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판 명저)야성의 삶
게리 스나이더 지음 | 동쪽나라
야성의 삶
게리 스나이더 지음
동쪽나라 / 2000년 8월 / 336쪽 / 9,000원
제1장 자유의 예절
자연, 야성 그리고 야생지라는 말들먼저 ‘자연, nature’를 말해 봅시다. 자연이라는 말은 ‘탄생, 구성, 성격, 사물의 운행’을 의미하는 라틴어의 natura에서, 태어날 예정이라는 nasci에서 유래했습니다. 여기에서 nation(국민, 국가, 민족), natal(출생의), native(출생지의), pregnant(임신한)란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믿을 만한 인도 유럽어의 어근은 gen이고 거기서 kin(친족), kind(종류)와 함께 generate(산출하다)와 genus(종류)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말에는 서로 조금 다른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깥’으로 그것은 모든 생명체를 포함하는 물질계입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자연은 세계의 규범으로 문명과 인간 의지가 갖는 특성이나 그 산물과는 구별되는 것이지요. 또 다른 의미는 ‘물질계 또는 그 집합적 물체와 현상들’인데 그것은 인간의 활동과 의도가 생산한 것을 뜻합니다.
세계에 작용하는 힘이라는 의미에서의 자연은 ‘물질계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그 모든 현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창조적이고 조절 능력이 있는 물리적 힘’으로 정의됩니다. 과학과 일부 신비주의가 “모든 것은 자연적이다.”라고 제안한 것은 옳습니다. 이런 제안에 비추어 보면 뉴욕시나 해로운 쓰레기, 원자 에너지에도 비자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정의상으로는 우리가 살면서 행하거나 체험하는 것 중 ‘비자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야성적’이란 말은 숲속으로 멀리 달아나 덤불 뒤로 숨어버려서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하는 잿빛 여우와 같습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첫눈에 그것은 ‘야성적’입니다. 그다음 숲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을 때 다시 보면 그것은 ‘wyld’입니다.
제2장 장소, 지역, 공유지
세계는 장소이다우리는 빈민가와 초원과 습지를 모두 똑같이 ‘장소들’로서 체험합니다. 하나의 장소는 거울처럼, 규모에 상관없이 어떤 것이나 다 담을 수 있습니다. 한 장소의 심장은 가정이고 가정의 심장은 아궁이, 화롯가입니다. 일시적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탐험은 그곳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노인들이 돌아오는 곳은 그 불가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장소는 우리 실체의 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하나의 ‘장소’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일종의 유동성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장소는 시공을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지구 전체는 하나의 명판으로 현재와 과거의 소용돌이치는 힘이 수없이 겹쳐진 자취를 담고 있습니다. 각 장소는 그 자신만의 장소이며 영원히 야성적입니다. 아이들이 처음 장소를 배우는 것은 집과 주거지 주위와 그 너머 바깥에 있는 그 작은 영역들을 배우면서부터입니다.
‘지역’을 배워 나가면서 한 장소의 크기에 대한 지식은 확장됩니다. 젊은이들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탐험을 하러 나갑니다. 탐험은 또한 땔감 수집과 낚시, 장터나 시장에 가는 것처럼 생필품을 얻는 일이기도 하지요. 좀 더 큰 지역의 주요 특색은 젊은이들의 깨달음의 한 부분이 됩니다. 한 집단이 고향이라고 부르는 지역의 전체 크기는 토지의 유형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집단이든 각기 토지에 관련되어 있고, 각기 정해진 지역 안에서 움직입니다.
모든 지역에는 그 지역만이 가진 야생지가 있습니다. 부엌에는 불이 있고, 사람들이 덜 찾아가는 장소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정착 지역에는 우선적인 농경지와 과수원, 포도밭과 거친 목초지, 식림지와 숲, 사막이나 산의 ‘황무지’가 얼마간은 서로 결합해 있었습니다. 사실상의 야생지는 그 모든 것 가운데 극히 오지에 있는 한 부분이었습니다.
