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괜찮은 하루
권순표 지음 | 메디치미디어
오늘은 괜찮은 하루
권순표 지음
메디치미디어 / 2026년 1월 / 204쪽 / 18,000원
1부 비움과 배움
비움의 기쁨 나는 시끄러움을 싫어한다. 평생 방송을 해온 직업병 때문인지도 모른다. 말을 해야 하는 강박적 상황에서 벗어나면 가능한 한 조용한 환경을 선호한다. 또 말을 해야 할 때도 진지한 얘기보다는 농담을 선호한다. 농담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농담에는 ‘소음’ 혹 ‘시끄러움’이 덜하기 때문이다. 진지한 척하는 대화에는 소음이 많다. 진심의 농도가 묽거나 혹은 서로 대화의 목적이 다를 때 특히 소음이 많다. 그래서 목적이 분명하거나 혹은 진심으로 상대의 마음을 느끼고 싶을 때를 제외하고는 농담을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물리적 시끄러움보다 더욱 피하고자 하는 것은 정신의 시끄러움이다. 쓸데없는 정신의 잡음들. 이들 소음의 대부분은 나 자신과의 대화로 구성돼 있다. 대화의 주체가 누구인지도 모를 언어들. 소음이다. 혼자 있는 시간 동안 잠시만 스스로를 관찰해 보라. 쓸데없는 대화가 얼마나 많이 머릿속에서 오가는지! 어딘가에 집중해 이 대화를 소거하면 놀라운 즐거움이 찾아온다. 이 즐거움과 동시에 몸과 정신에 에너지가 채워짐을 체감할 수 있다.
나는 15~16년 전부터 명상을 시도했다. 그리고 내가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 가늠하기 위해 꽤 많은 명상 서적을 읽어왔다. 그 책들의 가르침처럼 명상은 혹은 불교의 진리는 지극히 체험적이라는 말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그루들이 설파하는 진리의 근처도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곳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나를 명상에 붙잡아 놓았던 것은 그 실용성 때문이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큰 방석을 펴고, 그 방석 위에 작은 방석을 얹는다. 그 위에 나의 몸을 얹고 결가부좌를 한다. 그리고 호흡에 집중한다. 허리와 가슴은 숨을 따라 자연스럽게 펴진다. 마음속의 대화는 한동안 소음을 지속하다 잦아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30분쯤 지나면 꽤 깊은 즐거움이 온몸에 스며든다. 딱 50분을 앉아 있는다.
나는 불교도가 아니다. 하지만 붓다의 말씀과 가르침을 신봉한다. 이 시간이 하루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상의 시간으로부터 멀어지는 오후로 접어들면 오전에 명상을 통해 충전해 놓은 배터리가 점점 바닥을 향해 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경험하곤 한다.
명상을 하다 보면, 문득 ‘이거 오늘도 살 만한데…’ 이런 담대함이 차오른다. 명상의 분명한 효능 중 하나는 담대함인 듯하다. 마음에 소음이 없어지는 것과 맞물려 있는 현상으로 나는 해석한다. 소음은 거짓 정보이고 본질과 관계있는 명확한 신호를 방해한다. 그래서 소음을 소거하면 본질에 대한 확신이 생기고, 해야 할 일을 거침없이 하게 되는 느낌…. 일종의 담대함이 생긴다.
명상이 제대로 되는지 확인하는 주요한 방법 중 하나는 몸 어딘가에 힘이 들어가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힘이 들어가 있는 부분을 알아차릴 때는 예외 없이 정신에 소음이 끼어들었을 때다. 기막히게 맞는다. 힘을 빼면 힘이 생긴다. 모든 운동의 기본은 힘을 빼는 것이 아닌가? 정신 운동의 기본도 역시 물리적 힘을 빼는 것이다. 힘을 빼고 숨을 쉬면 뼈와 내장이 제자리를 잡아가는 것도 느낄 수 있다.
깊은 명상에 들어가면 김환기 화백의 푸른 추상화 비슷한 이미지에 휩싸이며 고요가 찾아온다. 그리고 자아의 개념이 옅어진다. 놀라운 일 중 하나는 자아가 옅어질 때 대단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내 얕은 진화 생물학적 지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이다. 하지만 이는 내가 살아오며 겪은 어떤 현상과도 맞아떨어지긴 한다. 어떤 일을 할 때, 자아를 잊으면 자존감은 올라갔던 경험들과 일맥상통한다. 그 일의 목적에 충실한 채 자아를 버렸을 때, 즉 ‘이 일을 하면 내가 어떻게 보일까’보다는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에 몰두할 때, 혹은 그 일 자체에 몰두할 때 자존감은 훨씬 높아지고 마음은 평화로워지던 경험이 많다. 자존심을 내세울수록 자존감은 떨어진다.
