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왜 나는 진정한 친구 하나 없는 걸까

조은강 지음 | 메이트북스
왜 나는 진정한 친구 하나 없는 걸까

조은강 지음

메이트북스 / 2019년 6월 / 244쪽 / 15,000원





1장 나는 왜 관계가 힘들까?



도대체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 거지?_ 뻣뻣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

나에게 첫 사회생활이었던 초등학교 시절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이것이다. 1학년 미술 시간이었는데 나는 언니가 쓰던 작은 크레파스를 가져왔다. 12색 아니면 많아봐야 20색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짝꿍인 아림이는 36색 아니 50색쯤 되는 커다란 3단 크레파스를 꺼내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걸 보며 나는 아림이에게 “저 색깔 좀 빌려줄래?” 혹은 “크레파스 좀 같이 써도 돼?” 같은 말을 건네고 싶었다. 몇몇 색을 빌려 쓴다면 내 그림이 훨씬 예뻐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말이 죽어도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 애와 나는 아직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은 소곤거리며 서로의 것을 나누어 쓰는데, 나는 그 애의 크레파스를 흘끔흘끔 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내겐 그 순간이 ‘누군가에게 다가가거나 무언가를 부탁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라는 사실의 표본으로 뇌리에 남았다.

나는 확실히 관계 맺기에 젬병이었다. 반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돌다가 선생님이 외치는 숫자에 맞게 모이는 게임을 하면 언제나 혼자 남았다. 누구에게 다가가지도, 누구를 불러오지도 못했다. 엄마가 ‘사람이 붙임성이 있어야지’ 같은 말을 할 때면 먼 외계어처럼 들리곤 했다. 중ㆍ고등학교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그때 주변의 아이들과 장난을 치거나 우스갯소리를 하긴 했지만 한마디로 내겐 ‘단짝’ 친구가 없었다. 매일 만나야 하고 뭐든지 털어놓는, 그런 친밀한 사이를 만들지 못했다. 친구가 되고 싶은 아이,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어도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랐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좀 나아질까 싶었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관계 맺기의 어려움은 계속된다. 이젠 동성 친구뿐만 아니라 이성 친구, 나아가 애인, 인생의 동반자까지 선택해야 하는 과제가 닥쳐온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떻게 다가갈 것인지, 다가오는 사람은 어떻게 대할 것인지 마땅한 대처법을 알지 못한다. 점점 사람 만나기가 두렵고 가벼운 우울 증세까지 느껴진다. 크레파스를 빌리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아이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이 세상에 사는 한 관계의 연속이었다.

문득 나보다 30년은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아빠의 서재에도 언제나 인간관계에 관한 책들이 가득했었음을 기억해냈다. 아빠는 퇴근 후 그런 책들을 꺼내 열심히 읽곤 했다. ‘그렇구나. 평생 배워야 하는 것이구나.’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니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그러다가 관계의 기본이자 힌트 같은 영화를 만났다. 영화 <바그다드 카페>. 이 영화에는 미인도, 대단한 배우도 나오지 않는다. 외모도, 성격도 모두가 조금씩은 부족하다. 영화의 배경조차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사막이다. 카페 주인 브렌다는 특히 무뚝뚝하고 불친절한 여인이다. 그럼에도 우연한 여행자 야스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면서 서서히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간다. 사실 나는 항상 완벽하고 훌륭한 상대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부족한 나를 알아서 채워주고 맞추어주길 기대했다. 물론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가느냐고? 그걸 미리 고민하는 자체가 문제였다.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그때 내가 아림이의 크레파스를 탐냈던(?) 순간은 오히려 나와 아림이가 친해질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가 아니었을까.