우리가 한때 장소에서 살았다는 것을 생각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자아 발견의 일부입니다. 그것은 ‘지구인’(어원상으로는 ‘지구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 같은 것인데)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에 토대를 놓아줍니다. 가끔 세계가 인간의 삶에 적대적이라고 느끼는 친구가 있는데, 그는 세계가 우리를 춥게 하고 우리를 죽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모습을 준 지구가 없었다면 어떻게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중력, 그리고 빙점과 비등점 사이의 생존 가능한 범위의 기온이라는 두 조건은 우리에게 분비액과 육신을 주었습니다. 대지는 우리에게 걸음을 주었고 호수는 뛰어들 수 있는 능력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마워해야 하고 자연의 좀 더 엄격한 교훈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3장 황갈색 문법
자연의 쓰기인문학이란 학문의 형식적 기준 가운데 하나는 텍스트의 정독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텍스트는 시간 속에서 축적된 정보입니다. 암석의 층위, 어떤 습지에 쌓인 화분의 층, 나무줄기가 밖으로 넓혀나가며 그린 나이테를 텍스트로 볼 수 있습니다. 언어의 역사가 남기는 층은 언어 텍스트 그 자체가 되지요.
『원시 인도 유럽어의 나무들』에서 저자 파울 프리드리히는 1만 2천 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은 일군의 말을 통해 인도 유럽어 어족의 ‘의미와 뿌리’를 찾아내고 있는데, 그 뿌리들은 나무의 이름입니다. 자작나무, 오리나무, 느릅나무, 물푸레나무, 사과나무, 너도밤나무가 특히 그렇습니다.
시간을 초월한 한 마리 들소의 시체나 유콘의 평야 아래로 이리저리 떠도는 큰 필적 같은 강, 또는 쿠우방미우트족과 관련 있는 고대 극지방의 세계주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서양 문화의 역사는 아주 짧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휴머니즘은 고대 역사와 문학에 몰두하여 깊이 감동 받은 나머지 변신했던 작가와 학자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의 글은 인간이 처한 상황에 유용한 문화적 - 신학적이거나 생물학적인 것이라기보다 - 전망을 제공해 왔습니다.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후기 인본주의자들은 지구상의 다양한 소수민족들을 연구하고 경험하면서 ‘원시 시대’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선사 시대야말로 끝없이 확장하는 비옥한 들판이라는 걸 발견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단 하나인 인간의 뿌리의 심연을 막연히 감지하고 있는 것이지요. 야성의 자연은 자아와 문화가 풀리지 않게 직조된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알게 되면 나머지 자연계는 바로 그곳에 존재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법과 진리, ‘다르마’의 일부입니다.
제4장 좋은 땅, 야생의 땅, 신성한 땅
참다운 자연환경과 지구의 운명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환경주의가 무엇보다 건강과 관련된 운동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물과 공기의 상태를 보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반구에서도 문제는 유사합니다. 그러나 서반구에는 아직 약간의 야생지가 남아 있어 축복 받고 있는 셈이며, 그것은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보존해야 할 유산입니다. 서반구에는 사원이나 사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물들의 숫자가 아주 미미합니다. 서반구의 사원들은 지구에 남아 있는 야생 지역의 일부분이 될 것입니다.
그런 곳에 맨발로 걸어 들어갈 때, 우리는 일본의 카미(神)나 마이두 족의 쿠키니(Kukini)가 여기에서는 아직도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곳들은 퓨마와 산양, 회색곰의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이 세 가지 동물들은 백인이 들어오기 전에는 북미의 낮은 언덕과 평야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바위가 많고 얼음으로 이루어진 고산지대의 장대함, 그리고 풍부하고 아련한 새와 물고기들이 줄무늬를 이루는 남부의 늪지들은 우리 모두를 살찌우고 산업경제를 떠받치며 아치형으로 걸려 있는 야생계를 상기시켜 줍니다. 불모의 아름다움을 가진 산의 눈벌판과 빙하에서 작은 냇물들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저 거대한 ‘캘리포니아 중앙 계곡’의 농업 관련 산업용 밭에 물을 대고 있습니다.
