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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 헌트 지음 | 생각의힘
언더그라운드

윌 헌트 지음

생각의힘 / 2019년 8월 / 351쪽 / 17,000원





그리로 내려가다



16살의 여름, 나는 프로비던스에 있는 우리 동네에서 버려진 기차 터널을 우연히 발견했다. 입구는 치과 뒤쪽에 수풀 더미 아래에 감추어져 있었고, 입구 위 콘크리트에는 ‘1908’이라는 준공 연도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친구들 몇몇과 함께 그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신발이 진흙 바닥에 절퍽거렸고 공기도 습했다. 천장에는 종유석이 매달려 머리 위로 물을 떨어뜨렸다. 중간쯤 갔을 때 우리는 겁도 없이 손전등을 껐다. 어둠에 갇힌 친구들이 소리를 질러대 메아리를 만들었지만, 나는 터널의 완벽한 어둠을 몸으로 느끼며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움직인다면 땅에서 곧바로 둥둥 떠오를 것만 같았다. 그해 여름, 나는 수시로 장화를 신고 터널로 들어갔다. 특별히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후로 몇 해가 지났고, 땅 아래 세상으로 걸어 들어갔던 그 시절 일은 머릿속에서 까맣게 지워졌다. 프로비던스를 떠나 대학에 진학했고 그렇게 내 갈 길을 갔다. 그러나 터널과 맺은 오랜 인연이 아주 끊어진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땅 아래 세상에 자석처럼 이끌리는 괴짜나 몽상가, 환상을 좇는 무리에게 알 수 없는 매력을 느꼈다. 어둠 속으로 내려가면, 내 마음처럼 굴러가지 않는 지상 위의 삶에 어떤 종류의 돌파구를 찾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여러 해에 걸쳐 이런저런 연구 재단을 설득했고 그다음에는 각종 잡지사나 출판사를 부추겨 땅 아래 세상을 조사할 기금을 모았다. 나는 그 돈으로 세계 곳곳에 흩어진 지하 공간을 탐험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돌로 만든 지하 묘지나 버려진 지하철역, 성스러운 동굴 그리고 핵 벙커 등을 탐험했다. 처음에는 순전히 개인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시작한 여행이었지만, 지하로 내려가는 횟수가 늘어나고 지하 풍경의 반향에 내 마음의 주파수가 공진되면서 더 많은 보편적인 이야기가 나타났다.

그렇게 내 안에서 작은 균열을 만들며 천천히 틈을 넓히던 지하세계는 어느 날 별안간 내 발밑에서 뚜껑이 열리듯 갈라졌다. 뉴욕으로 이주하고 맞은 첫 번째 여름, 그 일은 시작되었다. 어느 밤늦은 날 로어 맨해튼의 한 지하철역 승강장에 우두커니 서 있는데 열차가 들어와야 할 철로 저쪽에서 낯선 형체가 보였다. 이어서 젊은이 둘이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는데, 헤드램프가 달린 헬멧을 쓴 그들의 얼굴과 손은 검댕이로 덮여 며칠 동안 깊은 동굴 속에서 살다 나온 것만 같았다. 그들은 선로를 따라 잰걸음을 옮기더니 바로 내 앞에서 승강장으로 기어 올라와 순식간에 계단 위로 사라졌다. 그날 밤 나는 집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라 이마를 창틀에 대고 차창을 입김으로 뿌옇게 흐리면서 시가지 아래에 숨겨진 벌집처럼 짜인 비밀 통로들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헤드램프를 매단 그들은 도시 탐험가로, 땅 아래에 놓인 비밀스러운 구역을 재미로 들락거리는 엉성한 조직의 회원이었다. 그들 왕국에는 여러 종류의 부족이 공존했는데, 도시가 잊은 장소의 당당했던 과거 위풍을 기록하는 역사학자도 있었고, 뉴욕이라는 기업화된 공간에 대한 상징적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금지된 구역을 찾아 침입하는 행동가도 있었으며, 도시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곳만 골라 시설과 무대를 설치하여 은밀히 퍼포먼스를 벌이는 예술가들도 있었다. 뉴욕에 온 처음 몇 주 동안 나는 조금은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밤늦도록 잠을 못 이룬다는 핑계로, 숨겨진 장소를 찍은 탐험가들의 사진을 자꾸만 뒤적였다. 어느 날 어떤 탐험가의 기록을 조사하던 나는 한 장의 사진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프로비던스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며 드나들었던 터널이었다.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단선 철도의 입구 위에 새겨진 ‘1908’이라는 숫자는 사진에서도 선명했다. 이렇게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옛 터널과 만나고 나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사진을 찍은 사람을 확인해보니 스티브 덩컨이라는 탐험가였다. 그는 땅 아래 세상으로 나를 이끈 첫 번째 안내자가 된다.

