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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한의 열두 달 북클럽

이시한 지음 | 비즈니스북스


이시한의 열두 달 북클럽



이시한 지음

비즈니스북스 / 2022년 1월 / 271쪽 / 15,800원





‘처음책’, 최초의 독서에 관해



인생에는 경력직이 없다


인생을 경력직으로 시작하는 사람은 없죠. 누구나 신입입니다. 우리는 매해 새로운 나이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 나이는 우리에게 언제나 처음이에요. 매일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오늘이라는 날짜 역시 사실은 우리 모두 처음 겪는 날입니다. 오늘은 올해의 10월 19일이지만, 내일이 되어 맞이하는 오늘은 10월 20일이겠죠. 그러므로 우리의 오늘은 처음이자 다시는 오지 않을 유일한 날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유니크하고 우리 모두에게 처음인데도, 이상하게 그런 느낌은 잘 들지 않죠. 그건 아마 오늘을 어제처럼 살기 때문인 것 같아요. 반복과 정체가 비슷한 하루를 만들어내서, 타임 슬립에 걸린 것처럼 같은 날이 무한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처음책을 떠올려 보자 / 진짜 처음책


‘처음책’이 혹시 기억나나요? 이 기억을 되살리기 전에 먼저 ‘처음책’이라는 단어는 사전적 정의가 있는 말이 아니라, 제가 제안하는 용어입니다. 사실 여기서 말하는 처음책은 실제로 처음 읽은 책을 찾자는 게 아니에요. ‘자신이 어릴 때 읽었던 책 중에 유난히 기억에 남는 책’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죠. 어릴 때 읽었던 책 중에 가장 앞선 기억에 있는 책을 ‘처음 읽은 책’이라고 해 두자는 거예요.

저의 처음책은 한동안은 제목도 모르던 SF소설입니다. 그 책은 초등학교 때 동네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인데, 굉장히 인상이 깊었고, 무엇보다 공포스러웠어요. 책의 내용은 기억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책의 작가와 제목은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도대체 무슨 책이었을까 찾아보려고도 해봤지만, SF라는 것만 알지 다른 단서가 없다 보니 막막하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절실하지는 않아서, ‘그냥 내용만 기억하면 되지 뭐’라고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최근 유튜브에서 영화를 소개해 주는 채널을 보는데, 바로 그 책의 내용이 나오는 거예요. 너무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영화 정보를 보니, 과연 원작소설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원작소설은 생각보다 너무 가까이 있었더라고요. 그 책은 바로 필립 K. 딕의 『사기꾼 로봇』(집사재, 2004)이고, 이를 영화한 것이 <임포스터>(impostor)입니다.

‘임포스터’라는 제목의 뜻은 (다른 사람 행세를 하는) ‘사기꾼’인데, 이 제목이 줄거리를 암시하죠. 평범한 하루를 시작한 스펜스 올햄은 어느 날 출근을 하다가 납치를 당해요. 그를 납치한 사람들은 정부 비밀기관 사람들로 올햄에게 외계 행성에 온 스파이 로봇이라는 혐의를 씌웁니다. 이 정부요원들은 이야기를 들어 볼 생각도 안 하고 위험한 폭발 장치가 올햄의 몸 안에 있다며 그를 죽이려고만 해요. 특정한 말을 내뱉게 되면 폭탄이 터지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말을 하기 전에 죽여야 한다는 거죠. 올햄 입장에서는 너무나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탈출하는 길을 택합니다.

탈출에 성공한 올햄은 아내와 연락을 해서 자신의 의료기록을 확인해 줄 의사를 찾아 달라고 하지만, 그걸 예상한 정부요원들에 의해 다시 체포당할 위험에 처해요. 결국 외계 행성에 불시착한 우주선 앞에서 마주친 올햄과 정부요원들은 우주선 안에서 올햄의 시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순간 올햄은 “저게 올햄이라면 나는…….” 하고 스스로를 의심하는 말을 하는데, 그 순간 폭발하죠. 제가 어렸을 때 이 소설을 읽고 너무나 인상 깊었던 부분이 바로 이 점입니다. 보통은 주인공과 공감하며, 주인공이 억울한 누명을 벗기를 바라잖아요. 특히 마지막에는 거의 누명이 벗겨졌는데, 알고 보니 주인공이 누명을 쓴 게 아니라 진짜 폭발 로봇이었던 거죠. 자신도 자신이 로봇인 줄 몰랐던 것이고, 자신이 혹시 로봇이 아닐까 정체성을 의심하는 순간 폭발하게 설계되어 있었던 겁니다.

