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나를 고쳐 쓰기로 했다
김선영 지음 | 부키
오늘부터 나를 고쳐 쓰기로 했다
김선영 지음
부키 / 2024년 4월 / 276쪽 / 17,500원
1부 작아진 나를 키우는 연습
우선 큰 산부터 넘자클라이밍에 빠지기 전까지는 산에 자주 올랐다. 주말에는 등산 동호회에서 지방 산행을 떠났는데, 가을이 오면 억새를 보러 유명산으로, 단풍 구경을 하러 속리산으로 향했다. 폭설이 내렸던 어느 겨울엔가 지리산에서 마주한 상고대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엘사의 눈부신 겨울왕국이 그곳에 있었다. 지방 산행은 쉬이 볼 수 없는 절경을 선사하지만 그만큼 지리산은 나에게 무리한 체력을 요구했다. 아무리 아이젠을 착용해도 발이 푹푹 들어가는 눈길을, 그것도 오르막을 걷기란 쉽지 않다. 한 시간쯤 지나면 몸이 풀려 걷기는 한결 낫지만 ‘주저앉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나는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새벽 5시부터 일어나 산을 오르고 있나.
몇 번의 후회와 몇 번의 다독임 끝에 마침내 노고단 정상에 다다른 순간, 말도 안 되는 광경이 펼쳐졌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 끝에 서 있는 걸까. 산꼭대기에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평야가 존재하다니, 눈앞에 있는데도 믿기지 않았다. 보이는 건 온통 하얀 눈밭과 파란 하늘뿐. 그 와중에 알록달록 등산복을 차려입은 우리 일행은 마치 작은 요정들(?) 같았다. 소복하게 눈이 덮인 나뭇가지들이 지중해 산호처럼 반짝였다. 찬바람을 반찬 삼아 먹는 컵라면 맛은 또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구첩반상이 부럽지 않았다.
행복도 잠시, 천국을 열람한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했다. 올라온 만큼 내려가야 했으니. 나는 하산을 더 힘들어했는데, 미끄러질까 봐 조마조마 긴장한 탓도 있겠지만 이미 올라오면서 체력을 80퍼센트 이상 소진했기 때문이다. 무릎이 덜덜 떨리고 휘청거릴 때는 누가 업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저지른 일은 내가 끝내야 한다. 다섯 시간 넘게 산행하고 땅을 밟으면 내 다리가 아닌 것 같았다. 발바닥은 화끈거리고 허벅지는 욱신거렸다. 몸살이 난 것처럼 열이 나고 근육통도 앓았다. 그런 고생을 치를 때마다 내 체력을 생각지 않고 너무 무리한 것이 후회도 되었지만, 기억력이 나쁜 사람처럼 다음에 또 산을 찾았다.
등산은 하면 할수록 묘한 매력이 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더 가 보자는 마음이 끈질기게 다투는 것, 그것이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인생 같다고도 느꼈다. 힘들다고 도중에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산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산을 포기하지 않으니 삶이 점점 수월해지는 것이 아닌가. 큰 산을 일단 넘어 버리면 작은 산은 가뿐해진다는 이야기다.
예전에는 남산 정상에 오르는 계단 길이 하도 가파르고 끝도 없이 이어져 ‘지옥의 계단’처럼 느껴졌는데, 지리산을 다녀오고 달라졌다. 남산 정도는 가벼운 몸풀기가 된 것이다. 산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데 체력이 달라지자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잠시나마 남산 꼭대기에서 서울 야경을 내려다보며 내가 아름다운 도시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기도 했다. 밤늦도록 불을 밝힌 도시 야경은 아름다우면서도 서글펐다. 그곳엔 나처럼 자주 아픈 사람들도 틀림없이 있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노라면, 나만의 고통에 매몰되어 살다가 주변을 돌아보는 어른이 된 기분도 들었다. 큰 산은 버겁다고 피하기만 하면 작은 산을 오를 때마다 아등바등하게 된다. 그러니 큰 산도 부딪쳐 봐야 한다. 아니, 큰 산일수록 먼저 넘는 것도 괜찮다. 그러고 나면 다부진 몸과 산처럼 넉넉한 가슴을 가진 나를 발견할 테니까.
하다 보면 좋아지기도 하는 법‘달리기를 해 볼까.’ 처음으로 마음이 꿈틀한 건 순전히 사람 때문이다. 글쓰기나 독서 모임에서 알게 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부지런했는데, 취미 운동을 하나 이상 즐기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달리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도대체 그 힘들기만 한 달리기를 왜들 그렇게 좋아하는지 궁금해졌다.
