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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대신 샌드백을 때리기로 했습니다

윤리 지음 | 모티브


세상 대신 샌드백을 때리기로 했습니다

윤리 지음

모티브 / 2026년 5월 / 260쪽 / 17,800원





CHAPTER 1. 시작은 언제나 우연처럼 찾아온다



나는 나와 화해했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흠 없이 해내야 한다’는 기준을 등에 지고 살았다. 완벽해야만 마음이 놓였고, 작은 실수 하나에도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긴 방황 끝에 깨달은 사실은, 문제는 내 능력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나를 숨 막히게 조여오던 것은 ‘완벽주의적 기준’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견고하던 기준이 느슨해지기 시작한 곳은 예상하지 못한 장소, 복싱장이었다.

휴학을 하고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던 시기였다. 작업실로 돌아가는 건 나를 무너뜨렸던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자니 불안이 밀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알바몬 이력서를 보고 문자가 도착했다. “복싱장 상담 알바 가능하세요?” ‘복싱’은 낯선 영역이었지만, 이상하게 호기심이 생겼다. “일단 가보자.” 그 가벼운 마음이 내 인생의 핸들을 꺾었다. 복싱장에 갔던 날, 나는 내가 복싱장에 대해 가졌던 편견이 박살 나는 경험을 했다. 문을 열자마자 나를 맞이한 것은 화려한 샹들리에였고, 코끝에는 은은한 블랙체리 향이 감돌았다. 운동 기구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정돈되어 있었고, 바닥의 먼지 한 톨까지 신경 써서 관리한 흔적이 역력했다. 젊은 관장님은 서글서글해 보였지만, 자세와 말투에는 세월이 빚어낸 듯한 단단함이 서려 있었다.

면접 자리에서 내가 내뱉은 첫 문장은 참 나다웠다. “만약 상담하다가 실수하면 어떡하죠?” 그 질문 속에는 내 고질병인 완벽주의가 녹아 있었다. 그런데 관장님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못 해도 괜찮아요. 하나씩 배우면 돼요.” 그동안 내 주변의 세상은 늘 “잘해야 한다”고 속삭였지만, 생경한 공간에서 만난 낯선 이는 “못 해도 괜찮다”라고 말해주었다. 그 넉넉한 한마디가 나를 이 공간으로 끌어당겼다. 첫 출근 날, 관장님은 글러브를 건네며 웃었다. “오늘은 일 안 해도 됩니다. 복싱부터 배워봅시다!” 글러브를 끼고 엉성한 자세로 주먹을 뻗었을 때, 무서운 몰입감이 찾아왔다. 팔의 각도, 발의 위치, 호흡의 박자에 신경 쓰다 보니 머릿속의 잡생각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오로지 나의 신체에만 집중하는 그 감각은, 처음 조소를 시작하며 느꼈던 몰입과 닮아 있었다. 나는 그렇게 복싱이라는 운동에 빠져들었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이 공간이 나와 잘 맞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담하러 온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들의 기분과 망설임의 지점이 읽혔다. 체육관 안에서 회원들의 동선을 보면 어디가 막혀서 흐름이 끊기는지, 어떤 방향으로 조명을 바꾸면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느낄지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때야 깨달았다. 이건 이 일에 대한 재능이 아니라, 예고와 대학 시절, 조소 작업을 하며 사람을 관찰했던 그 시간이 내 몸에 새겨진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미술을 포기하고 떠나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복싱장에서 일하며 깨달았다. 미술을 끊어낸 것이 아니라, 잠시 내려두었을 뿐이라는 것을. 관찰하던 눈은 공감하는 눈이 되었고, 빚던 손은 관계를 만드는 손이 되었으며, 공간을 읽던 감각은 사람을 읽는 감각이 되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능력들이 내 안에서 서로를 지탱하고 있었다.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던 습관이었다. 비교는 나를 깊은 늪으로 몰아넣었고, 그때마다 나를 더 채찍질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는 애매한 사람이 아니라 면이 많은 사람일 뿐이었다. 결이 복잡해서 전체 형태를 맞추는 데 시간이 더 걸릴 뿐, 비어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흐릿하던 윤곽이 선명해지자, 나라는 사람의 고유한 결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여전히 완성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헤매며 새로운 면들을 발견해 나갈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시간이 두렵지 않다. 그 헤맴 자체가 나라는 작품을 빚어가는 숭고한 과정임을 알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조각들을 끌어안자, 흩어져 있던 나라는 사람이 비로소 하나의 형태를 갖추었다. 오랫동안 화해하지 못했던 나 자신과, 그날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

