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오치 도시유키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오치 도시유키 지음
사람과나무사이 / 2020년 5월 / 312쪽 / 17,000원
유럽의 세력 판도를 바꾼 작지만 위대한 물고기, 청어 이야기
청어의 회유 경로 변화가 유럽의 세력 판도를 바꾸고 여러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지었다고?청어는 잡은 뒤 볕에 말리기만 해서는 곤란하다. 워낙 기름기가 많은 생선이라 금세 상하기 십상인 까닭이다. ‘소금에 절인 청어’라는 식품은 이런 이유로 등장했다. 한편 회유어인 청어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어떤 이유로 갑작스럽게 이동 경로를 바꾸곤 하는데,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종종 일어난다. 아무튼 ‘소금에 절인 청어’가 주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자 청어의 회유 경로 변화가 당대 유럽의 세력 판도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왔다. 또, 그로 인해 여러 국가와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주요 집단의 흥망성쇠를 좌우하게 되었다. 청어라는 평범하고 흔한 생선이 유럽사를 바꾸고 한발 더 나아가 세계사를 뒤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바이킹의 기원에 관한 추측 중에서도 상당히 특이한 주장이 있다. 바로 바이킹이 잉글랜드를 습격한 배경에 ‘청어 회유 경로 변화’가 은밀히 자리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1952년 S. M. 토인은 〈청어와 역사〉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 이색적인 주장을 다음과 같이 펼쳤다. 청어 떼가 노르웨이 근해를 회유 경로로 삼아 이동할 때는 바이킹의 잉글랜드 습격이 소강상태에 있었다. 10세기 무렵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후 바이킹이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은 도시나 지역은 거의 예외 없이 청어잡이가 활발한 곳이었다. 토인은 다양한 자료를 꼼꼼히 조사한 끝에 바이킹이 유럽 여러 나라를 침략할 때 택한 항로가 훗날 북해에서 청어잡이 하던 네덜란드의 어장 및 해로와 절묘하게 일치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청어의 회유 경로 변화는 이후 실제로 몇 번이나 여러 국가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쳤다.
청어를 매개로 한자동맹 중심지로 떠오른 독일 도시 뤼베크13세기 무렵 기독교의 급속한 확산과 더불어 피시 데이(fish day, 禁肉齋日)가 자리 잡았고, 이 시기에 유럽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청어의 수요가 증가했으며 국제무역에서 주요 상품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흐름에 발맞추어 가공ㆍ보존 기술과 운송 수단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 두 가지 수단을 가장 먼저 확보하고 시스템을 구축한 주체가 바로 ‘한자동맹’이었다. 말하자면 한자동맹이 탄탄하게 기반을 닦고 정점에 올랐다가 다시 추락하게 된 배경에도 청어가 깊이 관여한 셈이다.
독일의 뤼베크는 한자동맹 중심도시로 발전한 대표적인 도시다. 뤼베크는 윌란반도가 발트해를 향해 뻗어나가는 지점에 건설되었는데, 1143년 즈음의 일이었다. 이후 이 도시는 13세기 초부터 북해와 발트해 지방 무역 중계도시로서 중요한 지위를 확보해나갔다. 일반적으로 한자동맹 성립은 독일 도시 뤼베크와 함부르크가 1241년에 맺은 상업동맹을 발단으로 본다. 뤼베크는 어떻게 교역 중심지로 발달할 수 있었을까?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지리적 조건’을 꼽을 수 있다. 즉, 이 도시가 발트해와 북해를 나누는 윌란반도가 시작되는 곳에 위치한다는 탁월한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뤼베크에는 두 해협의 중간지점이라는 천연의 지리적 이점 이외에도 또 다른 이점이 있었다. 바로 청어 떼가 주기적으로 몰려온다는 점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뤼베크 바다 건너 맞은편의 스칸디나비아반도 남단에 있는 스코네 지방과 뤼베크 동쪽의 뤼겐섬 연안, 그리고 남서쪽의 암염 산지인 뤼네부르크에 엄청난 규모의 청어 떼가 몰려왔다. 이는 11세기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새로운 현상이었다. 이 두 가지 입지 조건이 절묘하게 맞물리면서 뤼베크는 독일과 유럽의 주요 도시로 성장했고 청어 무역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려 무역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절정에 도달한 다음에는 내리막길이 기다리는 것이 자연과 우주의 원리다. 오랫동안 한자동맹의 부와 권력을 뒷받침해주었던 청어 떼가 회유 경로를 바꾸는 바람에 발트해에서 산란하는 일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는 15세기 중반 유럽국가들이 일상적으로 교류하고 무역하던 바다에서 일어난 커다란 변화였다. 16세기에 이르러 청어 떼는 완전히 북해로 이동했다.