덥지도 춥지도 않았던 어느 날, 문득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다가 보았던 작은 달리기 트랙이 떠올랐다. 신발장을 열어 예전에 헬스장에서 신던 러닝화를 꺼내 신고 트랙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경주나 체력장이 아니라 내 의지로 혼자서 하는, 달리기를 위한 달리기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한 바퀴, 두 바퀴 출발선을 다시 밟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숨이 차올랐다. 스마트폰의 달리기 앱을 확인하니 1킬로미터당 8분대였다. 달렸다고 하기에는 멋쩍은 기록이지만 처음이니까.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모인 그룹 채팅방에 들어가 오늘의 기록을 공유하고 러너로 입문한 것을 축하받았다. 그렇게 엉겁결에 시작한 달리기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언제든 몸만 있으면 가능한 운동이라 더 좋았다.
혼자 하는 달리기는 자유롭다. 누군가와 경쟁하거나 긴장할 필요도 없다. 마음이 동하면 달리고 힘들면 잠시 숨을 고르다가 괜찮아졌을 때 다시 달리면 된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내 몸을 마음대로 조율하는 것이다. 점점 빠르게, 더 빠르게, 절정! 다시 속도를 줄여 편안하게. 밋밋했던 일상에 달리기가 침투하면서 활력이 돌았다. 양 볼이 빨갛게 트도록 매서운 바람이 부는 12월에도 멈추지 않았다. 백 미터 달리기 꼴찌에, 달리기라면 인상부터 찌푸리던 내가 이제 스스로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2부 사람은 고쳐 쓸 수 있으니까
모르는 건 약이 아니라 병이다10년 넘게 원인 불명의 위경련을 앓았다. 병원에 가면 진정제를 처방해 주는 게 다였고, 주말에는 급한 대로 약국에 가서 약을 사 먹거나 응급실에 가기도 했다. 약은 놀라울 정도로 효과가 없었다. 기능 의학 병원에서 혈액 검사를 했더니 ‘중등도 위산 분비 저하증’이라는 생소한 병명이 나왔다. 속이 아파서 내과에 가면 보통 위산을 억제하는 약을 지어줬다. 나 역시 속이 쓰리니까 당연히 위산 분비가 지나치거나 염증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위산이 부족하다니 의외의 진단이었다. 알고 보니 위산 분비 저하와 위산 과다는 증상이 비슷하단다. 또 위산 분비가 떨어지고 소화력이 약한 사람은 보통 피부 문제를 안고 있다고 했다. 그럼 아토피도 위산 분비 부족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속으로 퍼즐 조각을 맞춰 보았다.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는 인생의 구원자라도 만난 것처럼 의사의 처방을 기다렸는데 그는 허망한 답변을 내놓았다. “별 방법이 없어요. 식초 드세요.”
새콤한 식초가 약이라니 황당했다. 위산이 잘 나오지 않으니 매 끼니 식사를 끝내자마자 식초를 물에 희석해서 마시라는 것이다. 위산 분비 저하를 해결할 약은 아직 없다고 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니 속는 셈 치고 식후에 식초를 먹기 시작했다. 소주잔에 사과 식초를 3분의 1 정도 붓고 나머지는 물로 채운 후 꼴딱 삼켰다. 외식할 때는 식초가 없어서 어쩌나 했는데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이미 ‘식초 캡슐’이 시중에 나와 있었다. 식초를 챙겨 먹은 지 벌써 3년 차가 됐다. 효과가 있었는지, 이전보다 훨씬 속 편하게 살고 있다. 한 달에 한두 번씩은 꼭 찾아오던 위경련이 두 달에 한 번, 석 달에 한 번으로 점점 줄더니 지금은 분기별 행사가 됐다. 이 정도 빈도라면 버틸 만하다. 만성질환은 완치라는 개념이 없으니까. 내가 지닌 병들은 항상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며 나를 긴장하게 한다. 증상을 유발하는 환경을 최대한 피하고, 증상이 나타났을 때 빠르게 대처하여 악화 빈도를 서서히 줄여 나가는 것이 내가 병과 함께 지내는 법이다.
“모르는 게 약이요. 아는 게 병”이라는 말이 있는데, 자주 아픈 사람에게는 ‘모르는 게 병, 아는 게 힘’이다. 만성질환을 앓는 안희제와 이다울이 편지 형식으로 주고받은 글을 엮은 책 <몸이 말이 될 때>에는 “치료 또한 자기계발 기술과 같이, 개인의 역량을 발휘해야 하는 모양새”라는 말이 나온다. 요즘 말로 ‘갓생’을 살려면 기본 전제가 건강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좋은 식습관을 유지하며 부지런히 운동해야 할 뿐만 아니라, 병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잘못된 부분을 가려내고 내게 필요한 내용을 분별할 줄 알아야 병을 적절하게 치유할 수 있다. 의사의 처방을 따르는 것이 기본이겠지만, 스스로 삶을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공부해야 조금이라도 더 빨리 통증 지옥에서 벗어난다.
