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봐, 바람이 불고 있어
고윤(페이서스 코리아) 지음 | 스노우폭스북스
하늘을 봐, 바람이 불고 있어
고윤(페이서스코리아) 지음
스노우폭스북스 / 2025년 4월 / 312쪽 / 18,700원
모두가 멋지게 추락하는 건 아니다어렸을 때부터 나는 인기 없는 사람이었다. 붙임성도 없고 인상도 호감 ‘상’이 아니었다. 대학생 때 친구에게 이 고민을 털어놓을 정도로 나한테는 ‘고민거리’였다. 그래서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나도 ‘인기 있는 사람이 돼 보자!’라고. 그때 눈에 띈 사람이 바로 ‘나쁜 남자’ 컨셉의 형이었다. 그 형은 나쁜 말도 하고, 배려도 안 하고, 못됐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행동을 하면서도 ‘자학개그’로 인기 절정을 누리고 있었다. 그날부터 그 형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나도 빠짐없이 관찰하려고 애썼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사친이 이렇게 말했다. “너 요즘 왜 그러는 거야? 집에 안 좋은 일 있는 거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너 그러는 거 굉장히 별로인 거 아니? 그리고 너랑 어울리는 행동도 아니야. 왜 그래? 너답지 않게.” 충격받았다. 집으로 가서 거울 앞에 섰다. 태생에도 안 맞는 나쁜 놈 흉내를 열심히 해보려던 탓인가, 얼굴도 죽상으로 보였다. 그때의 일로 내가 나한테 만족하는 법을 몰랐었고, 그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됐다.
도전은 멋있는 단어다. 하지만 뭐든 도전하면 다 좋은 걸까. 어쩌면 이런저런 철학이나 정보에 세뇌당해서, 나에게 맞지도 않는 일에 ‘도전!’이라고 외치고는 자신을 몰아넣은 건 아닐까. 도전에는 잃는 게 많다. 그러니 중요하게 따져 봐야 할 것은 따져 봐야 하지 않을까? 대략 이런 것들이라도 말이다. ‘도전의 방향이 정말 나에게 유익한 것인가! 오로지 무리한 실험에만 계속 머무는 건 아닌가? 도전 과정 동안 내가 잃은 것의 가치는 회복할 수 있는 것들인가?’
우리 이러지 맙시다사업을 시작한 친한 형은 잘 차려진 사무실에 직원이 세 명이나 있었다. 사무실에 갔던 날, 형과 얘기를 나누던 중에 직원 한 명이 사색이 된 표정으로 형에게 다가왔다. 8년 만난 남자 친구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며 오늘 일은 마무리됐고 반차를 내도 좋으니 퇴근하게 해 달라고 했다. “알잖아. 우리 회사 원칙상 연차, 반차 전부 전날 자정까지잖아. 그리고 직계 가족도 아니잖아!” 형의 말을 듣고 놀랐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일인지 당황스러웠다. 형은 회사 성공의 중요한 요건으로 ‘냉정한 이성’을 최우선으로 하기로 했나 보다.
하지만 역사 속 대단한 성공담에는 냉정함을 유지했지만 인간적인 감정을 소홀히 하지 않은 예들이 수두룩하다. 사전에서 냉정(冷靜)이란 단어의 뜻을 찾아보니 ‘생각이나 행동이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침착함’이라고 나온다.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게 고려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닐 거다. 인간은 감정이라는 본바닥 위에 사는 존재다. 그러니까 냉정함이란 단어의 깊은 뜻에는 때로는 감정을 고려하면서도 이성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적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기본 감정까지 무시하고 냉정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등지고 서 있는 사람 같다. 세상에서 잘 살려고 돈 버는 거면서 세상 등지고 서 있는지도 모르고 ‘전진!’을 외친들, 함께 나아갈 사람은 없다. 결국은 소외돼 가고 있는 줄도 모를 뿐. 다만 시간이 더 지나야 알게 될 일일 뿐이다.
뼈 때리는, 아주 귀한 명언을 주신 박명수 님!‘참을 인(忍) 세 번이면 호구다.’ 박명수 씨의 주옥같은 명언이다. 맞다. 매사 참는 건 득(得)도 아니고 능사(能事)도 아니다. 어느 날, 어떤 인플루언서에게 연락이 왔다. 어떤 계정에서 내 브랜드 콘텐츠 툴과 양식이 똑같은 걸 봤다는 거다. 확인해 보니 우리 브랜드를 그대로 복사한 것처럼 운영하고 있었다. 관리자에게 겨우 연락이 닿았는데 황당한 건 그의 반응이었다.“제가 최근에 읽은 책이 있는데, 『베끼려면 제대로 베껴라』라는 책이었어요. 그래서 그랬어요.”이 무슨 황당한 말인가! 화가 났지만, 상대할 사람도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당장 조치를 취하고 다시는 같은 일로 연락하지 않도록 하자.”라고 경고한 뒤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출근한 디자이너가 그랬다.
