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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쥬메, 셰프의 자격

심성철 지음 | 나비의활주로


레쥬메, 셰프의 자격

심성철 지음

나비의활주로 / 2026년 4월 / 360쪽 / 25,000원





RESUME 1 무모한 열정



손끝 발끝으로 꾹꾹 눌러쓴 나의 레쥬메


르 버나딘에서의 인턴십:
뉴욕에 있는 세계 최고의 요리학교, CIA에서의 학교생활은 무척 즐거웠다. 모든 수업이 새롭고 흥미진진했다. CIA는 현장 경험을 학점으로 인정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는데,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익스턴십(externship) 과정을 거쳐야 졸업 조건이 충족됐다. 내게는 반가운 조건이었다.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야 하는데, 인턴십도 하면서 돈까지 벌 수 있다니! 나의 원픽은 프렌치 레스토랑 ‘르 버나딘’이었다. 미쉐린 3스타를 자랑하는 이곳은 세계 최고 1,000개의 레스토랑을 선정하는 ‘라 리스트’에서 No.1으로 뽑힌 적도 있었다. 르 버나딘을 목표로 열 번도 넘게 레쥬메를 보냈고, 마침내 인턴으로 들어갈 기회를 얻었다. 간절하게 바라던 르 버나딘에서 드디어 경험을 쌓게 된 것이다.

르 버나딘에서 일하는 동안, 수시로 한국에서의 인턴 시절이 떠올랐다. 너무도 다른 주방 풍경 때문이었다. 2000년대 초반, 한국 호텔 주방은 위계질서가 지배했다. 일을 하다가 궁금한 것이 생겨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그게 왜 궁금한데?” 현장에는 ‘묻지 말고 시키는 일이나 하라’는 문화가 만연해 있었다. ‘이런 곳에서 무슨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어.’ 그렇게 답답함만 가득했던 경험을 짊어지고 르 버나딘에 들어온 나에게, 이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이곳의 셰프들은 요리 기술은 물론, ‘모든 것을 가르쳐주겠다’라는 열린 마인드를 갖고 있었다.

르 버나딘의 주방은 배움과 가능성으로 넘쳐나는 천국 같았다. 그들이 모든 걸 아낌없이 공유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르 버나딘이 쌓아온 명성과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 기준을 지키고, 더 높이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모든 셰프가 같은 수준의 지식을 갖추는 것이 필수였다. 이때 질문하고 공부하며 정리한 수십 권의 노트는 지금도 나의 보물 1호다. 이때의 경험은 이후 내가 운영하는 식당들의 기초가 되었고, 나 또한 일하는 사람들과 모든 것을 공유하는 마인드를 갖게 된 초석이 되었다.

‘더 배우고, 더 경험하고 싶다.’ 르 버나딘에서 4개월을 보내고 난 후, 내 안에서 이런 욕망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뉴욕에 남아 정식으로 셰프가 되어 일하고 싶었다. 끝없는 배움의 가능성을 열어준 이 도시에 더 머물 방법을 어떻게 해서든 찾아내야 했다.

가진 것은 가난과 패기뿐:
그 무렵 내 손에 남은 건 학생비자와 졸업 후 1년짜리 취업 비자가 전부였다. 그 1년이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식 취업 비자가 절실했다.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SOS를 보냈다. 간절함이 통했을까. 당시 미국의 유명 호텔 & 레스토랑 그룹인 ‘찰리 파머’에 있던 김세경 셰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CIA 선배이기도 했던 그의 소개로 ‘오레올’에서 면접 볼 기회를 얻었고, 정식으로 일할 기회를 잡았다. 뉴욕에 머물 수 있는 데다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에서 귀중한 경험을 쌓는다니,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있을까.

하지만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물가가 비싸기로 악명 높은 도시에서 버티는 것 자체가 전쟁이었다. 내 한 몸 누일 공간을 구하는 것은 사치였고, 식비와 교통비만 해도 아찔했다.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에도 아르바이트 두세 개는 필수였다. 몸은 늘 녹초가 되었지만, 부모님께 도와달라는 소리는 할 수 없었다. 도움 없이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죽을 만큼 가난했지만 패기 하나로 버텨냈다. 솔직히 말하면, 그건 오기에 가까웠다. 부서질 것 같은 몸과 마음을 억지로 붙들고 버티던 시간이었다.