누구나 한번 태어나면 신체를 바꾸지 못한다. 마치 ‘자동차 뽑기 운’처럼, 70년을 써도 튼튼한 몸이 있고 걸핏하면 이유 없이 잔고장이 나는 몸도 있다. 왜 내 차만 자꾸 고장이 나냐고, 자동차 매장에 가서 바꿔 달라고 하면 바꿔 주나. 나는 뽑기 운이 좀 나빴다. 그렇다고 폐차할 수는 없다. 관리하고 잘 달래서 타는 수밖에. 나만 왜 자꾸 아프냐고 주저앉아 불평하는 대신, 나는 내 몸에 귀 기울이고 병을 탐구한다. 내 몸의 친절한 관리인이 되어 부지런히 필요한 것들을 챙긴다. 이렇게 하면 앞으로 50년 더 타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3부 긍정의 기운을 끌어모으는 습관
느리게 갈지언정 멈추지 않는다10년 해온 방송 작가 일을 접어야 했을 때, 허무하고 두렵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똑같은 하루를 살면서 인생이 달라지길 바랄 수는 없다. 30대면 여전히 젊다. 무슨 일을 하든 내 몸 하나 건사 못하겠는가. 아프지 않으려면 규칙적인 생활이 보장되어야 했다. 돈은 예전만큼 못 벌어도 괜찮으니 주말에 쉬었으면 했다. 이왕이면 휴가와 퇴직금을 챙겨 주는 정규직이면 더 좋겠지. 그러다 운 좋게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웹 콘텐츠 회사에 취직하게 됐다. 영상 만드는 일은 비슷해 금방 적응했다. TV보다 유튜브를 많이 보는 시대이니 트렌드에 맞게 잘 이직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왕복 세 시간 가까이 매일 지하철을 타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되었다. 출퇴근 시간에 콩나물시루 같은 대중교통에서 쏟는 체력이 얼마나 큰지 직장인이라면 다들 공감할 것이다. 결국 10년 묵힌 장롱면허를 꺼냈다. 하지만 차로 출퇴근한 기간이 1년이 넘어가도록 운전에 적응하지 못했다. 매일 아침 운전대를 잡기 20분 전부터 심장이 날뛰고 얼굴에 열이 달아오르며 아랫배가 살살 아팠다.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사무실에 도착하면, 업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하루 일을 다 한 것처럼 피곤했다.
게다가 느슨하고 티 안 나는 회사 일은 그 어떤 보람이나 재미도 느껴지지 않았다. 수입이 안정적이고 워라밸이 주어지면 몸과 마음이 편안하겠지 했는데 너무 단순한 발상이었다. ‘일은 일일 뿐, 그 외 시간에 삶의 의미를 찾으면 된다’는 신념에 점점 회의가 들었다. 나는 그 둘을 분리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내 일을 사랑하고 싶었다.
다시 사회 초년생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가 새로운 직업들을 기웃거렸다. 우연히 독서 지도사라는 직업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책을 다루는 일은 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터라 열심히 공부해서 자격증을 땄다. 그런데 의외의 복병이 나타났다. 독서 지도사로 먹고살 만큼 수입을 얻으려면 까다로운 ‘학부모 영업’이 필수라고 했다. 선배들의 조언에 따르면, 어쩌면 독서 지도보다 더 힘써야 할 것이 영업처럼 들리기도 했다. 나는 연예인을 상대하는 일이 부담스러워서 예능 프로그램을 피했던 내향적인 사람이다. 아쉽지만 마음을 접었다. (그런 내가 지금은 수강생들 앞에서 큰소리를 치며 강의하다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인생이다.)
유튜버를 해 볼까 싶어 계정을 만들고 영상을 몇 개 만들어 올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내가 키우는 반려 식물을 예쁘게 촬영해서 올렸는데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다. 그렇다면 역시 전공인 글쓰기가 나을까 싶어 주제를 바꿔 보았다. 생각보다 촬영과 편집에 품이 많이 들었다. 방송 일을 오래 해온 바람에 스스로 엄격한 잣대를 포기하지 못했다. 겨우 5분짜리 영상 하나 만드는 데 하루를 다 쓰다니! 새삼 피디들에게 존경심을 느끼며 유튜브 계정을 비공개로 돌렸다.
