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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눈으로 춘천을 다시보다

강동완, 전병길 지음 | 너나드리
통일의 눈으로 춘천을 다시보다

강동완, 전병길 지음

너나드리 / 2021년 6월 / 240쪽 / 21,000원







1부 춘천대첩 - 역사의 흐름을 바꾼 3일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적으로 공격을 시작한 북한군은 탱크를 앞세워 남하하기 시작해 단 3일 만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그런데 북한군은 서울에서 진격을 멈추고 3일을 머물렀다. 세계 어느 나라 전쟁사에서도 초기에 진격을 멈춘 사례는 거의 없다. 적에게 시간을 준다는 것은 군사 전략상 아주 치명적인 실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한군은 왜 서울을 점령하고도 3일 동안 진격을 멈추었을까? 바로 강원도 수부 도시인 춘천 지역 점령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북한군의 계획은 원래 주력 부대가 서울을 점령하여 한국군을 한강 이남으로 밀어내면, 춘천을 점령한 북한군 부대가 경기도 수원 방향으로 내려와 한국군을 포위해서 섬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국제 사회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전에 한반도 전역을 공산화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춘천을 점령한 후 수원으로 내려와야 했던 북한군은 춘천에서 예상치 못한 저항에 직면했다. 우리 국군의 결사 항전이 북한군의 남하를 막은 것이다. 결국, 춘천을 하루 만에 점령한다는 북한군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급기야 춘천 점령 지연으로 인해 전쟁은 북한이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가 전쟁에 개입했고 퇴각하던 한국군도 전열을 재정비해 반격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6ㆍ25 전쟁 초기 ‘춘천대첩’은 역사의 흐름을 바꾼 3일이었다.

38선 표지석


한반도 분단을 상징하는 ‘북위 38도선’은 강원도 춘천의 북부 지역을 지난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8월 11일,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경계로 한반도 분할 점령 계획을 세웠다. 이보다 이틀 전인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고 한반도에 군대를 들여보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기 불과 6일 전의 일이었다.

남북으로 갈라진 춘천:
광복 이후 보름 정도 지난 9월 초에는 강원도 춘천 북부에 있는 위도 38도 선까지 소련군의 점령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1950년 6ㆍ25 전쟁 직전까지 춘천 북부 외곽을 비롯해 인근 화천과 양구는 북한 지역으로 분리되었다. 반면 춘천 시내는 미군 군정청이 담당하는 남한 지역에 속했다. 오랜 시간 동일 생활권이었던 지역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인위적인 힘에 나눠진 것이다. 소련군은 남북을 잇는 경의선, 경원선을 38선상에서 차단하고 열차 운행을 중지시켜 남북간 교통로를 막았다. 또한 식량과 시설물을 약탈하고 일제 강점기 시절에 건설한 화천수력발전소의 수차변압기, 배전판 등을 해체하여 소련으로 가져갔다.

1945년 9월 2일 소련군 1개 소대 병력 약 30여 명이 38선을 넘어 미군 담당 예정 지역인 춘천 시내로 들어왔다. 이때 미군은 아직 한반도에 상륙하지 않은 상태였다. 춘천 시내에 들어온 소련군은 강원도청에서 행정권과 경찰권의 이양을 요구했다. 하지만 광복 이후 미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38선 이남 강원 지역을 관리하던 일본인 관리들은 이를 거절했다.

미군이 38선 이남인 남한 지역에 들어온 날은 1945년 9월 9일이었으며 강원도청의 도청 소재지인 춘천에 진주한 건 9월 20일이다. 분단의 비극은 가족처럼 지내던 한마을 사람들을 둘로 갈라놓았다. 춘천군 북산면 추전리와 사북면 원평리는 각각 미소 점령 지역으로 갈라졌다. 광복 직후 남북 사이에 인적ㆍ물적 교류는 통제되었으나 미소는 제한적으로 38선상의 남북교류를 허용했고 일부지만 주민 왕래와 물물 교환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공식적인 남북 교역은 1947년 5월 미군과 소련군의 합의로 시작되었으며, 1949년 3월 교역이 전면 금지될 때까지 약 2년간 지속되었다. 춘천 북부에서도 이러한 남북 간의 교역이 시행되었다.

