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엽기인물 세계사
호리에 히로키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엽기인물 세계사
호리에 히로키 지음
사람과나무사이 / 2021년 11월 / 316쪽 / 17,500원
우리가 미처 몰랐던 ‘두 얼굴의 위인’ 이야기
힌두교 성인이 되고자 애썼으나 성욕의 포로가 돼버린 간디
비폭력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간디가 자기 가족에게는 폭력을 일삼았다고?: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위인이다. ‘마하트마’는 인도의 위대한 시인 타고르가 존경의 뜻을 담아 지어준 이름으로, ‘위대한 영혼’이라는 의미의 산스크리트어다. 간디는 어떻게 이 특별한 호칭을 얻을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그의 두 가지 업적이 배경이 되어주었다. 하나는 100년 가까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가 독립국이 되는 데 그가 크게 이바지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이 업적이 ‘비폭력주의’를 일관되게 관철하며 이루어낸 성과라는 점이다. 간디는 독보적인 업적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하지만 간디의 삶 속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가 보면 그의 내면과 외양, 그리고 사상과 행위 사이에 심각한 모순이 발견된다. 특히 비폭력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그가 자기 가족에게 오히려 폭력적인 모습을 뚜렷이 드러내곤 했다는 대목이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다.
위대한 사상가나 정치가라기보다는 힌두교 성인이 되고자 애쓰다가 미묘한 차이로 실패한 인물, 간디: 간디는 제국주의 영국에 맞서 싸우며 억압받는 인도인의 자유와 평등을 일관되게 추구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한편으로 인도의 전통적 신분제도를 옹호하고 고집했다. 간디는 독실한 힌두교도였다. 힌두교에서 인간은 ‘브라만(사제)’, ‘크샤트리아(왕족과 무사)’, ‘바이샤(평민)’, ‘수드라(노예)’ 네 가지 카스트로 구분되며 이 제도는 완벽하게 세습되었다. 여기에 더해 ‘달리트’라는 불가촉천민이 있다. 간디 집안은 평민인 바이샤 계급에 속했다. 참고로, 수드라 이하의 사람이 인도 전체 인구의 85퍼센트 수를 차지한다. 인도에서 세습신분과 직업문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그러므로 카스트의 해체는 인도사회와 전통문화의 해체를 의미한다. 간디는 이러한 상황을 우려했다. 실제로 간디는 매우 보수적인 사상가였다. 또한 그는 이중적인 모습도 드러냈다. 예컨대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는 불가촉천민과의 결혼을 권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기 아들이 신분이 낮은 이슬람교 여성과 결혼하려고 하자 완강히 반대했다. 이것은 그가 힌두교라는 전통적 가치관을 지나치게 중시해서 생긴 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간디를 위대한 정치가나 사상가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는 힌두교 성인이 되고자 애쓰다가 미묘한 차이로 실패한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지자와 친척의 아내, 심지어 조카의 아내와도 알몸으로 동침한 간디: 실제로 간디는 성자가 되고자 절대금욕을 유지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1882년 그는 열세 살 나이에 동갑내기인 카스투르바와 중매로 결혼했다. 성욕이 가장 왕성한 시기를 아내와의 잠자리로 나름대로 욕구를 해소하며 지낸 간디는 열여덟 살 이른 나이에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열여덟 살 간디는 어느 날 갓 태어난 아들과 아내를 두고 홀연히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영국은 금욕주의가 대세였기에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분방한 성생활과 영국인 삶 사이에 위화감을 느꼈다. 