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를 훔치는 방법
헤이든 원 지음 | 온더페이지
여유를 훔치는 방법
헤이든 원 지음
온더페이지 / 2025년 8월 / 216쪽 / 17,500원
1부. 오늘의 행운을 주웠다
여유를 훔치는 방법방 안에 누워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다. 처음엔 분명 무언가를 찾아보려 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그 목적은 사라지고 시간도 잊은 채 화면 속을 떠도는 알고리즘의 키워드를 무의식적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떠오른 궁금증에 이끌려 또다시 스크롤을 내리던 그때, 손 틈 사이로 맑고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휴대폰 쥔 손을 내리고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흰 구름은 멈춰 있지 않고 바람에 밀리듯 천천히 움직이고, 한 마리 새가 자유로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반대편 건물로 날아갔다. 내 방 안의 세상과 창밖의 세상은 같은 여유인 듯 보이지만 달랐다.
문득, 휴대폰을 오래 바라보고 있던 내 모습이 제삼자처럼 느껴졌다. 지금 이 휴대폰이 나에게 없다면, 더 나아가 휴대폰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상상이 가지 않았다. 막연한 두려움도 밀려왔다. 무서움보다 불편함에서 오는 두려움이랄까. 하지만 분명 나는 휴대폰이 없던 시절을 살아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시절에 나는, 나의 부모는, 우리는 불편했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그리고 불편했던 순간보다는 오히려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장면, 친구들과 정신없이 놀이터에서 뒹굴던 장면, 소중한 사람들과 여행을 갔던 장면, 비 오는 날 창에 맺힌 빗방울을 들여다보던 장면. 그 소중한 기억에 휴대폰을 하는 나는 없었다.
그래. 나가자. 붙들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놓고 당장 밖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오늘만큼은 휴대폰 없이 1시간만이라도 보내 보자. 짧지만 진지한 도전이었다. 휴대폰 없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찾고 싶었다.
집을 나서기 전, 휴대폰을 두고 나가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우선 책장에 있는 책 하나를 집었다.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읽으면 왠지 더 집중이 잘될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뭘 할까. 휴대폰 대신 선택한, 오늘 내가 보게 될 풍경과 장면들을 적어 보면 어떨까? 노트와 연필을 챙겨 나만의 여유를 찾기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 순간이 이 책의 시발점이었다!)
처음 집을 나섰을 때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작은 노트와 연필은 주머니에 넣고, 책은 손에 든 채 무작정 걸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참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일찍이 등교하는 아이도 보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아이의 모습 위로 등굣길에 친구를 기다리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겹쳐졌다.
공원에 들어서니 고요함 속에 활기가 느껴졌다. 달리는 사람, 천천히 걷는 사람, 출근하는 사람, 야채와 과일을 파는 사람, 커피를 사는 사람, 가게 창문을 닦는 사람, 어제의 이야기를 나누는 이웃들, 엄마와 아침 산책을 나선 아이까지.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로 하루를 열고 있었다. 헤드셋이나 에어팟으로 귀를 막고 내가 듣고 싶은 소리만 듣고 걸었던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다른 사람들의 말소리가 원치 않아도 들려올 때, 세상에는 나만 모를 뿐 수많은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구나 실감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창문 너머로 보던 하늘과는 또 다른, 훨씬 더 넓고 깊은 하늘이 내 머리 위에 파랗게 펼쳐져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로 울창한 나뭇잎들이 눈부신 햇빛을 가리듯 나의 머리 위에 드리워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빛이 빼꼼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숨었다 했다. 이 모든 순간들이, 장면들이, 감각들이 하나하나 나에게 다가왔다.
이것이 갑작스레 내게 다가온 걸까. 아니면 내가 이제야 이 가까운 것들을 볼 수 있게 된 걸까. 내 안에 있었던 새로운 눈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이 모든 건 사실 새로운 게 아니었다. 언제나 곁에 있던 것들이다. 너무 익숙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낯설 만큼 새로이 보이는 이 느낌. 이것이 내가 그토록 원하던 ‘여유’였다. 지금 내 머리칼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내 삶의 모든 찰나는 지나가고 있다. 난 그 시공간을 무수히 지나치고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순간이 내 생애 마지막 순간들이라면 너무나 예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마음먹었다. 이 여유를 매일같이 조금씩 훔치기로. 이전까지 놓쳐 왔던, 그토록 갖고 싶었던 여유가 바로 내 옆에 있었다는 걸 깨달은 오늘부터. 세상이 원하는 시선에 나를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닌, 그 속에서 나의 여유를 잃는 삶이 아닌, 주도적으로 내가 바라보고, 느끼고, 만져 보는 삶을 살고 싶다. 소중한 찰나의 시간을 온전히 누리는 것. 이것이 내가 유일하게 창작할 수 있는 나만의 여유였다.