집단 월북과 모진교 전투:
분단 이후 남북한에는 각각의 정부가 들어섰고 군대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38선 인근에서는 크고 작은 분쟁이 계속되었다. 1949년 5월 춘천과 홍천에 주둔한 한국군 제8연대 2개 대대 병력이 집단 월북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2개 대대장은 국군 내 남로당 계열의 장교들로 군 내 좌익 세력 척결에 위기를 느껴 자신들의 휘하 병력을 이끌고 38선을 넘은 것이다. 이후 춘천에는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배치된다. 연대 본부의 위치는 춘천역 부근이었다. 제7연대는 춘천 지역의 관공서와 주민들의 지원을 받아 춘천 북쪽 38선의 진지를 정비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남한을 공격했다. 6ㆍ25 전쟁이 발발하자 중부지역 38선에 자리 잡았던 춘천은 전쟁의 한가운데에 휘말렸다. 춘천에서의 6ㆍ25 전쟁은 춘천과 화천을 잇는 5번 도로상의 ‘모진교’라는 길이 250m의 다리에서 시작된다. 당시 38선상에 걸쳐 있던 이 다리에 북한군은 화력을 집중했다. 그 결과 현장에 있던 국군 1개 분대가 폭사했다. 열악한 병력과 장비로는 더 버티기 힘겨웠을 것이다.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지만 안타깝게도 국군은 모진교를 북한군에 내주고 말았다. 당시 국군에는 없던 북한군 탱크가 모진교를 건너 춘천 시내로 향했다.

우두동 충렬탑(忠烈塔)


춘천은 6ㆍ25 전쟁 초기 치열한 격전지였다. 전쟁의 판세를 바꿀 만큼 큰 역할을 했기에 춘천대첩이라 부른다. 전쟁을 일으킨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군사 지원을 받으며 국제 사회가 개입하기 전에 속전속결로 전쟁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북한군 남침 작전 계획의 핵심은 경기도 파주와 의정부 지역을 통해 진입한 북한 병력이 서울을 3일 이내 점령하고, 춘천 지역을 통해 진입한 병력이 수도권 외곽에 거대한 포위망을 구축해 한국군 주력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당시 북한군의 전력은 국군보다 우위였다.

하지만 춘천 지역에 주둔하던 국군 6사단 7연대와 춘천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이 계획은 수포가 된다. 특히 이 전투에서 춘천 시민, 고등학생, 우두동 제사 공장의 여성 근로자들이 탄약을 운반하는 등 전투에 직접 뛰어들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군인과 민간인이라는 신분을 뛰어넘어, 오직 나라를 지킨다는 굳은 결의와 한마음뿐이었다.

인천 상륙 작전, 낙동강 전투 그리고 춘천대첩:
전쟁 초기 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 한 번 못 하고 후퇴했다. 하지만 ‘춘천’ 지역만큼은 전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형을 활용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3일 이상을 버텼다. 춘천 지역 전투는 북한군의 포위망 구축을 사실상 어렵게 만들었고 국군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준 것이다. 전쟁 초기 춘천이 버텨 준 3일은 6ㆍ25 전쟁의 ‘골든타임’이었다. 그래서 춘천 전투는 인천 상륙 작전, 낙동강 전투와 함께 6ㆍ25 전쟁 초기 3대 전승 전투로 기억된다.

이러한 전승의 의미를 기억하기 위해 1955년 3군단 예하 제29사단 장병들과 춘천 시민 등이 합심하여 우두산에 충렬탑을 건립했다. 우두산이 위치한 우두벌은 북한강과 소양강 두 줄기가 만나는 곳에 흙모래가 축적되면서 형성된 평원이다. 우두산은 굵은 고구마 모양의 반도처럼 생긴 평원 위쪽(동쪽)의 소양강과 맞닿은 곳에 있는 해발 134m의 나지막한 산이다. 그러나 당시 군사적인 면에서 우두산은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북한군이 화천ㆍ양구 방면에서 춘천으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는 전초 기지가 바로 우두산이었다. 또한 북한군을 관제ㆍ공격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지금도 신년 초와 6월 6일 현충일에는 조국을 위해 희생한 분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