나 자신의 입장으로 돌아와 보지요. 내 가족이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시에라 네바다의 땅은 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럭저럭 좋은’ 곳입니다. 지목을 변경하고 많은 품을 들이고 건기에는 물을 담을 못을 파서, 약간의 채소류와 얼마간의 품질 좋은 사과를 생산합니다. 그런데 이곳은 숲으로 더 좋은 곳입니다.
수천 년 동안 이 땅은 무엇보다도 떡갈나무와 소나무를 훌륭하게 키워왔습니다. 생각해 보건대 이 땅을 야생으로 내버려두는 게 더 좋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땅의 대부분은 지금 ‘야생지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소나무는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이곳은 우리가 함께 일하고 함께 투쟁하며, 여름과 겨울을 견디며 살고 있는 지상의 터전입니다. 이곳은 우리에게 이제껏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떤 것을 신성하다고 부르는 데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인내심을 가져야 하며, 땅이 우리나 우리 후손들에게 말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딱따구리 소리, 회색 다람쥐의 우습고 급한 재잘거림, 헛간 지붕 위에 ‘탁’ 하고 떨어지는 도토리 소리. 이런 것들이 바로 그러한 신호들이겠지요.
제5장 변함없이 걷고 있는 푸른 산
부동과 관음우리는 어렸을 때 직접 걸으면서, 또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한 장소를 익히게 되고 공간들 사이의 관계를 마음속에 구체화시키는 법을 배웁니다. 장소와 공간의 규모는 우리 몸과 그 몸이 가진 능력에 비추어 측정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1마일’은 원래 로마인이 1천 걸음을 기준으로 해서 만든 거리 단위였습니다. 자동차와 비행기 여행은 우리가 쉽게 공간을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중국인들은 ‘네 가지 기품’에 대해 말합니다. 서 있는 것, 눕는 것, 앉는 것, 걷는 것이 그것인데, 이 네 가지가 ‘기품’이 되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인 모양에서 우리 몸이 편안하고 완전히 우리 자신이 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전처럼 다시 걸어서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가령 약 10마일마다 작은 여인숙이나 깨끗한 캠프가 있고 지나다니는 차량의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중국 전체나 또는 유럽 전체와 같은 광대한 풍경을 도보로 횡단하기 위해 여행길에 나설 수 있다면, 많은 이들이 이를 마치 기적 같은 일로 여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세계를 보는 방법입니다. 우리 자신의 육신으로 말이지요.
동아시아에서 ‘산’은 종종 야생지와 같은 뜻을 지닙니다. 농경 국가는 오랫동안 배수를 하고 관개를 하고 저지대를 계단식 밭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숲과 야생 동물 서식지는 농사터가 끝나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합니다. 마을, 시장, 도시, 궁, 술집이 있는 저지대는 탐욕과 욕망과 경쟁과 장사의 취기가 있는 곳, 즉 ‘속진(먼지 낀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세상에서 도망쳐 순수를 추구하려는 사람들은 산에서 동굴을 찾거나 직접 은둔처를 짓습니다. 그리고 수행을 하는데 수행은 그들에게 깨달음이나 적어도 건강한 장수의 삶을 줍니다. 이 은둔처가 절간 건물들의 중심이 되고, 결국 종교 지역이 되었던 것이지요.
산은 또한 수직성, 정신, 높이, 초월, 단단함, 저항, 남성성 같은 신화적 연상을 가집니다. 중국인들에게 산은 ‘양(陽)’, 즉 건조하고 단단하고 남성이며 밝은 것의 표본입니다. 물은 여성입니다. 축축하고 부드럽고 어두운 ‘음(陰)’은 흐르지만 강하고, 가장 낮은 곳을 찾으며 (그리고 갈망하며), 영혼적이고, 생명을 주며, 형상을 바꾸는 것과 연관됩니다. 민중 불교의 (그리고 금강승의) 도상은 ‘루파스’, 즉 부동명왕(확고부동한 깨달음의 왕)과 관음보살(세파를 지켜주는 보살)의 ‘이미지’로 ‘산과 물’을 의인화합니다.
