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마녀가 된 엄마
김주미 지음 | 글이
어느 날, 마녀가 된 엄마
김주미 지음
글이 / 2022년 8월 / 196쪽 / 12,500원
Part 1 엄마는 마녀가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라 여기고 가벼이 아침을 열었으나 돌아보면 인생이라는 항해에서 큰 태풍을 만나 방향키를 돌리고 예상치 못한 물길로 떠내려가야 하는 날. 엄마와 나의 가족에게는 2020년 12월 10일이 그랬다. 목요일이었고 겨울 초입의 추위가 느껴지는 오후였다. 12월의 바람을 우습게 본 죄로 코트 깃을 바짝 세우고 어깨를 움츠렸다. 목도리를 챙기지 않은 아침의 나를 속으로 나무라며 병원을 빠져나왔다.
최근 몇 년 동안 엄마는 잔병치레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일이 잦았다. 매번 그 과정을 옆에서 도와 온 나였기에 그날 역시 입원 절차는 순탄하게 흘러갔다. 과로를 하거나 겨울이 찾아오면 느닷없이 말썽을 부리는 엄마의 방광이 문제였다. 며칠 전부터 아랫배와 허리가 아프다는 엄마의 말에 가족들 모두 엄마의 방광염이 또 도졌구나 직감했다.
별 의심 없이 다니던 종합 병원의 신장내과로 향했다. 엄마를 오래 봐 온 의료진은 “재발했네요. 무리하셨나 봐요. 통원 치료하시겠어요, 아니면 저번처럼 며칠 입원하시겠어요?”라고 물었다. 홀로 생활하는 엄마가 식사를 챙기기에도, 한밤중 찾아오는 통증을 달래기에도 집보다는 병원이 좋을 것 같았다. 엄마도 아플 때 혼자 있으면 서럽다며 입원에 동의했다.
우리 모녀에게 병원 생활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허리에 인공 뼈를 삽입하는 수술과 폐의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며 엄마는 환자로, 나는 보호자로 병실을 내 방처럼 누볐던 지난한 시간들이 있었다. 대상 포진이나 신장 결석같이 우리 가족에게는 이제 사소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입원했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번엔 입원을 위해 코로나19 검사를 받아야 했다. 검사실로 향하기 전, 처음 받는 검사에 엄마가 살짝 긴장하긴 했지만 통과 의례일 뿐이라며 안심시켰다. 검사 후에는 엄마도 해 보니 별것 아니었다며 가벼이 웃어넘겼다. TV 뉴스에서 보던 면봉으로 코를 찌르는 모습을 드디어 본인도 재연해 봤다고 말하면서.
체온도 정상이고 아랫배 외에 통증도 거의 없었기에 입원 수속을 마치고 엄마를 혼자 병실에 두고 오는 마음이 그리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코로나19 덕에 보호자가 병실에 같이 있을 수 없는 상황에 고마움마저 느꼈다. 어서 빨리 집에 가서 식탁 위에 놓아둔 달달한 빵을 먹고 뜨뜻한 이불 속에 눕겠다는 의지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 가족 채팅방에 엄마의 경미한 증상들을 읊은 후 병원에서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오후면 퇴원할 수 있을 것이란 소식을 전했다. 오늘의 보호자 역할을 무사히 마치며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 오늘 미션은 잘 끝냈구나. 그래도 이번엔 이만하길 다행이다!’
다행이라 안심하던 나의 속삭임이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불행을 맞이하는 외침으로 바뀔 것이란 예상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다음 날 아침 8시 즈음,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였다. 어제의 피로로 잠이 덜 깬 채 전화기를 귀에 가져갔다.
“미야, 미야. 뭔가 이상하다.”
엄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왜, 엄마? 의사 선생님 다녀갔어?” “아니, 간호사가 왔는데, 뭐라 뭐라 하면서 이 방에 못 있는다고 짐을 옮기라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 “방을 옮기라고? 아, 다인실에 자리 나면 옮겨 달랬는데 그 말인가?” “아니, 어제 코로나 검사한 거 있잖아. 엄마랑 같이 검사한 사람들 중에 누가 확진이 나왔나 본데, 그래서 병실을 옮겨야 된다는데? 빨리 준비하라고만 하고 휙 나가 버려서 자세히 묻지도 못했다.” “뭐? 알았어요. 일단 진정하고 계셔 봐요. 간호사실에 지금 전화해 볼게요.”
목소리에서 엄마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 짐작이 되었다. 엄마와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간호사실로 전화를 걸었다.