여유는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먼 여행을 떠나야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마음만 먹으면 누릴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행복이었다. 이 여유를 발견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 내 마음속에 맴도는 말. ‘찾았다. 드디어 찾았다.’
오늘도 이겼다새벽 6시. 매일 새벽 몸을 일으키기 위해 나와의 힘겨운 사투를 벌인다. 지금 당장 일어나지 못하면 요가를 갈 수가 없다. 그러니 다른 생각들이 나의 정신에 침투하기 전에 우선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운다. 아… 그런데 오늘따라 무척 힘이 든다. 조금만 더 누웠다 일어날까. 아주 조금만, 아주 잠시만 더…. 그대로 푹 쓰러져 쉬고 싶지만, 쓰러지는 순간 다시 일어나는 게 두 배는 더 어렵다는 것을, 나는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망설일 새를 주지 않고 그냥 눈 딱 감고 천 근 같은 엉덩이를 일으킨다. 휙 몸을 굴려 ‘데구루루’, ‘착’ 두 발바닥이 바닥을 딛는다. 오늘도 일어섰다. “후….”
이 모든 과정이 불과 15초 만에 일어난 일이다. 이 15초가 아마 오늘 하루 벌어질 일들 중 가장 힘든 싸움일 것이다. 하지만 결국 오늘도 난 오늘의 나를 이겼다. 이 작은 성취감, 충만함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시작이 좋다.
여유의 바다두려움은 어디에서 피어나는 걸까. 내 마음 한편의 어떤 불씨로부터 피어오르는 것일까. 가끔 두려울 때가 있다. 아니, 가끔이 아니라 매번일지도. 그 두려움이 나의 모든 사고를 자연스럽지 않게 만든다. 난 그 두려움을 잊으려 아무것도 아니라며 스스로 외쳐 댄다. 하지만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그렇게 묵묵히 외치다 보면, 다행히 어느새 모든 두려움이 지나가 있다.
내 안에는 부정의 ‘악’이 존재한다. 나 자신도 어쩌지 못해 그저 심연 깊숙이 절제라는 자물쇠도 달아 꽁꽁 묶어 두었다. 혹여나 떠오르지 못하도록. 이 자물쇠가 풀리지 않을 거란 확신은 나도 할 수가 없다. 당연히 한낱 인간이니까.
그러나 이러한 걱정은 여유라는 바다 앞에선 모든 것이 무용해진다. 개울도 아니고 샘도 아니고 광활한 바다. 긍정의 물줄기가 모여 만든 바다. 모든 것을 덮는 잔잔한 바다. 여유 앞에서 ‘악’은 한없이 작아진다. 내 모든 부정의 에너지는 내 스스로 여유가 없을 때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만큼 마음의 여유를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의외로 심플한 방법일 수 있다. 결국 내 마음이니. 다만 노력이 따라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결국 악에 맞서기 위해 여유의 바다를 넓혀야 한다. 그 바다의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내가 한껏 안을 수 없을 만큼. 그저 멍하니 저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바람을 맞을 수 있을 만큼. 그런 크나큰 바다를 내 마음에 두어야 한다. 무언가 날 사로잡으려 들 때, 내 마음의 바다 앞에서 그저 숨 한번 크게 내쉬면 된다. 그 여유가, 여유의 바다가 결국 그 위에 ‘선’이라는 배를 띄울 테니. 그러니, 그려 보자. 나만의 바다, 여유의 바다.