우리는 어느 오후 브롱크스로 향하던 답삿길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스티브는 낡은 하수도관을 둘러볼 계획이었다. 스티브는 컬럼비아 대학교 1학년 때 캠퍼스 아래에 어지럽게 뚫린 증기 터널을 몰래 들락거리며 탐험 행각을 시작했다. 어느 날 밤, 벽 안에 설치된 환기구를 낑낑거리며 통과하던 그가 우연히 도달한 곳은 과학 장비를 주조하느라 어수선해진 방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구체화하기 전 필요한 장비를 보관하던 창고였다. 방 한가운데 놓인 둥근 형태의 초록색 기계는 입자가속기의 원형으로, 우리로서는 알 도리가 없는 은밀한 역사의 단편을 보여주는 생경한 보물이었다.

정확히 그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자석과도 같은 어떤 강렬한 힘에 이끌린 스티브는 즉시 공학에서 도시 역사로 전공을 바꿨다. 그리고 공부하다 답답함을 느낄 때면 열차 터널로 기어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그는 방수복 끈을 단단히 조인 채 본격적으로 하수구를 휘젓고 다녔으며, 급기야는 현수교의 까마득한 꼭대기까지 기어올라 그곳에서 도시의 전경을 사진에 담았다. 몇 해를 그렇게 보낸 스티브는 어느덧 이 도시의 인프라를 시시콜콜한 구석까지 손바닥 들여다보듯 꿰는 자칭 재야역사가 겸 사진작가가 되어 있었다. 그날 오후 우리는 배수구 사이를 유령처럼 휘젓고 다녔다.

그 후 어느 여름날 아침, 나는 125번가 근처에 있는 굵은 철사를 얽어 만든 울타리에 난 틈새를 통해 터널 입구로 들어갔다. 칠흑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터널 안은 사물을 제대로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둑했다. 나는 고즈넉한 기분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치 꿈속 같았다. 중간 지점에 다다랐을 때 거대한 벽화가 나타났다. 터널과 이름이 같은 프리덤이라는 화가가 그렸는데, 길이가 30미터가 넘었다. 반대편 벽에 서서 그림을 바라보고 있자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림이 빛에 흔들리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터널 저쪽에서 열차의 거대한 전조등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벽을 등진 채 웅크리는데 발밑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강렬한 빛줄기와 돌풍이 몰아치더니 우르릉거리는 굉음의 진동이 갈비뼈를 타고 전해졌다. 나와 철로 사이에는 5미터 공간이 있어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흥분과 두려움에 웅크리고 있던 몸과 마음이 후드득 떨렸다. 그날 오후 터널을 빠져나와 허드슨강 근처의 담장을 타고 넘는 순간, 나와 이 도시의 관계는 변하기 시작했다. 지상에서 나는 직장과 집만 오가며 한정된 경험의 궤도를 맴도는 쳇바퀴 속 존재였다. 그렇지만 터널로 들어간 순간부터 나는 주어진 영역의 한계를 벗어나 새롭고 본능적인 방법으로 도시와의 인연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후 어느 날 밤 “보여줄 게 있어.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돼.”라고 스티브가 말했다. 새벽 2시쯤이었고 우리는 브루클린 어딘가에서 열린 파티를 빠져나오던 중이었다. 스티브는 지하철역으로 나를 이끌더니 작업자 전용 통로로 데려갔다. 그의 뒤를 바짝 따라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어둠 속에서 놓쳐버리고 말았다. 저쪽에서 그의 목소리만 들렸다. 벽에 있는, 그러나 보이지 않는 문을 통과해 어디론가 들어갔다는 것을 눈치로 알 수 있었다. 나도 허공을 더듬어 어둠에 싸인 곳으로 들어갔다. 그 성스러운 공간은 메아리 효과가 대단했고 겨우 얇은 막 몇 개로 평범한 생활과 분리되어 있었다. 외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나를 방 한가운데로 데려간 스티브는 손전등으로 바닥을 비추었다. 120x180센티미터 정도의 직사각형 세라믹 타일로 된 격자가 먼지에 뒤덮여 있었다. 타일에 입김을 불자 지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뉴욕 지하철 노선도였는데, 도시 어디를 가건 정거장 벽에서 볼 수 있는 지도였다. 그런데 그 지도는 익숙한 랜드마크가 아닌, 볼 수 없는 지점들만 골라 보여주고 있었다. 뉴욕을 뒤지고 다니는 베테랑 도시 탐험가들은 거기에 사진을 덧붙였는데, 그런 식으로 하수구, 송수로, 유령 정거장이나 일반 사람들의 시야에서 배제된 또 다른 장소의 위치를 표시해놓고 있었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보이지 않는 장소에 감추어진 지도를 통해 이 도시의 보이지 않는 지점들을 유심히 보고 있자니, 말할 수 없는 희열이 밀려왔다.