2장 좋은 사람에겐 이유가 있어



온라인 인연들_ 블로그에서 인스타그램까지

나에게 최초의 소셜미디어는 블로그였다. 일이 바쁘지 않아 무료했던 어느 날, 나는 남들이 다 한다는 블로그를 만들어보았다. 그냥 뭔가를 끄적거릴, 온라인 일기장의 용도였다. 좋아하는 풍경이나 배우의 사진을 올려놓았고, 좋아하는 한글 단어를 닉네임으로 썼다. 참 소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나를 이웃으로 신청한 그들은 안부게시판에 서로 알고 지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글을 남기며 내가 쓴 글에 간단한 댓글을 달아주었다. 그때 깨달았다. ‘모니터 너머에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나도 이웃들의 블로그에 놀러갔다. 안부 글이나 댓글을 남겼다. 처음엔 예의바르게, 그런데 점점 어이없는 댓글을 내 딴에는 재미로 달게 되었다. 그러다가 내 댓글보다 좀더 독한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어느덧 경쟁이 붙은 이 댓글쟁이들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그저 댓글을 달기 위해 서로의 블로그를 오고가게 되었다. 누군가는 우리들의 댓글 공박이 재미있다며 다른 게시판에 퍼가도 되느냐고 묻기도 했다. 결국 TV 예능프로그램에서 보았던 ‘당연하지’ 게임을 인용한 댓글달기 게임까지 시도해서 무려 100개에 육박하는 댓글을 남기는 기록을 만들었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보여준 놀라운 팀워크였고 온라인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활발했던 블로그 활동이 잠잠할 무렵, 이번에는 페이스북이 등장했다. 블로그보다는 무언가 주최 측의 간섭이 많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페이스북을 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에 일단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친구 신청이 들어왔다. 그런데 뜻밖의 이름이 등장했다. 옛 상사였다. 하지만 함께 일하는 내내 서로가 ‘우린 왜 만났을까?’ 하는 의문을 일게 한 관계였다. 내가 회사를 떠나는 데에도 이분이 크게 일조를 했었다. 그런데, 왜? 웬만하면 친구신청을 다 받아들였지만 그분만은 거절했다.

모르는 사람을 알아가는 것이 블로그였다면 페이스북의 역할은 이렇듯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던 사람들을 다시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위의 에피소드처럼 달갑지 않은 사람이 친구로 추천되는 일이 종종 생겼다. 익명성 아래 까불 수 있었던 블로그와는 달리 페이스북은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누이, 시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놀아야 하는 느낌이기도 했다. 계속 눈치가 보였다고나 할까. 나는 그 점이 불편했다. 슬슬 발을 빼려던 차에 문득 한 가지 기능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사람을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와 펜팔로서 편지를 주고받았던 독일 친구의 소식이 궁금했다. 고 3이 되면서 공부에만 전념해야 했기에 나는 눈물을 머금고 그와의 연락을 끊었다. 고 3이 되면 왜 펜팔 친구에게 편지를 못 쓴다는 것인지 그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나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내 의견을 받아주었다. 그걸 보면 정말 속 깊은 친구였다.

결국 그를 찾아냈다. 어릴 때 얼굴 그대로였다. 메시지를 보냈다. 목요일에 보냈는데 토요일 아침 답장이 도착했다. 어릴 적 꼼꼼하고 정확했던 성격 그대로 내 메시지를 늦게 읽은 이유, 자신의 페이스북 이용 성향, 자신의 현 상황까지 장문의 글을 그 작은 메시지 창 안에 꼼꼼히 담아 보내왔다. 이 친구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겠지만, 그를 찾아준 것만으로 마크 주커버그는 내게 은인이다. 블로그, 페이스북을 거쳐 요즘엔 인스타그램을 이용한다. 1년에 한 번을 못 보는 친구도 그곳에서는 안부를 전할 수 있다.

결국 모든 소셜미디어는 좋은 것을 나누고 싶고, 잘한 것은 칭찬 받고 싶고, 또 아픈 일은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교류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인간다움을 지향하는 목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소셜미디어 활동이 인생의 낭비라고 매도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며 댓글을 확인하느라 눈앞의 사람에게 소홀하거나 사생활을 시시콜콜 생중계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 아닐까. 또 아쉬운 것은 온라인에서 알게 된 친구를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경우도 있지만 오프라인에서 친해진 사람들까지 이제는 대개의 경우 온라인으로만 연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굳이 통화를 하면 촌스러워 보일 지경이다. 매일 ‘좋아요’를 누르느라 자주 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못 본 지 수년 넘은 친구들아, 너희들 그 사진처럼 정말 잘 살고 있는 거니?

