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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은 사람들

김용민 외 지음 | 메디치미디어


국경을 넘은 사람들

김용민 외 지음

메디치미디어 / 2025년 6월 / 328쪽 / 22,000원





1부 국경을 넘어, 구호 현장으로



잊지 못할 첫 파견, 열대열 말라리아와의 전쟁 | 나이지리아 _ 신경수, 소아과 전문의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국경없는의사회 첫 파견:
2019년 3월, 20년 동안 근무하던 대학병원을 사직하였다. 국경없는의사회 국제 활동가라는 새로운 신분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경없는의사회 국제 활동가는 두 개의 신분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서 국경없는의사회 활동 현장에 가기 전에 직장을 그만둔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비정부기구 활동을 하기 위해 6개월 이상 자리를 비우는 것을 허락할 병원이 얼마나 있을까? 사표를 내고 병원을 떠나는데 동료들이 갑자기 병원을 그만두고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을 하려는 이유를 궁금해했다.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을 하고자 하는 이유는 국경없는의사회 채용 면접에서 제일 먼저 물어보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때 말한 이유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지금보다는 나의 쓰임새가 더 쓸모가 있기를,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만족감이 더 가득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국경없는의사회 한국 사무소에서는 첫 활동지가 확정되려면 6개월 이상을 기다릴 수도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로부터 첫 파견이 결정될 때까지 4개월을 기다렸다. 기다리던 시간은 한편으로는 재충전의 시간이 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삶을 앞둔 설렘, 약간의 두려움과 긴장감, 나의 선택에 대한 후회 등 여러 감정이 뒤섞인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나이지리아 파견을 제안받았다. 한국인에게도 낯설지 않은 아프리카 국가인 나이지리아.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첫 파견이라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도 몰라 허둥대는 사이에 시간이 지났다. 나이지리아로 떠나기 전에 파리 운영센터에서 의료진을 위한 사전교육과 파견지인 마이두구리에 대한 사전 교육을 받아야 했다.

나이지리아는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국가이다. 모두 36개의 주로 이루어진 연방 공화국이며, 수도는 아부자(Abuja)이다. 1963년에 영국으로부터 나이지리아 연방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부터 나이지리아의 북부와 남부는 부족, 역사, 언어와 문화가 달랐다. 독립한 후 현재까지도 북부와 남부 간의 차이와 갈등이 큰 문제로 남아 있다. 출산율은 세계에서 최상위권이어서 아프리카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 그러나 영아 사망률 또한 전 세계에서 최고로 높은 국가 중 하나이다. 인구가 많은 만큼 다양한 민족 구성을 보여주는 나라이며, 가장 큰 부족은 이슬람을 믿는 북부의 하우사족, 기독교를 믿는 남서부의 요루바족과 남동부의 이보족이다. 나의 첫 활동지였던 마이두구리는 나이지리아의 북동부에 위치한 곳이다.

나이지리아에 입국할 당시에 나에게 허용된 체류 기간은 한 달이었다. 그래서 아부자에 있는 국경없는의사회 사무소에서 체류 기간을 연장하고, 나이지리아 보건부로부터 의사 취업허가서를 받는 데 며칠이 걸렸다. 수도인 아부자에서 파견지인 마이두구리까지는 유엔인도주의항공서비스(UNHAS)가 제공하는 항공편을 이용하였다. 육로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안전하지 않아서였다. 유엔인도주의항공서비스는 비정부단체 활동가들을 위한 이동 수단으로 개인에게 허용된 수화물은 15킬로그램으로 제한되어 있다. 첫 파견 활동이라서 많은 것을 준비해왔던 나는 개인 짐 일부를 가져갈 수 없었다.

나이지리아 북동부에 위치한 마이두구리는 보르노주의 주도로 이슬람 무장단체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그래서 아부자 공항의 마이두구리행 국내선 터미널부터 보안 검색이 무척 까다로웠다. 다행히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에게는 보안검색이 심하지 않았고, 미리 나온 국경없는의사회 현지 직원의 안내로 주차장까지 불편 없이 나올 수 있었다. 대기하던 국경없는의사회 차량과 차량에 붙은 총기 휴대 금지 스티커를 보고서야 ‘이제 활동 현장에 왔구나’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국경없는의사회 사무소로 이동하여 보안 책임자, 의료 코디네이터, 프로젝트 코디네이터와의 간단한 교육을 겸한 면담을 한 후에 숙소로 향했다. 사무실에서 숙소까지는 차량으로 5분 거리였다. 하지만 도보 이동은 허용되지 않았고 반드시 차량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저녁 8시부터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통행금지여서 부득이 저녁 8시 이후에 이동해야 할 경우에는 보안 책임자나 프로젝트 코디네이터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숙소로 가는 길에 있던 집들은 철문으로 닫혀 있었고, 경호원들이 출입을 통제하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숙소도 차량이 입구 근처에 다다르면 차량에서 ‘지금 누가 들어간다’라는 무선 통신을 보내야만 문을 열어 주었다. 숙소를 나설 때는 사무실에 있는 무선 센터에 출입 대표자의 신분, 행선지와 출입 인원을 통보해야 했다.