“베끼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요? 정말 힘들게 만든 건데요.”
아차, 싶었다. 모두 함께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처리하고 끝낼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확실히 짚고 넘어갈 문제로 처리했다. 참지 않는 게 매번 최선도 아니지만 매번 넘어가 주는 것도 최선이 아니다. 내가 참아서 모두 좋은 일은 자기희생이라도 되지만, 내가 참아서 주변 사람까지 아프게 하는 건 덜떨어진 거다. 그 기준에서 보면 어지간한 건 참을지 말지 다 나온다.
남들과 다른 길=이상한 사람내가 뭘 하고 싶은지 찾지 못하는 과정은 있어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 좋아하는 게 직업으로 택해도 괜찮을지 답을 내야 할 때만 헷갈리는 것일 뿐이다. 한데 이 좋아하는 것을 두고 인생에서 꼭 찾아내라고 종용받는 게 ‘할 것’이고 그중에 가장 선호되는 게 의사, 변호사, 대기업 종사자 등이다. 이것들에 포함되지 않은 경우 2차 선택지로 종용받는 게 안정된 직장이다. 문제는 주변에서 안전한 길이라고 해도 내가 좋아하지 않을 때, 결국 언젠가는 튕겨 나간다는 거다.
안정적인 길에 안착했던 의사 선배가 돌연 그림을 그리겠다며 병원 문을 박차고 나왔다. 변호사 선배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해외로 떠나 선택지에 없던 다른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그 얘기들을 들을 땐 순간 ‘쳇, 배불러서 저러는 거야?’ 생각했지만 금세, ‘아, 그 길이 자기 길이었나 보다.’ 싶었다. 안전한 길은 분명 매력적이다. 하지만 잘 맞지 않으면서 계속 버티며 사는 사람 중에 우울한 사람이 많다. ‘도대체 나는 뭘 위해 이 길을 달려왔지?’라는 내적 갈등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나 역시 과거에는 남들 말대로 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이 많다. 인생 궤도를 수정해야 한다는 정보를 캐냈으니 말이다. 결국 지금의 나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안정적인 길을 택하든, 도전하든,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손꼽아봐야 한다는 것. 나는 나만의 길이 있고, 우리 모두 제각각 가야 할 자기만의 여정이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잘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정보로 같은 길을 가려고 해도 그건 그의 길이었지, 내가 똑같은 길을 갈 수는 없다. 똑같이 해도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게 각각의 특색에 따라 다르게 설계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 결정해야 할 순간에 필요한 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가?’라는 답에 가장 근접한 선택이다.
그냥 쌓인 거야. 짜증이나 뭐 그런 것들이사실 모든 싸움의 속내는 조금씩 쌓여 곪은 불만의 불씨가 새어 나온 결과다. 생각해 보면 내가 겪은 모든 갈등도 하찮은 이유에서다. 피곤한 몸으로 퇴근하다 들른 편의점에 내가 찾는 음료가 품절일 때, 언짢음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화한 친구에게 나는 짜증이 나서 툭, 말을 뱉고는 전화를 끊었다. 쌓인 불만들이 전혀 상관도 없는 곳에서 터뜨릴 폭탄으로 제조돼 가고 있던 것이다. 그 갈등들은 모두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상대의 행동이 잘못됐고 나는 잘못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결국 그 갈등의 대부분은 내가 감당하지 못한 감정이 폭발한 결과였다는 걸 말이다. 돌이켜 보면 대부분 ‘내가 기분 나빴다’는 이유에서 시작됐다는 걸. 기분이 나쁜 것을 논리로 포장해서 내 감정을 보호하려 들었다. ‘너의 말, 행동 때문에 상처받았다’는 게 진짠데, ‘상처’라는 단어를 내뱉자니 우스워 보일까 봐 이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감정을 가리는 것이다. 하지만 감정은 가릴수록 내면 깊은 곳에서 씨앗으로 뿌리를 내린다. 그 씨앗이 심하면 분노로 자라날 테고, 조금 덜 하면 짜증, 예민함 정도로 자라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싸움의 근본 뿌리를 사라지게 할 방법은 없는 걸까.
