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내각의 장관들과 반대당의 유력한 지도자들 바로 다음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에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게 되는 결정적인 두 건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첫 번째 만남은 학창시절 헐의 교장이었다가 당시에는 케임브리지 학감이 된 조지프 밀러의 동생인 아이작 밀러였고 두 번째 만남은 존 뉴턴 목사와의 만남이었다. 특히 그와의 만남은 어렸을 때의 기억과 함께 그가 한때 마음에 품었던 순수한 신앙적 열정을 다시 되살리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윌버포스는 한때 큰아버지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큰어머니는 윌리엄을 데리고 종종 교구 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를 들으러 갔다. 윌리엄은 그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았으며 특히 전에 노예선 선장이었던 존 뉴턴 목사의 설교와 간증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윌리엄은 노년에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 저는 그분을 아버지처럼 존경했습니다.”

윌버포스는 피트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신의 변화된 인생관을 썼고, 당분간 공직생활에서 물러나려고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피트는 애써 윌버포스의 신념을 버리게 하려고 설득했으나 결국 그의 신념이 옳다는 것과 공박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윌버포스는 공적 생활에 참여하는 문제에 관하여, “내가 하나님과 나 자신과 이웃에 대한 나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세상에 순응하려면 공적인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피트와 마찬가지로, 뉴턴은 윌버포스에게 옛 친구들을 떠나지 말라며 “주님께서는 당신을 주님의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국가의 유익을 위해서 길러 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윌버포스에게 공적인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라고 요구한 셈이었다. 이런 판단은 윌버포스에게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 그리고 개인의 성결과 세계를 위한 헌신 사이에서 성숙한 균형을 갖게 하였다. 이는 기독교의 기본이지만, 매우 신실한 신자들도 이를 자주 무시하고 있었다.



6. 하나님이 주신 두 가지 소명

윌버포스는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여 공적인 생활에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하는 중대한 문제에 직면했다. 어느 날, 그는 상류 인사들이 모이는 다섯 개 클럽에서 사퇴했다. 그리고 도박과 춤을 끊었으며, 그 당시는 연극이 매우 타락했기 때문에 극장에 가는 것도 그만두었다. 한편 그는 정치 활동에서 두 개의 법안을 하원에 상정했다. 하나는 온건한 의회 개혁을 좀더 진척시키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다소 어설픈 인도주의적 법령이었다. 그러나 점차로 그는 자신의 목적과 동기가 모두 철저히 수정되어야 한다고 느꼈다.

여전히 그는 최고의 상류사회에서 환영받았지만, 그곳에서 어떤 어색함 같은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아마 그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초기 시절에는 윌버포스의 철저한 삶의 변화가 냉혹한 사건처럼 보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1786년 중반쯤에는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던 쾌활함을 상당부분 회복했다. 월버포스는 만일 ‘진지함’이 인생의 본업이라면, ‘쾌활함’은 인생의 휴식이 되어야 한다고 자기 누이에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의 누이와 스미스 성을 가진 사촌들은 곧 그의 신앙을 따랐다. 피트가 총애하는 누이 해리엇과 결혼한 에드워드 엘리엇은 혼전에 시도한 성적인 모험을 시도했다가 1786년 9월 해산하는 과정에서 아내 해리엇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래서 엘리엇과 피트는 ‘끔직한 동요 상태’에 빠졌다.

그 이후 수개월 동안 엘리엇이 주로 의지했던 것은 바로 윌버포스와의 우정이었다. 그는 점차 윌버포스와 신앙을 공유하게 되었으며, 두 사람은 자주 서로에게 각자의 마음을 열어 보였다. 엘리엇도 의원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일상적인 정치의 압력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여, 내가 자네를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나를 위해 기도해 주게. 우리가 서로를 효과적으로 섬길 수 있는 길은 기도 외에 없다고 생각하네.” 윌버포스는 그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존 손턴의 막내아들 헨리 손턴도 곧 뒤를 따랐다. 그는 의원이 되기 위해 뇌물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윌버포스의 뒤를 이어 헐의 의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고 이듬해 그는 뇌물을 주지 않고서 사우스위크의 험난한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 무렵 윌버포스의 제자가 된 사람들 가운데는 매슈 몬터규 의원과 먼캐스터 경이 있다. 또 다른 구스트리즈 클럽 친구이자 도싯의 의원인 헨리 뱅크스도 점차 동화되었다. 1786년 내내, 윌버포스는 자신이 공적 생활에서 감당해야 할 특별한 임무를 찾고 있었다. 그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무능하지만 재미있는 그의 대학 친구인 제라드 에드워즈를 통해 그 대답을 얻었다.

제라드의 장인은 윌버포스가 회심할 당시에 대령으로서 해군의 감사관을 맡고 있던 찰스 미들턴 경으로 하원에서 복음주의자로 공공연하게 알려진 두 사람 중 하나였다. 미들턴 부부는 테스턴에 살고 있었으며 그들 주변에는 노예무역 폐지 운동에 헌신한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1786년 가을경에는 노예무역을 반대하는 여론이 여러 방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노예무역은 영국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의회의 결정 없이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미들턴 부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제라드의 친구인 윌버포스에게 하원에서 그 문제를 제기해 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윌버포스는 자기가 그 일에 적임자가 아닌 것 같다고 답변했다.

그 해 겨울엔 클라크슨이 그 문제를 가지고 팰리스야드 4번지에 사는 윌버포스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였다. 마지막 자극은 피트에게서 왔다. 1787년 5월 12일, 피트, 피트의 사촌 그랜빌, 윌버포스는 캐스턴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참나무 밑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피트가 말했다. “윌버포스, 자네 노예 무역이라는 주제에 대한 동의 안을 한번 제출해 보지 않겠나?” 한편 그는 여전히 아침 시간에 조국 영국의 도덕적 중생에 대한 필요성에 관하여 깊이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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