젊은 시절 금욕으로 애태우던 간디는 성욕이 한풀 꺾인 서른일곱 살이 되었을 때 ‘성관계를 하지 않겠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물론 이는 아내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훗날 간디는 한 지지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제 아내는 (성적) 욕망의 대상이었을 때는 열등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제 곁에서 알몸으로도 여동생처럼 잠잘 수 있게 되면서 더는 열등한 존재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자기 입으로 이렇게 단언했으니 부부간 섹스를 더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만년의 간디와 함께 잔 사람은 아내가 아니라 간디의 개인비서의 여동생이자 의사로서 간디를 간호한 수실라 나야르였다. 한데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간디가 그 외에도 어린 소녀, 지지자, 친척의 아내를 포함한 여러 여성에게 알몸 동침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간디는 혼자서는 추워서 잘 수 없다는 이유로 조카의 아내인 아바라는 여성의 옷까지 벗겨 한 이불에 들었다. 졸지에 아내를 빼앗기게 된 조카가 황급히 말했다. “몸을 데울 생각이시라면 아내 대신 제가 함께 자겠습니다.” 그러나 간디는 조카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간디는 왜 주위 여성들에게 자신을 ‘어머니’라고 부르게 했을까?: 오랫동안 간디와 알몸으로 같이 잔 소녀 마누는 “엄마랑 같이 자는 게 뭐가 문제야?”라고 오히려 반문했다. 간디는 주위 여성들에게 자신을 ‘어머니’라고 부르게 했다. 간디의 ‘절대금욕’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성욕을 절제하라는 힌두교 교리를 충실히 따르고자 했던 그는 자신의 남성성을 굴복시킴으로써 자신을 여성화, 양성구유화하고자 했다고 한다. 밤마다 시달리던 오한을 핑계 삼아 알몸 여성과 함께 자면서 그것을 성욕 제어 훈련 또는 제어하지 못한 욕구에 대한 속죄의 고통의식이라고 변명하는 논란을 일으키고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이쯤 되면 우리는 ‘간디의 위대함을 과연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하는 난감한 생각마저 든다. 여러 면에서 그는 베일에 싸인 ‘수수께끼의 인물’이자, 종교적 성인과 세속적 정치가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입체적이고도 기묘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가 역사적 위인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진짜 비결은 어쩌면 수많은 민중의 시선을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시킬 수 있었던 희귀한 재능에 있었던 게 아닐까.
밤에는 연인에게 애교를 부리고 낮에는 연인의 뺨을 때린 무서운 여자 엘리자베스 1세원조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스페인을 뛰어넘어 잉글랜드를 최강대국으로 만든 걸출한 여제 엘리자베스 1세: 오래도록 유럽 변방의 ‘북쪽 섬나라’에 지나지 않았던 잉글랜드는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 여왕 시대에 이르러 전 유럽을 호령하는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하던 시대에 전 세계를 통틀어 최강대국으로 군림하던 나라는 스페인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하면 우리는 영국을 떠올리지만 사실 ‘원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는 스페인일 정도로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대륙 발견 이후 스페인은 한동안 경쟁국이 없을 정도의 막강한 패권을 휘둘렀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를 어떻게 스페인을 뛰어넘는 막강한 나라로 만들 수 있었을까? 엘리자베스 1세는 앞선 잉글랜드 군주들이 범죄자로 엄격히 단속하던 해적 일당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적극적으로 활용할 정도의 예리한 판단력과 과감한 결단력으로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격파하고 제해권을 장악했다. 엘리자베스 1세 당시만 해도 군주란 신에게 선택받은 특별한 존재로 막강한 힘을 지닌 절대 권력자였다. 그녀는 남성 군주가 일반적이던 당시 여성 군주로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신중하게 생각한 뒤 차근차근 그러나 집요하게 목표를 실현해 나간 걸출한 여장부였다.