“저, 609호 환자 보호자인데요. 혹시 어제 입원 환자 중에서 확진자가 나왔나요? 엄마에게 병실을 옮겨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해서요.” “네. 보호자분이 어제 온 따님이세요? 그게, 어머니 어제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요, 코로나 확진입니다. 저희도 조금 전에 통보받아서 보호자분께 곧 연락을 드리려고 했어요.” “네? 잠시만요! 어제 입원한다고 검사했던 분들 중 한 명이 아니라 저희 엄마가 확진이라고요?” “네.” “혹시 검사 결과가 잘못되거나 다른 분과 바뀌었을 가능성은 없나요? 저희 엄마 열도 없고 기침이나 인후통도 없고 증상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다른 분들은 다 이상 없고요. 환자분만 확진으로 나왔습니다. 일단 저희 병원에서 격리할 수 있는 공간인 1인실에서 대기를 하시다 저희도 보건소 안내에 따라 차후 조치를 할 거고요, 보호자분한테도 지역구 보건소에서 전화가 갈 겁니다. 보호자분도 접촉자이니 어디 가지 말고 대기해 주세요.”
우르르 쾅!
엄마가 코로나19 확진자라는 소리가 나의 머리에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손을 떨며 들고 있던 전화기 화면을 보니 2020년 12월 11일이었다.
사람 좋아하고 수다를 즐기던 엄마는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을 살며 가족과 이웃 사이에 있을 때 제일 행복하다고 말했다. 사소한 그 행복을 한동안, 아니 영원히 되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바로 그날을 기점으로! 보건소 전화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아차, 내가 또 뒤통수를 맞았구나! 이번엔 별일 없을 것이라며 병원을 나서던 나의 안일한 태도가 하늘의 비웃음을 샀구나.’
엄마와 나의 삶 앞에 예상치 못할 불행이 도사리고 있다는 경고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오가지도 못하고 엄마 홀로 위태롭게 서 있어야 하는, 외롭고도 기나긴 코로나 회복을 향한 항해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안락한 동네의 마녀재판나는 가끔 생각한다. 엄마가 노년이 아니었다면, 엄마가 여성이 아니었다면, 엄마가 홀로 살지 않았다면 지금의 상황과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 여성 독거노인이었기에 코로나19 확진 이후의 현실은 엄마에게 더 가혹한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말이다.
엄마가 사는 동네 이름인 ‘안락동’은 안락서원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말 그대로 편안하다는 뜻을 지닌 지명이다. 일곱 살의 어린 내가 살기 훨씬 예전부터 주거 지역이었고 지금도 시장을 둘러싸고 주택가와 빌라촌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 기억 속에 안락동의 풍경은 골목을 따라 집과 작은 가게들이 옹기종기 늘어서 있고 곳곳에 평상이 놓여 있다. 골목에서 열 살 남짓의 나와 친구들이 땡볕에서 땀을 흘리며 놀이를 하고 있으면, 평상 위에선 엄마들이 모여 비빔국수며 전을 만들어 우리를 부른다. 그렇게 큰 평상에 앞집과 옆집, 뒷집 아이들이 뒤엉켜 앉아 같이 먹고 같이 뛰고 같이 웃던 시절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지금의 안락동은 아이들의 웃음이 사라졌다. 2020년 기준 노인 인구 현황에 따르면, 안락동이 속한 동래구는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부산시 구, 군 중 다섯 번째로 많은 지역구라고 한다. 나의 모교였던 중학교는 이미 사라졌고 초등학교도 곧 폐교될 예정이라는 소문이 들릴 만큼 어린이나 청장년층 인구를 찾아보기 힘든 동네이다.
나는 안락동을 ‘도시 속 읍내’라 부르곤 한다. 시장 길을 따라 걷다 골목으로 들어오면, 어느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알 정도로 토박이인 동네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곳에선 마치 어느 시골의 숨은 동네처럼 시간이 멈춘 느낌을 종종 받는다. 내가 엄마와 손을 잡고 다니던 목욕탕은 영업을 하지 않은 지 20년이 넘어 폐허가 되었지만 굴뚝마저 그대로인 채 남아 있다. 고소한 냄새와 요란한 소리로 나를 사로잡던 떡 방앗간도 그대로이고, 동네 곳곳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낡은 간판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지하철에서 내려 엄마 집까지 10분 거리 동안 나는 세네 번은 고개를 숙이며 구부정한 자세로 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어르신들 대부분이 몇십 년 터줏대감들이라 마흔 중반을 넘은 나를 향해 아직도 이름을 부르며 “아이고, 엄마 보러 왔어?”, “저기 호떡집 딸 가는구나.”라며 알은체를 해 주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남동생 부부는 신혼살림을 이 동네에 차렸다. 하지만 얼마 살지 않고 더 큰 동네의 아파트로 이사 갔다. 올케가 이 동네에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이 시장을 가든, 은행을 가든, 식당을 가든 모르는 사람들이 빤히 쳐다보거나 “나, 네 시엄마 친구야.”라며 먼저 인사를 할 때였다고 한다. 지금도 우스갯소리로 동생 부부에게 감시자들이 너무 많아 도망치듯 이사를 간 게 아니냐며 놀리곤 한다.
