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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에 삽니다

김미영 지음 | 새빛


이태원에 삽니다

김미영 지음

새빛 / 2026년 1월 / 316쪽 / 20,000원





상실



상실의 시대


“까톡!” “영미가 하늘나라로 갔대. 장례식장은 XXX야….” 나른한 오후. 카카오톡 메시지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다. 순간 바닐라향 커피와 에콰도르 쇼콜라가 진흙처럼 까끌거렸다. 메시지를 읽던 눈이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보그 지를 퍼이떼(feuillete, 하릴없이 책을 넘기는 행위)하며, 무료한 오후를 보냈어야 했다. 또는, 여느 때처럼 르 꺄나르 앙세네(프랑스 풍자 신문, 광고가 없기로 유명함)에 수록된 기사를 이해하려 애쓰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어야 했다. 영미가 갔다니…! 영미는 대학 시절 만난 친구이다. 작은 키에 동그란 얼굴, 하얀 피부와 가늘고 곧게 뻗은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명랑한 웃음소리가 특징이고, 세심하면서도 강단이 있는 친구이다. 첫째라서 그렇겠다 생각했다. 당시 나는 우연한 기회에 몇 개월간 영미의 집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 자연스레 우리만 아는 추억도 생겨났다. 서로의 발가락을 짚어가며 한참을 웃기도 했고, 영미 생일이라며 난생처음 미역국을 끓여보기도 했다. 산책하며 각자 좋아하는 선배에 대해 이야기할 땐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함께 지내며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런 내 친구 영미가 하늘나라로 갔다고 한다. 멍했다.

살면서 여러 번의 상실을 겪었다. 어느 날, 이 세상에서 사라진 친할머니. 중학교 2학년 1학기 기말고사 마지막 날, 생사를 달리한 아버지. 늘 아낌없는 사랑을 주셨던 외할머니, 삼촌, 친구…. 상실은 죽음으로만 겪는 것이 아니었다. 어릴 적 매일 보던 동네 친구가 갑자기 이사를 했다. 나의 첫 상실이었다. 다음엔 내가 멀리 떠나며 관계가 소원해졌다. 두 번째 상실이었다. 상실은 때때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귀었던 남자 친구와 이별하고, 배우자와 헤어졌다. 그렇게 하나씩 또아리를 튼 채 깊은 곳에 자리 잡고는 어느 날 불쑥 “나 여기 있었어!”라며 얼굴을 내비쳤다. 화창한 봄날 푸른 하늘을 바라볼 때, 온통 초록인 남산을 걸을 때, 유난히 에스프레소가 맛있는 해방촌의 어느 카페에서, 그렇게 불쑥 예고 없이 찾아왔다. 공허하고 쓰라리고 때로는 지옥이었다. 시간이 지나 감정이 무뎌질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기도 했다. 상실을 보듬는 일은 얕은 상처에 후시딘을 바르듯 수월하지 않았다. 이태원 참사로 150명이 넘는 존재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나의 상실이 기억나는 것처럼 그들을 기억하는 가족, 친구, 지인들이 있다. 믿기 힘들었고 허망했을 것이다. 온 국민에게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6년 전, 날개를 잃고 한없이 추락했다. 이혼을 겪으며 생긴 상처는 선명하고 비극적이었다. Rupture(파열의 프랑스어)는 끝끝내 응축되어 있던 파편을 터뜨렸고, 상하이에서는 살기 힘든 고통을 부여잡고 아파트 30층에 섰다. 그러나 결국 나는 발코니에서 발을 내렸고, 모든 순간을 살아냈다. 다행이었으나 쉽지는 않았다. “어떻게 이별을 사랑할 수 있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라는 AKMU의 노래 가사는 여러 해가 지나도 가슴에 아렸다. 상실의 그림자는 영원처럼 길고, 괴물처럼 검었다. 살아내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내가 아픈 만큼 상대도 아픈 것임을. 나의 고통뿐 아니라, 상대의 고통도 생생함을. 나는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목숨처럼 사랑하고 있었음을. 고통은 나만이 가지는 전유물이 아니었다.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그러한 시절이 있듯 나에게도 고통의 시절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기꺼이 그 어두운 터널 속을 묵묵히 걸었다. 시간이 걸렸다. 괜찮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니.