고속도로 아니고 저속도로


예전의 나는 어떤 선택을 하든 빨리, 눈에 보이는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복싱장에서 수많은 사람의 성장을 지켜보며, 그 견고했던 믿음에 금이 갔다. 사람들의 속도는 모두 달랐다. 어떤 회원은 글러브 끈을 묶는 법을 익히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고, 어떤 회원은 처음 보는 동작도 막힘없이 따라 하곤 했다. 그 서로 다른 속도들을 지켜보는 일이 나를 안심시켰다. 출발선도, 보폭도 달랐지만 각자가 가야 할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내 성장이 느려서 놓쳤다고 자책했던 기회들, 충분히 잘하지 못했다고 몰아세웠던 밤들. 그 모든 판단은 속도라는 하나의 잣대로 나를 옥죄었기에 생긴 착각이었다. 정작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 방향을 자신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복싱을 배우러 온 회원들이 내게 많이 던졌던 질문도 속도에 관한 것이었다. “저만 이렇게 진도가 안 나가는 건가요? 소질이 없나 봐요.” 그 질문을 들을 때마다 오래전 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불안 속으로 잠기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답하곤 했다. “중요한 건 남보다 빠른 게 아니라, 오늘 다시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지속을 선택했다는 사실이에요. 그 선택이 진짜 용기예요.” 그 말을 건넬 때마다 묘한 감정이 차올랐다. 누군가에게 해주는 조언인 동시에, 나에게 필요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타인과 함께 나 자신도 다독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관장님이 물었다. “복학 생각은 없어요?” 그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복싱장 일에 빠져 지내는 동안 미술을 잊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 느낌이 좋았다. “잘 모르겠어요. 잘할 수 있을지.” 관장님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기서 일하는 거 보면 매니저님 미적 감각이 보통이 아니에요. 그 감각으로 만든 작품들, 저는 궁금한데요?” 그 한마디가 나를 다시 작업실로 돌려보냈다. 학교와 복싱장을 오가는 이중생활이 펼쳐졌다. 오전에는 학교에서 작품을 빚고, 오후에는 복싱장에서 회원들을 맞이했으며, 밤에는 다시 작업실로 가서 나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예전의 나는 교수님이 좋아할 만한 작품,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형태를 만드느라 스스로를 내몰았다. 하지만 복학 후에는 달랐다. 나는 복싱장에서 몸으로 익힌 여유를 떠올리며 손길이 가는 대로 흙을 만졌다. 완벽의 기준을 타인의 시선에서 거두어 내 안으로 가져오자, 작업이 즐거워졌다. 예전의 작업들이 잘 만들어진 공산품이었다면, 이제야 비로소 나만의 작품이 된 것이다. 그 변화는 졸업 전시로 이어졌고, 전시를 본 갤러리 대표가 개인전 제안을 했다. 예전 같으면 불안해했겠지만, 이제는 내 속도대로 준비하면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게 첫 개인전을 열었고, 졸업 후 1~2년 사이 총 13번의 전시와 경매 제의를 받았다. 숫자가 쌓이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나의 속도대로 진짜 내 작업을 한다는 순수한 기쁨이었다. 사람들이 영감의 원천을 물으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완벽해지려는 마음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제가 가야 할 길이 보이더라고요.” 휴학이라는 이름의 멈춤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고속도로 위에서 앞차의 뒷모습만 보며 불안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속도를 줄였기에 고속도로에서 보이지 않던 길가의 꽃과 풍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풍경들이 내 작업의 양분이 되었고, 나를 평생 꿈꾸던 예술가의 길로 이끌었다. 이제 나는 내 삶의 리듬을 재촉하지 않는다. 빠르게 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길이 보이지 않는 순간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지금까지 내 삶이 남들보다 느린 저속도로였다면, 앞으로의 삶은 그 속도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나다운 이야기들로 채워질 것이다.



