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빨간 밥차
이선구 지음 | 벗나래
사랑의 빨간 밥차
이선구 지음
벗나래 / 2019년 12월 / 222쪽 / 13,500원
유년의 결핍이 가져다준 시선 ‘밥’
유치장에 구금된 어머니 어머니는 아이를 다섯이나 둔 젊디젊은 과부였는데,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나를 데리고 서울살이를 시작하셨다. 어머니는 매일 시장에 나가 바닥에 떨어진 배추 시래기를 모아, 못 쓰게 된 겉 부분은 떼어버리고 웬만큼 쓸 만한 것만 건져서는 그것으로 국밥을 만들어 노점에서 장사를 하셨다. 말이 좋아 노점이지 낡아빠진 드럼통 위에 송판을 깔고 서서 먹는 시래기 국밥집이었다. 이 드럼통은 낮에는 밥상이 되고, 밤이 되면 안방이 되었다. 드럼통 안에 연탄을 피운 뒤 그 위에 송판을 깔면 딱 안방 아랫목이 되었고, 송판 위에 요를 깔면 그대로 잠자리였다.
어느 날 어머니는 추위를 면할 생각으로 연탄불 위에 불쏘시개를 더 넣으셨고, 나는 곧 곯아떨어졌다. 자면서도 왠지 다른 날보다 바닥이 더 뜨겁다고 느껴지는 순간, 어머니가 나를 깨우셨다. 불쏘시개가 드럼통을 덮고 있는 송판에 옮겨 붙으면서 이부자리를 홀랑 태웠던 것이다. 한순간에 큰불이 나고 말았다. 당시에는 불이 나서 소방차가 출동하면 화재를 낸 사람이 벌금을 물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벌금을 낼 돈이 없었다. 어머니는 연신 고개를 수그리며 사정하고 빌었지만, 법은 없는 사람들의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았다. 그대로 어머니는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 갇히셨다.
졸지에 나는 ‘어린이 노숙자’가 되었고, 그때부터 혼자 단단해져 갔다. 어쩌면 그때가 내 인생에서 쌀과 밥을 얻으러 다니는 앵벌이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학교에 갈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눈만 뜨면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당시 논밭이었던 불광동 냇가에서 올챙이를 고무신에 떠다가 미동초등학교 앞에서 팔기도 했다. 잘 곳도 없는 신세, 남의 집 처마 밑이나 창고에서 자는 일이 허다했다. 그렇게 한 끼를 먹고 나면 유치장으로 달려가 어머니에게 내 활약상을 자랑했다.
초대받지 않은 하객 / 불량소년이 금란교회로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그려보라고 하면 구두닦이나 신문팔이에 영락없는 노숙자 꼴이었다. 밥벌이, 돈벌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소위 도둑질을 빼고는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가장인 어머니는 밥벌이를 위해 늘 밖에 나가 계셨다. 어머니가 아실 리 없으니 나는 자연히 학교에 안 가는 날이 많아졌다. 노고산 자락 철길이 있던 동네에는 나뿐만 아니라 소위 넝마주이촌의 불량 청소년이 많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는 동네 형들과 곧장 어울려 지냈다.
그날도 어김없이 형들을 따라나섰다가 해 질 녘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나를 꽉 잡더니 처마 기둥에 나를 묶고는 때리셨다. “애비도 없이 고생하며 널 키웠는데, 학교에 안 가고 나쁜 놈들하고 어울려 다녀? 오늘 너 죽고 나 죽고 같이 죽자. 더 살아서 뭐하냐!” 나는 소리 내어 흐느끼면서 싹싹 빌고 또 빌었다. “엄마,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진짜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 용서해주세요. 잘못했어요, 엄마.” 그날 밤 어머니나 나나 쉽게 잠이 들지 못한 채 아침이 왔다.