이태원에 삽니다



이태원 디아스포라(Diaspora)


2009년 캐나다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정착한 곳이 용산구 삼각지이다. 용산에는 외국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나름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이태원을 중심으로 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랫동안 해외 생활을 하고 돌아온 나 같은 사람보다 이태원을 더 잘 아는 외국인들이 많았다. 특히, 내가 만난 캐나다인 S는 더욱더 그랬다. “미영, 이태원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그게 무슨 말이죠?” “그럴 줄 알았어요. 한국인들은 이태원의 어원이나 역사를 잘 모르더라고요. 이태원은 한자로 ‘다를 이(異), 아이 밸 태(胎), 집 원(院)자’를 써서 이태원(異胎院), 배가 다른 사람들이 사는 곳, 이방인이 사는 곳이라는 의미예요.” “네? 아… 그런가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네요. 그런데 뜻이 좀 의외이긴 하네요.”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는 곳에 대한 부족한 지식과 이태원의 한자적 의미가 다소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서울 생활 7년 차 베테랑이었다. 한국 생활에 관심이 있는 외국인들을 위해 웹사이트를 운영하며 생활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배가 다른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이태원이 배가 다른 사람들이 사는 곳이란다. 외국인들을 배다른 사람으로 표현한 것 같아 괜히 불편했다. 중국에서 한국인들이 하얼빈으로 몰리고, 러시아에서는 중앙아시아로 몰린 것과 무엇이 다를까. 오랜 해외 생활로 이방인이 느끼는 차별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더 민감해졌다. “미영, 여기 음식 어때요? 캐나다만큼은 아니지만 괜찮지 않아요?” 그녀가 말한 음식은 몬트리올의 대표 음식인 스모크 미트 샌드위치이다. 한번 먹어보면 절대로 잊지 못할 맛! 이태원에 있는 스모크 미트는 꽤 현지 맛이 나는 편이었다. 그녀는 별것 아니라는 듯 화제를 옮겨 말을 이어갔지만, 나는 내내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검색해보니 새로운 사실이 또 있었다. 이태원은 지금의 트렌디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꽤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지리적으로는 과거 용산고등학교 일대에 있던 이태원의 위치가 지금의 위치로 바뀌었다. 명칭으로 사용된 한자도 여러 번 바뀌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오얏나무가 많다고 하여 ‘李泰院(오얏 리, 클 태, 집 원)’이라 하였다가, 임진왜란 이후에는 배다른 아이라는 뜻의 ‘異胎院(다를 이, 아이 밸 태)’, 그리고 효종 이후에는 배나무가 많다는 의미로 ‘梨泰院(배나무 리, 클 태)’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인들에게는 이런 이태원의 명칭이 ‘배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통용되고 있다. 물론 이태원의 의미를 모르는 외국인들도 많다. 요점은 이태원이라는 공간의 한자가 여러 번 바뀐 이유가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 외국인과 내국인을 구분하는 뉘앙스가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은 어느 곳을 가나 외세의 침략과 전쟁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이태원 지역은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 임오군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미군 주둔을 거치며 외국 세력과 관계하는 요충지의 역할을 해왔다. 한국사의 중요한 사건을 함께한 곳이며,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곳이라 해도 과하지 않다. 이태원은 여전히 외국 문화의 중심지이다. 많은 외국인이 살고, 외국에서 돌아온 한국인들도 많다. 디아스포라들이다. 디아스포라는 민족의 정착지를 벗어나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외국에 사는 한인들,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이 해당한다. 나를 포함하여 이들은 여러 문화를 체득하고 있으며, 때로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한다. 새로 정착하는 사회에서 다시 적응해야 하는 설렘과 부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어딜 가나 다 그런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금만 더 홍익인간의 후손으로서 너그러운 마음을 보여주면 어떨까. 만에 하나 외국인들이 느낄 수 있는 소외감이 있다면 좀 더 따듯한 시선을 보여주길, 같은 이치로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게도 그렇길 바라본다. 진심으로 세계인과 공존하는 성숙한 이태원이길 기원한다.