이렇게 좁고 내밀한 관계로 뒤얽힌 동네에서 처음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다. 30년 넘게 시장에서 호떡 장사를 해 동네 아이들 중에 그 집 호떡과 어묵 국물 먹지 않은 아이가 없다던, 인심 좋고 발이 넓은 사람. 바로, 나의 엄마다.
어제까지 다정한 이웃이었던 엄마는 한순간에 동네 전체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왜 안 그랬겠는가. 동네 이름처럼 안락한 동네, 시장을 중심으로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던 소박한 동네에 낯설고 공포스러운 바이러스를 데리고 온 사람, 게다가 노년 인구가 대부분인 동네에서 생활 터전인 목욕탕과 병원, 시장을 바지런하게 돌아다녔던 사람이 아닌가.
40년 가까이 시장에서 열심히 장사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베풀어 ‘장한 어머니상’까지 받았던 엄마였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라는 악의 기운을 퍼뜨리는 엄마는 ‘마녀’로 낙인찍히기에 모든 조건이 완벽했을지도 모른다.
끈끈하고 선량해 보이던 동네 사람들은 난생처음 경험하는 바이러스의 공포에 점점 날을 세우고 폐쇄적이 되어 갔다. 순박하고 평화롭던 동네에 나쁜 것, 외부의 위험을 안으로 들여온 존재는 40년간 동고동락했던 이웃이라 해도 결코 그들이 품을 수 없는, 오히려 배척해야 하는 존재였다.
게다가 엄마의 삶은 거의 모든 것이 공개되어 있었다. 엄마가 중환자실에 우두커니 앉아 혼자 눈물만 흘리며 침묵을 지키던 순간에도 엄마의 전화기만은 홀로 요란스럽게 울었다. 처음엔 눈물을 훔치며 전화를 받았지만 엄마는 이내 전화 받기를 포기했다. 동네 사람들은 전화를 걸어 처음에는 안부를 묻는 척하다 곧 언제부터 증상이 나타났느냐, 어디에서 옮아 온 것 같으냐, 며칠 사이에 자신의 집이나 가게에 혹시 왔다 가지 않았느냐며 꼬치꼬치 물었다고 한다. 엄마가 병원에서 치료를 끝낸 후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이러한 추궁은 계속되었다.
완치 판정을 받은 후에도 엄마는 집 밖을 거의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집 안에만 있는 것이 갑갑해 옥상에 잠깐 올라 가볍게 몸을 풀고 있으면 건너편 집 아주머니는 엄마를 매섭게 쳐다보고는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낮에는 사람들 눈이 무서워 밤이 되어 모자를 눌러쓰고 생필품을 사러 나가면 누군가 엄마를 알아보고 소문을 냈다. 확진자가 동네를 활보하고 다닌다고. 엄마의 친구 또는 지인들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걱정하는 투로 말하곤 했다.
“순옥아, 당분간 동네에서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겠다. 사람들이 다 지켜보고 있어. 아직 집 밖에 나오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내가 친하니까 나보고 말하라고 하더라.”
확진자로 낙인찍힌 후, 엄마의 일거수일투족은 동네 사람들에게 감시를 당했다. 엄마의 움직임들은 재판대에 올려졌고 엄마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간대와 길로는 다니지 말라는 판결을 받은 듯했다. 엄마의 말을 듣고 나는 엄마가 안락동 사람들에게 ‘마녀재판’을 받은 것만 같았다. 동네 사람들은 엄마의 작은 움직임마저 불길한 행동으로 보았고 엄마로 인해 공동체의 안전이 파괴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유럽 사회에서 일어났던 ‘마녀사냥’ 현상의 주된 공격 대상은 과부였다고 한다. 홀로 사는 여성은 원죄를 가졌으며 악마와 내통하여 심부름꾼이 되기 쉽다고 믿었다. 엄마 역시 든든한 남편이나 자식들이 항시 곁에 있었다면 사람들이 엄마를 향해 폭력과도 같은 시선을 보내거나 전화기 넘어 상처가 되는 말을 던지며 때와 시를 가리지 않고 돌팔매질할 순 없었을 것이다.