혼자 가서 둘이 걷는 길, 카미노_ 매일 만나고 매일 헤어지던, 축소판 인생

십 년 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을 TV로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곧바로 상사병에 걸렸다. 풍경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가고 싶었다. 정말 가고 싶었다. 그곳이 국내였다면 앞뒤 재지 않고 갔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 멀었고 비용도, 시간도 문제가 되었다. 끙끙 앓았다. ‘어떡하지? 가고 싶다. 어떡하지? 정말 가고 싶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선문답을 혼자 반복했다. 그때의 내 비정상적인 열정을 누군가 지켜보았다면 사람이 저렇게 이상해지나 싶었을 것이다. 그런 간절함 때문인지 얼마 가지 않아 갑자기 직장을 잃게 되었고 나는 잠시 많이 흔들렸다. 내가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면 다음 단계의 삶을 성실히 준비하기 위해 새 직장을 알아보거나 과감히 창업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신은 나와 함께했던 것 같다. “걱정하지 말고 떠나거라.” 그렇게 신은 내 등을 떠밀었다.

한 달 넘게 스페인 북부의 길을 걸었다. 철저히 혼자였다. 낯선 외국에서 외로움은 증폭되었다. 가장 당혹스러웠던 첫날밤의 이야기는 나의 산티아고 순례기인 『그 길 끝을 기억해』에도 실려 있다. 출발지였던 생장피에드포르에서 나는 여러 사람이 묵는 더럽고 시끄러운 방을 못 견디고 방에서 나와 식탁에 엎드려 잤다. 낯선 이방인들에 대한 경계심이 극에 달했고, 그 눅눅하고 퀴퀴한 공기를 함께 호흡하는 것도 정말 싫었다. 그런데 아침식사 시간에 마주한 그들은 뜻밖에도 선량하고 순박했다. 그런 이미지의 전환은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일어났다. ‘정말 무례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별 생각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도 나오듯 간사함이나 사악함보다는 오해와 태만이 이 세상에서 더 많은 갈등을 불러일으킨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산티아고 순례길이 놀라웠던 것은 일상에서라면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 깨달을 수 있는 것을 아주 짧은 기간 안에 체험하고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일은 이렇게 도미노 게임처럼 내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한 가지 사건이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되고 또 그 다음 사건의 원인이 되는 식으로 마침내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것이 현실생활에서 일어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카미노에서는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다. 그래서 더욱 놀랍게 와닿는 것이리라.

나를 그곳으로 떠나게 한 가장 큰 힘은 눈부신 자연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서 하루하루 보낼 때 나를 기쁘게 한 것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브라질의 안토니엘라, 독일에서 온 수산나, 에우나테의 장 아저씨, 산토스 신부님, 한국인 수사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서로가 서로의 선의를 알아보고 그 여린 마음을 이해하면서 나는 세상에 대한 강한 긍정을 몸에 새기게 되었다. 이런 체험을 그 어디에서 또 할 수 있을까.그래도 스페인에서 막 돌아왔을 때는 그곳에 다시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충분히 고생했다고 생각했다. 피레네 산맥을 오를 때는 정말 죽을 것 같았고 발목도 꽤 오래 시큰거렸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또 걸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게 되었다. 물론 10년 전보다 나는 세상의 때가 묻어 두려움도 많아졌고 몸도 무거워졌다. 그렇지만, 그래서, 더 겸손하게 그 길을 걷게 되지 않을까. 이제는 고독이 아니라 고통으로 눈물지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더 감사하게 순간순간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혼자 가도 둘이 걷게 되는 그 길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따뜻해진다.



3장 쉿, 이런 관계는 조심해!



모두가 나의 행복을 바라는 건 아니야_ 이아고는 왜 오셀로를 파괴했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좋은 일에 진정으로 기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어떤가? 실은 나도 다른 사람의 좋은 소식에 곧바로 기뻐해주는 대신 ‘아, 뭐지? 잠깐만, 내 표정이 지금 괜찮은 건가?’ 고민하다가 억지 미소를 지을 때가 종종 있다. 나는 아직 행복하지 못한데, 나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는데 나와 가까운 사람이 행복해 보이고 성공한 것 같으면 조바심과 불안감이 생긴다. 이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자신의 처지와 남의 행복을 비교하지 않더라도 진심으로 남을 축복하는 일은 사실 쉽지 않다.