나도 정확한 해답은 모른다. 다만 나만의 방법 하나를 찾아 놓았다. 바로 ‘호흡’이다.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순간, 그 찰나에 호흡을 초집중해 본다. 그 몇 초가 제어하지 못한 말을 막아주고 조금 더 진짜 나와 가까운 말로 내뱉게 해 주고 있다. 때때로 힘들어서 여유를 찾고 싶을 때, 잠시 숨을 고르고 숨에 집중하다 서서히 생각의 주제로 넘어간다. 그러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성찰이 일어나곤 한다. ‘내가 왜 그랬지?’ ‘왜 그렇게 생각했지?’ ‘왜 그렇게까지 화를 냈지?’ 분명한 건, 내가 그 모든 상황에서 정당했던 게 아니라 그저 ‘숨’ 쉴 틈 없이 행동한 이유가 더 컸다는 걸 알았다.
스스로 떠올린 질문 속에서 조금씩 성장해 가는 나를 느낄 수 있다는 건 잔잔한 기쁨이다. 비슷한 상황들은 앞으로도 끝없이 일어나겠지만 조금 너그러운 시선으로 자신에게 묻게 되길 바란다.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내가 화내는 진짜 이유는 뭘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뭘까.’라고.
잘 따져보고 할지, 말지 결정하는 게 ‘인내’다무조건 참아서 미덕을 쌓아 올리는 시대는 원래도 그리 흔치 않았다. 참은 사람이 이긴 게 아니라 이긴 사람이 이긴 것이다. 참아서, 속 곪아서 큰 병 생겨도 그 병이 왜 생겼는지 아는 사람 하나도 없거니와,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밥 먹고 차 마셔가며 들어도 365일 밤낮 걸릴지 누가 알겠나. 곪아서 터져 나온 건데, 그래서 폭발한 건데, 폭발하거나 자폭하면, 미쳤다고 하거나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거나, 변했다고 할 뿐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인내만 잘하는 사람이 설 곳’은 없다. 인내는 나 자신을 키우고 성장시키는 데 필요한 확장 레이스에 필요한 것이지, 터무니없이 나를 공격하고 흠집 내는 사람한테 쓰는 ‘장기(長技)’가 아니다. 공격받았을 때, 그 공격의 타당성을 잘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사리 분별해 대응이 필요한 상황인데도 참는 ‘인내’는 아직 뭘 좀 더 배워야 하는 멍청이다. 그렇게 세상에 하나뿐인 나 자신을 병들게 해 놓고 듣기 좋은 말로 ‘나는 인내하였노라’라고 말한들 약효가 없다. 혹시 참기만 하면서 하루를 버티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꼭 묻고 싶은 말이 있다. “고생한다. 고생하는 거 아는데, 지금 참고 있는 거 잘 따져보고 하는 거 맞지?”
급할 때마다 돌아가면! 다 끝나있습니다신입은 원래 그런 건지, 매일 바보 같은 실수를 했다. 나는 신뢰할 만한 인재가 되고 싶었다. 그런 마음에 글자 하나라도 꼼꼼하게 잘 쓰려고 하면 “급한데 뭐 하고 있어?” 하고 핀잔이 날아 왔다. 그래도 한편에서는 “처음이라 그래, 급할수록 돌아가는 거지.”라며 괜찮다고 말하는 선배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야 알았다. 회사에서는 진짜 급할 때가 있다는 걸. 그럴 때는 천천히 꼼꼼하게 돌아가지 않고 냅다 달려야 할 때라는 걸.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의 진짜 깊은 속뜻은, 평상시에 기본기를 잘 다져둔다는 마음으로 꼼꼼히 익혀 놨다가 정말 긴급한 순간, 냅다 내달리라는 의미였다.
늘 천천히 최대한 긴 거리로 걸어 들어오던 골목길을 그날 왜 숨이 턱까지 차오를 만큼 뛰었는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날 낮에 부장님한테 들은 핀잔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급하다니까 지금 뭐 하고 있어!”를 세 번이나 들은 날이었으니까. 다만, 하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냅다 뛰어 집 문 앞에 섰을 때 내가 무의식적으로 도착지까지 최단 거리로 뛰어왔다는 걸. 나는 매일 집 주변 길을 돌며 속속들이 모두 잘 알고 있었다는 거다. 그저 걷던 산책길이라도 내가 원하면 언제든 최단 거리로 주파할 수 있다는 걸.
갑시다! 떠납시다! 인생이 그리 길지 않다고 하니까나이 서른만 넘겨도 뭔가 확실히 결정을 못 해서 안달을 한다. 이제 서른이나 됐는데 뭘 어떻게 하겠나, 하는 식의 말도 듣는다. 하지만 맞닥뜨리게 될 운명은 아직 한참이나 더 남았다. 이 귀한 시간, 뭘 하면 좋을까? 나는 ‘경험’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 못하게 되기 전에, 해야 할 것들을 더 많이 경험하는 걸 우선시하는 중이다. 어쩌면 양분을 쌓는 중이란 말이 더 맞는지도 모르겠다.