졸업 후에도 레쥬메는 계속된다:
근무가 끝난 후에는 새벽 3시까지 한인타운의 한식당 우촌에서 서버로 근무했다.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버 경험을 쌓는 것 또한 내가 하려는 일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실제 이때의 경험은 창업했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저녁에는 오레올에서, 새벽 3시까지 우촌에서, 1주일에 4번 오전 7시부터 오후 1시까지 일식당 모리모토에서 근무했다. 오래전부터 아르바이트는 몸에 달라붙은 피부와 같았다. 고교 시절, 학원비를 벌기 위해 시작했던 아르바이트부터 대학생 때 대형마트에서 온갖 궂은일을 하던 기억까지. 그래서 뉴욕에서도 마음을 다잡았다. ‘그까짓 거, 하면 되지. 늘 하던 일이잖아.’ 잠깐 고생하면 금세 자리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깐일 줄 알았던 고생은 생각보다 길었고, 늦게까지 계속됐다.

그렇게 몸에 밴 절약과 성실함은 유학 생활 내내 나의 습관이 되었다. 다양한 곳에서 경험을 쌓으며 내 요리를 완성할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 꿈이야말로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중심이었다. 새벽 3시에 찬바람을 맞으며 집까지 두 시간씩 걸어갈 때도, 식사를 간단히 때울 때도 꿈은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해주었다. 몇 년 동안 착실하게 일한 덕분에 통장 잔고도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힘든 건 잠깐이었지만, 내 손으로 만들어가는 성취감은 훨씬 더 크고 오래갔다.

열정과 냉정 사이


미쉐린 3스타 파인 다이닝에서 일한다는 것:
고든 램지에서 일한 지 2년쯤 되었을 때부터, 나는 퍼 세에 지속적으로 이력서를 보냈다. 명실공히 뉴욕 최고의 레스토랑에 도전하고 싶었다. 나는 항상 목말라 있었다. 더 나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며 경험을 쌓고 싶었다. 퍼 세는 그 모든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여기서는 요리 기술뿐만 아니라 철학과 주방의 질서, 미식의 정수를 몸에 새길 수 있었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나를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발판이었다. 배우지 못하는 셰프는 결국 남의 주방에만 머물고, 자신의 요리를 만들지 못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좋은 경험이든, 아픈 경험이든 모든 경험은 결국 남는다. 경험은 셰프에게 있어 자신감이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재산이다. 2006년부터 미쉐린 3스타 타이틀을 유지해온 퍼 세는 그 모든 경험의 정점에 있는 곳이었다.

세계 최고의 파인 다이닝 ‘퍼 세’에서 일하다:
쉬지 않고 문을 두드린 지 석 달. 기다리던 소식이 왔다. 스테이지 인터뷰와 트레일 인터뷰(미쉐린급 키친에서 셰프를 채용할 때 진행하는 실무 평가 과정)를 하게 된 것이다. 무급으로 하루 동안 일을 하면서 경험을 측정하는 절차였다. 한 달에 한 번씩 석 달 동안 인터뷰한 후 정식으로 근무하라는 전화가 왔다. 꿈꾸던 무대에서 일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퍼 세의 대표이자 총괄 셰프는 ‘미식이라는 왕국을 세운 전설’ 토마스 켈러였다. 퍼 세의 주방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치열했지만, 나는 그 치열함 속으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그런 퍼 세에 파트장으로 채용된 것이다! 세 번째로 높은 섹션인 생선 파트였다. 이것은 퍼 세의 역사에도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짧은 경력의 중고 신입사원이 입사하자마자 팀장으로 발탁된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퍼 세의 주방은 군기가 빡세기로 유명했다. 그런 조직에서 생선 파트의 장으로 발탁된 내가 굴러들어 온 돌처럼 보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시기 어린 질투도 받고, 사사건건 트집이 잡혔다. 주방의 긴장감은 늘 나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작은 소음에 발목을 잡힐 시간이 없었다. 머릿속엔 하나의 생각만 가득했다. ‘이곳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쓸어 담자.’ 그래서 더 열심히 일했다. 더 완벽하게 준비했고, 더 빠르게 움직였고, 더 책임감 있게 행동했다. 최선이 모든 것을 증명해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퍼 세에서의 경험은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내가 셰프로 성장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밑거름이 되었다.

