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일상은 무슨 맛인가요
오연서 지음 | 온더페이지
당신의 일상은 무슨 맛인가요
오연서 지음
온더페이지 / 2022년 6월 / 256쪽 / 15,500원
추억 속, 나
냉국수 | 여름과 할머니의 맛나는 어렸을 때부터 무더운 여름에 할머니가 삶아주시는 냉국수를 좋아했다. 할머니만의 특별한 비법이나 육수가 담긴 국수는 아니고 그냥 보리차 국수였다. 면을 삶아서 잘 헹구고 차가운 보리차를 부어주셨는데, 시원해서 좋았다. 어린 나는 할머니가 자극적이지 않고 살짝 단맛이 나는 보리차 국수를 만들어주시면 꼭 한 그릇씩 다 먹곤 했다.
할머니는 내가 탄산음료나 사탕, 초콜릿을 많이 먹으면 혼내셨지만, 보리차 국수만큼은 내가 원하는 대로 달게 만들어주셨다. 날이 더울 때 먹으면 마치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는 것 같았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우리 할머니표 국수였다. 엄마도 이 집에 시집와서 처음으로 드셔보셨다고 했다.
지인들과 국수를 주제로 이야기해보면 보통 잔치국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나는 멸치의 비릿한 맛을 싫어한다. 그래서 여름에 국수를 먹으면 새콤한 동치미 국물에 소면을 말아서 먹거나 콩국수를 주로 먹는다. 어른이 된 지금은 콩국수를 잘 먹지만, 어렸을 때는 고소하다는 콩국도 콩의 맛이 비려서 싫었다.
오랜만에 할머니표 국수가 생각나서 아이들과 국수를 만들기로 했다. 소면을 삶아서 찬물에 헹구고 오이는 얇게 채를 썬다. 차가운 보리차에 설탕, 깨소금, 소금을 더해서 냉국수용 국물을 만든다. 삶아둔 면에 냉국을 붓고 오이를 올린다. 그리고 고춧가루와 참기름, 얼음을 곁들인다.
보리차 국수를 먹은 아이들은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내가 먹어봐도 어렸을 때 먹던 그 맛이 아니다. 요리법이 틀렸나 싶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불러주는 요리법도 내가 기억하던 요리법과 비슷하다. 사실 나도 국민학생-내가 졸업하고 초등학생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후로는 보리차 국수를 먹어본 적이 없다.
오랜 시간 잊고 있던 그 맛이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 나이를 먹을수록 가끔 할머니가 만들어주셨던 음식을 다시 먹고 싶다. 할머니의 음식은 이제 내 기억 속에 어렴풋하게 남은 추억의 맛이다. 아련하게 남은 나와 그녀의 추억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내가 지금의 우리 아이보다 더 작고 어렸을 때 나를 키워주셨다. 우리는 언제나 바늘과 실처럼 같이 붙어 다녔다. 삼십 년도 더 지난 일이다. 그때 먹었던 이름 모를 음식들은 이제 다시는 맛볼 수 없기에 내 마음 한편에서 그리움이 되었다.
할머니는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나이가 들면서 병원에 가는 게 곧 외출인 삶이 되었다. 할머니는 병원을 좋아하셨다. 매일 병원에 가시는 것으로 마음의 위로를 받는 듯했다.
늘 아프다고 하시면서도 내가 대학에 입학하자 “졸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라고 하시며 나를 보듬어주셨고, 내가 졸업하고 사회에 나갔을 때는 “결혼하는 모습은 볼 수 있을까?”라고 하시며 나를 기다려주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결혼과 출산이 남들보다 조금 빨랐다. 할머니는 건강하시지는 않았지만, 오래 사셨다. 결국 나의 두 아이를 모두 품에 안아보셨다.
내 기억 속의 할머니는 건강하시던 모습 그대로인데, 돌이켜보면 내 곁을 떠나신 지도 벌써 십 년 정도 되었다. 할머니가 만들어주셨던 음식을 지금도 가끔 먹고 싶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고 누가 부르기만 해도 짜증이 나는 날, 습도가 높아서 에어컨을 켜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더운 날에는 보리차 국수를 한 그릇 만들어서 먹는다.
이번에도 그 맛은 아니겠지만, 나는 할머니를 추억하며 국수를 삶을 것이다.
남편: “국수는 잔치국수가 맛있어. 밖에서 사 먹으면 미리 삶아둔 면을 쓰는데, 그런 면은 먹으면 꼭 체하더라고. 나는 자기가 만들어주는 비빔국수가 맛있더라!”
