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르파티
이주향 지음 | 맥스미디어
아모르파티
이주향 지음
맥스미디어 / 2020년 10월 / 296쪽 / 15,000원
1장 청춘을 짓누른 것은 청춘이었으니
그가 사라진다면 우주가 낯설 거야! 제대로 발현된 열정은 우리를 살맛나게 하지만 제대로 숨 쉬지 못하는 열정은 우리를 시들게 하고 병들게 합니다. 빛났던 시간의 그림자와 대면하게 해준 작품이 『초원의 빛』이었다면, 빛났던 시간의 그림자에 사로잡힌 병든 영혼의 춤을 그린 작품은 『폭풍의 언덕』입니다.
그런데 폭풍의 언덕 위 언쇼 가(家)의 여주인은 누구일까요? 캐서린과 힌들리의 어머니가 있었을 텐데 작품에는 그 존재감이 거의 없습니다. 아버지가 불쌍한 고아를 집으로 데려와 키울 만큼 따뜻하고 여유 있는 사람이라 해도 어머니의 존재감이 없다는 것은 중요한 상징이지요? 바로 여성성의 부재입니다. 왜 언쇼 가(家)의 아들 힌들리가 히스클리프를 향한 질투와 증오를 소화해내지 못하고 언덕 위의 바람을 그대로 맞아야 했는지 이해되는 대목입니다. 바로 그를 감싸 안아주는 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성성의 부재가 만들어내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있습니다. 그 허기에 시달리는 영혼이 추게 되는 비극의 춤이 바로 『폭풍의 언덕』의 주제 아닐까요?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은 역시 히스클리프입니다. 부모 없이 떠도는 아이였던 그는 언쇼의 배려로 어느 날부터 바람 부는 언덕에서 살게 되고, 언쇼의 딸 캐서린을 만나 둘도 없는 친구가 됩니다. 두 사람은 말을 타거나 뛰거나 함께 언덕을 누비고, 함께 놀고, 함께 상상하면서 사랑이라 이름 붙일 필요도 없는 사랑을 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심심할 때나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그들이 가서 노는 큰 바위 언덕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들은 평범한 소녀이고 평범하지도 못한 소년이지만, 거기서 그들은 왕자이고 공주입니다. 캐서린이 말합니다. “네가 얼마나 멋있는지 모르지? 너의 아버지는 중국의 황제, 너의 어머니는 인도의 여왕, 너는 나쁜 뱃사람에게 납치되어 영국으로 흘러들어온 왕자야. 저기 너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성이 있어!”
멋쩍은 히스클리프가 저건 그냥 바위라고 대답하자 소녀가 진지하게 대꾸합니다. “만약 저곳이 바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면 너는 절대로 왕자가 될 수 없어!”
캐서린, 참 당차고 현명한 소녀지요? 규율이 되는 도덕도, 매너도, 관심 어린 시선도, 체계적인 교육도 받아본 적 없는 히스클리프와 함께 거친 자연을 누비는 캐서린은 자연에서 배우는 히스클리프에게 은유를 가르쳐준 멋진 문학 선생님입니다. 서로를 의지하며 서로의 세상이 된 두 사람에게는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소중한 영역이 있습니다.
사람은 대부분 자기를 따라다니는 집안이나 직업이나 부나 명예에 의해 자아 팽창이 이루어지거나 기가 죽습니다. 그런 껍데기 자아는 속살을 보호하려면 어쩔 수 없지만, 그것밖에 없다면 상식과 편견이 사는 것이지 자기가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지요? 껍데기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자기만의 소중한 영역이 있고, 거기서 누구도 망가뜨릴 수 없는 소중한 꿈을 꾸는 사람만이 상식을 넘어 자기 삶을 살 수 있으니까요.
바람 부는 언덕 위의 집에서 외로웠던 히스클리프는 자유로운 캐서린과 함께여서 좋았지만 히스클리프가 좋아진 만큼 모질어진 소년이 있습니다. 바로 캐서린의 오빠 힌들리입니다. 내 젊은 날 그는 연민조차 생기지 않는 찌질남이었는데, 이젠 이해가 잘 되네요. 엄마 없이 자란 그가 이번에는 굴러들어온 돌에게 하나밖에 없는 누나를 빼앗겼으니 생각이 깊어질 새가 없었던 어린아이가 얼마나 상처를 입었겠습니까.