새벽 2시, 뉴욕 거리를 숨이 차도록 달려도 행복했다:
퍼 세만의 특별한 점은 매일 메뉴가 바뀐다는 것이다. 청소가 마무리되는 밤 12시. 셰프들은 미팅을 위해 모였다. 파트별로 어떤 메뉴를 낼지 치열한 논의가 시작됐다. 재료가 중복되어서는 안 됐다. 예를 들어, 고기 파트에서 당근을 사용하면 생선 파트에서는 쓸 수 없었다. 모든 메뉴는 독창성과 연결성을 유지해야 했다. 모든 요리는 퍼 세의 명성을 걸고 만들어지는 작품이었다. 미팅이 끝났다고 일도 끝나는 게 아니었다. 다른 셰프들의 메뉴까지 완벽히 숙지해야 실수가 없었다. 매일 밤, 엄청난 양의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는 공부가 필요했다. 퍼 세의 하루하루가 학교였고, 전쟁터였다. 그곳에서의 배움은 내 커리어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되어 남았다. 회의가 끝나고 나면 새벽 1~2시였다. 당시 나는 퀸즈의 아스토리아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한 달에 두세 번은 내려야 하는 역의 한두 구간 전에 지하철이 끊기기도 했다. 택시비는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쌌기 때문에 남은 방법은 두 다리로 뛰는 것이었다. 새벽 공기를 들이마시며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렸다. 다리는 무거웠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주머니는 비어 있었지만, 마음은 열정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레쥬메 한 줄을 만들기 위해:
인생의 항로를 바꿔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건 절대 안 돼!”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모든 벽은 깨지기 전까지 그저 벽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냉정한 현실 앞에서 낭만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내가 어떤 노력을 했고, 어떤 과정을 겪었느냐는 때로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연고도 없이 뉴욕에서 셰프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한 나에게는 어느 식당에서 어떤 포지션에서 일했는지 적힌 레쥬메 한 줄이 모든 것을 좌우했다. 그 한 줄이 내 다음 스태프를 결정짓는 통행권과도 같았다. 어디에서 면접을 보든, 나에게는 절박함이 압도적으로 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요리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일을 할 때만큼은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접근했다. 극도의 효율을 추구했고, 언제나 더 나은 방법을 찾으려 했다. 내 안에는 두 가지가 공존했다. 펄펄 끓는 물처럼 뜨거운 요리에 대한 열정과,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얼음 같은 시선. 현장에서 경험을 쌓아가면서 깨달았다. 열정은 반드시 불꽃처럼 타오를 필요는 없다는 것을. 때로는 고요하고 차가운 열정도 있었다. 그것은 은은히 타오르며 나를 앞으로 밀어붙이는 힘이었다. 경력을 쌓아나가는 동안 이 두 가지가 나를 지탱해주었다. 뜨거울 땐 차갑게, 차가울 땐 뜨겁게. 그 균형이 깨지지 않도록 매 순간 나를 조율했다.

새로운 시작의 서막:
2012년 말, 토마스 켈러가 나에게 승진을 제안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붙어 있었다. “더 높은 위치에 오르려면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해요. 지금보다 영어 실력을 더 쌓아야 합니다.” 누구라도 그 말을 들으면 “네, 알겠습니다.” 대답하고 어학원에 등록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내 안의 청개구리 기질이 발동했는지도 몰랐다. 미국에 온 지 8년이 지났는데도 영어가 이렇게 늘지 않다니! 나는 자조하며 생각했다. ‘내가 가질 언어 재능이 요리에 몰빵된 건가?’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영어는 아직 나의 약점일 수 있었지만, 내가 만든 요리는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강점이었다. 토마스 켈러의 제안은 영광이었지만, 나는 고민 끝에 제안을 거절했다. 오너 셰프가 되어 가게를 오픈하고 싶다는 갈망이 자라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퍼 세에서의 마지막 날, 뉴욕의 밤거리는 이상하게도 낯설었다. 불확실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그동안 내가 쌓아온 모든 경험과 노하우가 나의 새로운 무기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RESUME 2 셰프에서 오너 셰프로



잘 알고 있는 것, 잘하는 것을 하자


꿈을 현실로 만드는 힘:
투자자 미팅을 다니던 때, 나는 15개가 넘는 비즈니스 플랜을 갖고 있었다. 어떤 투자자를 만나게 될지 모르니 준비할 필요성도 있었지만 하고 싶은 레스토랑 콘셉트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비즈니스 플랜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메모하는 습관 덕분이었다. 재료를 준비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으면 바로 노트를 꺼내 적었다.