엄마인 나
돼지국밥 | 엄마가 되고 처음 만난 맛“안 돼!”
어느 토요일 아침, 나 혼자 소리를 질렀다. 손에 든 임신 테스트기에는 선명한 두 줄이 떠 있었다. 결혼 4개월 차이자 스물다섯 살인 나는 덜컥 눈물부터 났다.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렵고 무서웠다. 복잡한 심경을 억누르고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당장 오라고? 어디 아파?” “응. 많이 아파.” 급하게 돌아온 남편에게 테스트기를 보여주며 또 한바탕 울었다. 신혼이었던 우리는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날 동생은 외출 중이었다.
우리는 연애를 오 년 정도 하고 결혼했다. 남편은 내 첫사랑이었다. 결혼하고 가끔 ‘만약 아이가 안 생기면 어쩌지….’라는 근거 없는 불안감이 들 때가 있었는데 아니었다. 그래도 당황스러웠다. 이제 막 결혼했고 회사에서도 겨우 신입을 벗어났는데 덜컥 임신이라니.
예전부터 막연하게 ‘아이 한 명은 있어야 좋지 않을까? 둘이서만 사는 게 과연 괜찮을까?’라는 고민을 종종 했다. 결혼할 때 남편은 아이 없이 우리 둘이서만 함께 살고 싶다고 말했는데, 결혼 후 우리 부부의 미래를 제대로 그려보기도 전에 덜컥 아이가 생겼다. 우리 부부는 2008년 7월 21일이면 부모가 될 예정이었다.
“전부터 아이 갖고 싶다고 했잖아. 좋은 일인 거지 뭐.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최근 들어서 그냥 회사 일이 힘들어서 피곤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임신 때문이었다. 병원에서 임신을 확인하고 남편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딱히 떠오르는 메뉴 없이 그냥 집으로 가다가 문득 머릿속에 어떤 음식이 떠올랐다. “돼지국밥 먹고 싶어!” 다시 차를 돌려서 길가에 있는 작은 국밥 가게에 들어갔다.
“못 먹을 것 같으면 말해.”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는 메뉴였다. 나는 살면서 돼지국밥을 어렸을 때 아빠랑 한 번,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랑 한 번, 이렇게 총 두 번 먹었다. 돼지국밥은 돼지고기와 여러 가지 내장이 들어간 국밥에 부추무침을 올려서 먹는 음식이다. 임신 후에 처음으로 먹은 음식이 돼지국밥이었다.
아무렇지 않던 속이 막상 국밥을 보니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얼른 한 숟가락을 떠서 먹으니 속이 진정되었다. 반 정도 먹었더니 더는 못 먹을 것 같았다. ‘이런 게 입덧이구나.’ 혼자 내 마음을 다독였다. 남편은 오랜만에 먹는 국밥이라 그런지 열심히 먹었다. 그날은 남편의 어깨가 무거워진 날이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임산부처럼 심한 입덧을 할까 걱정했지만, 특별한 입덧 없이 무난하게 임신 기간을 보냈다. 한겨울에 수박이 먹고 싶거나 복숭아를 찾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임신한 사이에 시아버님이 돌아가셨고 남편은 난치성 질병을 진단받았다. 사실 임산부라고 마음 놓고 편히 쉴 처지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과 마음이 힘들어져서 35주 차에 가진통으로 출산하러 대학 병원에 갔다가 그냥 퇴원했다. 36주 1일 차에 또 진통이 왔다. 남편이 나를 다독여주었다.
“아기는 그렇게 빨리 나오는 게 아니야. 아직 4주나 남았어. 마음 편하게 갖자. 지금 힘들어서 그래.”
아기는 나오고 싶을 때 나온다. 남편이 퇴원한 다음 날에 아이가 태어났다. 예정보다 빨리 나온 아기 덕분에 만삭 사진을 예약한 주에 신생아 사진을 찍었다. 서산에 있는 우리 집 앞의 스튜디오에 사진 촬영을 예약했는데, 스튜디오 사장님께서 소식을 듣고 대전에 있는 대학 병원까지 와주셨다.
그렇게 나는 36주 1일에 2.4kg으로 태어난 작은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 아이가 지금은 열다섯 살이다. 어느새 순대국밥을 시키면서 “순대 없이 주세요.”라고 말하는 중학생이 되었다. 나는 어른이 되고 한참 뒤에 순대국밥을 먹었기에 순대국밥이 맛있다는 아이가 조금은 신기하다. 국밥 속에 들어있는 내장은 아무렇지 않게 먹으면서 이상하게 순대는 못 먹는 아이지만, 늘 사랑스럽다.
