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클럽
레오 담로슈 지음 | 아이템하우스
더 클럽
레오 담로슈 지음
아이템하우스 / 2020년 8월 / 612쪽 / 19,800원
새뮤얼 존슨 - 역경의 시절 새뮤얼 존슨은 1709년 스태퍼드셔 리치필드에서 태어났다. 당시 서점을 운영하던 아버지 마이클 존슨은 52살이었고 어머니 사라포드는 40살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난산으로 고생을 했고, 유모에게 그를 맡겼는데, 존슨은 유모 때문에 연주창에 감염되었다. 연주창은 몇 년 뒤에 자연스럽게 나았지만, 그의 목에 흉측한 흉터를 남겼고, 존슨은 연주창 때문에 한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존슨은 7살부터 15살까지 리치필드 그래머 스쿨을 다녔는데, 라틴어가 뛰어났다. 한편 아버지의 서점은 그가 탐독할 라틴어 책들로 가득했고, 어린 새뮤얼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영국 문학에 깊이 빠져 있었다. 이후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했다. 옥스퍼드 대학은 학비가 비쌌지만, 그의 어머니가 상속받은 약간의 유산과 가족 친구가 빌려준 돈으로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함께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 부유한 학교 친구가 도움을 주기로 했는데, 안타깝게도 학비를 도와주겠다던 학교 친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얼마 뒤 존슨은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옥스퍼드에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존슨은 극심한 우울증과 불안에 시달리며 살았다. 그러다가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로 불안에 대한 최고의 대처법은 불안을 해결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것이란 사실이었다. 참고로 그는 틱을 가지고 있었고 강박적으로 행동하고 이상한 소리를 냈는데, 이런 행동들은 그에게 일종의 해방감을 줬다.
옥스퍼드를 중퇴한 이후 5년 동안 그의 자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후 그는 버밍엄으로 이사했고, 외과 전문의로 일하던 오랜 학교 친구인 에드먼드 헥터와 함께 지냈다. 그곳에서 존슨은 포목 도매상인 해리 포터,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와 딸 루시를 알게 된다. 이들과 알고 지낸 지 1년 뒤에 해리 포터가 죽는다. 해리 포터가 죽은 지 채 1년이 안 된 어느 날 존슨은 엘리자베스와 결혼했고, 자신보다 6살 어린 루시의 계부가 되었다. 당시 그는 26살이었고 엘리자베스는 46살이었다.
존슨은 엘리자베스를 테띠라고 불렀는데, 테띠는 600파운드라는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이 돈으로 두 사람은 리치필드에서 3마일 떨어진 에디얼이라는 마을에 학교를 세우고, 청년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세운 학교를 찾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는데, 왜냐하면 리치필드 그래머 스쿨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한편 존슨과 테띠의 학교를 다니던 몇 안 되는 학생 중에 십대 초반의 데이비드 개릭이 있었는데, 데이비드 개릭은 흉내를 잘 냈다. 그는 존슨의 스태퍼드셔 억양을 흉내 내길 좋아했다.
이후 에디얼 학교를 세우는 데 투자한 돈은 공중으로 사라져 버렸고, 지금부터 무엇을 하면서 먹고살아야 할지를 존슨은 고민했다. 참고로 이 어려운 시기에 사귀었던 한 친구는 “존슨은 먹고살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고, 전문직을 가질 수 없었기에 필요에 의해 작가가 됐다”고 했다. 작가가 되려면 런던으로 가야했다. 1737년 새뮤얼 존슨은 한때 자신의 제자였던 데이비드 개릭과 함께 런던으로 간다. 테띠는 그가 런던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개릭은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그의 꿈은 빨리 이뤄진다. 존슨은 비극 무운시 〈아이린〉원고를 들고 런던으로 갔다. 하지만 그 시를 발표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개릭과 달리 존슨이 성공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참고로 1731년 에드워드 케이브는 《젠틀맨즈 매거진》이라는 월간지를 출판했는데, 《젠틀맨즈 매거진》에는 이것저것 다양한 글이 실렸고, 1737년 널리 알려졌다. 존슨은 미리 《젠틀맨즈 매거진》에 실을 글을 써놨었다. 그의 글을 본 케이브는 단숨에 그의 재능을 알아봤다. 두 사람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그는 매거진에 다양한 글을 기고했다. 사실상 새뮤얼 존슨이 매거진 편집장이나 다름없었다.