마녀처럼 엄마를 따돌린 동네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엄마를 따돌려서라도 안전하고 평온한 동네 안락동을 되찾고 싶었을 테니까. 엄마를 동네에서 배척시킴으로써 코로나 확진자가 아닌 그들은 더욱 하나로 뭉치게 되었을 테니까.
그래도, 그래도 마녀의 딸이 되고 보니 지금도 원망의 마음이 앞선다. 엄마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40년 넘게 지켜봐 온 가족 같은 이웃들이기에 그들의 말과 시선, 행동이 남긴 상처는 엄마와 나에게 오랫동안 흉터로 남아 있을 것 같다. 가장 가까운 이에게 받은 상처는 지울 수 없는 깊은 아픔을 남긴다.
Part 2 돌봄 노동이 일상으로 들어오다
집착과 기대 그 사이리베카 솔닛은 책 『멀고도 가까운』에서 살구를 통해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를 되짚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남긴 살구나무에서 딴 살구는 그녀의 거실을 뒤덮어 버리고 부담으로 남았다. 살구는 그녀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실마리고 멀고도 가까운 모녀 사이를 상징하는 존재다.
엄마가 코로나19 회복기를 거치는 동안 나는 자주 이 책에 기댔다. 엄마에게 받은 살구가 내게도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생각했다.
리베카 솔닛의 어머니는 작가인 딸의 하루를 “너는 온종일 집 안에만 있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잖아.”라고 묘사했다. 그녀처럼 뛰어난 작가는 아니지만 글을 쓰고 간간이 강의를 하며 사는 나의 일상도 다르지 않다. 내가 유일한 딸이자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직업을 가졌기에 엄마의 곁에 가장 오래 머물고 쉽게 찾는 가족이 되었다.
리베카 솔닛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살구를 처리하는 일이 남았듯이 나에겐 코로나19 확진자가 된 엄마 대신 병원을 돌며 약을 타는 일이 주어졌다.
엄마가 매일 빼놓지 않고 먹어야 하는 약은 크게 네 종류다. 천식과 폐 건강을 위한 호흡 약, 고혈압을 낮추는 약과 방광염을 예방하기 위한 약, 그리고 밤사이 매시간 엄마를 깨워 화장실로 향하게 하는 빈뇨를 다스리는 약까지. 2주마다 처방받는 약, 한 달마다 처방받는 약, 석 달에 한 번씩 병원을 찾아야 하는 약까지 그 모든 것의 일정이 나의 스케줄표로 들어왔다.
엄마가 집 밖을 나서길 두려워해 처음 한두 달은 나 혼자 병원을 다녔다. 내가 엄마의 딸이란 것을 증명하는 가족 관계 증명서를 품에 지니고 있어야 했다. 엄마 대신 진료실에 들어가 의사에게 엄마의 상황을 간결하지만 호소력 있게 설명하고 최대한 많은 양의 약을 달라고 부탁했다. 5분도 채 되지 않는 의사와의 만남을 위해 병원에서 두 시간 넘게 대기하기도 일쑤였다. 시간을 들인 만큼 돈이 들어오는 프리랜서의 일상에서 많은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강의료는 적지만 보람을 느낄 수 있어 이어 가던 주부나 성인 대상 강의들을 차례로 취소했다. 기한이 촉박한 원고 청탁도 거절했다. 마음이 쫓기는 일까지 맡는다면 가슴이 바짝바짝 타들어 갈 것 같았다.
일상을 느슨하게 조율했음에도 왠지 모를 답답함과 화가 마음에 쌓였다. 아침과 저녁, 하루 두 번의 전화에서 동네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서글픔을 반복해 얘기하는 엄마에게도 조금씩 지쳐 갔다.
엄마는 원래 성격이 급한 분인데, 코로나19를 경험하곤 불안이 더 커져 당장 처리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안달복달했다. 특히 생필품에 대한 집착이 커졌는데 물이나 쌀, 세제와 같은 것이 꽉꽉 채워져 있지 않으면 불안해했다.
엄마 주위에는 오지랖이 넓고 자기 신념에 찬 지인들만 있는 것인지, 그들은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출처를 알 수 없거나 오류가 있는 사실들을 전했다. 그런 정보를 가만히 듣고 있다 궁금증이 쌓이면 엄마는 내게 전화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