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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분의 삶

이슬기 지음 | 글이


일인분의 삶

이슬기 지음

글이 / 2022년 6월 / 180쪽 / 12,000원





한 칸 살이



독립이라 쓰고 자취라 읽는다


“아, 자취하시는구나?” “아니요, 독립한 건데요?”



내가 혼자 산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자취한다고 생각했다. 왠지 자취라고 하면 혼자 살긴 하지만 필요할 때 언제든지 부모의 도움과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뉘앙스가 있어 나는 반발심을 느꼈다. 내 상황은 조금 달랐다. 학업이나 취업 때문에 잠시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게 아니다. 결혼을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시는 부모님의 집으로 되돌아갈 마음 없이 집을 나왔다. 그 과정에서 부모님과는 충분히 마음을 풀지 못했으니 혹여나 필요하다고 해서 부모님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것이 나에게 있어 혼자 사는 일이 자취보다는 독립인 이유였다.

집을 나온 건 스물여덟 살을 한 달 남겨 둔 겨울이었다. 사실 독립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리되었다.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기만 한다면 그게 인생일까? 독립은 퇴사한다는 내게 부모님이 내민 조건이었다. 내 맘대로 퇴사하기로 했으니 독립까지도 안고 가야지. 그것이 내 선택에 따른 책임이라면.

나는 나답게 살고 싶었다. 나다움이 뭔지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그래서 그것을 찾는 여정을 꿈꿨다. 분명한 건 회사에서는 나다움을 구할 수 없었다. 어떤 게 나다운 건지 당장에 찾지 못하더라도 제대로 시도하고 꿈꿔 보고 싶었다. 그 첫걸음이 나에겐 퇴사, 그리고 독립이었다. 그렇게 원래 예정되어 있던 인생길에서 되돌아 나와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부모님의 집에서 나와 처음으로 혼자 지내게 된 공간은 집이라기보다 방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방 한 칸이 내 집이 되었다. 한 강연장에서 김애란 작가는 자신이 스무 살 적 혼자 지내던 공간을 칸이라고 표현했다. TV 프로그램에선 종종 가난한 사람들의 메타포로 단칸방을 보여 주곤 했다. 그렇게 살아 본 적은 없지만 칸이라는 단어는 왠지 아련하고 애틋하게 느껴진다. 이제 그 한 칸에 나의 마음을 준다. 태어나 처음으로 갖게 된 나만의 공간에서 낭만을 만끽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가족의 눈치는 안 봐도 되는 해방감도 함께 말이다.

부모님의 집보다는 좁지만 혼자 지내기에는 적당한 둘레다. 원룸은 아파트나 주택과 구조부터 달랐다. 처음으로 살게 된 공간은 현관문을 열면 바로 옆에 화장실 문이 있고, 신발을 벗고 들어서면 옆보다 앞으로 더 긴 직사각형의 방이 늘어서 있었으며, 그 끝에 커다란 창으로 연결되었다.

들고나온 짐이 많았다. 돌아갈 예정 없이 27년 치 나의 전부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차피 다음 날 출근할 일도 없는 내겐 남는 게 시간이어서 급할 것 없이 천천히 짐을 풀었다. 어느새 해는 지고 커다란 창 너머 밤하늘이 비쳤다. 어둠은 많은 것을 감성적으로 만든다. 문득 쏟아지는 별에 샤워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빛과 어둠은 서로를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 창 가까이에 들어온 어둠은 나의 실루엣을 유독 적나라하게 비췄다. 그 사실을 깨닫자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바깥에서 보면 내가 있는 이 공간이 다 까발려질 거란 사실, 창문 너머로 어둑어둑한 동네와 불이 켜진 몇몇 집들, 그곳에서 여기를 쳐다보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닐까? 혼자라는 낭만도 잠시, 바깥에 보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당장 이 공간의 빛을 가릴 것이 필요했다.

커튼 역할을 할 만한 게 뭐가 있을지 잠시 생각하다가 몇 년 전 샀던 머플러를 떠올렸다. 와인 색상에 면으로 된 머플러는 165센티미터의 내 키는 족히 덮을 만큼 길고 내 몸을 두어 번 감을 만큼 넓었다. 겨울을 따뜻하게 나기 위해 장만했지만, 이제 이 머플러의 용도는 커튼이다. 여차하면 식탁보도 될 수 있고 환절기용 이불로도 손색없겠다 싶을 만큼 유용해 보였다. 일단은 커튼이 필요했으므로 머플러를 쫙 펴서 커튼 레일 핀을 하나하나 꽂았다. 그걸 창문에 달았다. 이제 내 종아리 빼곤 바깥에 보일 염려는 없겠다. 그제야 나는 입고 있던 옷을 훌러덩 벗었다.