병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힌들리는 가장이 됩니다. 가장이 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히스클리프를 가족이 아닌 하인으로 격하시킨 일이었습니다. 히스클리프를 향한 질투와 증오를 힘으로 표출한 것이지요. 히스클리프는 힌들리에게 모욕당하며 허드렛일이나 하는 하인이 되었습니다. 그 나이에 받아야 할 교육도, 익혀야 할 매너도 배우지 못한 채 집에서 마구 기르는 짐승 취급을 받으면서도 히스클리프가 그 집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캐서린 때문입니다.
히스클리프에게 캐서린은 단순한 연인이 아닙니다. 그에게 캐서린은 살아온 이유이자 살아갈 이유였습니다. 어쩌면 그 누구로부터 존중받아본 적 없는 외로운 그에게 늘 곁을 지키며 좋은 친구가 되어준 명랑한 캐서린이 가을 햇살처럼 스미고 가을바람처럼 감기게 된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들의 사랑이 마음 담을 노력 없이 마음이 담기고 의지를 낼 필요도 없이 지향성이 생기는 거침없는 사랑이 된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소녀 시절을 몽땅 함께 보내며 둘만의 세계를 일구어온 캐서린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의 이 고백을 기억하십니까? “만일 모든 것이 없어져도 그가 살아 있다면 나는 살아갈 거야. 하지만 모든 것이 남고 그가 사라진다면 이 우주는 아주 낯설어질 거야.”
그랬던 캐서린이 전부를 걸고 전부를 요구한 가난한 히스클리프의 사랑을 외면하고 너그럽고 부유한 신사 린튼과 데이트를 시작한 것입니다. 히스클리프의 관점에서는 배신이었겠지요? 히스클리프는 에드거의 조건에 혹해 자기를 부담스러워 한 캐서린의 배신에 이를 악물고 떠납니다. 히스클리프가 사라진 시간, 캐서린은 에드거와 결혼하지만, 사랑을 잃어버린 캐서린은 시름시름 죽어갑니다. 결국 히스클리프는 부자가 되어 돌아오지만, 세상에, 복수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돌아온 히스클리프가 죽어가는 캐서린에게 쏟아놓은 사랑의 말들은 『폭풍의 언덕』의 절정입니다.
“왜 당신은 나를 멀리했소? 왜 당신은 자기 마음을 배반한 거지? 어떤 말도 나에게는 위로가 안 돼! 당신은 이런 꼴을 당해 마땅해. 당신이 당신 마음을 죽인 거니까……. 당신은 나를 사랑했소. 그런데 무슨 권리로 나를 버렸지? 불행도 타락도 신도 악마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었는데……. 내가 살고 싶은 줄 아시오? 나는 건강한 만큼 불행하오!”
전부를 걸고 전부를 요구한 사랑, 무섭지 않나요? “나는 건강한만큼 불행하오”라는 히스클리프의 진실, 그것은 탈대로 타지 못한 열정의 말이지요? 탈대로 다 타지 못한 열정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변하는데, 변화를 따라 흘러가지도 못하고 넘어가지도 못하는 시간, 그래서 나이가 드는데도 멈추어 있는 시간 말입니다. 캐서린이 죽고 나서 아무리 나이 들어도 성숙하지 못하는 히스클리프의 시간처럼. 그의 시간은 캐서린의 죽음에서 멈추어 있습니다.
만나지도 못하고 망각하지도 못하는 사랑의 고통이 사랑의 결과가 아니라 집착의 결과라고 해도 어찌할까요? 충분히 애착의 시간을 누리지 못한 집착이 삶을 파괴하는 것은 멈출 수 없으니.
2장 아모르파티,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아모르파티, 그 운명을 사랑하게 되기까지 우연히 박선영 SBS 전 아나운서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화려하게 포장해주었던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그만둔 이유가 귀를 열게 하네요. “일 이외에는 나를 설명하는 것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어느 순간, 바닥을 긁어가며 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지금이 아니면 용기 내지 못할 것 같아서 사표를 냈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를 알아가고 ‘나’를 찾아가겠다는 그녀의 말에서 나는 그녀의 심지를 본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바닥을 긁어도 타지 않는 마음의 중심 말입니다.