유튜브만 켜도 어떤 지식이든 원하는 방식으로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지식이 보편화 돼 가고 있다. 하지만 경험은 다르다. 인생은 즐기는 사람이 이긴다. 즐기는 것에 ‘경험’은 비교 불가 섹터다. 어쩌면 이 말이 생계에 하루하루 매달려 사는 누군가에게는 사치처럼 들릴까 봐 걱정이 된다. 하지만 내가 나누려는 것은 힘든 하루 속에서도 휴일이 있고 잠시의 짬을 낼 때도 있다는 거다. 누워서 쉬어도 아까울 시간일 수 있지만 그 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뭐든, 어디든 허락되는 만큼 직접 보거나 가보는 경험은 가치를 매길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육체적 늙음보다 정신적 늙음에 너무 일찍 다가서 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하고 싶은 거 포기하면서 사는 건 아닌지 말이다. 포기를 너무 자주 하고 포기를 너무 당연하게 여기면 포기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살게 된다.
모두 쓰기에도 부족한 것들한때, 사랑에도 총량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내가 가진 걸 모두 주고 나면 사랑도 끝나버리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애정을 충분히 주기보다 아껴서 줬다. 그런 나에게 상대는 답답해했지만 나는 ‘오늘 많이 아꼈다’는 미련한 생각을 하며 만족해했다. 당장 내일이라도 헤어질 수 있고 영영 이별할 수도 있는 걸 몰랐다. 바보처럼.
나중은 언제일지 모른다. 좋은 걸 아껴두면 더 좋게 잘 쓰일지, 곰팡이가 펴 버리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 좋은 것이 더 이상 쓸모없어지거나 그걸 누릴 여유나 시간이 없어질 수도 있는 거였다. 내일 행복하기 위해서 오늘의 행복을 희생하는 게 모두 맞는 말이 될 수 없는 것도 이제는 안다. 오늘 행복해지려고 오늘의 행복만 추구하면 불안정한 미래에 살게 된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지나친 절제와 미루기는 오히려 현재와 미래 사이의 불균형일 뿐이다. 지금 누릴 수 있는 행복이면 적당히 누리는 요령을 챙기고 살았으면 좋겠다. 누구는 ‘그 좋은 거 지금 다 써버리면 나중에 어떡하냐’고 따지겠지만 미래만을 위해 지금을 모두 다 버리면 미래가 와도 행복이 낯설어서 잘 쓰지 못할 거 같다. 좋은 거 누리는 게 뭐 그리 대단하겠나. 와인 한 병 아껴뒀다가 날씨 화창한 날 친구들과 나눠 마시는 것, 튼튼하고 멋스러운 노트 한 권 사놨다가 어느 날부터 들고 나가 쓰기 시작하는 것 아닐까. 뭐든 오늘을 느끼는 기쁨, 나에게 주는 작은 보상이면 되는 것 같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짝사랑을 하거나 차인 남자가 공통으로 분노하는 영화가 있다. 바로 <500일의 썸머>다. 여자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남자는 모두 이해하다, 결국 연애도 싫다던 여자가 결혼까지 하고 나타난 영화. 썸머 같은 못된 여자들이 문제라고 욕하며 봤다.
나는 이제 결혼을 했다. 10년 만에 <500일의 썸머>를 다시 보기로 했다. ‘추억 팔이나 해 볼까’ 하는 마음으로. 아차차….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나쁜 썸머만 보이더니 다시 본 영화에서는 바보 같은 톰만 보였다. 톰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썸머에게 온통 자신을 맞추고 썸머가 자기를 사랑하게 하려고만 애썼다. “친구로 지내고 싶다.”라는 썸머의 마음을 바꿔야 할 마음으로만 봤다. 아무리 노력해도 뜻대로 되지 않으니, 나중에는 썸머를 원망했다. 이제 좀 알겠다. 맞추려고 애쓴 것은 그녀의 마음을 돌리고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한 욕심, 그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썸머를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이 이해하고 싶은 방식대로만 이해했다는 것을 말이다.
사랑하면 모두 비슷하다. 사랑하니까 내가 이해할 수 없어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게 당연하다. 여기서 다른 건 딱 하나다. ‘상대를 잡기 위해서 억지로 참는 것인가, 아닌가?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이해하려고 하는 중인가, 아닌가?’다. 내가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하고 싶은 방향으로 이해하고 있을 때 사랑의 마음은 종잇장처럼 얇아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