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

박승숙 지음 | 인물과사상사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

박승숙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9년 7월 / 377쪽 / 18,000원





나를 찾아가다



꼬마 재홍

박제훈은 뒤늦게 독학으로 공부해 공무원이 되었고, 예천으로 발령 받아 한의원집 딸 남기매를 처로 얻어 세 살 터울로 아이들을 낳았다. 둘째 아이가 폐렴으로 일찍 세상을 뜬 그해 11월 15일 셋째가 태어났는데, 훗날 서보라는 예명으로 알려진 재홍이다. 제훈은 재홍이 경기중학교를 거쳐 법대에 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재홍은 아버지가 볼 때는 공부하는 척하다가 아버지가 나가면 몰래 빠져나가 종일 연을 만들며 놀았고, 결국 서울의 삼류학교에 들어갔다.

물론 재홍이 잘하는 것도 있었다. 당시 안성에서 나름 살 만한 가정은 이당 김은호의 그림을 집에 하나씩 걸어놓고 있었다. 재홍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그 그림들을 따라 그리면 보는 사람마다 혀를 내둘렀는데, 그 재능은 제훈에게서 온 것이었다. 하지만 제훈은 아들 중 누구도 ‘환쟁이’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재홍이 중학교에서 포스터를 그려 전국 1등 상을 타와도 모른 체하고 칭찬하지 않았다.

제훈은 재홍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맨날 뺀질대기만 하니 대학에 보내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재홍은 야밤에 금고를 털어 서울로 도망을 갔고, 한참 뒤 그를 보았다는 사람들의 말에 제훈은 아들 친구들 집을 샅샅이 뒤져 재홍의 멱살을 끌고 집으로 왔다. 그런데 재홍은 아버지 앞에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동양화과에 합격했다는 증서를 내놓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기에 결국 첫 등록금을 내주기로 했다. 그렇게 재홍은 1950년 홍대 문학부 미술과 2기 3명 중 1명으로 입학했다.

‘나’는 누구인가?

다시 배지를 달고: 1953년 휴전이 되었고, 홍대는 서울 종로구 누상동으로 자리를 잡았다. 미술과는 얼마 안 있어 종로2가 YMCA 뒤에 있는 큰 창고 건물을 빌려 다시 이전했다. 학창 시절 재홍은 모딜리아니와 고갱을 좋아했다. 당시 미술계에 입문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 당선되는 것이었다. 1954년 가을 어느 날, 교수들이 전 학년을 불러 그동안 작업한 그림을 전부 가져오라고 했다. 국전에 낼 작품을 뽑기 위해 사전 심사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김환기 교수는 재홍의 그림 3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나는 대각선으로 누운 여인의 누드 그림이었고, 또 하나는 테이블에 비스듬히 앉은 나체 여인의 그림이었다. 후자는 모델이 삐쩍 마르고 피부가 거무튀튀해서 보이는 그대로 색감을 살려 그렸는데, 비리디언계의 짙은 녹색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그 물감을 툭툭 안으로 밀어쳐 윤곽선 안쪽의 거무튀튀한 살색과 자연스럽게 섞이도록 해 입체감을 냈다. 김환기가 그 점을 알아보고는 잘 그렸다고 칭찬했다. 또 다른 하나는 정물 그림이었다. 의자에 흰 보자기를 씌우고 마른 해바라기를 여러 개 아무렇게나 던져서 그린 그림이었다. 스승의 반응을 보고 용기를 얻은 재홍은 국전에 세 작품 모두 출품했다. 그중 테이블에 앉은 〈나부〉와〈해바라기〉가 입선이 되어 홍대에서는 유일하게 재홍 혼자 신문에 이름이 올랐다.

도망자, 서보: 휴전 후 유엔군 대부분이 철수한 상태에서 병력 증가가 시급했던 남한은 20대 남자들을 징집하기 시작했다. 장교 요원도 확보해야 해서 정부는 각 대학에서 징집했는데, 장교 훈련 6개월 중 전반기 훈련 3개월만 받으면 전쟁이 났을 경우 현역으로 동원되고 전쟁이 나지 않으면 소위로 복무하다가 제대하게 될 것이라고 선전하여 재홍과 친구들은 지원서를 내고 1954년 가을 광주 육군보병학교에 입대했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가 약속을 어겼다. 지원서를 받아갈 때 했던 말을 뒤엎고 휴전 중인데도 육군보병학교 수료생들을 현역으로 바로 데려가 버리곤 했다. 그래서 재홍은 졸업식 전날 이원용과 함께 도망을 갔다. 도망 중 재홍은 가짜 이름을 만들어 사용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친구 맹인재에게 아호로 쓰게 이름을 2개만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인재는 ‘수헌(樹軒)’과 ‘서보(栖甫)’를 지어준 뒤 알아서 골라잡으라고 했다. 재홍은 서보를 택했다. 그렇게 재홍은 서보가 되었다.