사회적으로 보장된 화려한 자기를 벗어버리는 일은 용기고, 어리석음입니다. 누구에게나 용기는 어리석음과 결합합니다. 어쩌면 어리석음은 세상의 문법이 아닌 ‘나’의 문법이고, ‘나’의 문법으로 세상을 배우며 살고자 하는 자의 몸부림일 것입니다. 그 몸부림 없이 ‘나’의 세상은 열리지 않는 것이지요.
<라이언>이라는 영화, 보셨습니까? 거의 실화 그대로가 담긴 영화라고 합니다. 영화가 한 일은 한 청년의 인생을 그대로 담은 것입니다. 종종 인생이 그 자체로 영화니까요. 주인공 사루는 마음만 먹는다면 누릴 수 있는 것을 모두 누릴 수 있는 엘리트 청년입니다. 좋은 가정에서 자라 좋은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부모만큼이나 좋은 연인을 만나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꾸리고 좋은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으련만, 그런 삶이 보장될수록 사루는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몸부림칩니다. 마음은 그가 어렸을 적에 길을 잃은 인도에 가 있습니다.
사루는 인도 태생입니다. 다섯 살 때 기차역에서 형을 잃어버리고 빈 기차에 올라 2박 3일 동안 어디론가 이동했고 엉뚱한 곳에서 고아가 된 바람에 호주로 입양되었습니다. 그를 입양한 호주 부모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이어서 그는 부족한 것 없이 성장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잃어버린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움이 그를 미친 듯 떠돌게 했습니다. 그의 방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연인에게 그는 이런 절규의 말을 던집니다.
“진짜 엄마와 형이 날 찾고 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아? 형이 얼마나 내 이름을 부르고 있을까. 그런데 나는 두 발을 뻗고자, 그게 구역질 나!”
‘나’를 알아가기 위해 꼭 알아야 하는 사람들, 그 식구들을 찾지 못해 그는 방황하고 마침내는 그를 잘 키워준 호주 엄마에게까지 그 방황을 들키고 맙니다. 그와 만토쉬를 입양한 호주 엄마와의 대화가 찡합니다. “엄마의 불임이 안타까워요. 우리가 백지 상태로 온 것이 아니잖아요. 엄마가 낳았으면 달랐을 텐데, 우리가 엄마를 괴롭히는 기분이에요.” “나는 불임이 아니었어. 세상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아이를 낳는 게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차라리 힘든 아이들을 거두어 살아갈 기회를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지.”
참 좋은 엄마지요? 이 엄마, 어떻게 이렇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녀는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습니다.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뒷마당으로 달아났던 열두 살 소녀는 어느 날 지진이 일어나 땅이 자기를 삼켰으면 하는 기도를 하는데, 그때 환상을 봅니다. 들판을 지나가는 갈색 아이들이었습니다. 번개처럼 강한 충격과 함께 행복한 느낌이 밀려왔다고 했습니다. 그 감정이 어려움 속에 있는 그녀를 믿게 하고 어려움 속에 있는 아이들을 돌보게 한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그녀와 뜻을 함께하는 남편을 만나 그는 인도 아이 둘을 입양했고, 키우는 것이 쉽지는 않았어도 아이들과 함께 행복했습니다.
그런 엄마와의 인연도 ‘나’의 방황을 멈추게 하지는 못합니다. 방황은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모르면서 내 자리를 찾으려는, 어찌 할 수 없는 몸부림, 어리석은 몸부림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나’를 알아가는 징검다리니까요. 호주 가정에 함께 입양된 만토쉬는 평소에는 착하기 그지없는데, 조그마한 자극에도 화가 폭발하고, 마약을 끊지 못합니다. 그렇게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는 고립되어 있습니다.
생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물음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와 같은 물음입니다. 사두는 자기를 던져 자기가 나온 자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반면 만토쉬는 그 물음 앞에서 좌절한 것 같습니다. 그런 물음을 포기하고 주저앉으면서 만토쉬처럼 자해하게 되거나 신경증에 걸리게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루는 엄마가 돌을 깨는 일을 했다는 기억을 토대로 마침내 가족을 찾아냅니다.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이사조차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늙어간 인도 엄마는 기적처럼 찾아온 아들을 단박에 알아보고는 번개 맞은 것처럼 놀랐고, 바다처럼 깊은 행복을 느꼈다고 합니다.