다음으로 내 관심을 끈 것은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현재의 브런치 스토리)’였다. 진득이 앉아서 두세 시간 글을 쓰는 일쯤은 열 시간 넘게 오줌을 참아 가며 원고를 쓰던 나에게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쓰는 동안 희열을 느꼈다. 교양 방송 작가를 할 때는 프로그램이나 아이템에 맞춰서 글을 써야 했다. 나의 의견과 감상은 사족일 뿐, 정확한 정보 전달이 우선이었다. 그러다 보니 글을 그렇게 오래 썼는데도 ‘내 이야기’를 한다는 순수한 기쁨은 이때 처음 맛보았다.
브런치 작가 활동은 직업도 아니고 돈을 벌어다 주지도 않지만 내 마음속 직장이 됐다. 매일 출근하다시피 커피를 내려 모니터 앞에 앉았다. 방송 일을 하며 그동안 겪었던 사연, 품었던 생각을 신나게 모니터에 쏟아 냈다. 그러다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내 글을 책으로 내는 게 어떻겠냐는 출판사의 제안을 받은 것이다. 기회를 덥석 붙잡았다.
그즈음 독서 모임에서 사귄 친구와 글쓰기 모임도 만들었다. 온라인으로 알음알음하는 사람들과 함께했던 것이 입소문을 타며 확장됐다. 방송 작가로 일하면서 체득한 글쓰기 기술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는데,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나는 기꺼이 내 능력을 사용하기로 했다. 글쓰기 모임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려고 만든 커리큘럼이 나의 두 번째 책, 글쓰기 실용서의 기반이 됐다. 어느새 나에게 ‘글쓰기 코치 글밥’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생겼다. 책을 내자 글쓰기 강의를 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책을 내고 강의를 하면서 나는 더 이상 다음 직업에 대해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모든 일은 우연했고 연쇄적이었으며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저 운이 좋았던 것일까. 돌이켜 보면 나는 체력이 허락하는 한에서 무리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시도했다. 느리게 갈지언정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에게 잘 맞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깨달았고, 맞는 일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디뎠다. 내향적인 내가 강의 활동을 부담 없이 시작한 비결도 그간 쌓아온 경험 덕분이었다.
일을 쉬고 있을 때는 일부러 강제적인 루틴을 만들려고 한다. 안 그러면 오전 내내 침대에서 뒹굴뒹굴할 것이 뻔하다.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시 평생교육원에서 운영하는 ‘영화 OST로 배우는 영어 회화’가 눈에 띄었다. 일주일에 한 번, 대여섯 명의 사람들과 조그만 교실에 앉아 <라라랜드>나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영어를 공부했다. 학창 시절 음악 시간도 떠오르고, 다 큰 성인들이 모여서 어설픈 발음으로 합창하는 모습이 귀엽게도 느껴졌다(물론 그 귀여움의 핵심은 나다). 수업을 이끄는 강사님은 예전에 학원에서 초등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쳤다는데, 우리와 함께하는 내내 즐겁고 편안해 보였다.
그 모습이 부러우면서 문득 ‘이렇게 소소한 규모로 가르치는 일을 해도 괜찮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마지막 수업 날, 수업 평가를 위해 교실에 들어와 있던 평생교육 플래너에게 “혹시 글쓰기 수업은 필요하지 않으세요? 제가 가르칠 수 있는데….” 하고 조심스레 의견을 비쳤다.
글쓰기 수업 첫 시간의 떨림을 아직도 기억한다. 강의 전날, 얼마나 긴장이 되었던지 소파에 동물 인형을 앉혀 두고 예행연습도 했다. 그렇게 여섯 명의 수강생 앞에서 시작한 시급 2만 원의 강의는 내 안에 숨어 있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기회가 됐다. 미리 훈련해 둔 덕에 배짱이 생겼는지, 책을 내고 난 뒤 학교나 도서관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왔을 때는 흔쾌히 하겠다고 했다. 아마 이전의 경험이 없었다면 용기를 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이 어렵다는 말을 나는 온몸으로 믿는다.
그 후로는 언제든지 ‘지르는 습관’을 장착했다. 안 해 본 것이라도 일단 새로운 기회가 생기면 “제가 할게요”라고 말부터 질렀다. 수습하지 못한 일은 없었다. 방송계에서 10년 넘게 골골거리면서도 끈질기게 버티는 힘을 기른 덕택이다. 그 고통스러웠던 시간은 허송세월이 아니었나 보다. 나도 모르는 사이, ‘저지르는 힘’과 ‘버티는 힘’이라는 양 날개가 어깨에 쑥 돋아나 있었다. 시간에 쫓겨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닌,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두 번째 인생은 그렇게 싹을 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