1737년 새뮤얼 존슨이 런던으로 간 지 몇 달 뒤에 테띠도 런던으로 올라왔다. 1740년대 초반에 이르러 새뮤얼 존슨은 거의 총각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테띠는 그와 함께 친구들의 모임에 나가지 않았고 절대 자신의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하지도 않았다. 테띠는 점점 술과 아편에 의존했다. 그리고 신선한 바람을 쐰다는 핑계로 작은 집을 빌려 햄스테드에서 머물렀다. 1752년 테띠는 63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런던 교외의 브롬리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 존슨은 여생 동안 아내의 죽음을 애도했다.
한편 새뮤얼 존슨은 글을 잘 썼다. 그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돋보이는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이른바 ‘존슨 스타일’은 호소력 짙고 정도를 지키려는 정신적 용기로 가득했다. 하나의 사례가 존슨이 1738년 익명으로 발표한 〈런던〉이다. 이는 새뮤얼 존슨이 고대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의 여섯 번째 풍자시를 현대적으로 각색하여 압운이 있는 쿠플레 형식으로 작성한 시로 힘 있고 격정적이다.
한편 새뮤얼 존슨의 첫 번째 성공작은 1744년 발표한 『리처드 새비지의 인생』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그때까지 존슨을 알지 못했던 조슈아 레이놀즈는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고 벽난로 위 선반에 기대어 읽기 시작했다. 후에 레이놀즈는 보즈웰에게 “깊이 빠져들어 끝낼 때까지 그 책을 내려놓을 수 없었고, 다 읽고 난 뒤 자리를 옮기려고 하자 팔에 아무 감각이 없었다”고 말했다.
새뮤얼 존슨 - 마침내 얻은 명성 1750년대 존슨은 문인으로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오르게 되는 걸작을 연달아 발표했다. 새뮤얼 존슨은 십여 년간 익명으로 글을 쓰다가, 1749년에야 비로소 자신의 이름으로 압운이 있는 쿠플레 형식의 시와 무운시 형식의 희곡을 발표했다. 한편 〈욕망의 공허〉는 존슨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발표한 첫 번째 시다. 〈욕망의 공허〉는 그가 익명으로 발표한 〈런던〉처럼 유베날리스의 풍자시를 각색한 것이었지만, 〈런던〉보다 힘이 넘쳤다. 그리고 존슨의 유일한 장편 시였다.
새뮤얼 존슨은 작가로서 유명해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가장 유망한 듯 보였던 시와 희곡이란 두 장르는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후에 그는 간략한 중편소설 『라셀라스』를 발표했다. 하지만 그는 소설에는 별다른 재능이 없었다. 시, 희곡 그리고 소설 외에 유망한 장르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기간행물이었다. 새뮤얼 존슨은 출판인들 몇몇을 설득했고, 《더 램블러》를 발간했다. 본래 《더 램블러》는 6쪽의 팸플릿으로 출간됐는데, 그 뒤 다양한 형식으로 출간됐고, 하나의 수필집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더 램블러》에 실린 그의 글에는 그만의 개성이 있는 스타일이 생겨났다. 새뮤얼 존슨은 복잡하고 과장된 산문체를 선호했는데, 그의 문체는 ‘존슨체’로 잘 알려져 있다.
1746년 출판인으로 구성된 컨소시엄이 사전 편찬을 하기 위해 새뮤얼 존슨과 계약을 체결했고, 그는 사전 편찬을 위해 꾸준히 작업했다. 마침내 1755년 사전 편찬이 완료됐고, 그의 사전은 출판 즉시 기념비적 성과로 인정받았다. 초기 전기작가는 그것을 ‘새뮤얼 존슨의 단어 세상’이라 불렀다. 존슨 사망 200주년에 『더 타임즈』의 논설위원은 “영국 사람의 주요 자랑거리는 그들의 언어와 새뮤얼 존슨의 『영어사전』이다. 이 지구상에서 천재적인 작가가 사전을 편찬한 유일한 언어가 영어다. 새뮤얼 존슨의 『영어사전』덕분에 이 언어의 영예가 드높아졌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과찬이 아니다.