한편 1961년 6월, 박정희 군사정권은 내각 공고 제1호로 병역의무 불이행자 자수 신고 기간을 정해 10일간 접수했다. 이듬해 초 제2차 신고 기간을 정했고, 그 기간 중 신고한 사람이 41만 명에 육박했다. 그해 육군보병학교 수료생들은 정부를 상대로 단체 소송을 걸어 승소해 일등병 만기 제대로 제대증을 받았다. 프랑스에 가 있어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서보는 귀국하자마자 진정서를 내고 국방부의 담당자를 찾아갔고, 간신히 3년 뒤에 만기 제대 통지서를 받았다.

발동을 걸다

안국동파: 1956년 홍대 강사 이봉상이 서보를 찾아와 누가 그림을 가르쳐달라는데 자기는 시간이 없으니 대신 맡아보겠냐고 의사를 물었다. 용돈이 궁해서 승낙을 하고 그 사람이 오라는 안국동 건물로 찾아가니 동덕여자대학교 창립자의 자제였다. 그때 서보는 건물 2층에 큰 교실 2개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탐이 나서 봉상에게 미술연구소를 같이 해보자고 제안했다. 자기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이름만 빌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서보는 자기 학생에게 잘 말해 교실 2개를 무상으로 빌려 ‘이봉상회화연구소’로 이름을 내걸고 학생들을 받기 시작했다.

서울대, 홍대, 이대의 미술과 학생들이 찾아왔다. 하지만 다들 가난했던 때라 첫 달만 수강료를 내고, 다음 달에는 친구를 한 명 끌고 와 그 친구가 수강료를 내는 사이 은근슬쩍 묻혀 배우는 식으로 연구소를 다녔다. 서보는 물감 살 돈이 없으니 작업을 계속할 새로운 방안을 강구해야 했고, 값싼 안료 가루와 정제되지 않은 누런 린시드 오일을 사서 수제 유화물감을 만들어 그림을 그렸다. 서울대 학생이었던 윤명로, 김봉태, 김종학, 이만익은 서보가 알려준 대로 물감을 만들어 연지동에 있던 자신의 학교에 가져갔는데, 그들은 서울대에서 ‘안국동파’ 혹은 ‘안료파’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뭉치고 갈라지고 시끄럽고: 1956년 서보는 홍대 친구 문우식, 김충선, 김영환과 함께 국전에 작품을 출품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따로 ‘4인전’을 열었다. 1년 뒤인 1957년, ‘한국현대미술가협회(현대미협)’라는 새로운 동인이 결성되었고, 이 자리에 ‘4인전’의 친구들이 합류했다. 그런데 서보에게는 아무 말이 없었다. 서보는 자존심에 친구들에게 따지지도 못하고 혼자 속을 끓였다. 현대미협의 첫 동인전은 미국 공보원에서 열렸다. 서보는 그 전시회를 보고 와서 5월 10일 『세계일보』에 <허식과 성실의 교차: 현대미술협회전의 인상>이라는 비평문을 썼다. 그 기사를 보고 김창열, 하인두, 장성순이 서보의 작업실로 찾아와 동인에 참여해주면 좋겠다고 말해주어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자기를 배신한 친구들과 더는 한데 묶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러자 다시 김창열과 하인두가 찾아왔다. 서보는 그러면 몇 가지 조건을 걸겠다고 했다. 우선 세 친구를 동인에서 빼달라고 요청했다. 김창열과 하인두가 서로 눈치만 보면서 곤란해 하자, 그러면 문우식만큼은 얼굴 부딪히고 싶지 않으니 탈퇴를 요구해달라고 했다. 한 발 더 나아가 전시를 봄가을 두 번 개최하는 것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전시회명도 그냥 ‘현대전’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고 의견도 냈다. 두 사람이 알겠다고 말하고 돌아갔고, 결국 문우식이 빠지고 서보가 들어갔다. 마침내 화신백화점에서 제2회 ‘현대전’이 열렸다. 1958년 개최된 ‘현대전’ 3회와 4회는 세간의 주목을 유독 많이 받았다. 4회전 이후 현대미협은 앵포르멜의 대표 주자로 인식되었고, 그 움직임은 서보에게서 시작되었다.