2부. 아무렴 어떤가
비눗방울최근 내 심장을 강타한 문장이 있다. ‘넌 무엇을 기대했는가.’ 정말이지 책을 읽으면서 한 문장에 이렇게 꽂힌 적은 드물다. 나에게 커다란 위안을 준 문장이라, 이를 가지고 독립 장편 영화 시나리오도 쓰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장이 극적으로 관객들에게 닿을 수 있을까 상상하며 재밌게 써 내려가고 있다.
항상 아등바등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실상 바람을 잡으려는 기분이랄까. 바람은 잡으려 노력해도 결코 잡히지 않는다. 반대로 그대로 서 있으면 바람이 와서 내 피부를 스친다. 그냥 그렇게 스쳐 지나감을 통해 바람을 느끼면 그만인데, 잡히지 않는 바람을 잡으려는 나의 모습을 느낄 때마다 나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다. 무엇을 기대하고 있니.
오늘도 여의도공원을 걷고 또 걷다가 언덕 위에서 이리저리 뛰노는 아이들을 보았다. 가까이 가 보니 선생님이 아이들을 위해 비눗방울을 흩날리고 있었다. 비눗방울을 잡은 아이도, 비눗방울을 놓친 아이도 모두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무언가 잡으려는 행위가 어른과 다름을 느꼈다. 아이들은 눈앞의 비눗방울이 내 손에 닿아 터져도, 요리조리 손을 피해 달아나도 마냥 웃는다. 어쩌면 진짜 비눗방울을 잡고 싶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즐거움을 주는 하나의 매개체일 뿐 그것이 어떠한 목적이 아닌 것처럼. 순수하게 즐기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잊고 있던 가장 소중한 것이 저 ‘순수함’ 아닐까. ‘당장 먹고살기 바쁜데 순수는 무슨, 편안한 소리하네.’라고 할지도 모른다. 맞다. 참 편안한 소리. 배부른 소리. 그렇지만 한편으론, 왜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하루에 편안한 소리 한 번 못 하는가, 싶다.
삶을 다하기 전 누군가가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라고 묻는다면 과연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성공하기 위해, 집을 사기 위해, 100억을 벌기 위해, 회사에서 승진을 하기 위해, 좋은 차를 타기 위해.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대답하고 만족할 수 있을까. 과연 후회 없다 말할 수 있을까.
내 아이에게 비눗방울을 왕창 만들어 주기 위해, 그리하여 아이의 웃음을 보기 위해, 그 웃음으로 행복할 나를 위해, 내 아내를 위해, 내 가족을 위해. 사계절의 변화 속에서 하루하루 옷을 바꿔 입는 나무와 꽃들의 변화를 보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과 따뜻한 한 끼 먹기 위해, 그저 내 곁에서 내 마지막을 지켜주는 이들에게 좋은 추억의 한 조각이 되기 위해, 라고 나는 답하고 싶었다.
철학자이자 시인인 랠프 월도 에머슨은 이렇게 말을 했다. “모든 레전드는 처음에 아마추어였다.” 걸음마도 못 떼던 우리가 이제는 걷는 것을 넘어 뛰는 것까지 하는 마스터들 아닌가. 지구상의 모든 원리는 같다고 본다. 아이처럼 순수하게 접근해서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 다시 일어서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느껴 보는 것.
우리는 비눗방울을 잡으려 수없이 시도할 것이다. 어쩌면 바람도 잡으려 손 내밀지 모른다. 그러나 내 손에 잡히지 않더라도 웃어야 한다. 그렇게 웃다 보면 수많은 비눗방울 중 하나는 나에게 다가와 터질 것이다. 팡. 내 손에 닿아 터질 것이다. 바람도 손을 시원하게 스쳐 지나갈 것이다. 여전히 이 말이 내 마음에 빙빙 맴돈다. 난 무얼 위해 사는가.
발버둥짧은 기간 동안 내 안의 수많은 감정들과 마주했다. 평소와 달리 낯선 모습도 있었고, 다소 지친 듯한 모습도 있었다. 나는 나에게서 잠시 떨어져 거리를 두고 멀리서 나 자신을 바라보았다.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나를 그리며 살아가고 있을까. 남들이 보고 싶어 하는 나로 살아가고 있을까. 무척 어려웠다. ‘나답게 살아간다’라는 틀 안에서 어쩌면 고집을 피우며 살아온 것은 아닌가.