제임스 보즈웰 - 넓은 세상을 향하여 제임스 보즈웰은 1740년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제임스 보즈웰의 아버지 알렉산더 보즈웰은 오킨렉 경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호칭은 세습 작위가 아니라 최고의 판사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칭호였다. 오킨렉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부동산의 이름이었고, 보즈웰의 할아버지가 그 부동산을 소유했다. 제임스 보즈웰은 지배적인 아버지와 유약한 어머니 아래서 자랐다. 아버지보다 10살 어린 어머니는 소심하고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했으며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그녀의 독실함은 자녀들에게 고통스러운 영향을 미쳤는데,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칼뱅주의를 엄격하게 따랐고 운명과 지옥 불을 강조했다.
13살 때 보즈웰은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했고, 강의실을 들락날락거리며 6년을 다녔다. 그는 교육에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은 즐기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조금씩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친구들과 어울려 사교생활에 빠져들었다. 한편 보즈웰은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일기장에 기록하면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대화를 효과적으로 기록하는 방법을 익혀나갔는데, 이것은 그의 문학적 성취의 아주 중요한 자산이 된다. 이후 그의 방탕한 생활은 아버지의 귀에 들어갔고 1759년 아버지는 아들에게 글래스고 대학교로 가라고 명령했다.
글래스고는 칼뱅파의 전통에 따라 극장은 허용되지 않았고, 글래스고 대학교의 교칙은 교수진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엄격했다. 당시 애덤 스미스는 10월부터 6월까지 일주일에 한 번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1시까지 철학과 수사학을 가르쳤고, 오후에는 학생들과 개별 지도 시간을 가졌는데, 제임스 보즈웰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글래스고로 간 지 6개월이 흐른 뒤에 보즈웰은 학교에서 무단이탈해서 런던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아들에게 당장 에든버러로 내려오라고 명령했다. 그 이후 보즈웰은 글래스고로 되돌아가지 않았고 학위도 따지 못했다. 대신 그는 혼자서 법을 공부했다. 아버지가 그에게 민법 시험을 통과하면, 런던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네덜란드에서 계속 공부할 계획이었다.
이후 보즈웰은 22살이 되기 직전에 민법 시험에 합격했고, 1762년 11월 15일 에든버러를 떠나 런던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즐겁게 사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는 런던을 처음 방문했을 때 알게 된 친구들 몇몇과 재회했다. 앤드루 어스킨, 조지 뎀스터, 에글린턴 백작 등이었다. 이들 외에도 에든버러에서 알았던 친구들과도 재회해서 우정을 다시 이어나갔는데, 그중 한 명이 40대 초반의 아일랜드인인 토마스 셰리든이었다. 셰리든은 얼마 동안 더블린에서 극장을 운영했는데, 극장이 망했을 때, 그는 런던에서 배우가 됐고 웅변술을 가르쳤다. 셰리든에겐 매력적인 아내 프랜시스가 있었는데, 데이비드 개릭이 드루어리 레인에 올린 연극 몇 편은 프랜시스 셰리든의 작품이었다. 한편 보즈웰은 오가다가 스치면서 토마스와 프랜시스 셰리든의 막내아들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리처드 셰리든이다. 리처드 셰리든은 뛰어난 극작가로 성장했고 더 클럽의 회원이 된다.
운명적 만남 보즈웰이 런던에서 지낸 지 6개월이 지났다. 보즈웰은 『더 램블러』와 『라셀라스』를 읽고 존슨을 지혜의 대가로 존경했다. 한편 에든버러에서 보즈웰에게 웅변술을 가르쳤던 토마스 셰리든은 존슨의 친구였다. 런던에서 셰리든과 재회한 보즈웰은 셰리든에게 존슨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셰리든은 자신은 더 이상 존슨과 연락하지 않는다고 매몰차게 이야기했다. 셰리든 외에도 보즈웰과 새뮤얼 존슨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었다. 파트타임으로 연기를 하던 토마스 데이비스는 코벤트 가든 극장에서 가까운 러셀 스트리트에서 서점을 운영했는데, 그는 보즈웰과 친구가 되었다.
데이비스는 존슨이 자주 자신의 서점을 찾는다고 보즈웰에게 말했다. 운이 좋다면 보즈웰은 그의 서점에서 존슨과 마주칠 수도 있었다. 마침내 그 순간이 왔고 새뮤얼 존슨은 자신의 전기를 쓸 운명을 타고난 보즈웰을 만났다. 1763년 5월 16일은 보즈웰에게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시작됐다. 오후에 데이비스의 서점에서 그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존슨이 서점 안으로 들어왔다. 보즈웰은 『존슨전』에서 이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극적인 전환점이었다고 썼다.