빌럼 벤켈소어의 ‘소금에 절인 청어’가 세계사를 바꾸다소금에 절인 청어 만드는 법을 개발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대다수 학자가 빌럼 벤켈소어를 꼽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움직일 수 없는 명확한 사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네덜란드는 빌럼 벤켈소어가 활약한 시기에 발전의 기틀을 다졌는데, 학자들은 이를 14세기 무렵으로 추정한다. 그즈음 이 나라는 빌럼 벤켈소어 같은 위대한 장인과 기술자, 숙련공들의 노력에 힘입어 소금에 절인 청어를 가공하는 기술을 눈부시게 발전시켰다. 그로써 이전에는 며칠만 지나도 썩어 문드러지고 악취를 풍긴 청어를 무려 1년 넘게 신선한 상태로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는 무역으로 다른 유럽 국가들을 압도할 만큼 거대한 부를 일구었다. 아무튼 네덜란드 성공 신화는 한자동맹을 대신해 ‘소금에 절인 청어’를 본격적으로 공급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빌럼 벤켈소어의 ‘소금에 절인 청어’는 세계사를 바꾼 위대한 발명 중 하나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청어,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운명을 바꾸다
세 차례의 잉글랜드ㆍ네덜란드 전쟁으로 번진 ‘청어잡이’ 불화찰스 L. 커팅의 책 『물고기: 가공과 보존』에 따르면 1679년 시점에 네덜란드에는 4,000여 척의 어선과 20만여 명의 어부가 있었다고 한다. 한편 엘리자베스 1세 시대부터 이어진 어업 진흥책에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어민과 어업 상인은 17세기 안에 압도적 우위를 점한 네덜란드를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번영도 있을 수 없는 법이다. 네덜란드의 번영은 18세기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찰스 L. 커팅에 따르면 1736년에 이 나라의 청어잡이 어선 수는 300척까지 떨어졌고 1779년에는 162척으로 곤두박질쳤다. 17세기에 청어잡이로 엄청난 호황을 누리며 잉글랜드인의 질투를 유발하고 네덜란드 타도를 외치던 국왕의 목을 떨어뜨리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던 네덜란드 어업은 잉글랜드인의 도전이나 위협과는 무관하게 저절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네덜란드 어업 쇠퇴의 가장 큰 원인을 꼽아보라면 ‘끊임없는 전쟁’을 들 수 있다. 네덜란드는 1652년 제1차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이 시작된 후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종료될 때까지 60여 년 동안의 대부분을 잉글랜드나 프랑스, 혹은 두 나라 모두와 전쟁을 치르며 보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됭케르크 해적은 잠시도 잠잠할 새 없이 약탈과 살육을 반복했다. 바다에서 아무리 잘나가는 해양 강국 네덜란드라도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에게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알고 나면 어업에 관한 권리를 한 치도 양보하려 하지 않던 네덜란드의 외교 방침이 과연 옳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같은 신교 국가인 잉글랜드와 손을 잡고 동맹 관계를 강화하는 방향이 훨씬 현명하지 않았을까. 네덜란드 부의 원천은 동인도에도 있었으니 청어 어장 정도는 양보해도 좋지 않았을까. 물론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말이다. 게다가 ‘보장금’이라 부르는 어업진흥을 위한 기금 제도가 잉글랜드에 조성되었다. 1718년에는 수출되는 소금에 절인 청어 한 통당 2실링 8펜스, 알배기 레드헤링은 한 통당 1실링 9펜스, 품질이 떨어지는 쇼튼 헤링은 한 동안 1실링의 보장금을 지급했다. 『국부론』을 집필하고 자유주의를 주창한 애덤 스미스는 이 보장금 제도를 당연히 낮게 평가했다. 그러나 찰스 L. 커팅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는 이 보장금 제도가 18세기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의 청어잡이 성장에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1755년 7만 통의 청어가 야머스에서 보존ㆍ가공되었는데, 그중 5만 2,000통이 수출 길에 올랐다. 