조지 와인버그는 『셰익스피어에게 묻다』라는 책에서 이아고라는 캐릭터를 내세운다. 이아고는 『오셀로』에서 주인공 오셀로의 가까운 친구이자 부하이지만 오셀로를 불행하게 하기 위해 오셀로와 부인 데스데모나의 사이를 이간질한다. 그로 인해 결국 오셀로와 데스데모나 두 사람은 죽게 된다. 이아고는 오셀로에게 무언가 원한이 있어서 복수하기 위해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일까. 하지만 오셀로는 딱히 이아고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 그 점이 무서운 것이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는 오셀로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그는 그저 오셀로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불편했고, 자신의 역량으로 한 가정을 무너뜨렸다.

우리의 현실에도 이런 사람이 없지 않다. 심지어 결혼 후 행복하게 사는 친구가 부러워 친구와 그녀의 아기를 죽여 버린 여자도 있었다. 이렇게 죽음으로까지 몰아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아고처럼 우리의 평온한 삶을 파괴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 우리 주변에 전혀 없다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이아고 같은 이들은 겉보기에는 차분하고 이성적이고 배려하는 사람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그들의 가치관은 뿌리 깊게 부정적이어서 타인의 행복은 물론 자신의 행복조차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같이 망하고 같이 죽겠다는 심보라고나 할까.

“설마요? 제 주변엔 그런 사람 없어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이런 항변을 해준다면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남의 행복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하는 일은 어렵다는 것을 일단 받아들여야 한다. 앞에서는 웃으며 축하해준다고 해도 돌아서서는 우울해할지 모른다. 그러니 섣불리 자신의 성공이나 행복을 함부로 떠벌리지 않았으면 한다. SNS는 어느 틈에 자랑질의 공간이 되어버렸지만 그것으로 인한 폐해와 위험성에 대해 인지해야 한다. 심지어 가족조차 당신의 성공과 행복을 기뻐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의 행복과 기쁨은 어차피 나의 일이다. 과시하거나 자랑하는 것을 삼간다고 해서 행복과 기쁨의 총량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도시의 밤, 아파트에 가득한 노란 불빛을 보면 세상은 고요한 행복이 이끌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진짜 행복이란 이렇게 조용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나도 모르게 왕따가 되었을 때_ 깊이가 결여된 그들을 향한 대처법

요즘처럼 단톡방 내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시대에 한 지인이 내게 이런 경험을 들려주었다. 취직을 하면서 모임에 자주 못 나가게 된 그는 대신 단톡방에 올라오는 소식은 빠짐없이 읽고 자기 의견도 올리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올린 글에는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글을 올리면 답변이 이어지고, 자신이 한마디 하면 다시 정적이 흐르고…… 이 정도면 누가 보아도 단톡방 내 왕따현상이 아니냐며 지인은 허탈해했다.

이런 식의 왕따행위는 의외로 많은 곳에서 쉽게, 공공연히 일어난다. 눈에 띄는 가해나 공격이 아니니 가해자는 태연할 수 있고, 피해자도 딱히 항의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보이지도 않고 증거도 남지 않는 독가스와 같다고나 할까. 싸우기라도 했다면 어색한 공기가 당연한 것인데 아무 일도 없었음에도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래요?”라고 물어본들 돌아올 답은 뻔했다. “네? 저희가 뭐요? 저희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모임의 구성원 전부가 나를 싫어하고 왕따를 주동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면, 나는 나의 방식대로 계속 존재하는 것을 택할 것이다. 이때 굳이 왕따 주동자들과 친해지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나에 대해 호감이 없는 사람들과 친해지는 비법이란 없다. 그들이 그랬듯이 나도 그들을 그저 깔끔하게, 하얀 백지처럼 무시해주는 수밖에. 대신 나의 에너지는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만 집중할 것이다. 사실 멀쩡한 성인을 이유 없이 왕따시키는 사람은 어디에서든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약하고 불행한 사람이다. 자신이 혼자서 버틸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을 홀로 두는 방식으로 고통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유치한 행동에 휘둘리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한 일이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