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지구사
오드 아르네 베스타 지음 | 에코리브르
냉전의 지구사 - 미국과 소련 그리고 제3세계
오드 아르네 베스타 지음
에코리브르 / 2020년 5월 / 814쪽 / 39,500원
서론
이 책은 20세기 후반의 초강대국 아메리카합중국(이하 ‘미국’)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하 ‘소련’)이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에서 이뤄진 변화 과정에 어떻게 반복적으로 개입했는지를 다룬다. 이들의 개입은 여러 국가뿐 아니라, 국제 문제를 지배한 여러 운동과 이데올로기를 부채질했다. 이 책에서 사용한 개념의 정의는 단순하다. ‘냉전’은 미국과 소련의 지구적 대립이 국제 문제를 지배했던 1945~1991년의 기간을 의미한다. ‘제3세계’는 유럽(미국과 러시아를 포함한다면 범유럽이라는 표현도 가능)의 지배를 받았던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나 반(半)식민지 국가를 의미한다. ‘지구적’이라는 말은 거의 동시에 각기 다른 대륙에서 벌어진 과정을 말한다. ‘개입’은 타국을 향한 일국의 국가 차원의 준비된 행동을 뜻한다. 이는 간단한 조작적 정의로서 이 책에서 사용한 특정 맥락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당연히 더 넓은 맥락에서 보면 이와 같은 정의에 대한 비판은 가능)
이 책은 미국과 소련을 제3세계로 이끈 동인이 두 나라의 정치에 내재된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한다. 유럽적 근대성 개념을 둘러싼 투쟁 속에서 두 나라는 모두 자국을 유럽적 근대성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여겼다. 한편 미국과 소련은 자국의 이데올로기가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세계를 바꾸고자 했는데, 미국과 소련에 있어 신생 독립국의 엘리트는 매력적인 경쟁 대상이었다. 한편 두 국가는 제3세계에서 자유나 사회 정의를 확장해 세계사의 자연적 방향과 자국의 안보를 일치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은 모두 자국이 제3세계를 위한 특별한 사명을 지녔다고 여겼고, 그들 국가만이 그 사명을 이룰 수 있으며, 만약 그들의 개입이 없다면 현지인이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남반구에서 진행된 냉전을 단순히 유럽 식민주의의 개입이나 유럽이 제3세계 민중을 통제하고자 하는 시도로 파악하는 시각은 일면적이라 할 수 있다.
또 냉전과 유럽 식민주의의 차이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 소련의 지배를 ‘제국’으로 유형화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오히려 냉전은 하나의 특수한 시기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근대 초기에 시작된 유럽의 팽창과 달리 소련과 미국의 목표는 착취나 정복이 아닌 통제와 개선에 있었다. 이와 같은 구분은 개입의 대상이었던 측에서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지만, 냉전 담론 그 자체를 이해하는 데 이는 매우 중요한 차이다. 유럽 제국주의가 제3세계 사회의 개선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을 지배하던 도중에 덧붙인 것에 가까웠으나, 냉전은 처음부터 제3세계 사회의 개선을 고려하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은 진심으로 유럽 제국주의를 비판했으며, 이러한 비판은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에 기초했다. 베트남이나 아프가니스탄에서 나타난 냉전기 개입의 폭력성은 소련과 미국이 지켜내고자 했던 이 민중과의 동일시를 통해서만 설명 가능하다. 대부분의 냉전기 개입은 이데올로기를 두고 진행된 내전의 확장판이었으며, 그 쟁투는 내전만이 야기할 수 있는 폭력성과 함께 이뤄졌다.
자유의 제국 - 미국 이데올로기와 대외 개입
1890년대, 미국이 처음으로 북아메리카 대륙 너머를 식민화할 준비를 마치자, 미국인들은 공화국이 과연 제국이 될 수 있는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에 돌입했다. 190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필리핀 식민화 정책이 미국 공화주의의 근간을 훼손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비판했다. 하지만 브라이언의 대권 도전은 연이어 실패했다. 이후 약 한 세기 동안 브라이언의 감정에서 나타나는 복잡 미묘함은 미국 외교정책 결정의 주요 순간에 자주 반복해 등장했다.