숙소에서 요리, 세탁, 청소, 숙소 정비 등을 담당하는 직원들과 인사를 나눈 뒤 이른 점심을 먹었다. 마이두구리에서의 첫 식사는 긴장감과 현지 음식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처음 한 달은 현지 음식이 낯설어서 잘 먹지 못하였다. 마이두구리 프로젝트는 국제 활동가가 총 아홉 명으로 크지 않은 프로젝트여서 점심시간에 동료들 모두와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의료 코디네이터의 안내로 마이두구리 그완게 어린이 병원으로 갔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마주치는 마이두구리의 풍경을 보면서 1960년대 우리나라 풍경 사진이 떠올랐다.

그완게 어린이병원의 하우사 빠뚜레:
마이두구리에는 외국인 비정부기구 활동가들에게 적용되는 레드존(Red zone)과 그린존(Green zone)이 있었다. 레드존은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지역이고, 그린존은 하루에 일정 시간 동안 통행금지가 있는 지역이었다. 그완게 어린이병원은 레드존에 위치했다. 그런 까닭에 아침 8시에 숙소에서 차량으로만 출근이 가능하고, 오후 1시부터 2시까지 점심시간에 다시 숙소가 있는 그린 존으로 철수해야 했다. 점심 식사를 마친 다음 다시 차량으로 이동하여 오후 2시부터 오후 6시까지 병원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오후 6시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병원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가야만 했다. 가끔 퇴근 시간에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중환자가 있더라도 환자를 현지 의사에게 맡기고 병원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그완게 어린이병원은 약 80병상 규모의 병원이었다. 이곳은 응급실, 집중치료실인 레드 병동, 집중치료실과 일반 병동의 중간 정도의 환자가 입원하는 오렌지 병동, 그리고 일반 병동인 옐로우 병동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일반 병동은 텐트로 만들어져서 말라리아 대유행 시기에는 텐트 병동을 더 많이 만들어서 200병상까지 확대 운영할 수 있었다. 현지 직원은 150명 정도였고, 말라리아 대유행 시기에는 임시 직원을 채용하여 전체 직원이 200명 가까이 되었다.

병원에 근무하는 국경없는의사회 국제 활동가는 의료 코디네이터, 수간호사, 교육 담당 간호사, 약사 그리고 소아과 의사로 총 다섯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의 전임자와의 인수인계는 다행히도 대면으로 진행되었다. 전임자가 임시 직원을 교육하는 중이어서 나도 직원 교육에 합류하였다. 교육 담당 간호사와 함께 말라리아 대유행 시기에만 채용되는 직원들에게 심폐소생술과 응급 처치, 일반적인 환자 관리 등을 교육하였다.

그완게 어린이병원 응급실에 근무하는 의료진은 현지 의사 2명, 간호사와 간호조무사가 6명이었다. 환자들이 응급실에서 체류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고, 의사의 지시를 어느 간호사가 받아야 할지 몰라서 진료 후 처치가 진행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나는 응급실 의료진의 조직을 재편하였다. 나를 포함하여 의사, 간호사, 간호조무사를 묶어 한 팀으로 만들고, 환자를 팀별로 순서대로 받았다. 간호사는 자기 팀이 맡은 환자의 처치만 시행하면 되었고, 환자 상태를 파악해서 팀 의사에게 빠르게 보고할 수 있었다. 입원이 결정되면 병동에 인계하는 시간도 단축되었다. 자연히 응급실 체류 시간이 짧아지고, 응급실의 병상 회전율도 나아져서 더 많은 응급 환자를 받을 수 있었다. 환자들도 빠르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완게 어린이병원에서는 낮 근무 12시간을 총 5명의 현지 의사가 담당하였다. 밤 근무는 3명의 의사가 12시간을 근무하였다. 낮 근무 의사 5명은 응급실에 2명, 집중치료실 1명, 오렌지 2개 병동에 1명, 2개의 일반 병동에 1명씩 배치되었다. 입원 대기 환자가 많아서 퇴원이 가능한 환자들을 빨리 확인하여 퇴원시켜야 했다. 그런데 응급실 외에 각 병동을 담당한 의사가 한 명이어서, 한 명의 의사로는 빠른 시간 내에 퇴원 가능한 환자를 진료하고 퇴원을 결정하기가 힘겨웠다.