신기하지요? 찾았다고 함께 살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잘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비로소 발 뻗고 잘 수 있고 거칠 것 없이 살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있다는 것이 말이지요. 우리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자리인가 봅니다. 잃어버린 가족을 찾고 나서 사루의 당연한 말이 인상적입니다. “그분을 찾았다고 엄마의 의미가 바뀌지는 않아요. 사랑해요, 엄마 아빠, 그리고 만토쉬도!”
찾았기 때문에 기존의 관계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관계를 돌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제 자기 삶을 살 수 있고, 마음을 붙이고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삶에서 내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갈 수 있어야 그 때문에 버려졌던 것들을 돌볼 수 있습니다.
3장 영혼의 지도를 사랑하는 사람들
바주데바, 경청하는 자 그 작가는 창문만 열면 펼쳐지는 정경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산 밑의 정원 같은 넓은 뜰이 마치 집에 딸린 마당 같았으니까요. 그래서 얼른 그 집을 계약했습니다. 그 집에서 조용히 살다 보면 도시에서 받은 상처까지 말끔히 아물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사 오자마자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처음 보는 순간부터 마음에 들어했던 그 공간은 그만 좋아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동네 아이들이 매일 거기 와서 놀았습니다. 그 집은 조용하지 않았고, 그는 조용히 거할 수도, 작업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기분 좋게 노는 아이들에게 소리를 질러 내쫓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는 아이는 다섯. 그는 아이들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하며 천 원씩 주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여기 와서 이렇게 즐겁게 노니, 아저씨가 행복하구나. 과자 사 먹어라!” 그저 노는 것인데 돈까지 생기니 아이들은 이게 무슨 횡재냐며 좋아했습니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다음 날도 아이들은 그렇게 천 원씩 받았습니다. 아이들은 차츰 노는 것보다 돈 받는 일을 더 좋아했습니다.
일주일을 그렇게 한 뒤 작가는 더 이상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아저씨가 잊어버렸을 거라며 창가 바로 밑에 와서 더 크게 놀았지만 그는 내다보지도 않았고, 아이들은 돈 받는 일에 대한 기대로 이미 노는 일에 흥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 다음 날도 돈을 주지 않자 한 아이가 결단한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우리 여기서 놀지 말자, 저 아저씨 이제 돈 안 준다!”
세상에, 돈 천 원에 놀이터를 잃어버린 것이지요? 종종 눈앞의 작은 이익을 챙기느라 삶을 잃어버린 우리 같지 않으세요? 꽤 오래 전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라디오에서 들었는데, 그 이야기가 문득 생각난 것은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다가였습니다. 거기 내가 좋아하는 인물 중에 바주데바가 있습니다. 그는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위해 노를 젓는 뱃사공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탑니다. 돈을 벌기 위해 혹은 결혼식에 가기 위해 혹은 순례를 위해 강을 건너는, 대부분의 그들에게 강은 그저 장애물입니다. 목적이 생기면 때론 엄청난 것을 잊어버리지요? 뜰에서 놀면서도 뜰을 보지 못해 돈 천 원에 뜰을 팔기도 하고, 강을 건너면서도 강을 보지 못하고 현재에 있으면서도 현재를 살지 못합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에게만 이 강이 장애물이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강에 귀를 기울여 강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을 강에 살면서 강물을 사랑하게 된 바주데바는 강물의 소리를 듣는 현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면서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입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무상한 세계를 일컫는 말이지만, 그래도 강은 또 거기 그대로 있습니다.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거기 존재하는 강물에서 영원과 순간이 둘이 아님을, 헤라클레이토스도, 바주데바도 본 것입니다. 순간에, 현재에 온전히 거하는 일 없이 영원과 순간이 하나라는 시간의 비밀은 열리지 않습니다.
현재에 거하는 자는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도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현재에 거하기 때문에 잘 관찰하고 잘 듣습니다. 조급한 사람, 목적이 있는 사람,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경청하는 척할 수는 있어도 경청하지 못합니다. 지금 이 순간 오로지 느긋하게 현재에 거할 줄 아는 사람만이 경청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