어머니는 교회에 다닌다는 동네 누나들에게 물어 인근의 금란교회로 나를 데려가셨다. 당시 어머니는 불교 신자셨는데 말이다. 그날이 마침 부활주일이었다. 처음 간 교회에서 나는 소위 문화 충격을 받았다. 모든 아이에게 달걀을 나눠주었는데, 알록달록한 색깔의 예쁜 달걀을 보는 순간 어찌나 신기하던지 단번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더욱 나를 사로잡은 것은 유년 주일학교의 여자 선생님이었다. 상냥하게 노래를 가르쳐주시는 모습이 얼마나 예쁘고 따뜻하던지 대번에 나는 교회에 적응해버렸다. “선생님! 저는 이제 집도 싫고 학교도 싫고, 교회에서 살래요.” 그 후부터 정말 나는 툭하면 교회에 가서 살았다. 그 교회에 3년 정도 다녔다. 살던 동네가 모두 철거되어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번번이 죽다 살아나다 이름뿐이었던 아버지가 호적에 올린 내 생일은 12월 25일이다. 구세주의 탄생일인 크리스마스에 내가 태어났으니, 주변 사람들은 출생신고부터 이미 나는 구원받은 자녀라고 말하며 웃는다. 그래서일까. 나는 정말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학창 시절 내내 나는 직접 학비와 생계를 책임졌다. 한동안은 학교에 가기 전에 신문 배달을 했다. 빈 병을 수집해서 파는 고물장수도 해보았고, 껌, 볼펜 등을 가득 담은 가방을 들고 버스에 올라 파는 일도 했다. 학교는 야간 중ㆍ고등학교를 다녔다.
당시 천막으로 지은 집에 살았다. 낮에는 날품팔이 장사를 하고 밤에 학교까지 다녀오면 그야말로 몸은 천근만근 녹초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연탄 가스를 마셔 죽다 살아났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다방 같은 곳을 돌아다니며 껌, 볼펜, 개비 담배를 팔았는데, 불량배를 만나 많은 사람 앞에서 중죄인처럼 뺨을 맞았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비참한 일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참을 수 없는 울화와 서러움으로 무작정 걸었고, 한참 걷다 보니 제1한강교 위였다.
나는 모든 것이 부질없이 느껴져 다리에서 뛰어내리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그때 내 안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는 붙들리라.” 나중에 알고 보니 이사야 41장 1절 말씀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주변을 돌아봐도 내게 가까이에서 그런 말을 들려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멍하니 있다가 마음을 추스른 후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비가 오면 나는 설교를 한다 중학교 2학년 여름쯤 신림동 철거민촌으로 이사를 한 나는 장재덕 전도사님이 개척하신 작은 천막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그런데 장대비가 그치지 않는 날이면 전도사님은 불어난 개울을 건너지 못해 교회에 오지 못하셨다. 발만 동동 구르던 전도사님은 개울 건너에 서 있는 내게 소리치셨다. “선구야! 오늘은 네가 선교해!” 그런 날은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나이는 어려도 교회의 출석 교인 중에서는 꽤 고참 축에 끼었으니 전도사님의 뜻을 거스르기도 쉽지 않았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할 수 없이 전도사님 대신 앞으로 나가 강대상을 겸하고 있던 보면대 앞에 섰다.
설교라고 해봐야 쪽복음서를 들고 말씀을 읽은 후 내 느낌을 말하는 정도였다. 그런 일이 몇 번 있다 보니 어르신들은 나를 위로한다며 강대상에서 내려오던 나를 향해 ‘작은 이 목사’라고 불러주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목사라는 그 호칭이 아주 싫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부터 이미 하나님께서는 내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기시기 위한 출애굽 광야의 계획을 시작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사업의 불길이 타오르다 중ㆍ고등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사회로 뛰어들었고, 제대와 동시에 결혼했을 때 내 나이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나는 신촌에 터를 잡고 은성가구라는 인테리어 가구점을 운영하게 되었다. 다행히 수입이 좋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소규모 주택업자인 선배의 제안으로 집 장사를 시작했다. 거기서 집 짓는 기술을 배웠고, 어느 정도 사업이 안정되자 나는 독립해 나왔다. 강남에 ‘신일부동산’을 차린 나는 집을 짓고 파는 단독 사업을 시작했다. 그때는 땅만 파도 일명 복부인들이 몰려 분양이 되는 호황기였다. 내친김에 건설 업체를 인수해서 빌딩 건축까지 사업을 늘려나갔다.