이분법을 좋아하는 역사가들은 1890년대와 브라이언의 연이은 패배를 자유를 중시한 공화주의자와 돈과 이익에 강한 열망을 보인 공화당(Republican)의 대립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적어도 19세기 미국 외교 정책의 전환은 18세기부터 21세기까지 이어지는 미국 이데올로기의 지속적 형성 과정에서 특히 중요한 국면이었다. 참고로 1785년 토머스 제퍼슨은 국내의 자유를 최우선시하는 미국의 원칙을 찬양했다. 그러나 동시에 전쟁 회피는 “미국의 위정자가 따를 수 없는 이론”일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근간이었다. 제퍼슨은 “우리 미국인은 항해와 상업에 관해서는 확실한 애호를 지니고 있습니다.”라고도 말했는데, 19세기와 20세기 초 미국의 국가 형성 과정 속에서 이렇게 ‘이론’과 ‘애호’는 우월적 지위를 향해 서로 경쟁하는 동시에 점차 혼합되며 상호 조정되어갔다.
그리고 20세기 중반이 되자 자유라는 ‘이론’과 이익이라는 ‘애호’는 미국 외교정책 이데올로기로 자연스럽게 통합되었다. 자유와 이익이라는 두 가지는 결합되어 하나의 상징이자 미국의 보편주의적 사명의 핵심 인식으로서 기능했다. 이러한 냉전기 미국적 가치의 역할이 다른 서구의 ‘보통’ 국가와 달랐던 점은 미국의 상징과 미국이 지닌 일련의 표상(자유로운 시장, 반공주의, 국가 권력을 향한 경계, 기술을 향한 믿음)이 목적론적 기능을 수행했다는 사실이다. 즉, 미국의 오늘은 세계의 내일이 될 예정이었다. 미국의 보편주의와 목적은 미국 혁명기에 그 기원을 둔다. 그러나 서로 다른 관념 간에 타협이 필요했기에 미국이 보편주의와 목적론을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선언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미국의 제3세계 개입의 역사는 이와 같은 미국의 이데올로기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발전했으며, 미국 외교 정책 엘리트의 정책을 형성하는 데 어떤 기여를 했는지와 관련한 역사라 할 수 있다. 외교 정책을 둘러싼 국내의 강력한 반발이 있기도 했지만, 적어도 미국의 기준에서 냉전기 미국의 외교 정책에는 당면한 목표와 이를 이루기 위한 수단과 관련해 놀라울 정도의 합의가 존재했다. 외교 정책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이 상대적으로 적었기에 학자들은 미국의 국제 정책 수행에서 이데올로기와 드러난 행동 간의 관계를 단순하게 파악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의 대외 관계 기원에서도 볼 수 있듯이, 냉전기 미국 외교 정책을 둘러싼 합의는 민주공화국이 타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무슨 역할을 하고, 어떤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지를 두고 이루어진 치열한 논쟁 끝에 나온 결과물이었다.
‘외부인’과 반공주의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과 주요 서구 열강이 비참하고 비합리적인 수준으로 추락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이제 미국이 승전국이자 종전 이후 세계 최강대국으로서 모든 것을 고쳐나가야 할 차례였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미국의 사명이 강대국 간 전쟁을 방지하는 국제 질서의 형성에 있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윌슨은 민족주의와 혁명이라는 두 가지 주요 문제에 집중했다. 전후 중ㆍ동부 유럽의 민족주의 구상이 결실을 맺는 데 윌슨의 민족자결권 지지는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윌슨은 급진주의나 사회주의가 국가 건설의 주된 원동력이라고 여겨지는 지역을 지원하는 데는 주저했다.
한편 1920년대 초 비유럽 지역의 불안정과 이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면 어떤 나쁜 결과가 나타나는지에 대해 미국인은 우려했다. 이와 같은 우려는 러시아 혁명과 그 여파를 보면서 더욱 커졌다. 1917년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몰락했는데, 차르 체제를 유럽의 정치체 중 가장 반동적인 형태라고 여긴 많은 미국인은 초기에 러시아 혁명을 환영했고, 새로이 등장한 러시아 체제가 미국 독립혁명과 같은 정책 궤도를 따르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볼셰비키가 권위주의적 집단주의, 영구 혁명과 국제주의를 강조하자 미국 엘리트 집단은 소련 체제를 향한 호의를 거두어들였다. 오히려 소련의 등장 이후 전개된 일련의 사건은 소련 공산주의가 아메리카니즘의 극명한 경쟁자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러시아 혁명은 스스로를 대안적 근대성으로 선포했으며, 가난하고 탄압받는 민중이 미국 모델을 모방하지 않더라도 현상을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에 미국 정부는 일찍이 1918년부터 다른 제국주의 강대국과 함께 볼셰비키에 맞서는 군사 개입을 전개했다.