나의 임무는 현지 의사들을 지도 감독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현지 의사들을 도와서 환자를 직접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오전에 일반 병동을 돕고, 오후에는 응급실과 집중치료실을 오가며 직접 환자 진료에 나섰다. 대부분의 현지 의사들은 남부지역 출신으로 현지어인 카누리어를 하지 못하여 현지 직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심지어 몇 명의 의사들은 공용어인 하우사어도 하지 못하였다. 입원 환자 수에 비해 의료진의 수가 너무 모자랐기 때문에 통역을 담당하는 직원을 따로 둘 수 없었다. 환자를 직접 보기 위해서는 환자를 볼 수 있을 정도의 간단한 하우사어와 카누리어를 배워야만 했다. 하우사어로 ‘빠뚜레’라는 말은 ‘백인’이라는 뜻이다. 출퇴근 때 종종 인근 지역 아이들은 우리 차량을 향해 “빠뚜레”라고 소리치기도 한다. 어느 날부터 그완게 어린이병원의 직원과 환자 보호자들은 나를 ‘하우사 빠뚜레’라고 불렀다. ‘하우사어를 하는 이국인’이라는 뜻이었다.

웰컴 투 아프리카, 열대열 말라리아와의 전쟁:
마이두구리 프로젝트에 합류한 지 2주가 되었다. 나는 나이지리아에 오기 전부터 말라리아 예방약인 메프로퀸을 복용하기 시작하였다. 메프로퀸은 일주일에 한 번만 복용하며, 약제 내성이 있는 열대열 말라리아를 예방하는 약이다. 어느 날은 아침에 일어났는데 너무 어지러웠다. 얼른 혈압을 재어 보니 90/60mmHg, 혈압이 너무 낮았다. 열감도 있었다. ‘말라리아에 걸렸나?’ 출근한 후에도 어지럽고, 메스꺼웠다. 말라리아 신속검사를 하니 두 줄이 떴다. ‘말라리아에 걸렸구나.’

현지 의사들에게 “나, 말라리아 걸렸어”라고 하니, 다들 웃으면서 “웰컴 투 아프리카”라고 한다. 일찍 퇴근하여 말라리아 치료약을 먹었는데,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한과 어지러움도 심해졌다. 다시 병원으로 가서 중증 말라리아 치료약인 아르테네이트 주사를 맞았다. 이틀 동안 증상이 나아지지 않아 일어나지 못했다. 사흘이 지나서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열대열 말라리아가 이런 거구나.’

말라리아가 의심되는 환자가 그완게 어린이병원 응급실에 오면 우선 혈관을 확보하고, 혈당, 빈혈 그리고 말라리아 신속 진단 검사를 확인한다. 혈당 수치가 떨어지면 경련, 의식장애 등의 증상이 나타나며, 혈액 내에 많은 수의 말라리아 원충을 보유하고 있는 환자들은 혈당 수치가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낮아질 수 있다. 경련이나 의식이 혼탁한 환자들에게서 저혈당이 확인되면 고농도의 포도당 용액을 주사하고, 저혈당이 재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혈당을 자주 확인한다.