그 순간, 도시 아래 먼지로 뒤덮인 깊숙한 지점에 서서 나는 내가 지하세계와 맺은 인연에 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너무도 많다고 생각했다. 오래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토스카나를 산책하던 중 커다란 너럭바위 위를 어슬렁거리다가 어떤 동굴의 입구에 다다른 적이 있다. 동굴 어귀의 그늘 아래 서서 얼굴에 서늘한 미풍을 느끼며 어둠 속을 응시하던 그는 잠시 망설였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실랑이를 벌였다. 두려움과 욕망, 즉 컴컴한 동굴이 주는 위협적인 두려움과 저 안에 어떤 경이로운 것들이 있을지 모르니 한번 알아봐야겠다는 욕망이었다.”

1980년대, 보르네오섬의 구눙물루 국립공원에 있는 사라왁 석실을 탐험하는 과정에서 어떤 탐험가는 축구장 17개를 합친 정도의 크기인 동굴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었다. 끝도 없는 어둠 속을 헤매던 그는 일종의 마비 증세를 일으켰고, 결국 파트너들의 도움을 받아서 빠져나와야 했다. 동굴 탐험가들은 이처럼 어둠으로 인한 공황발작을 “황홀증”이라 불렀다. 좁은 공간에 갇혔다는 생각이 들면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지하 석실에 갇혀 팔다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고 빛이 들지 않는 상태에서 산소마저 희박해지면 갖가지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계관시인 에드거 앨런 포도 폐소공포증을 실감 나게 재현했다. 단편 〈때 이른 매장〉에서 그는 지하에 갇히는 기분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 어떤 것도 … 이보다 더 몸과 마음을 파괴하는 지독한 고통은 없을 것이다. 폐를 압박하는 참기 힘든 고통과 축축한 땅이 내뱉는 숨 막히는 기운, 좁은 관 속에 누인 몸에 꽁꽁 감긴 수의의 감촉, 밤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절대적 어둠, 짓누르는 바다 같은 침묵…” 저 아래 지하의 공동(空洞)에 들어서면 완전한 공포까지는 아니라 해도 반사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불길함 속에서 천장과 벽에 포위되는 망상에 휩싸이게 된다.

결국 우리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죽음이다. 컴컴한 다크존에 대한 혐오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의 운명에 대한 두려움으로 수렴된다. 동굴 입구에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우리는 반사적으로 언젠가 닥칠 죽음의 징후를 느낀다. 다시 말해 그 순간 우리 뇌리를 스치는 것은 자연선택이 우리로 하여금 피하도록 설계한 ‘단 한 가지’다. 그러나 지하세계 입구 언저리에 웅크리고 앉은 우리는 종내 내려가고야 만다. 토스카나를 걷던 그날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결국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

지난 몇 해에 걸쳐 나는 뉴욕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 흩어진 후미진 곳을 두루 섭렵하며 지하에 펼쳐진 풍경과 우리의 뒤엉킨 관계의 실타래를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현대 도시의 아래에 놓인 음습한 낭하에서 나는 더 오래되고 넓은 공간으로 들어섰고, 마침내 천연 동굴의 태곳적 어둠에 이르렀다. 우리가 발밑에 있는 공간을 의식한다는 것은 저 아래 펼쳐진 세상을 몸으로 느낀다는 뜻이다. 물리적인 지하세계에 있는 터널과 동굴 쪽으로 시선을 돌릴 때, 우리는 현실을 이루고 있는 모든 보이지 않는 힘에 우리의 파장을 맞추게 된다. 지하세계와 맺는 관계는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방으로 통하는 문을 밀어젖힌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 볼 수 없는 것을 보기 위해 내려간다. 오직 어둠 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빛을 찾아 그곳으로 간다.



길을 잃은 자들



2004년 12월 18일 저녁, 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어느 작은 마을에서 장뤼크 조슈아-베르지라는 남성이 버려진 버섯농장에 있는 굴속으로 들어갔다가 길을 잃었다. 그는 마흔여덟 살로, 동네 보건소 관리인으로 일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집에 아내와 열네 살 난 아들을 남겨둔 채, 그는 위스키 한 병과 수면제 한 움큼을 주머니에 넣고 차를 몰아 산속으로 들어갔다.

버섯농장의 커다란 터널 입구를 지나 랜드로버 지프를 몰고 들어간 뒤, 차에서 내려 손전등을 켜고 어둠 속으로 비틀비틀 걸어 들어갔다. 터널은 원래 분필 광산이었던 석회석 구릉지에 조성한 갱도였는데, 미로 같은 8킬로미터 길이의 통로와 비틀린 샛길, 막다른 길 등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장 뤼크는 내키는 대로 통로를 따라 걷다 방향을 틀었고 조금 가다 또 방향을 틀었다. 그러다 길을 잃었다. 그는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당황하여 손을 더듬고 휘저으며 출구를 찾았지만 허사였다.