지독한 구두쇠인 엘리자베스 1세의 옷장에 6,000벌이 넘는 호화로운 드레스가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고?: 엘리자베스 1세는 스물다섯 살 나이에 왕위에 올라 평생 동안 ‘처녀 군주’로 통치했다. 그녀가 성적으로 순결한 상태는 아니었겠으나 죽는 날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많은 우여곡절과 시련 끝에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에게 국내외 왕족과 귀족들로부터 혼담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귀족 남성들은 그녀의 막대한 재산 ‘여왕의 남편’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국가를 통째로 주무를 수 있다는 흑심을 품고 접근했다. 영리한 엘리자베스 1세는 혼담이 들어오는 족족 매몰차게 퇴짜를 놓았다. 그녀는 풍부한 감성 이상으로 날카로운 이성과 냉철한 판단력의 소유자였기에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처녀 군주’로 살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훗날 엘리자베스 1세는 많은 연인을 두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즉흥적 감정에 이끌린 선택이 아닌, 치밀한 계산 끝에 맺은 냉철한 관계였다. 또한 그녀는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 탓에 차츰 욕구불만이 쌓였고, 그러한 욕구불만을 다소 도발적인 취미생활로 발산하기도 했다. 그녀는 상반신을 덮은 부분이 좌우로 벌어져 있어 가슴과 배가 슬쩍슬쩍 드러나는 옷을 입고 공식 석상에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당시 귀족 여성들은 몇 번 입은 드레스를 시녀들에게 하사하곤 했는데, 구두쇠였던 엘리자베스 1세는 단 한 벌도 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의 옷장에는 6,000벌이 넘는 호화로운 드레스가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밤에는 여느 여자들처럼 연인에게 애교를 부리고 낮에는 거침없이 연인의 따귀를 때리는 ‘무서운’ 여자: 한편 엘리자베스 1세는 남성적 매력을 물씬 풍기는 잘생긴 남자를 특히 좋아해서 총애하는 연인에게 통 크게 인심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열렬한 사랑을 요구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남성 취향은 ‘강하고 나쁜 남성’에 가까웠다. 그녀는 낮에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밤에는 여린 모습을 보여주는 반전 매력의 소유자였다. 연인과 단둘이 있을 때는 응석을 부리기도 하고 달콤한 말로 속삭였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 남자가 애인 행세를 할라치면 격노해서 거침없이 그의 따귀를 때리고 망신을 주었다. 총신이자 연인이던 에식스 백작의 경우 엘리자베스 1세에게 손찌검 당하는 장면이 여러 번 사람들에게 목격되기도 했다. 또한 에식스 백작이 전쟁터에서 무모하게 지휘한 점이 빌미가 되어 반역자로 몰리게 되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끝내 그를 구해주지 않았다.
에식스 백작이 처형당해 비어 있던 여왕의 옆자리는 월터 롤리 경이 채웠다. 롤리 경은 과감히 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간 탐험가이기도 했는데, 이런 부류의 남자가 흔히 그렇듯 그는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으며 제 잘난 맛에 사는 전형적인 ‘나쁜 남자’ 유형에 속했다. 롤리 경은 엘리자베스 1세의 총애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여왕이 아끼는 시녀를 건드려 아이가 생기자 서둘러 결혼하는 스캔들을 일으켰다. 당연히 여왕은 크게 분노해 시녀는 면직하고 롤리 경은 투옥시켜버렸다(그러나 그는 롤리 경에 대한 미련이 남았는지 나중에 관계를 회복했다). 이처럼 쉬지 않고 연애를 즐긴 ‘처녀 왕’ 엘리자베스 1세였지만 정작 연인과 분위기가 무르익어 침대에 드는 순간이 되면 히스테리와 경련 증상을 일으켰다고 알려져 있다. 어쩌면 엘리자베스 1세는 자신이 말한 대로 ‘국가와 결혼’ 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고 이상적이었던 게 아닐까.
인간에게 가장 잔혹했던 인간들 이야기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 야만적 행위, ‘마녀사냥’마녀사냥으로 처형당한 사람 수가 많았던 나라일수록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을 버리고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는 사람이 많았던 이유: 중세 유럽에서는 페스트와 천연두 등 치사율이 높은 감염병이 주기적으로 창궐해 그때마다 대규모 사상자가 나왔고 때로는 흉작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기도 했다. 어제까지 멀쩡히 살아 돌아다니던 가족이나 이웃이 갑자기 죽어가는 현실을 마주한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이유를 따져 묻고 싶었고, 죽음의 공포를 마주하는 인생에 대해 ‘왜?’라는 의문을 품었다. ‘병원성 세균이 질병을 일으킨다’라는 사실이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 박사 연구팀에 의해 밝혀지고 대중에게 받아들여진 것은 19세기 중반이 지나서였다.