장군에서 중령으로 스스로 계급을 낮추다:
우두산 충렬탑에는 6ㆍ25 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당시 프랑스군 대대의 지휘관은 랄프 몽클라르(1892~1964)였다. 몽클라르 장군은 6ㆍ25 전쟁이 발발하자 “한반도의 자유를 지키겠다.”라며 자진해서 프랑스군 600여 명을 모집해 참전한 인물이다. 3성 장군 출신이었지만, ‘대대 병력은 중령이 이끈다’라는 프랑스군 규정에 따라 계급을 스스로 중령으로 강등시켰다. 몽클라르 장군은 미군과 함께 1951년 2월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에서 중공군 3만 병력을 맞아 백병전 끝에 승리를 이끌었다. 몽클라르 장군이 이끈 지평리 전투는 6ㆍ25의 전세를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프랑스군은 중부 전선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

소양1교


1933년 12월 20일 자 동아일보에는 “강원도의 신명물(新名物) 춘천 소양교 준공”이라는 제목의 기사 한 편이 실렸다. 이 기사에 따르면 12월 16일 3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준공 축하식이 열렸다. 길이 397m, 공사 비용 18만 원, 공사 참여 연인원이 8만 4천 563명이라고 한다. 또한 이 다리는 경성(서울)으로부터 춘천을 지나 동해안 고성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주요한 역할을 하며 강원도 문화 향상과 산업 발전에 이바지할 것이라 보도했다.

끝까지 소양교를 사수하라:
1933년 개통된 소양교는 실제로 1950년대 초반까지 춘천의 남과 북을 잇는 유일한 교량 역할을 했다. 6ㆍ25 전쟁 초반에는 소양교를 사이에 두고 국군과 북한군의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1950년 6월 25일과 26일 전투에서 패한 북한군은 27일 오전 춘천 시내에 무차별 포격을 가한 후 보병 부대를 앞세워 소양교를 건너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양교 남쪽 봉의산 기슭에 배치된 국군의 사격으로 더는 전진할 수 없었다. 당시 북한군의 시체가 소양교 위에 가득 쌓일 정도였다고 하니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북한군은 최후 수단으로 오전 11시쯤 T-34 전차를 앞세워 다시 공격해 왔다.

국군 6사단 7연대 공병 중대는 소양교 파괴를 위해 미리 설치된 폭약의 폭파 스위치를 눌렀다. 하지만 포격으로 인해 뇌관과 연결된 선이 끊어지는 바람에 교량을 파괴하지 못했다. 마침내 북한군의 탱크는 소양교를 넘어 춘천 시내로 들어왔고 3일을 버티던 춘천은 결국 북한군에 함락되고 말았다. 춘천에서 퇴각한 국군은 원창고개를 거쳐 홍천 방면으로 후퇴했다. 춘천 전투가 높게 평가받는 이유는 당시 열악한 조건에서도 북한군 제2군단 2사단, 12사단을 맞아 국군이 처음 거둔 승전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춘천을 함락하고 수원을 거쳐 서울을 포위하려던 북한군의 초기 진격전 계획은 이 전투로 인해 무산되었다.

교각에 새겨진 총탄 흔적:
지금도 옛 소양교(지금의 소양1교) 교각에는 6ㆍ25 당시 탄환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70여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총탄 자국은 그대로 남아 당시의 처절한 상황을 웅변한다. 현재 소양강 주변에는 크고 웅장한 여러 개의 다리가 건설되어 춘천의 남과 북을 연결한다. 그에 비교해 편도 1차선 다리인 소양교는 역사의 뒤안길에 가려져 왜소하게 보인다. 하지만 1933년 이래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는 소양교는 그 존재만으로도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 한 가지 아쉬운 건 교각 어디에도 6ㆍ25 전쟁의 흔적임을 말해 주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2부 피스 트레일 - 호수를 따라 걷는 평화의 산책길



포니 대령 기념비


미국 버지니아 페어팩스 출신의 프랭크 포니 대령은 웨스트포인트 출신의 엘리트 군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이기도 한 포니 대령은 미 24사단 19공병단 소속으로 6ㆍ25 전쟁에 참전했다가 1950년 11월 29일 청천강 전투에서 전사했다. 청천강 전투는 1950년 11월 24일부터 12월 2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흔히 중공군 2차 공세라고 부른다. 압록강까지 진격한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예상하지 못한 중공군의 개입을 맞게 된다. 이때 유엔군은 중공군의 전력을 얕잡아 봤고 전략적인 대응에 실패하며 청천강 일대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리고 청천강 전투 한 달 뒤에는 중공군의 위세에 밀려 다시 수도 서울을 내줘야만 했다.