나는 타인을 사랑하고, 존중한다. 그러고 싶다. 우리 삶에서 관계란 것이 지독히도 어렵지만 결국 관계란 것이 지속적으로 내 삶을 지탱해 주니까. 그렇지만 나는 이 관계의 양면성에 상처를 입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런 나를 받아들여서 고통스러웠다.
순수하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타인에게 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어떨 땐 저 밑바닥에 있던 나의 이기심이 불쑥 그것을 짓누른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물밀듯 밀려올 때, 더욱 낮은 자세로 겸손해지는 것도 어렵다. 인정 욕구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겸손의 미덕은 나 스스로 길러야 한다. 끊임없이 나를 다스려야 한다. 바라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매번 이렇게 고통스러운 게 맞는 걸까.
그러다 문득 이러한 고통스러움이, 나의 열정과 노력이, 전부 나의 발버둥이었음을 깨달았다. 이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땐 수치심이 말도 못 하게 밀려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의 모습이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자랑스럽다. 그것은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었으니까. 나는 오늘도 나의 삶을, 순간을 잘 살아내려 발버둥 치고 있다. 그 삶의 발버둥이 결국 나를 늪에서 벗어나게 해줄 성장 동력임을 이제는 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아니었다. 이상과 현실의 연속성에서 나아감과 뒤처짐이 있을 뿐이다. 반대 개념이 아닌 양립 가능한 개념임을, 그것이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임을 받아들이니 마음이 무척이나 평온해졌다. 미안한 감정이 있는 나의 인연들에게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난 미안함을 머금고, 또한 고마운 인연들에게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난 감사함을 머금고 그저 살아가는 것. 그렇게 지금의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오늘 아침, 기분 좋게 눈을 뜬 후 조깅을 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언덕 위를 달렸다. 오늘따라 달리는 기분이 너무나도 좋았다. 잡념들이 순간순간 나를 찾아오지만, 그저 시원한 바람에 흘려보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이 거리를 음미하고, 이 햇살을 음미하고, 이 순간을 마음껏 마셨다. 이 의미를 가슴 깊이 새기면 나는 더욱더 건강히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유연하게 살아가야지. 이래도 나이고, 저래도 나이니까. 그저 오늘의 나니까.
네모의 꿈오늘 아침, 친구와 함께 한강 변을 걸었다. 아침의 한강을 만끽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63빌딩이 눈에 들어왔다.“와, 나 어렸을 때 진짜 63빌딩이 가장 커 보였는데, 이제는 왜 이렇게 작아 보이냐.”
한때 세상에서 가장 높게 보였던 63빌딩이 이제는 그리 크지 않게 느껴진다. 여의도엔 더 높은 건물들이 생겼고, 저 멀리 잠실에는 63빌딩보다 두 배나 큰 롯데타워가 들어섰다. 도심의 스카이라인이 자꾸만 높아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참 많은 것이 빠르게 변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의 서울은 어땠을까. 한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풍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미국을 오갈 때, 비행기 안에서 서울을 내려다본 적이 있다. 한강과 산의 조화를 간직한 도시의 아름다움은 하늘 위에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충격적이었던 건 하늘에서 본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윗낯’이었다. 한강을 따라 빼곡히 들어선 하얀색의 네모난 상자들. 좁은 땅 위에 더덕더덕 붙어 있는 네모 박스들. 한강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파트의 잔상들이 덧대어져, 이 모습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짓고 또 짓고, 지평선 너머의 아름다웠던 한강이 이제는 아파트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비단 한강만이 아니다. 본래 그 자리에서 오랜 시간을 버텨온 나무와 산들이 깎이고 깎여 이 비좁은 서울의 땅 위에 새로운 네모가 지금도 계속해서 들어서고 있다. 이렇게 점점 사라져가는 자연의 풍경들. 하늘 위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딘가 씁쓸하게 느껴졌다.
아파트 한 채를 갖기 위해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쏟아붓는 현실이 과연 옳은 방향인가 생각해 본다. 거기에 가정을 꾸려야 하는 사람들 혹은 가정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의 사회적, 경제적 위치까지 고민하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삶에서 ‘전망 좋은 네모박스’를 손에 넣는 것이 진정한 성공일까? 그 박스를 갖지 못하면 실패한 삶일까?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