한창 일이 잘 풀리면서 돈 버는 재미에 푹 빠진 나는 미친 듯이 사업에 몰두했고, 머지않아 내 명함에는 13개 단체명이 적힌 건설 회사의 회장이라는 직함이 새겨져 있었다. 의식할 새도 없이 내 삶은 방만한 쾌락으로 물들어갔다. 일주일에 세 번은 골프를 치러 필드에 나갔고, 틈만 나면 해외여행을 다녔다. 노상 고주망태가 되어 가정을 등한시하니 처가 식구들이 아내에게 이혼을 종용할 정도였다.
한편 아내는 고지식하고 순박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아내가 나를 보더니 간절한 눈빛으로 부탁을 했다. 결혼한 지 3년이 다 되도록 아이가 없다가 이제 막 첫아들 동연이를 출산했을 무렵이었다. “동연 아빠, 나 교회에 나가고 싶어요.” 아내의 말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목사님을 주례로 모시고 결혼식을 했던 우리 부부였다. 아내의 한마디에 문득 생각하니, 내가 교회를 나간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사업한답시고 허랑방탕한 행실로 얼룩진 생활을 하다 보니 아내에게 미안한 일이 너무 많았다. 힘없이 말하는 아내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내를 인근 교회에 데려다주면서 나도 다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부부 동반으로 교회에 나가니 늘 일꾼이 모자란 교회에서는 나를 성가대장으로 임명했다. 어느 정도 굵직한 건설 업체도 운영한다고 하니 제법 좋은 일꾼이 되겠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그런데 교회에 매주 나가고 성가대장이라는 직책을 수행하면서도 내 안에는 믿음이 없었다. 나는 다시 교회와 멀어졌고 그때부터 수년 동안 교회와 담을 쌓은 생활이 계속되었다. 어쩌면 사업은 핑계였다. 세상 쾌락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거리에 차려진 하나님의 밥상
한국신장협회를 세우다 한창 돈을 잘 벌 때도 나는 이름뿐인 집사이긴 했지만, 평소에도 뭔가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늘 있었다. 그래서 사회사업을 하는 라이온스클럽이나 청년회의소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하였다. 귀갓길에는 늘 ‘사랑의 꽃다발’이라는 기독교 방송의 라디오를 들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차에 타자마자 습관처럼 주파수를 맞추었는데, 마침 내 마음을 붙드는 사연 하나가 방송에서 흘러나왔다. “제 남편이 목사인데 신장병으로 강단에서 쓰러져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어요. 제발 남편을 살려주세요.” 주종태 목사의 사모라는 분의 사연이었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바로 방송국 PD에게 전화를 걸어 그분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알아냈다. 먼저 통화를 하고 즉시 차를 돌려 찾아갔다.
도곡동 시장 안으로 들어가자 작은 교회가 나왔다. “아까 전화 드렸던 이선구라는 사람입니다. 목사님은 어디 계신가요?” “아, 네. 투석하러 가셨습니다.” 사모님과 함께 근처의 세브란스병원으로 목사님을 만나러 갔다. 투석실이라는 곳에 난생 처음 들어간 나는 그만 충격을 받고 말았다. 하루하루 힘겹게 투석을 받으며 언제 자신을 삼킬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와 싸우는 사람들을 살려내고 싶었다. 마침 내게는 돈이 있었기에, 아예 신장 재단이나 협회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고, 사재를 출연했다. 많은 분이 수고해준 결과 1990년 5월, 한국신장협회 조직에 착수했다. 물론 처음부터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당시에는 법적인 제약이 많아서 뇌사자 장기기증 관련 법부터 시작해 5년 동안은 전국을 돌며 캠페인과 강연도 하며 뇌사자와 생존자의 장기기증에 대한 텃밭을 넓혀 나갔다.
빈손으로 쫓겨나다 그런데 한국신장협회 회장 일은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도중에 그만두어야 했다. 내가 세운 신장협회에서 나를 밀어내려고 일을 꾸미는 사람들이 수시로 협박을 해왔다. 처음에는 전화로 협박을 하더니, 딸을 납치하려고까지 했다. 사실 그전까지는 음지에서 불법으로 장기를 사고파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우리 협회가 진짜 환자만을 위해 일을 하니, 비교가 되는 그들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면서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결국 협회 이사들이 회장과 함께 사임하고 몸만 나가는 것으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모두가 각자 출자한 재산을 돌려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나왔다. 내가 설립한 신장협회였지만 이후에는 아예 관심 자체를 끊어버렸다. 그 일로 나와 가족들은 모두 크나큰 상처를 받았다.