여전히 구상을 그리던 서보는 3회를 준비하며 석불상의 얼굴이 마모된 것처럼 인간상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 작업이 지겹고 하기가 싫어졌다. 도대체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회의감까지 들었다. 짜증이 나서 캔버스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칼 가는 거친 숫돌에 비누칠을 해 그림 위를 마구 문질렀다. 그랬더니 속에 칠해놓은 빨간색이 숫돌에 긁혀 툭툭 튀어나왔다. 창열과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 나가야 하는데 작품 꼴이 그러하니 서보는 ‘에잇!’ 하고 캔버스 위에 물감통을 던졌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려 캔버스를 발로 홱 걷어차고 방을 나갔다. 외출 후 들어와 서보는 불을 켰고, 한쪽 벽에 처박힌 캔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서보는 깨달았다. ‘저거였구나. 내가 하려던 게!’ 캔버스 위에 흩뿌려진 물감이 주인 없는 방에서 스스로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 거기에는 단순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서보는 그 작품을 제3회 현대전에 냈다. 화신백화점 화랑으로 전시회를 보러 온 이세득이 서보를 불러 말했다. “이런 식으로 작업하는 작가를 유럽에서는 ‘앵포르멜’이라고 부른다네.”

당시 서보는 서구의 동시대 미술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이세득이 미셸 타피에의 『선언』이 일본 잡지에 번역되었다면서 보라고 한 권을 가져다주었다. 서보는 자신과 닮은 정서로 비슷한 행동을 했다는 사람들이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급히 펼쳐보았다. 그 선언을 수첩에 베껴놓고 창열에게 넘겨주었다. 워낙 귀한 자료다 보니 동료들이 한 명씩 돌려가며 보았고, 서보 손에 다시 돌아온 건 6개월 뒤였는데, 그때는 이미 동료들이 모두 앵포르멜 작가가 되어 있었다.

제4회 현대전은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제4회 현대전이 앵포르멜 일색으로 전시되자 현대미협 내부에서는 서보를 내쫓자는 모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김창열과 전상수가 반대해 결국 무산되었지만 서보로서는 기분이 나빴다. 그해 말 서보는 윤명숙과 결혼식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동료들의 뒷담화에 실망해 제5회 현대전에는 아예 참여를 하지 않았다.

서보는 모든 것을 잊고 작업에만 몰두하고자 마음을 가다듬었다. 캔버스에 자기를 내동댕이치는 앵포르멜 방식은 어린 치기처럼 느껴져서 좀 더 내향적으로 스며드는 작업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진행 중이던 캔버스의 색이 너무 난잡해 보여 일단 검정색 물감을 덮어보았다. 아래에서 붓 자국이 재미있게 드러나자 이것 봐라 싶어 서보는 뭉쳐 엉긴 검은색 물감 위로 나이프를 툭툭 쳐보았다. 바닥에서 흰색이 슬쩍슬쩍 올라왔다. 알베르토 부리의 작품들에서 본 게 있으니, 서보도 그 위에 마대천을 꿰매 붙여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위에 콘크리트를 부었다. 마대천의 올 사이로 콘크리트가 들어가면 오일 위에 그냥 붓는 것보다 오래 붙어 있을 것이다. 마른 뒤에 다시 채색을 했다.

창열의 주선으로 서보는 제6회 현대전에 다시 참여했고 시멘트 작품도 출품했다. 김환기가 유독 시멘트 작품을 눈여겨보고 갔다. 다음해 갑자기 파리로 가게 된 서보는 현대전에 전시했던 대작들을 둘 곳이 없어 창열과 의논 끝에 경찰전문학교 분교에 작품을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6개월마다 집을 이사하느라고 찾으러 가지 못했다. 창열도 얼마 후 유럽으로 떠나버려 같이 맡긴 작품들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중 서보의 시멘트 작품만 돌고 돌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 기자이자 한국근대미술연구소 소장인 이구열이 소장하게 되어 나중에 서보도 그 작품을 다시 만났다.