치유



이사벨라 비숍


공간을 기록하는 일은 순간을 간직하려는 몸부림이다. 나를 돌보는 일이다.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1897)은 영국 작가 이사벨라 비숍의 기록물이다. 책에는 1800년대 말 당시 한국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왕을 비롯해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상이 묘사되어 있고, 중국, 러시아, 일본과의 관계도 서술되어 있다. 그중 동물과 자연에 대한 글이 인상적인데, 당시엔 호랑이와 표범을 서울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광경이다. 강아지에 대한 글도 흥미롭다. 그녀에 의하면 한국의 개들은 늘 담황색을 띠고, 털이 길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양을 지키는 개들의 모습과 흡사하단다. 삽살개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거위는 성실의 상징으로 결혼식 선물로 제공되었다는 코멘트도 있다. 남산에서 본 서울은 아름다운 도시였다. 한강변에는 금모래가 가득하고, 강은 수정처럼 맑았다. 글을 읽으며 나는 그녀가 어쩌면 한국이 아닌 자신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60대에 외국을 방문하며 기록을 멈추지 않는 삶. 100년이 훌쩍 넘어 그녀의 글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읽힐 것이라는 상상을 했을까? 하나라도 놓칠세라 방문한 장소와 사람들, 자연, 풍습을 세세히 묘사했다. 그녀는 그렇게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자신을 돌보고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며 그녀가 채웠을 노트와 펜을 잡은 손, 종이 위에 사각거리며 써나갔을 시간을 상상해 본다. 서술과 쉼표, 마침표와 느낌표 사이 그녀의 호흡이 느껴진다. 해외에서 지낼 때 일본이나 중국에 관한 책을 종종 볼 수 있었지만 한국에 관한 책은 적었다. 지금은 K 문화에 대한 외국인의 관심이 높아지고, 국가 주도하에 번역된 한국문학이 많아 과거보다 눈에 많이 띈다. 이태원에 대한 글을 쓰며 이사벨라 비숍을 떠올려 보았다. 내가 사는 공간을 그녀처럼 열정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까?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태원 이곳저곳을 걸어본다.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녀가 보았을 남산 아래 서울이 보인다. 호랑이와 표범, 한강변의 금모래 대신 촘촘하게 채워진 아파트와 콘크리트 건물들이 있다. 서울은 그동안 많이도 변했겠다. 그러나 반짝이는 한강, 멀리 도시를 둘러싼 수락산과 인왕산 그리고 북한산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지 않을까.

이곳에서의 생활을 기록하며 많은 기억을 떠올린다. 처음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우연한 기회에 옻칠과 나전칠기를 소개하는 영어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했다. 옻과 조개로 만드는 한국의 전통예술이다. 섬세한 장인의 손에 의해 태어난 예술품이 색색의 빛으로 반짝일 때의 아름다움이란! 한국의 미는 그것만이 아니다. 못 하나 없이 짓는 전통 방식의 한옥, 닥나무로 만드는 한지, 자연에서 얻은 섬유로 만든 한복.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하며 한국 전통예술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가까이에서 체험할 수 있었다.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 몬트리올에서 행인이 “Hello! Are you from North-Korea?”라고 하자 발끈해서 괜히 화를 냈었다.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북한이 더 익숙한 나라이기도 하다. 그 일을 계기로 외국인 친구들의 질문에, 한국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동안 별 관심을 두지 않던 한국의 역사와 지리, 전통과 관습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내가 마치 한국을 대변하는 민간 외교관 같지 뭔가. 어쩌다 한국에 있는 가족을 방문하면 경복궁 같은 역사적인 곳을 꼭 둘러보곤 했다. 미리 작성한 한국 음식 리스트를 하나씩 체크하며 먹기도 했다. 외국에서 지내면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한국에 관한 것을 세세히 알아가는 계기가 된다. 그러니 나는 지금 내가 사는 이 공간을 마음껏 탐구하고 사랑하련다. 시간이 흘러 이곳을 떠나더라도 생생하게 남을 기억들. 이태원에서 함께한 나의 순간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중이다. 나를 돌보는 중이다. 이사벨라 비숍 여사처럼.