내 가게를 오픈할 때 현실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하지만 투자자를 만나는 족족 실패했고, 그만큼 받는 스트레스도 컸다. 아내가 어느 날 슬며시 말을 건넸다. “그렇게 스트레스만 받지 말고 직접 해보는 건 어때?” 아내의 그 말이 용기가 되었다. 투자자를 찾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내 힘으로 가게를 열자고 노선을 바꿨다. ‘일단 돈부터 만들자!’ 비즈니스 플랜을 들고 은행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NO!’ 우리 집으로는 대출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만둘 수는 없었다. 새로운 사업 계획서를 가지고 은행을 다시 찾았다.

지속적인 어필 끝에 스몰 비즈니스론을 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 모은 돈과 은행에서 빌린 30만 달러를 합치니 작은 가게를 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 마련되었다. 일식 레스토랑 네타에서 나왔다. 예전처럼 일하면서 오픈 준비를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서였다. 대신 컨설턴트 셰프라는 직함으로 고급 라면집, 포케집 등 여러 곳의 창업 메뉴 컨설팅과 개발을 진행했다. 일을 하면서 고민하고, 고민하면서 움직였다. 충분히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머리로 그려보지만 결국 손을 움직여야 답을 찾는다. 긴 시간 일해 온 경험이 고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에게 일은 행동이고 생각이고 창의성을 계발하는 계기였다.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잘하는 것을 해:
‘일본식 꼬치구이’라는 콘셉트로 모든 계획을 끝내고 오픈 준비에 들어갔다. 겨우 은행의 허락을 받아 서둘러 계약하고, 인테리어를 시작했다. 공사는 순조로웠다. 그런데 뭔가 찜찜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물었다. “그런데 왜 일식을 하려고 해? 그건 당신 메인이 아니잖아.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잘하는 것을 하면 어때?” 네타에서의 성과가 좋았기에 일식은 내가 잘 알고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 좀 더 본질적인 것, 내 요리의 ‘오리지널리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일식을 왜 하려고 하지?’ 일식을 하면 망하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망하지 않는 일’이 내가 오너 셰프를 꿈꾸던 이유였나? 아니었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잘할 수 있는 건 뭐지?’ 일식 아니면 프렌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안에서는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온 ‘한식’이었다. 내 요리의 정체성은 한식에 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이제라도 깨달아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꼬치’라는 메뉴 콘셉트는 그대로 가져가되, 한식으로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테리어 수정부터 메뉴 개발까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비용이 더 들었지만 바로잡는 건 아무리 늦어도 ‘지금’이 가장 빠른 순간이니까. 그리고 이 일은 내 인생을 역전시키는 중요한 결정이 되었다.

오너 셰프로서의 첫걸음:
2019년 9월, 뉴욕 땅에 발을 디딘 지 14년 만에 꿈을 이뤘다. 맨해튼 서쪽, 헬스 키친 지역에 나의 식당을 열었다. 식당의 이름은 ‘코치(Kochi)’였다. 한식 꼬치 요리를 콘셉트로 잡았다. 한국 궁중 음식인 화양적, 일식의 전통 꼬치구이, 한국 재래시장에서 볼 수 있는 떡꼬치 등을 떠올리며 재료를 선별하고 식감을 고민했다. 요리 하나하나가 맛있으면서도 코스 전체가 조화를 이루어야 했다. 오픈 준비가 끝난 가게, 주방 안에 서 있으니 그동안의 감회가 밀려들었다. ‘이게 진짠가? 꿈인가?’ 14년을 버티고, 미치도록 달렸다. 제일 먼저 출근해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눈에 띄지 않아도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그렇게 보내온 시간의 결과가 ‘코치’라는 이름으로 내 앞에 있었다. 그러나 감상에 빠지는 건 잠깐일 뿐, 다음 날부터 전쟁이 시작됐다. 레스토랑의 격전지인 뉴욕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이건 철저하게 내 싸움이었다. 그리고 나는 기꺼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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