나만의 것을 만들다



체념과 포기를 배우다

나만의 작업을 찾아서: 서보는 파리 세계청년작가회의에서 돌아왔을 때, 앵포르멜이 포화 상태에 도달했다고 인지하고 있었다. 서보는 한 인터뷰에서 추상이라는 하기 쉬워 보이는 예술에 너무 많은 사람이 덤벼들고 있기 때문에 이제 예술은 좀 더 정신화되어 작가의 내적 정신생활의 표현이 됨으로써 차별화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아울러 서보는 우리의 토착성을 먼저 정신적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그 ‘토착성’은 성실하게 자기에게 귀의하다 보면 나올 것이니, 우선 자기부터 시끄러운 화단 행적을 지양하고 작업에만 매진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서보는 학교에 사표를 냈다. 모처럼 집에 있으니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길어져 좋았다. 어느새 첫째 아들 승조는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둘째 아들 승호는 네 살이 되었다. 어느 날 형이 학교에 가자 승호는 형이 두고 간 방안지 공책을 몰래 펼쳐 글씨를 써보려고 했다. 연필을 들고 네모 칸에 글씨를 썼는데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삐뚤빼뚤 써서 그런지 칸 밖으로 글씨가 튀어나갔다. 형이 쓴 것과 비교해보더니 다시 시도했지만 여전히 잘 되지 않았다. 어린 것이 홧김에 쓴 것을 지그재그로 휘갈겨 덮어버렸다. 연필심에 걸려 종이가 구멍이 나자 울상이 된 승호는 형이 했던 대로 지우개를 들었다. 힘 조절이 안 되자 지우개질에 종이가 찢어졌고, 결국 어린 것이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방안지의 칸 속에 글자를 넣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그것이 안 되니까 체념과 포기를 하고 만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보에게 옛날 수덕사에서 김일엽을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 섬광처럼 지나갔다. ‘자신을 닦고 비워내라더니, 저렇게 내가 한 짓을 체념으로 다시 지우고 포기하면 나 자신이 닦이고 비워질 수 있는 것일까?’ 서보는 당장 캔버스를 준비해 방안지를 그리고 그 위에 승호가 했던 것처럼 연필질을 했다. 아직은 인위적인 느낌이 나서 이게 맞나 싶었지만, 일단 탐색을 계속해보기로 했다.

서보는 아직 어느 것에도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승호 따라하기’는 그것대로 시도하면서, 재미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닥치는 대로 탐색하고 실험에 옮겼다. 한번은 캔버스를 벽에 걸어 어린 승호를 앞에 세운 뒤 환등기 불을 비춰 실루엣을 땄다. 무엇을 할까 하다가 띠를 둘러보니 사람이 토막 난 것 같아서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이어 아내의 이미지도 실루엣으로 그려 색띠를 두르는 작업을 했다. 그러다 점차 강렬한 원색 줄무늬의 기하학적 화면 구성으로 그림이 바뀌었다. 그렇게 탄생한 그림들에 ‘유전질(遺傳質)’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유전질 작품은 1968년 도쿄국립미술관 ‘한국현대회화전’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1970년에는 서울화랑에서 10점을 골라서 유전질 개인전도 가졌다.

서보는 동시다발적으로 다양한 작품을 했던 1960년대 후반기를 “헛발질하던 시기”라고 회고한다. 서양미술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자부했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일 뿐 자신도 모르게 서양미술 속에 깊이 빠져 있었던 때였다. 다시 서보는 ‘나는 누구인가?’를 물으며 계속 반성하고 고민했다. 그러는 중에 ‘승호 따라하기’가 손에 익기 시작했다. 여러 방식으로 시도하면서 보니,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생체 에너지가 손의 움직임을 따라 그대로 물성으로 체화되는 가장 자기다운 회화였다. 서보는 나중에 자기 고백이자 ‘체험적인 작업’에 이우환의 제안을 따라 ‘묘법’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서로 필요했던 사람, 이우환 / 개천에서 들키다: 서보와 우환은 작가로서 사실 정반대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우환은 개념 미술을 했고, 항상 차분하고 서늘한 미술 비평과 이론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반면에 서보는 책상 대신 화실 바닥에서, 머리가 아닌 몸과 마음으로 화폭에 자기를 뜨겁게 던지는 작가였다. 그렇지만 둘은 네트워크를 공유하며 현실적으로 서로를 도왔다. 한 사람은 지식과 논리로, 한 사람은 감성과 직관으로 부추기면서 정신적으로도 강하게 유대했다. 그러다가 서보와 우환은 작업실에서도 함께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우환은 1972년 명동화랑에서 개인전을 할 때 캔버스 위에 전구를 끼우고 에어브러시로 회색 그림자의 농도를 점차 빼 불이 들어온 것처럼 보이게 작품을 제작했다. 우환이 에어브러시에 익숙하지 않자 허상 시리즈로 단련된 서보가 대신 스프레이 작업을 도와주었다.

1973년 서보는 묘법의 첫 개인전을 무라마쓰화랑에서 열었다. 전시장에 작품을 걸고 시간이 남은 서보는 골목 뒤에 있는 화방을 찾았다.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다양한 미술 재료에 눈이 휘둥그레져 신나게 구경하는데, 문득 8B와 9B 연필이 보였다. 서보는 그때까지 4B가 세상에서 가장 진한 연필인 줄 알고 있었다. 깜짝 놀라 냉큼 그 연필들을 집어온 서보는 곧장 3미터짜리에 작업을 해보았다. 그렇게 힘차고 진한 연필은 처음 보았다. 서보는 완전히 흥분해 작업했고 결과에도 굉장히 만족했다. 다시 같은 해, 그 작품들을 포함해 명동화랑에서 묘법을 선보였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