아프지 말고 지금처럼 씩씩하게 자라라. 엄마의 쌍꺼풀과 아빠의 성격을 닮은 우리 첫아기. 많이 사랑한다.
남편: “어린 시절 시골 잔칫날에 돼지를 잡던 모습이 생각나네. 지금은 식당에서 사 먹지만, 그때는 특별한 날에만 먹는 음식이었어. 맛있는 부분은 동네 아저씨들이 다 먹고 어린아이들은 주로 퍽퍽한 수육만 먹었지.”
아내인 나
샌드위치 | 풋풋했던 연애 시절의 맛요리의 시작은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깜짝 놀라게 해야지!’ 날씨가 좋은 토요일 아침, 나는 기숙사의 좁은 부엌에서 요리사라도 된 것처럼 바쁘게 움직였다. 룸메이트에게 오늘 아침은 내가 준비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쳤다. 옆방에 있던 친한 친구도 불렀다.
넓은 볼에 삶은 감자와 계란 등 준비한 재료들을 넣고 마요네즈, 소금, 후추와 버무렸다. 샐러드를 한 숟가락 떠서 맛을 보니 맛있었다. 마요네즈와 어우러져 간도 딱 맞았다. 그렇게 만든 속 재료를 식빵에 넣어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모닝빵도 반으로 쪼개고 사이에 속 재료를 넣었다. 도시락 하나를 뚝딱 만들었다. 남은 샐러드와 샌드위치는 아침으로 다 함께 먹었다.
대충 방을 치운 뒤 서로 주말 잘 보내라는 인사를 나누고 친구들과 헤어졌다. 대학과 본가가 멀어서 나는 집에 자주 가지 않고 주말에도 주로 기숙사에 머문다. 그래도 오늘은 작은 도시락을 챙겨서 버스를 탔다. 소풍 가기 좋은 날이다. 버스도 한 번에 바로 갈아탔다. 오늘은 시작부터 상쾌하다.
남자친구의 퇴근 시간 겸 점심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춰서 회사 앞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나오는 사람들 사이로 남자친구가 보이지 않아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디야?” “나? 일 끝나고 집에 가는 중이지!” “지금 만나자.” “지금? 만나려면 가는 데 시간이 좀 걸릴 텐데….” “나는 여기 ○○ 앞이야.” “혹시 우리 동네 말하는 거야?” “응.” “내가 바로 갈게. 조금만 기다려.”
어느 정도 기다렸더니 남자친구가 오는 모습이 보였다. “전화라도 하고 오지 그랬어.” “일부러 시간 맞춰서 여기 서 있다가 놀라게 해주려고 그랬지. 타이밍이 안 맞아서 아쉽네.” “차 타고 다니니까 길에 누가 서 있는지도 몰라. 버스 타고 오느라 힘들었지?”
손을 꼭 잡고 근처 공원으로 갔다. 이제 남자친구가 도시락을 먹는 순간이 왔다. 아침부터 준비해서 친구들에게 이미 검증을 마친 샌드위치였다. 남자친구가 맛있게 먹을 거라 기대했더니 무척 설렜다.
“직접 만들었어?” “응. 얼른 먹어봐! 맛있어서 놀라지나 말아.” 그런데 샌드위치를 입에 넣으려던 남자친구가 잠시 멈칫거리더니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냄새가 이상하지 않아?” “아니. 괜찮은데? 오빠, 샌드위치 싫어해?” “그건 아니야. 잘 먹을게.”
우리 둘 다 동시에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아~!’ “이거 상한 것 같은데? 우리 다른 거 먹으러 가자. 이런 거 힘들게 만들지 않아도 돼.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만으로도 고마워.” 상한 것 같다는 말이 귀에 들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는 이십 년 정도 지난 나와 남편의 봄날 에피소드다. 그렇게 내가 남편을 위해 처음으로 만든 도시락은 실패했다. 남편의 이야기를 듣다가 지난날의 그 사건이 기억났다. 남편은 남자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던 이십 대 초반의 내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 대화를 시작으로 연애하던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날이 늘어났다. 이야기하다 보면 서로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다. 나는 지금도 샌드위치를 만든다. 물론 그때처럼 다양한 재료를 넣어서 화려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주로 냉장고 속에 있는 재료로 간단하게 만드는 편이다. 나중에 알았는데, 사실 남편은 샌드위치를 싫어한다.