한편 스코틀랜드에서는 보장금 제도 덕분에 청어잡이에 나선 바위스선 수가 1751년부터 1756년 사이의 3척에서 1787년에서 1798년 사이에 293척까지 껑충 뛰어올랐다. 스튜어트 왕조의 청어에 걸었던 꿈은 하노버 왕조 시대에 비로소 이루어진 셈이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잉글랜드인은 왜 청어를 천대했을까셰익스피어 작품 속에서 청어는 늘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왜 그 시대의 잉글랜드인은 청어라면 치를 떨었을까? 우선 음식에 관한 당대인의 통념이 여기에 한몫했다. 당시 사람들은 음식을 ‘고기 vs. 생선’이라는 이분법 구도로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인식은 ‘피시 데이’의 생성 기반이 되었다. 사람들은 소고기 등 육류를 ‘뜨거운 고기’라 하여 남자다움, 성욕, 양기 등 양성을 상징하는 음식 재료로 보았다. 아울러 그들은 대구나 청어 같은 물고기류를 ‘차가운 고기’라 하여 여성스러움, 음습한 성격 등 음성을 상징하는 음식 재료로 인식했다. 따라서 ‘차가운 고기’ 생선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사순절은 평범한 시민에게는 날마다 맛없는 청어를 질리도록 먹어야 하는 끔찍한 기간을 의미했다. 이런 이분법적 관점과 우울한 현실이 셰익스피어 작품에 잘 드러나듯 당대인이 청어를 기피하고 천대하는 사고방식과 태도의 기반이 되었던 게 아닌가 싶다.
피시 데이는 애초부터 종교적 목적으로 생겨난 이벤트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피시 데이의 종교적 색채는 옅어졌다. 그러다가 셰익스피어가 활동하던 시기에 이르러서는 종교적 색채가 상당 부분 사라졌다. 게다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정치적 억압으로 해석할 여지마저 생겨났다. 그 결과 셰익스피어 시대의 잉글랜드 국민은 신의 뜻보다는 국왕의 명령에 따라 생선을 먹어야 했던 셈이다.
잉글랜드가 청어의 국제정치적ㆍ경제적 중요성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도 셰익스피어가 활동하던 시기에 이르러서였다. 셰익스피어 시대 이후 잉글랜드는 그야말로 ‘청어에 홀렸다!’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청어를 국가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자원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당대의 잉글랜드인이 청어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국가 자원으로 삼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그 거대한 산 중 하나가 바로 청어가 헤엄치는 바다 건너편에 버티고 선 신흥강대국이자 ‘청어의 나라’ 네덜란드의 존재였다. 당대에 잉글랜드 어민들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배와 구식 도구만으로 대규모 선단에 최신 장비를 갖추고 조업하는 네덜란드 어선 가까이에서 주눅 든 채 청어잡이를 해야 했다. 게다가 네덜란드산 소금에 절인 청어가 1 라스트 당 25파운드에 팔릴 때 야머스에서 가공한 잉글랜드산 소금에 절인 청어는 1 라스트당 고작 10파운드 남짓한 헐값에 팔렸다. 이렇듯 당시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사이에는 청어의 어획량뿐 아니라 품질 면에서도 완전히 다른 상품으로 취급받을 정도로 격차가 컸다.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 네덜란드산 소금에 절인 청어에 맞서 그나마 어느 정도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상품이 바로 야머스 특산물 ‘레드헤링’이었다. 레드헤링은 ‘훈제청어’다. 왜 야머스산 훈제 청어에 ‘레드헤링’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훈제 과정을 마칠 무렵이 되면 청어가 검붉은 빛깔을 띠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 보존 기간을 좀 더 늘리기 위해 장기간 훈제 과정을 거친 훈제 청어 ‘블랙 헤링(Black herring)’도 있었다.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인이었던 토머스 내시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소금에 절인 청어를 먹고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로버트 그린의 친구였다. 그의 『내시의 사순절 음식』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어떤 내용으로 채워져 있을까? 