나는 하루 한 끼를 먹는다. 점심 약속을 하건, 저녁 약속을 하건 그것이 그날의 한 끼다. 속이 텅 비어 있을 때 정신은 명료해진다. 명상이 정신의 소음을 제거하는 것이라면, 금식은 물질적 찌꺼기를 제거한다. 결핍은 중요한 에너지 흐름을 만들어 낸다. 비어 있는 곳에는 무엇인가 채워지려고 모인다. 대화도 마찬가지다. 물론 나도 선후배들과 좋은 얘기를 하며 즐거운 식사를 하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강박적으로 식사 약속을 만들며 매일매일을 꼬박 채워놓지는 않는다.
기자 중에는 식사 약속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정보를 다루는 직업 특성상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기자 생활에서 뭔가 뒤처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나이가 든 뒤 사람을 만나 애써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을 버렸다. 필요한 사람은 굳이 밥을 먹거나 술을 먹지 않아도 친해진다. 이렇게 친해진 사람과 식사를 해야 그 자리가 즐겁다. 반면에 습관적으로 사람을 만나 이런저런 소문과 풍문을 나누다 보면 이런 대화는 오히려 소음일 때가 많다. 소음은 본질적 신호를 방해하고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책 읽기라는 놀이 사람들은 책을 읽는 것을 꽤 큰 정신적 노동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책을 읽는 행위는 상당히 편안하고 수동적 유희에 가깝다. 즉,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는 것보다 조금은 더 정신적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만, 책을 읽는 행위 역시 수동적 ‘유희’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평생 기자로 일하면서 무엇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체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경우 정신노동 중 가장 강도가 높은 것은 무엇인가를 쓸 때다. 물론 책을 읽고 그 의미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경우는 상당한 정신노동을 동반한다. 하지만 책을 읽는 단계에서는 그저 즐겁다.
물론 괜찮은 책일 경우의 얘기이긴 하지만 나는 책을 읽을 때 처음에는 저자에 대한 맹목적 수동성을 가지고 일단 그 내용을 흡입한다. 이 단계가 가장 유희에 가깝다. 그러고 나서 정신노동을 시작한다. 머릿속에 넣어 놓은 내용을 이리 흔들고 저리 비틀고 하며 분석하고 비판한다. 이 단계는 무엇인가를 쓰는 단계 바로 밑의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그래서 피곤할 때는 그저 읽기만 할 때도 많다. 나는 노는 것을 좋아한다. 논다는 것의 필수요건 중 하나는 실용성에 대한 집착을 동반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가장 행복할 때는 가치 있는 놀이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느긋하게 할 때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 최고의 놀이는 운동과 책 읽기다.
하지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많다. 영화를 보건 책을 보건, 보는 행위와 분석을 동시에 시작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본다. 이렇게 할 경우 나에게는 영화를 보거나 책을 보는 행위가 노동이 돼 버린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볼 땐 그냥 보라고, 그것도 맹목적으로 보라고…. 물론 나중에 비판적으로 되새기지 않으면, 놀이의 잔재는 재활용 쓰레기로 남을 뿐이다. 그래서 놀이 뒤엔 노동이 필요하다.
나는 목적 없이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일단은 비판적 사고도 멀리한 채 그저 책을 즐긴다. 느긋하게 책 읽기 놀이에 빠진다. 정말 좋아하는 일을 온전하게 즐길 수 있는 점은 멋진 일이다. 그리고 나는 요약할 수 있는 책을 싫어한다. 아무리 훌륭한 아이디어와 괜찮은 구성을 가진 책이라도 쉽게 요약할 수 있으면 내 취향의 책이 아니다. 쉽게 한두 페이지로 요약이 가능하고 이 한두 페이지를 읽으면 굳이 책 전체를 읽지 않아도 되는 책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책들은 요약은 가능하지만 한두 페이지의 요약본을 읽음으로써 책 한 권의 완독을 대체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책이 있다.