다르게 생각해 보자 / 처음책 다시 읽기


요즘 우리는 개인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개인주의의 전제는 다른 사람은 다 의심스러울 수 있지만, 개인주의의 주체가 되는 자기 자신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기꾼 로봇』은 그런 나 자신조차도 의심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한 번 세운 생각, 한 번 느낀 느낌만을 진실이라고 믿으며 모든 것을 그 잣대로 생각하게 되지만, 사실 언제나 의심해야 하는 게 자기 자신일 수도 있어요. 선입견, 편견 같은 것들을 스스로는 주관, 줏대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자기도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그래서 스스로를 의심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 소설을 보고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A가 보인다고 반드시 A라고 생각하지 말고, 다르게도 생각해 보자’라는 교훈을 어린 저는 깊게 새겨 넣었습니다.

제가 처음책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처음책으로 기억에 남은 책은 강렬한 기억을 여러분에게 심어 주었을 겁니다. 아마 어릴 때이기 때문에 자신의 사고, 감성, 태도, 인성 등에 일정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처음책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고, 처음책으로 기억에 남겨진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지금 자신의 모습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성인이 된 여러분은 지금 책 읽기에 흥미를 가지려고 하잖아요. 그렇다면 어린 시절 기억 속에 있는 처음책을 끄집어내서 다시 읽어 보는 것으로 시작해 보면 어떨까 해요. 사실 꼭 어린 시절에 읽은 책이 아니어도 됩니다. 꽤 강렬한 기억과 인상을 준 책이면 되거든요. 이런 책은 일단 한 번 읽은 것이기 때문에 낯익죠. 처음책으로 보았을 때의 그 감정과 생각이 여전히 생생히 다가옵니다. 그러면서도 ‘어! 이게 이런 뜻이었어?’ 하고 예전에 읽었던 느낌과 다른 지점을 발견하고 놀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시 읽었을 때는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낯선 감각을 발견하게 돼요. 특히 어린 시절 읽었던 어린이 문학을 완역본으로 읽으면 완전히 다른 내용이 다가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어서 흥미롭고 유익한 경험이 될 거예요.



베스트셀러는 왜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시대정신이 담겨 있는 베스트셀러


한 시대를 뒤흔든 베스트셀러에는 보통 그 책이 탄생한 시대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시대정신이 담겼다고 해서 반드시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실은 경험적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꽤 진한 감동과 공감을 느꼈던 책이지만 아무도 몰라 안타까웠던 책도 있을 것이고, 엄청나게 훌륭한 내용을 담은 책이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못해 사장된 예도 있을 것입니다. 또 동시대의 사람들이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다음 시대의 사람들이 뒤늦게 발견한 책도 꽤 있죠. 『변신』을 쓴 프란츠 카프카는 회사원 생활을 청산하고 전업 작가 생활을 하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지만, 그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카프카의 작품은 살아 있을 때 출판된 것이 거의 없거든요. “모든 작품을 불태워 달라.”는 카프카의 유언을 무시한 친구의 결정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카프카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카프카의 책들은 나중에 역주행을 해서 지금은 전 세계 사람이 다 아는 명작이 되었죠. 이전 시대에는 역주행이 일어났다고 하면 대부분 지나간 작가들을 발견하고 평가해 주었던 평론가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대중은 잘 모르는 작가지만, 평론가가 발견하고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과정에서 대중도 그 작품을 알아보기 시작하는 거죠. 하지만 이런 과정이 그저 ‘운’은 아닙니다. 뒤늦게 작품을 발견한 평론가들은 지금 시대에 맞는 정신을 그 작품에서 발견한 것이거든요. 뒤늦게 히트한 작품이 운이 좋아서라기보다는 그 작품이 담고 있는 정신이 공명하는 시대를 만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작가가 살아있을 때 작품이 인정받지 못한 것은 시대를 앞서갔다는 뜻일지 모릅니다.