한편 전시 미국의 대(對)중국 개입은 미국이 개혁에 필요한 능력, 교육, 도덕적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는 동맹국을 어떤 방식으로 지도하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중화민국의 지도자 장제스는 미국과의 동맹이 우선적으로 일본에 맞서기 위한, 그리고 일본 패망 이후에는 중국 공산주의자에 대항하기 위해 맺은 일종의 정략결혼이라 생각했다. 이에 반해 많은 미국인은 미국-중화민국 협력을 중국의 사회ㆍ국가를 개혁하기 위해 장제스에게 수여한 백지수표라고 여겼다. 그리고 국가 운영에서 장제스가 미국인의 지도와 교육을 따르려는 의지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미국은 중국을 포기하기보다는 장제스를 미국의 조언에 좀 더 순응하는 반공주의자로 대체하려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입 형식은 이후 20세기의 절반 동안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되풀이되었다.
‘세계는 하나의 시장’ 19세기 경제의 경이로운 성장(이는 역사상 전례가 없었다)으로 미국은 이미 경제 대국이었다. 군사ㆍ정치 영역에서 대국으로서 역할을 하기 전에도 말이다. 미국의 연간 총생산량은 유럽의 주요 강국인 영국, 독일, 프랑스의 연간 총생산량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 19세기 미국은 자본의 순수입국이었지만, 1918년 세계 최대의 자본 수출국이 되었고 이러한 지위를 1981년까지 유지했다. 이처럼 거대한 미국 경제는 무역뿐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도 전 세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890년대와 1900년대 초 뉴욕과 런던 사이의 금융망을 통해 최초의 국제 자본 시장이 탄생했다. 이 금융망은 영국과 여타 외국 회사를 거쳐 미국 자본을 세계와 연결했다. 1897~1914년 미국의 해외 총투자는 5배 증가했으며, 그중 상당 부분은 제3세계와 관련이 있었다. 그 형태는 식민지를 착취하는 유럽 기업과 관련된 투자이기도 했으며, 멕시코ㆍ쿠바ㆍ중앙아메리카에 대한 직접 투자, 또는 소규모이지만 그 밖의 다른 라틴아메리카 지역을 향한 투자였다. 미국의 제3세계 투자는 상대적 규모 면에서 제일 높았던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더 다양한 국가와 산업, 그리고 상품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이전보다 더욱 확장된 형태를 띠었다.
이러한 우월성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경제 제국주의를 추구하기를 망설였다. 미국 국내 시장은 부유하고 사회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이동성이 확보되어 있으며 정치적으로 안정된 반면, 해외 시장(특히 제3세계)은 이러한 이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냉전 시기 미국 정부는 영향력과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항상 기업이 해외, 특히 제3세계 투자를 확대하도록 촉구했으나 이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아무튼 냉전 초기에 미국은 점진적으로 세계 경제를 위한 체계적 책임을 졌으며, 이를 위해 세계 경제 구조 속에서 유럽과 제3세계의 위치를 새로이 정의하려고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와 전략은 조화를 이루었다. 제3세계가 시장을 선택해야 하는 부분적 이유는 주변부인 제3세계가 과거 제국의 중심부인 서유럽과 일본을 지탱해야 했기 때문이고, 이를 통해 공산주의를 봉쇄하는 동시에 이들 국가의 미국 시장 진입 요구를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3세계에 대한 원조는 이를 일거에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1950~1960년대 동안 소련의 공세에 맞서는 상황에서도 제3세계 원조의 약 90퍼센트는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가 제공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의 원조 중 60~70퍼센트를 미국이 부담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제3세계의 많은 국가가 독립하면서 원조를 어떻게 사용할지를 두고, 원칙과 우선순위 문제가 제3세계 지도자들에게 또 다른 문제로 대두했다.