CHAPTER 2. 어제의 서툰 반복이 오늘의 단단함이 되기까지



도전은 완벽하지 않을 때 시작된다


복싱장에서 일한 지 1년쯤 되었을 무렵, 나는 신규 회원 상담을 전담하고 있었다. 어느 날, 30대 중반의 여성분이 찾아왔다. 눈빛에 불안이 가득했던 그녀는 걱정을 쏟아냈다. “운동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거든요. 괜찮을까요?”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여기 오시는 분들 대부분이 처음이에요.” 하지만 그녀는 확신이 없는 듯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준비를 마친 상태로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가볍게 체험부터 해보시죠.”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등록을 마쳤다.

며칠 후 첫 수업 시간, 나는 그녀를 멀리서 지켜봤다. 자세를 배우는 시간에 그녀의 몸은 굳어 있었다. “회원님, 긴장 푸세요!” 30분쯤 지났을까, 코치님은 그녀를 샌드백 앞으로 데려갔다. “정답은 없습니다! 그냥 스트레스 푼다고 생각하고 쳐보세요!” 그녀가 주먹을 쥐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주먹이 샌드백에 ‘팡’ 하고 닿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 생각보다 재밌는데요?” 한 달이 지났을 무렵, 그녀가 상담실 문을 두드렸다. “매니저님, 감사해요. 처음 왔을 때 해주신 말씀 있잖아요. ‘완벽하게 준비되고 오는 사람 없다’고 하셨던 거요. 그 말 덕분에 등록할 수 있었어요. 한 달 전만 해도 복싱을 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요.” 물병을 내려놓으며 웃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지금의 그녀는 처음에 왔을 때 불안에 떨며 앉아 있던 그 사람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런 변화들을 지켜보는 일은 내게 묘한 감동을 주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40대 중반의 직장인, ‘최 부장님’이다. 그는 처음에는 제자리 뛰기조차 힘들어했다. 운동 신경과 거리가 멀어 보였고, 금방 그만두시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예상은 빗나갔다. 최 부장님은 매일 저녁 체육관 문을 열었고, 반년이 흘렀을 때 그의 섀도복싱을 지켜보던 나는 탄성을 내뱉었다. 리듬을 타며 가볍게 스텝을 밟고 부드럽게 원투를 뻗고 있었다. 그 느리고 정직한 성장의 궤적을 지켜보는 것은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연말 무렵, 관장님과 코치진, 그리고 회원 몇 분과 함께 고깃집에서 회식을 한 적이 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최 부장님이 말했다. “제가 왜 매일 어설픈 스텝을 밟으면서도 체육관에 나오는지 아세요? 밖에서 저는 부장이라는 직함 때문에 완벽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늘 긴장하고 살죠. 그런데 복싱장에서는 스텝 좀 꼬이고 넘어져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하잖아요. 그 서투른 시간 자체가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었어요. 넘어져도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나면 된다는 걸 배우니까, 회사에서 받는 압박도 덜 무섭더라고요.” 옆에 앉아 있던 두 아이의 엄마인 회원님도 거들었다. “맞아요. 샌드백을 칠 때만큼은 오롯이 ‘나’ 자신이 되는 기분이에요. 내 한계랑 싸워보는 그 기분이 일상을 버틸 힘을 주거든요.” 나는 가슴 한쪽이 저려드는 것을 느꼈다. 이들에게 복싱장은 단순히 살을 빼고 기술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를 받아 가는 곳이었다. 나는 내가 이들을 돕고 가르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타인을 지켜보는 일은, 나 자신을 가르치는 과정이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매일 문을 열고 들어오던 사람들의 모습이, 멈춰 있던 나를 일으켜 세우는 동력이 되었다.

4학년이 되면서 졸업 전시 준비를 앞두게 되었다. 나는 완벽한 주제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몇 주를 고민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흐릿하기만 했다. 어느 날, 복싱장 청소를 끝내고 작업실로 돌아왔다. 시계는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혼자 앉아 있으니 조급함이 밀려왔다. ‘남들은 저만큼 앞서가는데, 나만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때 머릿속을 스치는 말이 있었다. “완벽하게 준비되고 오는 사람 없어요.” ‘나도… 그냥 손을 움직이면 되는 거 아닐까. 준비가 덜 됐더라도, 일단 뭔가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나는 자리에 앉아 손을 뻗고,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작업을 이어갔다. 1시간쯤 지나자 투박하지만 분명한 형태가 드러났다.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이 온몸에 번졌다. 그것은 누군가의 칭찬을 바라고 만든 것이 아닌, 오로지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나만의 형태였다.