흥미롭게도 야머스와 야머스의 특산물인 레드헤링에 관한 찬가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그는 “잉글랜드에 많고 많은 특산물이 있지만 전 기독교 국가에서 돈을 그러모으는 상품으로 레드헤링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그는 “청어가 이 정도로 많이 잡히는 해안은 전 유럽을 통틀어 잉글랜드의 야머스밖에 없다. 청어를 제대로 가공할 줄 아는 지역도 야머스 외에는 없다”라는 주장도 한다. 내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오로지 야머스만 말리고 훈제하고 구운 다음 네덜란드인도 부러워할 정도로 세심하게 소금을 뿌릴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신항로 개척시대를 열어준 주인공, ‘스톡피시’와 ‘소금에 절인 대구’
말린 대구 ‘스톡피시’가 없었다면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선 바이킹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도 없었다노르웨이 북서부 로포텐 제도와 베스테롤렌 제도, 노르웨이 본토에 의해 둘러싸인 해역은 오래전부터 북유럽 최대 대구 어장으로 유명했다. 이 해역은 북극권에 있음에도 난류인 멕시코 만류가 부근을 통과해 비교적 온난하다. 이 바다에 서식하는 대구는 1~5월에 산란기를 맞이한다. 이 해역의 대구잡이 역사는 유구하다. 놀랍게도 석기시대부터 이어져 왔다.
말린 대구 스톡피시는 노르웨이 북서부 지방에서 맨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는 절대 오류가 없는 정설은 아니므로 정확한 진위는 알 수 없다. 스톡피시는 아이슬란드나 스칸디나비아반도 이외의 지역에서는 섣불리 따라 하기 힘든 방법이다. 왜냐하면 이 방법으로 스톡피시를 만들려면 한랭한 기후와 온화한 기후가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소금을 사용하지 않고 장시간 볕에 말려, 망치로 수십 수백 번 두드린 다음 하루 넘게 물에 불려야 겨우 요리할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 사가의 하나인 『대머리 그림의 아들 에길의 사가』에는 9세기 노르웨이에서 제조해 잉글랜드로 수출했다는 스톡피시 무역이 묘사돼 있다.
스톡피시는 뛰어난 보존성이 장점이다. 심지어 소금에 절인 청어와 비교해도 보존 기간이 훨씬 길다. 통상 소금에 절인 청어의 유통기한이 1년 정도인 데 반해, 스톡피시의 경우 보존 상태가 좋으면 5년도 넘게 보관할 수 있다. 게다가 수분을 빼고 바짝 말린 덕분에 무게가 가볍고 부피도 적다. 이런 장점 덕분에 스톡피시는 먼 바다로 항해할 때 비상식량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참고로 아이슬란드인의 사가 『붉은 에이리크의 사가』와 『그뢴렌딩가 사가』에 따르면, 바이킹은 콜럼버스보다 500년 정도 앞선 1000년 전후로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고 한다.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바이킹 리더는 붉은 에이리크의 아들 레이프 에이릭손인데, 오늘날 미국에는 ‘레이프 에이릭손의 날(Leif Erikson Day)’이라는 기념일이 있다. 10월 9일로 레이프 에이릭손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날을 기리기 위해서다. 다만 ‘레이프 에이릭손의 날’은 국경일이 아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날을 기념해 10월 둘째 주 월요일을 국경일로 정한 것과 대조적이다.
바이킹의 식량 문제를 해결해준 기특한 먹을거리는 바로 ‘스톡피시’였다. 이렇게나 뛰어난 상품을 이재에 밝은 상인들이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상인들 눈에 스톡피시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보였다. 노르웨이의 로포텐 제도의 스톡피시는 노르웨이 남서부 베르겐에서 곡물과 거래되었다. 그리고 10~13세기 무렵에는 독일 상인들이 베르겐을 찾아와 거래했다. 1350년 무렵 한자동맹은 베르겐에 사무소를 설치했다. 비슷한 시기인 14세기 중반에 한자동맹은 스톡피시 무역을 독점했다. 이 독점이 노르웨이 왕국과 국민에게 어느 정도의 이익을 가져다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스톡피시 덕분에 국제무역 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고 시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참고로 베르겐에 있던 한자동맹 사무소 문장에는 독수리와 왕관을 쓴 스톡피시가 그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