또한 말라리아 원충이 적혈구를 파괴하여 심한 빈혈이 나타나기도 하고, 감염된 적혈구가 혈관 벽에 붙어 혈관을 막아 주요 기관에 손상을 주기도 한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4mg/dL 이하일 경우에는 수혈을 준비한다. 수혈이 필요할 정도의 빈혈을 보이는 말라리아 환자의 예후는 그다지 좋지 못하다. 입원 첫날 수차례 수혈을 하여도 빈혈이 회복되지 않는 환자의 경우에는 말라리아 치료를 응급으로 하여도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기가 끝나고 응급실로 오는 환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임상적으로 열대열 말라리아일 것이라고 판단되어 말라리아 신속 진단키트를 이용하여 검사를 하면 말라리아 양성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입원 환자 중에서도 검사에서 말라리아 양성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말라리아 치료약을 투여하면 증상이 호전되는 증례가 많았다. 국경없는의사회 운영센터에 현재 사용하고 있는 신속 진단키트를 다른 회사 제품으로 바꾸자는 제안을 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우리 병원과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자 운영센터에서 신속 진단키트를 다른 제품으로 바꾸기로 결정하였다. 새 신속 진단키트의 검사 양성율은 95% 이상이었다. 우연히 제품의 포장지를 보다가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직원들과 동료들에게 마음껏 자랑을 했다.“이것을 과연 어느 나라에서 만들었을까? 바로 우리나라 것이야! Made in Korea.”

자신의 나라에서조차 머물 곳을 잃은 국내실향민:
국내실향민(Internally Displaced Persons; IDP)은 일상의 거주지에서 강제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떠나게 된 사람들을 말한다. 무장분쟁, 폭력, 인권 유린, 자연재해나 인위적으로 발생한 재해로부터 집을 떠난 사람 중에서 다른 나라가 아닌 자국 내에서 머무는 사람을 말한다. 가끔 ‘난민’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국내실향민은 난민이 아니다. 그러나 유엔난민기구는 국내실향민도 난민과 같이 국제인도법에 따른 권한을 가진다고 명시하였고, 노르웨이 난민위원회는 2022년에 전 세계 국내실향민은 7천 1백만 명에 이른다고 발표하였다. 현재 국내실향민이 가장 많은 지역은 아프리카이다. 2019년 기준으로 보르노주의 인구는 6백만 명인데 그중 국내실향민이 약 2백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그래서인지 국내실향민을 수용하는 캠프가 22개나 있었다.

국경없는의사회 그완게 어린이병원은 국내실향민의 보건의료지원을 위하여 만들어진 병원이었으나 현재는 모든 현지 주민에게 제한 없이 보건의료를 제공한다. 그완게 어린이병원에 내원하는 거의 모든 환자의 보호자들은 환자의 증상이 경증이라도 입원하기를 원한다. 대학병원이나 인근 진료소에서는 진료비를 지불해야 하나 이곳은 무료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가끔 부득이 전원을 해야 하는 환자의 보호자가 전원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는데, 병원비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에 더해 그완게 어린이병원은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입원환자와 보호자에게 밥과 빵, 분유 등 하루 세 끼 식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입원할 때 잘 먹지 못하던 환자들도 증상이 나아지면 음식을 잘 먹는 것을 자주 보았다. 하루 한 번의 식사도 하지 못하는 현지 주민이 많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완게 어린이병원에 내원하는 모든 환자는 진료 전에 영양상태 평가를 받는다. 통상적으로 국경없는의사회의 활동 현장에서는 영양실조를 위쪽 팔 둘레를 측정하여 진단한다. 중증 급성 영양실조는 위팔 둘레가 115mm 미만이거나 키에 비해 체중이 심하게 감소한 경우에 진단한다. 응급 중증 상태를 제외하고, 중증 급성 영양실조 환자들은 영양치료센터가 있는 국경없는의사회 벨기에 운영센터 병원으로 전원되었다.

입원 환자에게는 살충제 처리 모기장을 제공한다. 퇴원할 때 반납을 해야 하지만, 모기장 회수율이 20%에도 못 미친다. 병원 의료팀 회의 때마다 모기장 회수율을 올리는 방안이 논의되지만, 회수율은 좀처럼 올라가지 않았다. “내가 내는 국경없는의사회 후원금을 올릴 테니 모기장을 그냥 주는 것도 검토해 보자”라고 농담처럼 회의 때마다 제안하기도 하였다.

가끔씩 낯익은 환자 보호자가 뭔가를 요구할 때가 있다. 캠프로 돌아갈 차비가 없어 퇴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국경없는의사회에서는 현지 주민에게 개인적으로 물건이나 현금을 주지 말라고 교육한다. 참 난감한 상황이다. 환자를 볼 정도의 간단한 하우사어와 카누리어를 하는 나로서는 손짓 발짓을 동원하여 “지금 가진 돈이 없어 도와주지 못하겠어요”라고 할 수밖에 없다. 환자들이 애처롭고 한편으로는 귀엽고 해서 사탕을 준 적이 있는데 여기저기서 달라고 해서 곤란을 겪은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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