그날 이후로 더 이상 완벽한 결과를 고집하지 않았다. 내 손이 이끄는 대로 작업을 쌓아 올렸다. 두 달쯤 지나자 작품은 그럴듯한 형태를 갖추어 갔다. 어느 날 작업실에 들른 교수님이 내 작품 앞에 멈춰 섰다. “네 색깔이 뚜렷하게 느껴져서 좋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너만 할 수 있는 작업이다.” 그 한마디가 내가 걸어온 지난한 미술 인생을 조용히 끌어안아 주는 것 같았다. 만약 완벽한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면, 나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손대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조금 더 나중’을 기다리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그 완벽한 시점은 오지 않는다. 완벽함이란 출발선 앞에서 갖추는 것이 아니라, 일단 손을 뻗고 부딪치고 수정해가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완성된 작품이 아닌, 손을 움직이는 그 순간 속에서 배웠다.

꾸준함은 언제 재능이 될까


복싱장에서 일하며 운동을 시작한 지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경력자’ 소리를 들을 법도 한데, 내 체감은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어제 지적받은 동작을 또 틀리고, 남들은 금방 익히는 스텝을 몇 달째 엉거주춤 따라 하고 있었다. ‘운동 신경이 결핍된 게 아닐까?’ 2년이라는 시간을 돌이켜 보면, 나의 재능 없음을 처절하게 확인해가는 일종의 ‘검증기’ 같았다.

샌드백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던 날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관장님께 툭 던졌다. “관장님, 저 언제쯤 잘한다는 소리를 듣게 될까요?” 관장님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너 엄청 늘었는데?” 와닿지 않는 소리였다. 나는 여전히 허점투성이였으니까. “에이, 저 아직도 원투 칠 때 고개 돌아가고 난리잖아요. 엉망이에요.” 그러자 관장님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처음 왔을 때 기억 안 나지? 너 그때랑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너만 모르는 거야.”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기억을 되감아보기 시작했다. 복싱장에 처음 발을 들였던 그날의 낯섦을.

나는 핸드랩 뭉치를 손에 쥔 채 쩔쩔매고 있었다. 4미터나 되는 천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감아야 할지조차 몰랐다. 샌드백 앞에서는 더 가관이었다. 스텝은 엉켰고, 주먹은 허공을 가르며 몸의 중심을 무너뜨렸다. 기록용으로 찍었던 첫 영상 속의 나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도 다음 날 다시 가방을 챙겼다. 나와의 약속을 하루 만에 깨는 비겁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꾸역꾸역 나갔다. 시간이 흐르며 모든 것이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나는 나를 ‘재능 없는 노력파’ 축에도 못 끼는 사람이라 정의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었다. 변화의 조짐은 엉뚱하게도 작업실에서 먼저 발견됐다. 어느 날, 평소처럼 흙을 만지며 작업에 몰입하다 무심코 시계를 봤는데 5시간이 지나 있었다. 놀라운 점은 그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았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예전의 나는 30분만 지나도 답답해서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그런 내가, 이제는 진득하게 작업의 시간을 견디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멈추지 않고 마지막 10초의 주먹을 뻗던 집요함, 똑같은 잽 동작을 수백 번 반복하며 권태를 견디던 그 근육의 기억이 고스란히 작업실로 옮겨온 것이다. 몸을 쓰는 감각이 마음을 쓰는 근육까지 단단하게 단련시킨 셈이었다.

나는 SNS 보관함에 묵혀두었던 옛날 운동 영상들을 꺼내 보았다. 2년 전 영상부터 시작해 6개월 뒤, 1년 뒤, 그리고 오늘의 영상을 재생했다. 영상들을 붙여 보니 선명한 궤적이 보였다. 하루하루는 미세해서 티가 안 났을 뿐, 나는 분명 나아가고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서툰 동작들이 쌓여 단단한 ‘결’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2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겉모습은 같아도 세상을 대하는 질량 자체가 다른 사람이었다. 보잘것없고 지루한 하루들이 쌓이자,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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