2005년 1월 21일 오후, 장뤼크가 터널로 들어간 지 정확히 34일이 되던 날 동네 십 대 사내아이 세 명이 버려진 버섯농장을 탐험하기로 했다. 입구를 지나 어두운 통로를 몇 발짝 걸은 지 얼마 안 되어 아이들은 사람이 없는 랜드로버를 발견했다. 운전석 문은 열려 있었다. 곧바로 경찰에 연락했고 즉시 수색대가 파견되었다. 90분 뒤 입구로부터 불과 180미터 떨어진 공간에서 그들은 장뤼크를 찾아냈다. 유령처럼 핏기 없는 모습으로 누운 그는 해골처럼 말랐으며 수염이 더부룩하게 자라 있었다. 그래도 그는 살아 있었다. 이후 며칠 동안 그의 사연이 언론에 소개되면서 장뤼크는 “암흑 속의 기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기자들은 그가 버섯농장에서 보낸 몇 주 동안의 이야기를 신이 나서 보도했다.

길을 잃었을 때 나타나는 알 수 없는 양가감정에 관한 장뤼크의 이야기를 접한 순간, 몇 해 전 파리에서 저지른 반갑지 않은 추억이 되살아났다. 나는 두 친구 셀레나와 오사와 함께 18세기에 살았던 어떤 사나이의 흔적을 따라가 보기 위해 카타콩브로 들어갔었다. 그는 채석장으로 들어갔다가 실종되는 바람에 유명해진 사람이었다. 발 드 그라스 병원의 경비였던 필리베르 아스페르라는 이 육십 대 남성은 1793년 근처 수도원의 땅굴을 찾기 위해 지하로 내려갔다. 사르트뢰즈 수도원에서 만든 고급 증류주가 비밀 땅굴에 보관되어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필리베르는 결국 길을 잃었고 그의 주검은 11년 뒤 상미셸 가 아래에 있는 한 감실에서 발견되었다.

12월 어느 날 밤, 나는 전문적인 광대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 셀레나와 오사와 함께 필리베르의 묘지로 갔다가 길을 되짚어 몇 시간 뒤에 밖으로 나올 예정이었다. 저녁 8시쯤 우리는 짧은 행차에 필요한 물품을 작은 가방 하나에 넣었다. 와인 한 병, 빵 한 덩이, 물 한 병이었다. 우리는 입구를 비집고 들어가 300킬로미터가 넘는 미로에 발을 들여놓았다. 앞장서서 길을 찾는 역할은 내가 맡았지만, 돌이켜보건대 안내자로서 나는 너무나도 무능했다. 그때 나는 파리에 막 도착한 터였고 카타콩브도 전에 한 번 왔던 경험이 전부였다. 내가 가진 것은 채석장 지도 한 장이 전부였다.

우리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가운데 모퉁이를 돌고 또 돌면서 벌집 같은 바위 통로를 헤쳐 나갔다. 헤드램프가 벽을 따라 춤을 추었고 발밑에서는 물이 튀었다. 셀레나와 오사는 채석장이 처음이었다. 아마도 한 시간쯤 걸었을 때였다. 우리는 비좁고 천장이 낮은 석실로 들어갔다. 바짝 마른 진흙 바닥에는 갈라진 금이 문양을 새겨놓은 듯 아주 뚜렷했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은 나는 균열 무늬가 미로의 통로를 닮았다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미로 속의 미로였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때쯤이었다. 나는 지도를 꺼냈다. 필리베르의 무덤으로 가려면 어디에서 꺾어야 할지 손으로 짚어보았다. 갑자기 속이 쓰려왔다. 처음부터 입구의 위치를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쯤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둘 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식량과 물은 한정되어 있고, 헤드램프도 벌써 희미해지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나침반도 없었다.

발걸음을 하릴없이 옮기며 나는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셀레나와 오사는 조용히 하라고 핀잔을 주었고, 에너지를 낭비해봐야 도움 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덧붙였다. 생각할 수 있는 목표는 한 가지뿐이었다. 들어왔던 벽의 구멍을 찾아내는 일. 두 사람은 민주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침착하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온 길을 되짚어가되, 헛힘을 쓰지 않도록 바위의 특이한 점이나 눈에 띄는 그라피티, 진흙에 찍힌 발자국 등을 찾아보기로 했다. 교차점을 지날 때마다 우리는 가능성 있는 터널을 전부 살펴본 다음 세 사람 모두가 낯익은 통로라고 동의해야만 그곳을 택하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조바심만 더해질 뿐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우리는 갈수록 진이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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