중세인은 ‘악마와 계약을 하거나 성교를 해서 무시무시한 힘을 얻게 된 마녀나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이단‘이 기독교 공동체에 은밀히 숨어들었기 때문에 천벌이 내려 재앙이 일어났다’라는 억지 논리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 공동체에서 배척당하거나 소외당하는 사람이 사냥감이 되고 산 제물이 되어 합법적으로 처형되는 마녀사냥이 이루어졌다. 15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유럽 각지에서 ‘마녀사냥’이 맹위를 떨쳤다. 특히 1580년 무렵부터 1650년까지 마녀사냥이 가장 극렬했다. 흥미롭게도 마녀사냥으로 처형당한 사람 수가 많은 나라일수록 16세기에 절정에 이른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을 버리고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마도 걸핏하면 마녀사냥에 나서는 가톨릭 신앙으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깨달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마녀로 몰려 처형되는 사람 중 왜 50~60대 여성이 많았을까?: 1630년대 후반 독일의 지크부르크 지방의 사형수 명부를 보면 당시 독일에서는 대략 2,000명 중 3명 정도가 마녀로 처형되었다. 1636년 7월 24일 지크부르크라는 평범한 중소도시에서 쿠니군데 모이러라는 여성이 마녀로 체포되었다. 당시 누군가를 마녀로 체포하려면 그 전에 마녀에 대한 밀고를 받은 당국이 본격적으로 조사를 해야 했다. 당시 그녀에게는 ‘성서를 갖고 있지 않았다’라는 사유가 붙었다. 독실한 신자가 아니었다지만 고작 그 정도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투옥된 것이다. 투옥된 후 그녀는 가혹한 고문을 받고 그로부터 두 달쯤 지난 9월 16일에 처형되었다. 사람들에게 ‘마녀를 처형해 악의 싹을 도려냈으니 안심하라’는 것을 내보이기 위해 속전속결로 판결과 집행이 이루어졌다.
마녀 심문에는 정해진 절차가 있었다. 심문 과정에서 마녀라고 자백하든 부인하든 고문을 피할 수는 없었다. 또한 마녀로 지목된 여성을 물에 빠뜨려 물 위로 떠오르면 마녀로 판명하는 황당한 방법도 사용되었다. 결국 마녀로 고발당해 체포된 사람은 어떻게 하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죽을 수 있을지를 궁리하는 게 최선이었다. 체포된 후에는 가택수색이 이루어졌고 주술의 흔적으로 보이는 물건이 거의 예외 없이 발견되어 마녀로 단정되고 법원에서 사형(일반적으로 화형) 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된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엄청난 속도로 처형까지 일련의 과정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마녀로 몰려 처형되는 사람은 50~60대가 많았는데, 주로 노인층이나 사회적으로 고립된 소외 계층 여성이 손쉬운 표적이 되곤 했다.
1636년 당시 독일은 30년 전쟁 후반기를 맞아 사회 전체가 말할 수 없이 피폐해진 상황이었다. 그 무렵 스웨덴 등의 외국 군대가 독일을 침공해 서민들 사이에 ‘말세가 도래했다’며 불안감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어쩌면 사람들은 힘든 세상을 탓하며 원망할 대상을 찾았고 그 모든 원인을 마녀의 탓으로 돌리며 한풀이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독일 예수회 소속 프리드리히 슈페 신부는 1631년에 펴낸 『재판관에게 경고하다』라는 책에서 마녀재판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예수회 내부인이 마녀사냥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규탄했다는 사실이 대중 여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슈페 신부의 책에 따르면, 마녀가 줄줄이 발견되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마녀로 판정받은 사람에게 “네 동료는 누구인가? OO라는 여자를 아는가?” 식으로 추궁하는 심문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네, 그 여자도 마녀입니다”라는 자백이 나올 때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이 가해졌다. 그런데도 조서에는 “강압적 심문 없이 자발적으로 털어놓았다” 등의 거짓 진술이 기록되었다. 교회가 마녀재판의 폐해를 바로잡은 것은 슈페 신부가 선종한 후 크리스티안 토마지우스라는 기독교 법학자의 열정적인 호소를 받아들이고 난 뒤의 일이다.
‘성’과 ‘사랑’을 도구로 부와 권력을 쟁취하려 분투한 사람들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