자취생이 아니라 ‘독립러’라고 우기던 마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손수 밥을 지어 먹으면서 생활하는 자취든, 다른 것에 예속하거나 의존하지 않는 상태인 독립이든 혼자 칸에 살기 시작하면서 둘 다 중요하다는 걸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가족의 울타리에만 안주했다면 몰랐을 것들을 겪으며 새로운 인생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내가 하고 있는 게 자취든 독립이든 일인분의 삶은 나를 키웠다.

혼자서도 잘해요


살면서 어른들에게 혹은 미디어에서 듣는 얘기 중의 하나는 여행을 많이 다니라는 말이다. 여행이 주는 경험만큼 좋은 것은 없다면서 기회가 되면 어디든 떠나 보라고 한다. 나도 여행하는 것을 늘 꿈꿔 왔다. 누군가 여행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좋아하는 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싫어하진 않으니까). 하지만 어쩐지 살면서 여행을 다닌 경험은 적다. 이유야 여러 가지다. 어디로 떠날지 모르겠어서,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두려워서, 시간이 많이 들어서, 그리고 돈도 많이 들어서.

스무 살이 되면서 자유로운 시간이 많아졌고, 아르바이트나 직장 생활을 하며 스스로 돈도 벌게 되었지만 아무 고민없이 여행을 갈 만큼 넉넉한 정도는 아니었다. 돈 없이 할 수 있는 무전여행도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만 그만한 깜냥은 또 없는 사람이었다. 여행을 위해 돈을 아끼고 모으려는 의지도 없고 몇 달 동안 일상을 벗어나 있을 용기도 없었다. 그래서 늘 여행보다 다른 경험에 더 높은 기회비용의 가치를 매겼다. 게다가 스무 살 언저리 시절엔 여행 말고도 재밌는 경험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예를 들면 술을 마신다든가 혹은 술을 마신다든가.

점점 나이를 먹어 20대 후반이 되자 전보다 여행에 대한 갈망이 커졌다. 새로운 환경에서 일탈을 맛보고 싶은 마음이 싹텄지만 떠나는 버릇이 들지 않은 내 몸과 마음은 여행을 결심하기엔 턱없이 부족했고 무엇보다 이젠 정말로 여행할 돈이 없었다. 아무렴, 퇴사를 하고 독립한 마당에 여행 자금이 생길 리 만무했다. 독립 후 몇 년간은 한 달 벌어 한 달 생활비 충당하기도 빠듯한 일상이 지속되었다. 이래서 집 나오면 고생이라고 하는 거였다.

집을 나오고 나서야 그동안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재정적 지원이 얼마나 컸는지 체감했다. 어떤 달은 월세를 밀렸다. 그렇긴 해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거나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기는 싫었다. 지인들과 친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스스로 이 삶을 버텨 보려고 아등바등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좀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만약 누군가에게 기대어 얻는 편익으로 안심하는 것보다 빚졌다는 죄책감이 더 컸다.

여가나 취미 생활, 만남을 줄이는 것으로 생활의 균형을 맞춰 나갔다. 마음 한편으론 여행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는 도대체 여행이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싶었다. 해외의 이국적인 도시에 가는 것? 국내에서 관광지로 소문난 지역으로 떠나는 것? 바다와 같은 휴양지의 호텔에서 머무는 것? 물론 이런 것이 훌륭한 여행이 될 수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여러 방식의 여행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지 않는가? 내 인식이 이다지도 좁다는 것에 한 번 반성했다. 어차피 새로운 환경과 일탈이 필요한 거라면 평소에 해 보지 않은 걸 해 보면 될 터였다. 여기에 꼭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하는 것도 아닐 테니.