오늘은 어떤 글을 쓸지 고민하던 나를 본 남편이 우리가 데이트하던 이야기를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이왕이면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썼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스스로 원래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터라 내심 뜨끔했다.
그러나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때의 우리도 다른 연인들처럼 서로 많이 사랑했다는 생각이 든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서 서로 달라진 환경 때문에 그때의 사랑이 조금은 식었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사랑한다. 앞으로도 사랑하면서 살 것이다.
그동안 앞만 보느라 나도 잊고 있던 내 이십 대의 모습을 남편이 기억하고 있다. 지금보다 훨씬 어리고 여러 면에서 미숙했던 나를 잡아주고 보듬어준 내 남편. 지난 추억을 돌아보니 우리는 부부가 되어서 잘 살고 있다. 남편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다. “사십 대의 나도 잘 부탁해요.”
딸: “학교 수업에서 샌드위치 만들기를 실습했던 적이 있는데, 제대로 못 해서 아쉬워. 그리고 지난번에 소풍 갔을 때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김밥이나 주먹밥을 싸 왔는데 나는 샌드위치가 있어서 좋았어. 그날 샌드위치를 싸 온 사람은 나 혼자였거든. 친구들도 모두 맛있다고 했어. 도시락을 예쁘게 싸가면 친구들 사이에서도 은근히 인기를 끌더라?”
작가인 나
초밥 |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에 감사하게 되는 맛“마그네슘 영양제 하나 주세요.” “병원에 한번 가보세요. 이거 마그네슘 부족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중풍의 전조 증상일 수도 있어요. 꼭 큰 병원에 한번 가봐요.”
약국에서 이 말을 들었던 것을 계기로, 대학 병원 신경과에 몇 년째 다닌다. 병원에서 안면 경련 진단을 받고 지금까지 추적 관찰하는 중이다. 얼마 전부터는 보톡스 시술도 받는다. 신경과 담당 교수님은 파킨슨병과 뇌혈관 질환, 안면 경련 전문이라 그분의 진료실 앞에는 대부분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기다리신다. 그래서 젊은 여자가 대기실에 있으면 다들 힐끗거리며 쳐다본다.
첫 진료에서 교수님은 내 증상을 보고 안면 경련을 확진하셨다. “임상 경험으로 볼 때 안면 경련이 맞아요. 그래도 더 정확하게 알려면 영상으로 확인해봐야 합니다.”
MRI를 찍었다. 결과를 보니 혈관과 신경이 서로 눌려있었다. 다행히도 증상이 미미해서 수술하지는 않고 지켜보기로 했다. “이 병은 수술로만 완치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수술은 환자분께 부담스러우니 일단은 지켜보기로 하죠.”
2014년도에 이 말을 들은 이후로 나의 길고 긴 투병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 주사를 맞은 건 진단을 받고 나서 사 년 정도 지난 2018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다시 직장에 다니며 워킹맘 생활을 시작하니 전업주부로 있을 때보다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일을 시작하니 숨어있던 증상이 눈에 띄었다.
안면 경련 증상이 나타난 이후로는 사람들과 눈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편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는 말하기도 겁났다. 나는 조금이라도 긴장하면 얼굴에 먼저 드러난다. 상대방은 미처 알지 못한다 해도 나 스스로 불편해지는 이 병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생명에 지장을 주는 병은 아니었지만, 삶의 질을 낮추는 엄청난 고통이었다. 일그러진 얼굴과 안면의 떨림은 늘 불안과 초조한 감정을 안겨주었다. 결국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이 따라왔다. 이 고통은 겪어본 사람만 알 수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병이 더 진행될수록 주사를 맞는 간격도 짧아졌다. 한번은 3개월 만에 병원을 재방문하기도 했다. 평생 병원에 다니며 살 수는 없었다. 주사를 평생 맞는다고 생각했더니 무섭게만 느껴졌던 뇌 수술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략 4~5개월에 한 번씩 보톡스 주사를 맞다가 결국 수술을 받기로 결심했다. ‘자연스럽게 웃는 얼굴로 살고 싶다. 예전처럼 다시 건강해지고 싶다!’
간단한 수술이라고는 들었어도 뇌 수술이라 고민이 많았다. 담당 교수님은 대전에 있는 병원에서는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셨다. 서울에 있는 대학 병원에서 1월 19일에 입원해서 1월 28일에 퇴원하는 일정으로 수술을 예약했다. 2020년 1월 20일. 경희의료원 신경외과의 첫 수술 환자는 나였다. 아침에 눈을 뜨니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어제부터 금식하고 수술 대기용 침대 위에 누워있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