청천강 전투에는 2만여 명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중에는 미 19공병단 프랭크 포니 대령도 있었다. 포니 대령의 이름은 1951년 춘천 소양강 지역의 병참선 유지 등 군수 물자 보급을 위해 건설된 나무다리 ‘포니 브릿지’ 명칭에 부여되었다. 1951년 7월 8일부터 8월 1일까지 미 62건설공병대대가 불과 26일 만에 건설한 이 다리는 길이 573m, 폭은 4.15m였다. 이 다리는 당시 미군 공병 부대가 한국에서 건설한 교량 중 가장 긴 교량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1960년대 초까지 춘천 시민들의 주요 교통수단으로 사용되었다. 1967년 4월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돼 ‘소양2교’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포니 브릿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포니 대령을 기리는 기념비는 최초에 목교가 구축된 장소였던 현재 소양2교 초입에 설치됐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덤불로 덮이는 등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2014년 현재 장소인 소양강 처녀상 옆으로 기념비를 이전하고 포니 브릿지 유래에 관한 기념비를 추가 설치함으로써, 이곳을 찾는 시민들에게 포니 브릿지의 기원과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기억하는 건 우리들의 몫:
1950년~1953년까지 벌어졌던 6ㆍ25 전쟁은 이해 관계자에 따라 그 호칭이 달라진다. 아마도 전쟁에 대한 의미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6ㆍ25 동란, 6ㆍ25 사변 등으로 주로 부르고, 북한에서는 ‘조국 해방 전쟁’으로, 일본은 ‘조선 전쟁’, 중국은 미국에 대항하며 조선을 도왔다는 ‘항미 원조 전쟁’, 그리고 미국은 6ㆍ25를 ‘한국 전쟁’(The Korean War)이라 부른다. 미국 워싱턴 D.C. National Park에 있는 한국전 참전 기념비에 가면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그들이 알지도 못했던 나라, 만나 보지도 못했던 국민들을 지켜 주기 위해 나라의 부름을 받고 응답한 우리의 아들들과 딸들을 존경하며 영예롭게 여긴다.”


6ㆍ25 전쟁에 대한 미국과 미국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너무나도 잘 반영한 문구다. 또한 6ㆍ25 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과 베트남 전쟁 사이에 끼어 잊혔다는 의미로 잊혀진 전쟁(the Unknown War)으로 불리기도 한다. 2차 대전 종전 5년 만에 벌어진 전쟁이라 주변 강대국들 모두 확전이 되면 3차 세계 대전으로 간다는 적지 않은 부담감이 있었다. 따라서 휴전이란 미봉책으로 상황을 빨리 덮으려 했고, ‘베트남 전쟁’처럼 명분도 약하고 치욕적인 패배를 준 전쟁도 아니기에 6ㆍ25 전쟁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리고 미국 워싱턴 D.C 내 한국전 참전 기념 공원도 베트남 참전 기념 공원보다 더 늦게 생겼다.

포니 대령은 산화해 북한 자강도 청천강 유역 어디엔가 유해가 있을 것이다. 그 희생에 감사하며 기념하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은 소양2교의 옛 포니 브릿지 주변에 비석으로 남아 있다. 기억하는 건 온전히 우리들의 몫이다.

에티오피아의 향기


한국과 에티오피아의 인연은 6ㆍ25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티오피아는 6ㆍ25 전쟁에 유엔군을 파병한 16개국 중 유일하게 전투병을 파병한 아프리카 국가다(남아프리카공화국은 공군 비행단을 파병). 에티오피아의 한국전 참전에는 어떤 특별한 사연이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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