베스트셀러를 보면 시대를 읽을 수 있다


시대정신을 담고 있고, 시대의 흐름을 대변하는 책은 오래도록 살아남아서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중요한 동력이 됩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책은 그 시대의 흐름과 가치, 관심 혹은 그 시대가 가진 활기를 짐작할 수 있다는 뜻도 됩니다. ‘서울책보고’는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공공 헌책방입니다. 서울시에 흩어져 있는 헌책방들을 모아 복합 편집몰처럼 만든 곳이에요. 저는 얼마 전 서울책보고에서 열린 <그 시절, 그때 베스트셀러전>에 다녀왔어요. 1980년대부터 2010년까지의 베스트셀러 목록과 함께, 거기에 해당하는 헌책들을 전시하고 판매까지 하는 전시였습니다. 그런데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는 것만으로도 한국 사회의 시대상이 어느 정도 보이더라고요.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알게 되는 게 있습니다. ‘어떤 해의 사건에 대한 감각은 그다음 해에 제대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책을 쓰는 데도, 그 책이 대중에게 퍼지는 데도 오래 걸리다 보니, 작가가 책을 쓴 해에 느낀 감각이 대중에게도 침투해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까지는 1년 정도가 걸리더라고요. 예로 1988년 올림픽이 끝난 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게 된 자신감을 느끼려면 1989년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됩니다. 과연 1989년 베스트셀러 1위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입니다. 당시 삼성, LG 등과 더불어 우리나라 재벌 순위를 다투던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 자서전인데요, 올림픽 직후 세계와 경쟁을 해볼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엿보이는 책이었어요.

시대별 베스트셀러를 나열하고 보니까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IMF를 겪을 때 대학에 들어갔던 학생들이 졸업할 무렵인 2003년이었습니다. 베스트셀러 목록에 토익 관련 책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그 후로는 토익 책이 빠지지 않더라는 거죠. 심지어 2009년에는 베스트셀러 20위 안에 해커스의 토익 책만 네 권이나 포함되었어요. 취업난의 자취가 베스트셀러 목록에서도 묻어났습니다.

지금 우리의 관심을 보여 주는 책들


2020년을 뜨겁게 달군 책 중 하나가 『파타고니아,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입니다. 파타고니아라는 기업의 경영 철학을 담은 이 책은 유튜브가 띄운 책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많은 유튜버가 소개했어요. 이 책은 기업을 만들고, 운영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인데, 보통 기업들의 성공 스토리는 그 가운데 열정, 기회, 노력, 교훈 같은 것들이 들어 있지만, 이 책에는 그런 것들이 아닌 ‘가치’가 들어 있어요.

파타고니아는 한 등반가가 자신이 쓸 등반 장비를 직접 만들기 위해 고철상에서 화덕과 모루, 해머 등 대장간 장비를 구입한 데서 시작했습니다. 독학으로 대장간 일을 익힌 그는 자연을 파괴하고 해를 끼치는 등반 장비가 아니라, 조금 더 효율적이면서도 자연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등반 장비를 개발하고 자신이 직접 사용합니다. 겨울에는 장비를 만들고 봄, 여름, 가을에는 요세미티나 알프스 같은 데서 등반을 하죠. 그 기간에 자신이 만든 장비들을 팔아서 생활자금을 마련해요. 이 사람이 바로 파타고니아의 설립자 이본 쉬나드입니다. 그는 등반 장비를 파는 사업을 본격화할 때도 사업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등반가들에게 필요한 장비를 만들어 나눈다는 생각으로 접근했어요. 자연에 상처를 내서는 안 되고, 쓰기에 편해야 하며, 무엇보다 최고의 품질로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죠. 등반가인 자신이 쓸 것을 만들었으니, 다른 등반가들에게도 이 장비들은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류 사업에 손을 댈 때도 마찬가지로 등반할 때 입을 옷이 필요해서, 그 필요에 맞춰 옷을 만든 거예요.

이본 쉬나드는 스스로를 사업가라고 생각하지 않고 등반가, 서핑하는 사람, 스키를 타고 카약을 타는 사람 혹은 대장장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사업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연을 즐기는 데 필요한 장비를 만들고, 그것을 비슷한 사람들과 나누려고 사업을 한 거죠. 이런 생각으로 만든 제품은 소비자에게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이본 쉬나드는 딜레마에 빠지게 돼요. 그야말로 ‘왜 자꾸 사업이 잘되는데?’가 된 거죠. 그즈음 자신이 왜 사업을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비로소 자신이 사업하는 이유를 확고하게 정하게 됩니다. 그건 바로 환경에 대한 책임과 지속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한 본보기가 되겠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파타고니아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됩니다.