그래서 한번은 등산을 하며 여행 같은 기분을 느꼈다. 여행을 하는 수많은 이유 중의 하나가 세상 속 펼쳐진 자연의 위대함을 느끼는 거잖나. 산은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할 수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지리산을 당일치기로 오른 게 계기였다. 힘들게 올라간 산 정상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서 하늘을 마주 보고 누웠던 경험 후 나는 산을 오르는 걸 여행이라 여겼다. 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가까운 산을 혼자 오른 적도 있고, 조금 더 용기 내어 혼자 한라산을 오르기도 했다.

산을 오르내리는 동안은 자동차 소음을 면할 수 있다. 그 편안함 속에서 내가 느낀 한 가지는 산에서는 도망칠 수도 없고 그러려는 마음도 안 든다는 사실이다. 두 다리로 점점 가파른 땅을 올라가는 행동은 결코 편한 일이 아니다. 심지어 내려갈 때도 무릎이 아파서 오랜 시간 걸어 내려오는 게 쉽지 않다. 힘든데 그렇다고 포기하거나 도망치고 싶지 않다. 산은 코앞에 목표가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산을 오르면서 나는 종종 앞으로 어떤 책임을 지고 살아야 하는지 생각했다. 스스로를 책임지고 살기 위해 경제적인 자립은 필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며 경제적 수입이 생겼을 때 그것이 경제적인 자립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때는 여전히 부모님 밑에서 편리한 소비 생활을 누렸다. 온전한 자립을 이루기 위해선 인간의 구심점이던 가족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자립의 한자어를 보면 스스로 우뚝 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어떻게 해야 홀로서기가 될까? 나는 과연 제대로 서 있을까? 경제적 자립. 혼자 살며 이 명제에 강박적으로 집착했다. 누구에게도 손 벌리지 않고도 혼자를 책임져야겠다고 맘먹었다. 그런 와중에 부모님을 떠올리기도 했고, 또다시 적당한 회사에 취업을 해 볼까, 아니면 결혼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마음에 스치듯 왔다 갔다. 매 순간 난 흔들리며 겨우 중심을 잡아 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구나무서기를 할 때의 내 몸을 떠올렸다. 두 다리를 머리 위로 올려 떨어뜨리지 않고 버티기 위해서는 몸의 중심부, 즉 배에 단단히 힘을 주기도 해야 하지만 미세하게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중심을 잡곤 한다. 겉으론 잘 안 보이지만 끊임없이 몸을 흔들어야지만 중심을 잡고 제대로 서 있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처음 물구나무서기를 할 때는 누구나 오래되지 않아 넘어지고 만다. 중심을 잡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내가 혼자 살아 내려 시행착오와 흔들림을 겪는 순간에도 주변에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 삶을 응원한다고, 잘하고 있다고, 틀린 게 아니라고 말이다. 애착 이론 중에는 의존 역설이라는 게 있는데, 누군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느낄 때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어린아이를 놀이방에 혼자 두었을 때 아이가 울지 않고 잘 노는 이유는 부모가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인식하기 때문이다. 낯선 상황 실험이 이를 잘 보여 준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혼자서도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건 주변에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방증이다.

만약 계속 부모님의 보호 아래 있었다면 내가 얼마나 스스로 잘 설 수 있는지 몰랐을 수도 있겠다. 모든 걸 혼자 책임진다는 부담감은 있지만 자립심으로 인해 얻는 자유가 더 크다. 그러니까 부모의 보호를 뒤로한 것이 꼭 마이너스만은 아니라는 말씀.



더불어 살이



연애, 할 수 있을까


나의 연애는 대학교에 들어간 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학 생활은 이성과 만날 기회가 많았고 사귀는 관계로 발전하는 계기도 무궁무진했다. 한 사람하고만 오랫동안 만나는 것도 좋았겠지만 나의 경우엔 헤어짐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좋거나 싫은 감정에 충실했다. 상처받아 울었으면서도 또다시 찾아온 설렘을 마다하지 않았다.

스물다섯 살 때는 2년 정도 만난 애인과 헤어졌다. 아마도 권태기였겠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식은 마음을 되돌리기는 싫었다. 그 후 이성적인 감정이 드는 사람을 몇 번 만났지만 연인 관계로 발전하진 못했다. 속마음을 숨기고 짝사랑하다가 내 안에서 끝나 버린 적도 있고, 상대방에게 마음이 닿더라도 어쩐지 깊은 교감으로 이어지지 않기도 했다. 어른이 되고 1년에 3분의 2 이상은 연애하는 사람이었는데 이즈음 처음으로 긴 시간 연애하지 않는(아니, 못하는) 일상을 보냈다. 그리고 퇴사와 독립이라는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다.