모델 하우스의 화환, 성스러운 성이 되다 그 뒤 IMF 때 나도 건설기업의 파산 도미노에 휘말렸다. 수많은 자금을 운용하던 회사가 순식간에 빚더미를 안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참담했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했고 나도 그런 생각을 수없이 했다. 깊은 절망에 빠져 신음하고 있을 때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깨달음이었다. 손에 움켜쥐고자 하는 것은 언제라도 다시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또다시 무너져 막막한 상실감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일어서야 했다.
2006년 ‘사랑의쌀나눔운동본부’를 설립했다. 시범적으로 모델 하우스 화환부터 쌀로 바꿔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화환을 내걸어야 할 일이 있을 때 사랑의 쌀을 기증하는 방법으로 바꾸는 운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한주택건설협회와 주택산업연구원, 대한주택보증 등 주택 건설 기관이 함께 앞장섰다. 그러자 운동본부의 좋은 취지를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곳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결혼식이나 사무실 이전 등의 개업식에서도 화환 대신 쌀을 챙겨 기증해주면, 곧바로 기증받은 지역의 장애인 가정이나 독거노인, 결식아동 등을 도울 수 있는 시설에 그 쌀을 나눠 주었다.
사랑의쌀나눔운동본부, 봉사의 본부 쌀을 모으는 방법은 다양하다. 개인과 단체의 각종 행사가 모두 대상이 된다. 개인의 결혼식, 환갑, 칠순, 고희, 상조 등의 경조사 때 꽃 화환 대신 쌀 화환으로 전환해 쌀을 모으게 하여 기증받는다. 또는 쌀독에 쌀을 기증해서 쌀을 채우는 방법도 있고, 아예 쌀값을 현금으로 후원해도 좋다. 기업 및 단체들의 창립 기념일이나 사무실 이전 기념식, 공장 등 각종 회사 건축물의 준공식 때도 쌀 화환을 보내도록 권유한다. 연예인들의 공연 축하 때 쌀 화환이 가장 많이 모이기도 한다.
운동본부의 1년 계획과 그에 따른 일정은 숨 돌릴 틈 없이 빼곡하다. 1월과 2월에는 신정과 구정을 기념해 사랑의 떡국을 나눠 주고, 3월에는 후원 회원들을 위한 명사 초청 강연회를 연다. 4월에는 자원봉사자와 후원자들에 대한 감사 나눔의 날, 5월에는 어버이 행사로 합동 팔순 잔치, 6월에는 자선 바자회를 진행한다. 7, 8월에는 삼계탕 나눔 잔치, 9월에는 송편 나눔 잔치를 한다. 10월에는 밥차 자선 콘서트를 열고, 11월에는 나눔대상 시상식을 연다. 12월에는 사랑의 김장나눔 행사를 갖는다. 이 일들을 위해 ‘사랑의빨간밥차’와 ‘지구촌사랑의쌀독’을 운영하고 있다. 100개 이상의 어려운 시설들을 지원하고 돕기 위해 250여 개의 착한 사업장들과 1,80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십시일반으로 돕는 독지가들의 후원이 힘이 되어주고 있다. 또한 수백 명의 기도 동역자들이 운동본부의 사역을 위해 합심하여 기도해주시니 감사하고 뿌듯하며 뭉클하다.
왜 하필 노숙인들인가 “목사님! 왜 노숙자들 밥을 줘서 술 먹게 하고 일 안하게 만들고 게을러지게 합니까?” 처음 내가 서울역에서 노숙인들을 위한 밥차를 운영하게 되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내게 하던 비난 섞인 질문이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눈살 찌푸리는 풍경은 딱 하나였다. 노숙인들이 소주를 먹고는 술김에 행패를 부리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꾸준히 밥을 먹이고 치료해주면서 계몽하고 다독인 결과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당면한 문제나 불만을 해결해주고 사랑으로 감싸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는 서울역에서 그런 풍경을 찾아볼 수 없다. 그네들이나 우리나 똑같은 사람이다. 처음부터 노숙자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관심이 있다면 무엇이든 도울 수 있다. 단지 관심이 적거나 없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