데이비스는 보즈웰에게 존슨을 소개했다. 보즈웰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곧장 말실수를 했고, 자신의 실수와 새뮤얼 존슨의 응수에 기가 죽을 만했다. 하지만 그는 절대 기가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계속 그들과 함께 있었고 아주 가끔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후 존슨이 떠난 뒤 데이비스는 “불안해할 것 없어. 자네가 마음에 쏙 든 눈치였어”라고 말했다. 일주일 뒤 보즈웰은 용기를 내서 존슨을 찾아갔다. 아마도 데이비스가 그에게 존슨이 집으로 손님이 찾아오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해 줬을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나고 3개월이 채 안 됐을 무렵 보즈웰은 네덜란드로 떠났다. 하지만 이미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친구였고 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졌다. 두 사람의 관계는 21년 동안 지속됐다. 1784년 존슨이 세상을 떠나면서 두 사람의 우정도 끝이 났다. 우정을 나누는 동안 보즈웰은 끊임없이 존슨에게 의지했다. 보즈웰은 그에게서 아버지로부터는 받지 못한 조언, 격려, 그리고 사랑을 받았다. 이렇게 『존슨전』은 두 사람의 오랜 우정에서 시작됐다.
더 클럽의 탄생 1763년 새뮤얼 존슨이 제임스 보즈웰과 함께한 기간은 3개월 남짓이었다. 이 기간 동안 보즈웰과 나눈 애정 어린 우정은 그에게 삶의 활력소였다. 하지만 그해 가을 보즈웰이 네덜란드로 떠난 뒤에 존슨은 끔찍한 우울감에 빠졌다. 7년 전에 계약했던 셰익스피어에 관한 원고를 완성하지 못한 것도 원인이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를 괴롭혀온 치밀어 오르는 강박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극심한 우울감에 빠진 존슨이 걱정된 스레일 부부는 그를 자신들의 저택에서 지내도록 했다. 조슈아 레이놀즈가 한 일도 존슨에게 아주 도움이 됐다. 1764년까지 두 사람은 친하게 지냈다. 그래서 레이놀즈는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자신의 친구를 고통스러운 우울감으로부터 구할 방법임을 잘 알고 있었다.
1764년 초반에 레이놀즈는 존슨에게 유쾌하고 매력적인 친구들을 모아서 클럽을 만들고,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클럽 회원으로 9명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전원이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활발히 대화를 나누기에 적당한 수라고 두 사람은 생각했다. 더 클럽의 규모가 커지면서 신입회원은 기존회원이 만장일치로 뽑는다는 규칙이 만들어졌다. 1766년 잉글랜드로 돌아온 보즈웰은 더 클럽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1773년이 되어서야 그는 더 클럽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이후 런던에 생겨난 클럽들과 달리, 더 클럽은 건물을 소유하지 않았다. 더 클럽이 창설되고 거의 20년 동안, 회원들은 정기적으로 스트랜드에서 조금 떨어진 제라드 스트리트 9번지에 위치한 터크즈 헤드 태번에서 만났다.
한편 존슨과 레이놀즈는 평판에 상관없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더 클럽을 만들었다. 에드먼드 버크는 하원 의원의 개인 비서로 일하고 있었는데, 2년 뒤에 그는 의회에 입성했다. 크리스토퍼 뉴전트 박사는 에드먼드 버크의 장인이었다. 앤서니 채미어는 증권 중개인이었지만, 그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올리버 골드스미스는 글을 쓰는 작가였는데, 새뮤얼 존슨은 항상 그를 ‘골디’라고 불렀다. 마지막 3명은 존슨이 특히 더 클럽에 들어오기를 바랐던 친구들이었는데, 토펌 보우클레어와 베넷 랭턴이라는 두 청년과 치안판사이자 음악학자였던 존 호킨스였다. 존 호킨스는 고루하고 유머감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몇 년 뒤에 호킨스는 버크와 말다툼을 했고, 그 뒤로 더 클럽의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더 클럽의 초대회원들의 면면을 보면, 9명 모두 뚜렷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회원들은 돌아가면서 회장을 맡았고, 회장으로 뽑힌 회원은 그날 모임을 주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