나는 자연과학 분야의 책들을 읽기를 즐기는데 이 분야의 책들 상당수가 이 부류에 속한다. 하지만 요약본으로 완독을 대체하기가 불가능한 분야가 하나 있다. 바로 문학이다. 문학의 요약된 줄거리를 읽었다는 것과 책을 완독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좋아한다. 특히 레이몬드 챈들러의 소설을 사랑한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그 밑줄 친 부분을 모아 저장해 놓는다. 이런 문장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챈들러와 어깨동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리고 문장에 대한 나의 짝사랑은 언젠가는 소설을 쓰고야 말겠다는 치기로 발전됐다.
2부 일상과 여행
우연이 길이 될 때1994년 어느 날이었다. 나는 모 금융회사 17층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 연기는 창문을 미끄러지듯 빠져나가고 있었고, 담배 연기가 새어나간 그 창문으로 파리 한 마리가 얼떨결에 빨려 들어왔다. 그 파리는 몹시 당혹스러운 듯 보였다. 자살 충동에 가까운 모습으로 투명한 창문에 연신 몸을 두드리고 있었다. 탈출을 위한 몸부림이 꽤 처절해 보였다. 그때 나는 갑자기 요의를 느꼈고 재떨이에 담배를 팽개치듯 버리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는 사라졌다. 대신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깨끗하게 치운 재떨이를 정리하고 있었다. 맑은 햇볕 속 재떨이는 쨍하고 빛을 튕겨내고 있었지만 그는 흔적도 없었다. 나는 그의 운명이 궁금했다. 그는 청소부 아주머니에 의해 살해됐는가 아니면 탈출했는가? 그는 알 수 있었을까? 유일한 탈출구는 자신이 빨려 들어온 그 입구였다는 것을….
인간의 기억은 미묘하다. 어떤 일들은 이상하리만큼 오랜 세월을 견디고 나머지 대부분은 마치 존재한 적이 없는 듯 사라진다. 위의 문장들은 내가 MBC 입사 시험 작문 부문의 마지막 단락으로 쓴 글이라 기억한다. 30년 전 그해 나는 금융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대학교 4학년쯤 언론에 종사하기로 마음먹고 언론사에 응시했지만 모두 실패한 후 들어간 회사였다. 대한민국에서 월급을 가장 많이 주는 회사 가운데 하나였다. 언론사 입사의 꿈을 접었냐는 친구들에게 이 회사가 월급을 많이 준다는 헛헛한 얘기를 하곤 했다. 왠지 모를 쓸쓸함을 금융회사가 있던 강남 특유의 화려한 외향에 몸을 묻고 잊으려 했던 듯하다.
어쨌든 그 당시는 거품의 시대였고 당시 연봉 수천만 원은 내가 생전 만져보지 못한 큰돈이었다. 그러나 내 안의 헛헛함을 구원하지 못했다. 물론 그 당시의 젊은 나는 돈의 효용에 대해 절실하게 느끼지 않았다는 점도 그 헛헛함에 한몫 보탰을 것이다. 아니 헛헛함을 잊게 할 만큼 큰돈은 아니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회사원 생활은 나름 즐거웠다. 세련된 사무실에서 당시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종합기획실 직원으로서 나름 인정받는 회사 생활. 샐러리맨의 애환과 퇴근 후 소주 한 잔. 이런 감수성이 전혀 싫지만은 않았다. 문제는 그 헛헛함이었다. 내가 최선을 다했을 때 가능한 삶, 그 금융회사 임원들의 모습을 내 미래의 모습에 투영해 봐도, 전혀 부럽지 않았다. 이 모 이사라는 분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분의 별명은 이 대리였다. 나는 당시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멜빵을 허리띠 대신 하고 다녔는데 이 모 이사라는 분은 그게 못마땅하셨던가 보다. 그러나 겉보기에도 세심하고 여린 그분은 신입사원인 내게 그 얘기를 직접 하지도 못하고 대리에게 대신 이런 말을 전달해 왔다.“권순표 주임 멜빵 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되나?”
이 말을 전해 듣는 순간 약간 우울해졌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그맘때였을 것이다. 종합기획팀 재무예측 담당이란 이유로 회사에서 상당히 비싼 돈을 내고 외부 교육에 나를 참여시켰다. 그런데 지하철을 타고 한강 다리를 막 지날 때쯤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나는 지하철에서 내려 한참을 걷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곳을 발견했고 무엇을 위한 줄인지도 모른 채 줄을 섰다.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하염없이 서 있었고 끝에 다다라 보니 토익시험을 접수하기 위한 줄이었다. 아무런 목적 없이 멍하니 접수를 했다.