파타고니아의 철학은 필요한 기능이 갖추어진 최고의 제품을 환경을 해치지 않고 만들며, 벌어들인 이윤은 환경을 보호하고 살리는 데 쓰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지구가 목적, 사업은 수단’인 거죠. 그래서 이윤추구가 목적인 기업과 행보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어요. 이것이 많은 사람이 파타고니아를 사랑하고 믿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파티고니아,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은 단순히 유튜브에 자주 나와서 히트한 것이 아니라, 그런 계기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이 책을 본 사람들이 지금의 시대정신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에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입니다.



고전이 고전인 이유



고전이 고전인 이유 / 해석의 여지가 많다 / 인간의 본질을 다룬다


고전은 시대를 뚫고 살아남아 오늘의 우리 앞에 우뚝 선 책들을 말합니다. 무조건 오래되었다고 고전이 아니라, 시대마다 유용하게 읽힌 책이 고전이라는 거죠. 그러면 도대체 어떤 책들이 시대의 풍파에 상하지 않고 살아남아 지금 여기에 존재할까요. 책마다 상황이 달라 일반화하긴 힘들지만, 두 가지 특성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특징은 애매모호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은유나 상징이 많아 해석이 다양할 수 있다는 뜻이죠. 시대가 변함에 따라 고전은 다양한 해석을 덧입게 됩니다. 바꿔 말하면, 시대가 바뀌어도 달리 해석되면서 사람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책이 고전인 것이죠.

『어린 왕자』는 감성적인 그림체, 작가인 생텍쥐페리의 베일에 가려진 죽음 등 여러 가지 요소로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내용이죠. 소행성 B-612에 살던 어린 왕자가 자신의 장미와 다투고 여러 별을 떠돌다가, 지구까지 와서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인데, 『어린 왕자』는 처음부터 우화적으로 쓰인 이야기인 데다가 내용도 비현실적인지라 그야말로 여러 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죠. 특히 마지막에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로 돌아가는 방법으로 맹독을 가진 뱀에게 물리는 방법을 택하는데요, 저는 그게 꼭 자살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비록 어린 왕자는 “내가 죽은 것처럼 보일 거야. 하지만 그게 아냐.”라고 말은 하지만요. 자신의 별에 돌아가기 위해 몸까지 가져갈 수는 없어 정신만 가져간다는 것은, 육신을 입고 지구에 온 인간들이 육신을 벗고 신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종교적 설정을 연상시켰습니다. 이 마지막 장면만 가지고도 “내 생각은 달라.”라고 할 분이 많을 겁니다. 한편 『어린 왕자』는 보통 사람 관계에 대한 이야기,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말랑말랑한 이야기로 읽히지만, 사실 초반부에는 사회풍자적인 요소도 많습니다. 어린 왕자는 지구에 도달하기 전에 여섯 개의 별을 지나는데, 그중에는 정작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는 왕이 있는 별도 있고, 별의 수를 세면서 그 별이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사업가도 있어요. 별을 소유한다면서 자기 서랍에 예금만 해놓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냐고 어린 왕자가 핀잔을 주죠. 세 발자국만 걸으면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작은 별에서 가로등을 켜는 사람은 금방 낮과 밤이 바뀌기 때문에 30초 단위로 쉴 틈 없이 가로등을 껐다 켜야 하는데요, 어린 왕자는 이 사람은 그래도 남을 위해 일하니, 왕이나 사업가에 비하면 나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이야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를 쓴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때죠. 몰락한 왕이 실제로 존재했고, 대공황 이후이기도 해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은 심각했었죠. 따라서 어린 왕자의 앞부분은 당시 사회에 대한 풍자로 읽어도 크게 무리는 없어요. 지금은 이런 의미는 간과된 채 사랑받는 책이지만, 이 메시지는 시대가 바뀌어도 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꼭 자본가가 아니더라도 이 이야기 속 사업가처럼 의미 없는 짓을 반복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거든요. 자기 충족적인 연구만 하면서 학문의 진보라고 떠드는 학자, 국민의 뜻을 들먹이며 자기의 뜻대로만 하는 정치인 등에 대한 은유로 해석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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