나다운 삶과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서 이리저리 둘러보고 헤매는 과정에서 또 한 사람을 마음의 방에 들였다. 한 1년 동안은 그 사람을 동경했다. 어떤 면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였던 우리에게 연인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크지 않았다. 그런 게 중요하지도 않았지만 동경을 빙자한 연정의 마음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기는 했다. 다수가 모인 자리에서는 타인의 관심에 관심이 많아지는 것일까. 어느 날 사람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나의 마음이 누구를 향하는지가 안줏거리가 되었다.

그날이 있고 나서 그에게 처음으로 개인적인 연락이 왔다. 그의 문자를 두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만나 서로에 대해 궁금한 것을 나누며 조금씩 거리를 좁혀 갔다. 그와 사귀는 사이가 되고 행복 지수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바쁜 와중에 짧은 전화 통화가 설레었고 일 마친 후 늦은 밤 5분 정도 보는데도 온 마음이 녹아내렸다. 20대 초반에 으레 그랬던 것처럼 자주 만나고 계속 연락하는 식의 연애는 아니었다. 둘 다 시간의 여유가 많지 않았고 각자의 일상도 제대로 돌봐야 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어른의 연애인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겉치장을 억지로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이미 독립해 살면서 짙은 화장을 하거나 화려한 옷과 액세서리를 하는 게 불편했고 어색했다. 연애를 한다고 해서 달라진 건 없었다. 나는 자연스러운 맨얼굴과 편한 옷차림을 고수했고 그도 나의 꾸미지 않은 모습에 큰 불만을 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믿는)다. 서로의 생활을 존중해 주는 게 성숙한 어른의 관계라 믿었다.

그러다가 그를 향한 나의 마음이 점점 커졌다. 그에게서 연락이 더 자주 왔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모르는 그의 일상이 궁금했다. 좀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불안했다. 섭섭함이 밀려왔고 때론 원망했다. 상대방의 삶 전체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엔 난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참을성 없고 서툴렀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었으니 이성적인 판단과 현명함이 늘었을 거라 착각했다. 아직 무르익지 않은 마음은 조급함이 컸다. 애정과 관심만 바라는 게 가끔 쓰나미처럼 감정을 뒤흔들었다. 서로 간의 거리를 좁히고 가장 친한 친구가 되기에는 연락도, 만남도, 어쩌면 마음도 한참이나 모자라는 사이였다. 몇 개월 뒤 우리는 헤어졌다. 그 후 몇 번은 더 다른 사람을 만났다. 언제나 누군가 좋으면 그걸로 마음을 던질 준비가 되었다. 자꾸 생각나고 궁금하고 넘치는 마음을 표현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 그것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의 전부였다. 그렇게 해서 서로 동의하에 만남을 시작하기는 했으나 어쩐지 오래 지속되는 관계는 아니었다. 1년을 넘기지 못했던 나의 연애 방랑벽을 스스로의 문제점으로 치부했다.

관계를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한다는 게 나로서는 단점으로 느껴졌다. 이제는 쉽사리 누군가를 좋아하기가 무서워졌다. 늘 감정이 먼저였던 내게 이성적인 판단이 앞서기 시작했다. 관계에 무작정 뛰어들던 내가 앞으로 있을 부정적인 일을 먼저 생각하며 머뭇거렸다. 이런 걸 보면 나이가 들수록 겁쟁이가 된다는 게 거짓은 아닌가 보다. 짧게 지속된 관계의 경험은 내게 두려움과 의구심을 가져다주었다. 그리하여 풍선처럼 부푼 감정이 생겨도 그것을 붙들고 놔주지 않는 이성이 늘 앞선다. 이성이라고 해 봤자 고작 엄지만 해서 자칫 잘못 손가락을 떼어 버리면 잡혀 있던 감성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닐지도 모른다.

살면서 어느 것 하나 서툴지 않은 게 있을까 싶다. 유독 나에게는 연애가 그랬다. 깊은 유대를 요구하는 관계. 만남과 헤어짐을 아무리 반복해도 같은 건 하나도 없다. 타인이 지닌 특수성은 늘 새로움을 가져다주고 그것에 익숙해질 일은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 아주 조금, 시행착오를 줄일 수는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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