그해 MBC는 입사 요강을 갑자기 바꿨다. 토익시험 성적표를 요구했다. 묘한 느낌이 들었다. 가끔은 어느 순간이 운명처럼 느껴지곤 한다. 회사에 다니느라 시간을 내지 못하는 나를 위해, 당시 고시 공부 중이던 백수 친구가 입사 원서를 대신 접수해 줬다. 그리고 작문과목에서 썼던 글이 위의 글이다. 나는 빨려 들어왔던 그 창문으로 탈출하고 있었다.
인간의 기억은 기묘하다. 그 전해 어느 신문사의 논술시험 주제는 중앙청, 즉 옛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에 대한 찬반 논리를 서술하는 것이었다. 당시 논쟁의 큰 줄기 중 하나는 상징이냐, 현실이냐 하는 부분이었는데, 나는 상징이 중요한 이유는 현실에 상징이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펼친 기억이 난다. 그래서 정작 철거 쪽을 지지하는 글을 썼는지, 보존 쪽을 선택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또 어떤 언론사의 최종 면접에서는 사주가 여러 논설위원과 함께 직접 면접을 했는데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물어왔다. 나름 성실히 대답했는데 평가를 하지 않고 무안을 주는 식으로 내쫓다시피 면접을 종료했다. 나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지금은 아내가 된 여자친구를 불러내 맥주를 마시며 오징어를 씹어댔던 기억이 난다.
숙박하며 치렀던 MBC의 입사 시험 분야 중 하나는 심사위원들이 단어를 던지면 그 단어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게 주어진 단어는 난방과 온돌이었다. 나는 서양의 난방은 사람을 흩어지게 하고 동양의 온돌은 가족을 모이게 한다. 그 뭉침의 가족 문화에서 개인주의로 우리의 문화는 바뀌어 왔다…. 이런 식의 논리를 전개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인생은 새옹지마. 그때 다른 언론사에 입사했으면 나는 무엇이 돼 있을까. 돌이켜 보면 나쁜 일은 나쁜 일이 아닐 때가 많았다.
불편해도 괜찮아, 프랑스 식당 적응기휴가철의 프랑스 파리. 일시에 인간들을 소거해 버린 도시는, 낭만의 골격을 간직한 채 미라로 남는다. 적막감을 즐기며 걷는 파리는 아름다웠다. 한적한 거리를 하염없이 걸을 수 있는 휴가철의 파리를 나는 사랑한다. 내가 휴가철의 파리를 유독 좋아하게 된 것은 특파원으로 일한 2014년부터 정말 엄청난 테러들이 잇따라 일어났기 때문이다.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유럽의 호텔들을 하염없이 돌아다녀야 했다. 그래서 휴가철 파리의 한가함이 더욱 좋았던 듯하다.
프랑스에 온 동양인, 특히 한국인 관광객이나 주재원들의 경우 프랑스 식당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 성격 좋은 사람의 경우 “답답하다”이고, 성격 급한 사람들은 “화가 치솟는다”고 반응한다. 워낙 유명 관광지이다 보니 식사 시간에는 대부분 식당이 손님으로 넘쳐나는데 식사를 하고 나오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우선 주문부터가 쉽지 않다. 그 과정은 이렇다.
일단 식당이나 카페에 가 빈자리를 찾는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팔이 맞닿을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틈에 비집고 앉기가 일단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리고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오길 기다린다. 메뉴판을 검토한 뒤에는 주문해야 하는데 어지간히 기다리지 않고는 종업원이 오질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큰 소리로 종업원을 부르거나 과격하게 손을 휘휘 내저으면 예의 없는 사람이 되고, 종업원들의 노골적인 냉대를 받을 수도 있다. 방법은 하나. 열심히 손이 비어 있는 종업원의 행방을 찾은 뒤 눈을 맞추려 노력하고, 눈이 마주치면 손을 살짝 들어 부른다. 여기까지 심할 경우 20여 분이 걸리는 수가 있다. 자! 그 뒤에는 물론 식사를 기다려야 한다. 또 기다린다. 문제는 식사 도중 포크를 떨어뜨렸거나 추가 주문을 하고 싶을 때다. 눈을 마주치는 데까지 또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조금 살다 보면 추가 주문을 하지 않기 위해 한 번 종업원이 왔을 때, 필요한 모든 것을 한 번에 주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