미국 입장에서 볼 때, 냉전기 전략과 동맹의 쟁점 배후에는 미국의 성공 경험이 세계 어느 곳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미국의 관세와 금수 조치에 대해서는 일말의 모순점도 발견하지 못한 채, 미국인은 ‘지구적 차원의 발전 교육’을 통해 세계가 스스로 시장을 개방하도록 가르치고, 그 모범은 미국과 미국의 자유 기업이었다. 해외 전시회에서 미국 상품은 미국이 거둔 성공의 징표였다. 당대에 이를 기록한 기자의 표현에 따르면 전시회를 방문한 이들은 “세탁기, 식기세척기, 진공청소기, 자동차, 냉장고가 제공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무역이 상품을 확산하듯 미국 상품을 따라 미국의 이데올로기도 확산되리라는 것은 미국인 관찰자에게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근대화, 기술 그리고 미국적 지구주의20세기 중반 미국에서 진행된 민주주의의 확대로 인해 제3세계를 둘러싼 정책 담론은 두 가지 방향으로 분화했다. 대외 정책 담당 엘리트 계층에게 그 답은 냉전을 통해 해외에 대한 관여를 더욱 심화하고, 미국의 자유를 국내뿐 아니라 해외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반면 많은 소수자들이 스스로의 지위와 평등을 미국 내에서 확보하는 데 성공한 이후, 그들은 미국의 권력에 대항해서 똑같은 목적을 위해 싸우고 있는 외부인에게 연민을 느꼈다. 언제나 소수 의견으로 남은 채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미국 내 비판 담론은 국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는 동시에 제3세계 국가와 대화를 통해 관여를 표방하는, 새로운 관념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미국의 공식 대외 정책과 관련한 목표를 상징하는 건 지구적 차원의 냉전이었다. 이는 20세기 후반 미국이 영위하고 있던 이데올로기와 권력에 부합하는 지구적 시각이었고, 스스로를 대중적이고 현대적이며 국제적이라고 표방하는 공산주의에 맞서 대항하는 것이었다. 18세기 후반부터 미국 대외 정책의 핵심에는 어떠한 조건하에서 이데올로기적 연민이 개입으로 이어져야 하는지를 둘러싼 고민이 놓여 있었다. 냉전은 미국이 다음과 같은 극단적 결론을 내린 계기였다. 즉 어디든지 공산주의가 위협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면 미국은 개입해야만 했다. 그렇게 냉전은 제3세계로 확산되었다.
정의의 제국 - 소련 이데올로기와 대외 개입
20세기는 여러 국가가 러시아와 미국을 주권 원칙에 기반을 둔 국제적 상호관계에 맞추어 사회화하려고 지속적으로 시도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몇몇 경우 이런 노력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대개는 실패했다. 사회화가 성공한 경우는 주로 소련이나 미국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국제 체제 내의 위기와 관련될 때뿐이었다.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베트남 전쟁의 종결은 미국이 다른 국가의 이익을 좀 더 고려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경우 1905년과 1917년 혁명 사이의 기간, 1941년 독일의 침공 이후, 그리고 고르바초프-옐친 시대가 그런 타협의 신호를 주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두 강대국은 점차 발전하고 있는 국제적 상호 작용의 규범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개입하곤 했다. 미국과 러시아(적어도 소련이었던 기간 동안)가 20세기에 취한 정책으로 미루어보면 국가 주권의 원칙과 미국 및 소련이 추구한 지구적 이데올로기는 조화될 수 없었다고 보는 편이 설득력 있다.
이 장은 러시아라는 국가의 특수하고 독특한 형태가 소련의 대외정책에서 나타난 대부분의 개입주의 정책의 원동력이었다고 주장한다. 미국과 러시아 두 경우 모두, 개입을 정당화한 이데올로기는 이전 세기에 형성된 관심사로부터 출발해 전혀 다른 제도 아래에서 발전했다. 러시아 공산주의자가 볼 때 소련의 건국은 인구의 절반 이하만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다문화적 공간을 상속했다는 의미뿐 아니라, 차르가 비(非)러시아인 신민에게 두 세대에 걸친 러시아화와 근대화 정책을 시도했던 국가를 공산주의자들이 비로소 접수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19C 후반과 20C 초반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러시아인은 그들이 아시아적 야만을 일소하고 동방의 민족을 문명화할 특별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