수용·존중



집


LGBT는 성소수자 중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젠더를 합하여 부르는 단어다. 사회적 약자를 카테고리별로 분리하여 부르는 것이 불편하나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용어이므로 무시할 수 없다. 이태원에는 이런 성소수자들을 위한 클럽이나 바가 몇 있다. 퀴어 퍼레이드도 매해 열린다. 내가 있었던 몬트리올에서도 매년 8월에 게이 프라이드(행진)가 열렸는데, 성소수자들만이 아닌 모두의 축제로 자리 잡았다. 화려한 복장과 메이크업을 한 이들이 음악에 맞춰 춤추며 도심을 행진한다. 2001년 처음 그 광경을 보았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런 행사를 공공연히 한다는 것도, 시민들이 함께 즐기는 모습도 놀라웠다. 행진은 유쾌했다. 나도 덩달아 신나게 즐겼다. 누구도 편견 없이 함께하는 자유로운 축제 그 자체였다.

성소수자 이야기를 하자면 멕시코 친구 R과의 만남을 빼놓을 수 없다. 캐나다에 있는 어학원에서 공부할 때였다. 어느 날 아침 클래스 친구인 R이 호들갑을 떨며 교실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이야?” 들뜬 모습으로 들어선 그에게 물었다. “세상에! 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을 봤지 뭐야? 처음이었다고. 처음! 눈을 만져보니 부드럽고 녹아내리는 거야. 세상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을 막 먹어보기도 했지 뭐야? 오호호호~!” 그렇다. 캐나다 몬트리올은 5월에도 가끔 눈이 온다. 처음엔 5월에 눈이 와서 놀랐나 싶었다. 더 들어보니 이해가 갔다. 더운 나라 멕시코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보던 눈을 실제로 봤으니 정말이지 기쁘기도 했겠다. “그래, 축하해! 너에겐 첫눈이겠구나!”라고 응수하며 ‘그래도 참 호들갑이네, 저 웃음소리에 저 몸짓은 뭐람?’이라 생각했다. 이후 R과 친해진 뒤 함께 간 바에서, 그는 자신이 동성연애자라 했다. 미리 말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R은 내게 말하기가 망설여졌다 했다. 이해한다. 동성연애자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많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편견은 있으니까. 주위에 R과 같은 성소수자 친구들이 여럿 있다. 어찌 됐든 나는 그들의 선택을 존중한다.

한국은 성소수자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이 북미나 유럽보다는 폐쇄적이다. 그러나 점점 더 이해와 수용의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은 있다고 본다. 이렇게 폐쇄적인 한국도 세계 여느 곳 못지않은 관대함을 보이는 장소가 있다. 이태원이다. 이태원에는 게이바 근처에 이슬람 사원이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아마 하루가 멀다 하고 큰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슬람교는 규율이 엄격하고 동성애 행위를 죄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태원의 이슬람교인들이 성소수자들과 지척의 거리에서 지내며 공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길 바란다. 그런데 나는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다. 그들에게 이태원은 또 다른 고향이자 안식처이다. 그들이 안전하게 지키고 싶은 공동체이자 집일 수 있다. 이슬람 사원 일대에는 파키스탄, 인도, 말레이시아 등에서 이주해 온 이들이 많다.

한국으로 되돌아온 아이들은 또 어떠한가. 입양아들 이야기다. 통계청에 의하면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한국인 입양아를 받아들인 나라이다. 내가 어릴 적 80년대에도 6천 명이 넘는 아이들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울 따름이다. 내가 속해 있는 프랑스 커뮤니티에서는 프랑스로 입양되었다가 성인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온 입양아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오는 이유는 다름 아닌 정체성, 즉 뿌리를 찾기 위해서다. 친구 중 몇몇은 TV 방송에 출연해서 공개적으로 친부모를 찾기도 했다. 그리하여 친부모를 찾은 친구도 있고, 못 찾은 친구도 있다. 찾은 이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고, 찾았으나 친부모가 만나기를 거부한다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사회에는 이처럼 소외된 커뮤니티가 많다. 이태원에 살고 외국인 커뮤니티에 속해 있다 보니 이런 다양한 사정을 알게 된다.

“아빠, 전 어쩌면 좋죠?”

“집으로 가”

“그게 어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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