‘산과 물’은 자연의 진행 전체를 가리키는 한 방식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것은 순수와 오염, 자연과 인위의 이분법을 멀리 뛰어넘습니다. 강과 계곡을 가진 그 대자연 전체란 말할 것도 없이 농지, 들, 마을, 도시, 그리고 (한때는 비교적 작았던) 인간사로 가득한 속진의 세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제6장 극서 지방의 고대의 숲
상록수미국 서부의 개발되지 않은 메마른 땅은 미국 정치에 기이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땅은 어떤 사람들을 변화시키면서 급진적으로 만들기까지 하였지요. 한때 서부는 그 땅으로 이주할 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주인 없는 토지가 공유지가 되었을 때, 극소수의 사람들만 이 토지가 미래에 공적인 논의의 대상이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야생지의 탐험과 올바른 이해의 차원에서 더 나아가 정치적 행동에 투신하기도 했습니다.
도교 사상가들은 놀라움과 오묘한 가르침이란 ‘무용한 것’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미국 서부의 황무지가 바로 그렇습니다. 초창기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 땅은 접근할 수 없고, 거주할 수 없으며, 건조하며, 금지된 땅이었습니다. 그 ‘쓸모없는 땅들’은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이르러 몇몇 사람들에게는 꿈꾸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울창한 숲은 돌아오고, 돌아오고, 다시 돌아옵니다. 미 서부의 고대 숲들은 아직도 우리 주변에 남아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유레카, 코발리스, 포틀랜드, 시애틀, 롱비우에 있는 집들은 모두 그 오래된 나무의 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의 증손자들은 강바닥에서 채취한 돌과 모래 등의 혼합재로 지은 집에서 살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그때가 되면 과거의 숲은 정말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숲에서 쓰러진 나무가 완전히 흙으로 돌아가는 데는 그 나무가 살아있었던 시간과 대충 같은 세월이 걸립니다. 만일 인간의 사회가 그런 걸음으로 사는 걸 배울 수만 있다면 물자 부족도 자원 소멸도 없을 것입니다. 맑은 물이 흐를 것이고, 연어는 언제라도 알을 낳으러 상류로 돌아올 것입니다.
제7장 길 위에서 오솔길을 벗어나서
일하면서 얻는 자유현실에 대한 통찰은 지금의 정치와 역사에 대한 감정을 가지라고, 자신을 통제하라고, 24시간을 지배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잘 하되 자기연민 없이 하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을 모아서 자가용 승용차에 합승시켜 버스가 있는 길 아래로 데려다주는 일은 추운 아침 법당에서 경전을 염불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한쪽의 활동이 다른 쪽의 활동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니며, 각각의 활동은 따분한 것일 수 있지만 둘 다 반복이라는 미덕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답게 세상을 경험한 사람, 세련된 사람은 ‘일상 속에서 기쁨을 발견합니다.’ 그런 사람은 집이나 사무실 주변에서 하는 지루한 일을 등산의 비유가 암시하는 것처럼 도전과 놀이가 충만한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진짜 ‘놀이’는 오솔길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행동, 인간이나 동물이 어떤 현실적이거나 정신적인 목적을 겨냥한 규칙성의 어떤 흔적으로부터 벗어난 행동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따라갈 수 없는 오솔길’로 나갑니다. 그 숲길은 가능성들로 이루어진 끝없는 직물이며, 같은 주제에 대해 무수히 많은 우미한 변화가 있으면서도 각각 독자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는 집과 난롯가에서, 그리고 집 근방의 길 위에서 안락함과 위로를 발견합니다. 거기에는 또한 해야 할 이런저런 허드렛일의 지루함과 사소한 일들이 되풀이되는 진부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행무상의 법칙은 오랫동안 반복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의 일시성은 우리로 하여금 일종의 시간의 야생지로 가게 합니다.
우리는 무생물과 생물이 진행하는 과정의 그물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 과정은 지하로 흐르는 강에 부딪치고 창공에 쳐진 거미줄처럼 반짝이면서 만물을 가릅니다. 활동하고 있는 생명과 물체는 으스스하고 강인하며, 털북숭이이고 맛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길이라고 말하는 일시적인 질서정연함이라는 작은 고립된 장소보다 더 큰 질서가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큰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